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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혼자 사는남자

작성자명관**
조회수3183
등록일2007-02-23 오후 6:29:30

너무 외로워서 혼자 사는남자........김용 소설.또는무협지
2004/07/16 15:29

http://blog.naver.com/winnerkk/20004112879

너무 외로워서 혼자사는 남자
지은이: 김용
출판사: 도서출판 큰바위


들어가면서
내가 북에 두고 온 것들
그때 내가 정성들여 물을 주던 수선화 한 송이가 있었다. 마당에 피어있는 그
수선화를 화분에 옮겨 심어, 내 방 창가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빛을 찬란하게 받고 있는 그 수선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 이슬이
라도 맞은 듯, 마치 새벽 강물에서 금방 튀어나와 물을 뚝뚝 흘리는 알몸의 여
인네처럼. 그 수선화가 내 아침을 황홀하게 했다.
장롱 안에는 내가 아끼던 쥐색 양복이 걸려 있었다. 형님이 러시아에 나갔을 때
택시비와 아침 식사비를 지출해 가며 모은 돈으로 나를 위해 사온 고급 양복이
었다. 조끼라면 질색을 하던 내게도 그 쥐색 양복의 조끼는 편안하게 들어맞았
다. 다리미로 주름 하나 없이 펴고 있노라면 세상 시름도 잊혀졌다. 남들의 걱정
도 이렇게 다리미로 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쥐색 양복을
반들반들하게 다려 입고 영화음악단에서 멋쟁이 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불렀다.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일과로 구겨진 양복을 다시 다리미로 다려서 장롱안에 곱
게 걸어두었다. 장롱 문을 열 때마다 친구처럼 버티고 있는 그 쥐색 양복의 존
재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 말었는 친구와 헤어진 것이 벌써 6년 전이다.
부엌에는 평양 시내에서 한두 대 있을까 말까 한 자동커피기계(커피 메이커)가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었다. 일본인 친구에게 선물받은 그 자동커피기계를 나
는 무서워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친구가 함께 건네준 커피가루(원두커피)를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한 채 찬장 안에 넣어두었다. 주인을 잘 못 만난 그 자
동커피기계는 남들처럼 씩씩하게 김도 뿜어보지 못한 채, 그렇게 버림받았다.
냉장고를 열면 시큼한 냄새로 코를 싸잡는 어머니의 깍두기가 있었다. 여름 내
내 그 깍두기를 꺼내 먹는 재미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깍두기는 팔뚝 크기 만
한 맑은 색 독에 소복이 담겨 있었다. 이쯤 먹으면 바닥이 드러나겠지 싶을 때
또 다시 소복해졌다. 그 깍두기 맛을 그 후로 6년동안 찾아 헤맸지만,이곳에는
없다.
장롱 서랍 어딘가에는 일본산 세이코 손목시계가 잠자고 있었다. 일본친구가 나
에게 선물한 것인데 한마디로 뇌물이다. 이 손목시계를 나에게 선물한 것인데
한마디로 뇌물이다. 이 손목시계를 나는 감히 만지지도 못했다. 내가 깔고 자는
집보다도 더 비싼 그 손목시계를 나는 조카가 장가 가는 날 주려고 모셔두었다.
그 손목시계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누군가 내가 남한으로 온 다음 가택
수색을 하느라고 뒤지다가 슬쩍 주머니속에 넣고 '땡'잡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마도 그 사람은 '이 좋은 시계를 두고 왜 남조선으로 갔을까. 버러지 같은 놈'
하고 생각하겠지. 잠자고 있는 그 녀석을 깨워주었을까. 나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마룻바닥에는 남한 아이들은 이미 질려서 줘도 갖지 않는다는 미니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작은 자동차들은 뒤로 조금만 당겼다가
놓으면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면 이 자동
차들이 내 친구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바퀴벌레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떤 바
퀴벌레도 이 자동차들만 있으면 사망이었다. 바퀴벌레들은 속도.방향 무시하고
달리는 나의 과속 차량들에게 밟히고 채인 채 죽어갔다.
집앞에는 녹색 벤츠 승용차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내가 일하는 부서에서 나에
게 배치한 업무용 차이다. 그 차를 나는 내 몸보다 더 아꼈다. 행여 발냄새 나는
동무들은 입장을 불허했다. 오로지 어머니응 옆에 태우고 막히지 않는 평양시내
를 달릴 때가 최고였다. 운전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오렌
지빚 가죽 시트는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윤이 났다. 뻑뻑거리는 변속기어를
말 잘 듣게 길들이고 좌로 가자, 우로 가자는 내 변덕에 그 녀석이 끽 소리 없
이 복종할 때쯤, 그때 그 녀석과 헤어졌다.
갑자기 러시아 출장에 나서면서, 나는 당에서 맡겨준 과제를 착실히 수행했고
시간이 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쇼핑을 했었다. 형님에게 줄 운동화ㅡ 형수님과
누나에게 선물할 신발과 스카프, 스타킹, 화장품, 어머니에게 줄 옷감, 조카들에
게 안겨줄 공책과 인형들.
그것들을 모두 호텔방에 고스란히 두고 왔다. 분명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내가 버렸던 이 물건들이 나를 어지럽힌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깊어갈수록
이들의 생김새와 색깔이, 그 냄새와 촉감까지도, 더욱 또렷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나는 그것들보다 훨씬 좋은 양복, 훨씬 좋은 넥타이에 둘러싸야
있는데, 그래도 내 눈에 차는 것은 꿈에 보여도 그것들뿐이니, 그 이유는 무엇일
까.
내가 북에 버리고 온 모든 것들을 이곳에서 하나씩 하나씩 다시 마련했다. 차를
타고 몇 시간만 달리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그 물건들을 나난 가지러 가지 못했
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 아픔이 내 인색의 또다른 시작이었다.
97년 가을 어느날 외로운 남자 김용

1부.그 남자의 그리움

프롤로그-더이상 나의 자존심은 없다
거울 속의 깡마른 사내가 나를 찌를 듯이 노려본다. 수척한 양볼에 피부는 칙칙
하고 눈가에는 어두운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나는 양치질을 하려 했던가, 면도를
하려 했던가. 욕실의 거울 앞에서 나는 그렇게 한동안 서 있다. 다 싫다. 억울하
다. 이건 내 얼굴이 아니다.
장난기를 가득 담은 꼬마 용이의 얼굴은 어디로 갔는가. 그 세월로부터 벌써 한
세대가 지나갔고 또다른 한 세대가 시작되고 있다. 그저 개구쟁이 꼬마로 살기
에 세월은 너무 잔혹했던 것일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자란 '북'을 견디지 못했
고 '남'에서조차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내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내 책임이 아니다. 분단 때문이다. 분단 때문에 나는 고
향을 잃었고 어너미를 잃었다. 그 아픔에 나를 사랑하고픈 마음마저 잃어버렸다.
이제 나는 없다고 나는 몇 년 전부터 다짐했다. 이제 나는 없다. 나 김용이란 사
람은 이제 민족의 한과 설움으로서만 존재한다.
TV에 얼굴을 자주 내밀던 시절, 나는 날마다 머리에 무스를 발랐고 드라이가
잘 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다. 우체통에는 나를 좋아한다는 아가씨
들의 편지가 수북했고 주머니에는 만원 짜리 지폐가 빳빳하게 들어 있었다. 남
한 사람들은 그것을 '성공'이라 불렀다. 나역시 내가 성공한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한순간의 '흥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쇼가 끝나면 나는 여전히 근본 없는 북한 촌놈에 불과했다. 나는
북에도 남에도 속하지 못했다. 도대체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누움!"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가게 된 남한인데 그런 광대짓
거리를 하고 있느냐! 정신차려라 멍텅구리야!" 아무것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3일을 생각한 것은, 그것은 어머니였다. "내레 여길 어캐 왔는디요.
이렇게 살면 안되디요. 내레 오마니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오마니!오마니!"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나는 거울 앞에 서 있다. 내게 얼굴이 어떻게 보이든,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북한이 내게 가르쳐 준 모든 것을 버린다. 그리고 남한이 내게 가르쳐 준
나머지 지식도 미련없이 버린다. 나는 그저 한국인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북한도
남한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이데올로기도 투쟁도 없었던 시대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원해 우리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었다. 그때는 이토록 어둡고 쓸쓸한
표정의 30대 중년의 사나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뒤로 돌아감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의 조선인
처럼 살고 싶다. 통일 한국의 통일인으로 살고 싶다. 이 분단의 시대에, 나는 벌
써부터 통일인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의 머리에는 아무것도 함부로 넣을 수가 없다.
6년간의 남한생활을 통해,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배울 필요가 없는
것 까지도, 그렇게 모조리 배워 버렸다.
나는 북한에 대해 갖는 연민만큼이나, 그와 똑같은 무게로 남한을 동정한다. 경
제적 풍요로움, 과소비, 술과 돈에 흥청거리는 사람들, 피자와 햄버거, 콜라를 마
셔대는 아이들, 사라져 가는 인간성, 이와 반대로 법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순수라고 때묻지 않은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들.남한이 내게 가르쳐 준 것중에
하나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던가.
욕실 안의 거울이 나의 거친 호흡으로 뿌옇게 흐려진다. 나는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다. 칫솔 위에 치약을 내려 짜면서, 나는 거울이 점점 더 흐려지는 것을 가
만히 내버려 둔다. 동시에 슬픈 표정의 사나이의 모습도 사라진다. 이제 나에게
는 자존심이란 없다.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아침 7시, 그 남자의 그리움
째르르릉. 아침 7시, 자명종이 울린다. 눈을 떠보면 나는 사변이 꽉 막힌 사각
의 방. 어울리지 않는 퀸 사이즈의 침대위에서 홑이불을 움켜쥐고 팬티바람으로
덩그러니 누워 있다. 창문이고 방문이고 모든 것이 꼭꼭 닫혀져 있다. 바람 한점
통하지 않는 이 방에 밤새도록 숨쉴 공기가 남아 있었던가.
나는 그대로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누워 있다. 왜 창문을 열어야 하는지, 왜 맑
은 공기를 마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직 잠이 덜 깬 나의 머리속은
벽지처럼 하얗기만 하다. 조금 있으면 전화벨이 울릴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조
금만 더 누워 있고 싶다.
내일 아핌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해안의 콘도인지 콘돔인지 안에 누워 있
으리라고 위로하며 잠을 청했었다. 아니면 눈이 폭신폭신 쌓여 있는 스키장이
내려다보여도 좋았겠다. 그러나 벌써 몇 년째, 눈을 뜨면 나는 같은 자리에 누워
있다. 천장 벽지의 똑같은 무늬, 똑같은 음조의 자명종 소리, 똑같은 침대, 똑같
은 이불, 똑같은 베개, 똑같은 팬티들이 내게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이다.
오늘도 역시 수첩을 해야 할 일들로 빼곡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해야 할 말들로 머릿속이 북적거린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야 하고 은행통장을
정리해야 하며 어디를 간 다음에 어디를 가는 것이 가장 시간을 아끼는 것인지
를 계산해야 한다.
방문을 열었다. 휑하니 넓은 아파트가 떡 버티고 있다. 매일 아침 이렇게 잠자리
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 때마다, 나는 나의 집이 이렇게 넓다는 사실에 놀란다.
방이 4칸, 거다란 거실이 한, 욕실이 2개.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집이다. 나
는 이 집에 아리따눈 여인네를 끌어들일 것이고 아이들이 뛰놀길 원한다. 욕실
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수건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욕실선반을 바라보니
빙그레 미소가 나온다. 선반 위의 수건은 온통 연분홍빛이다. 서른장이 넘는 수
건들이 온통 연분홍 빛이다. 아침마다 이 사실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가끔씩
회갑연이나 기념식에서 얻어온 다른 색깔의 수건들은 모두 걸레로 쓰고 있다.
연분홍빛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 닿게 하기가 싫어서이다. 여행갈 ㄸ도 이 연분
홍빛 수건을 챙겨가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이상한 놈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
에게 "이건 나의 유일한 자본주의식 사치야. 말리디 마!" 라고 말해줬다. 물방울
이 뚝뚝 떨어지는 내 몸에 연분홍 빛 타월을 문지르면 내 마음은 아이처럼 맑아
진다. 연분홍빛 타월은 살벌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무기다.
이런!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다. 청바지, 기놈의 청바지가 오디갔어? 얼마전
백화점 세일 때 단돈 1만원에 장만한 청바지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청년들은
얼마나 키가 큰지 바지가 하도 길어서 밑단을 줄여야 한다. 수선집에 맡겨야 할
그 청바지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묵혀두고 있다. 오늘은 기놈의 청바지를 찾으면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릴 테다. 어쨌든 바닥에 질질 끌리지만 않으면 되지 않갔어!
나는 엉뚱하게 쌀통 위에 올려저 있는 청바지를 찾아내 기어이 칼로 밑단을 북
북 찢어 버렸다. 실밥이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사방팔방으로 나풀거린다. 에라 모
르겠다. 나는 양말안으로 청바지 밑단을 쓸어넣었다. 마치 모내기를 하려는 농사
꾼으로 모습같다. 옷방으로 들어가 얼른 눈에 띄는 윗도리를 집어 몸에 끼고 거
울을 힐끗 들여다봤다. 완벽하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 수 있겠다.
신발을 씬으려다 나는 멈칫, 동작을 멈춘다. 내가 신는 두 개의 운동화가 모두
엉망이다. 노란 육수물에 절어 땟국물이 꼬질꼬질하다. 분명히 그제 저녁에 빨았
었는데. 어머니가 신발만큼은 항상 깨끗이 빨아 신고 다니라고 하셨는데. 불현
듯 내가 누구이고 뭘 하며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나는 냉면을 파는 장사꾼
이다. 나는 하루에도 10여통이 넘는 육수물을 끊여야 한다. 펄펄 끊는 육수물 앞
에서 땀을 흘리다 보면 어느새 하얗던 운동화는 이렇게 샛노래 진다. 아침마다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까만 정장 구두를 신던 시절이 있었다. 그 구두들은 도대
체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오마니, 오마닌 절 믿습네까?"
맛있게 끓이라 하시는 어머니 말씀은 듣지 못하지만 분명 어머니는 이 아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무 맛있어서 다들 통일하고 싶은 마음 들도록, 그만큼 맛있
게 끓이라. 그게 니가 남한에서 할 일이다. 용아, 내 아들놈."
육수물이 꼬질꼬질 묻은 운동화에 나는 발을 담근다. 하루가 시작된다. 어머니가
드립다. 이웃에서 어머니 친구들이 부르는 최성숙 노친네가.

마지막 어머니 소식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거린
다. 비행기가 연착이 됐는지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이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의 지친 표정 때문에 나는 더욱 초조해진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고향 사람
한 명이 이곳에 온다. TV와 신문에서 본 그 청년의 모습은 초라하고 지쳐 보였
다. 청년은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러시아 벌목공으로 자원했었다. 가족을 위해
서, 도을 벌기 위해서였다. 몸뚱아리 하나만 잘 굴리면 북한에서 1년 동안 배 곯
으며 모을 돈을 한달이면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목공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최악의 환경에서 인간 이하의 대
우를 받으며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그는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심했다. 탈출역시
순탄치 않았다. 관리감독에게 붙잡혀 북으로 송환되던 중, 청년은 기적적으로 도
망쳤다. 그가 남한으로 오는 길은 그렇게 멀고 험난했다. 저쪽에서 작은 얼굴의
깡마른 청년이 다가온다. TV에서 본것보다 더 깡말랐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잘 여문 쇠고기를 잔뜩 먹이고 싶은 충동과 분노를 느낀다. 그를 제대로 먹여서
사람답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 김용 선배님." 우린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동시에 손을 부여잡았다. 이 청년의 손을 잡기 위해 지난
밤에 그토록 설레였던가. 바로 이손을 잡기 위해 긴 밤을 그토록 울먹였던가.
"선배님!" "응,오느라 수고했다." 경철이는 있는 대로 흐느꼈다. 나라도 울지 말
아야 하는 데. 나는 붉어지는 코를 감춰가며 경철이의 어ㄲ를 껴안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우리는 서둘러 광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
었다. 방송국에서 특집 프로그램으로 북한 땅의 같은 고향에서 귀순한 우리 두
사람을 취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서울부터 저 아래 땅끝마을
이 있는 전라도 해남까지, 긴 여정을 함께 했다. 고향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를 주고 받으며.
이 녀석에게 무엇부터 물어볼까? 겨우 입을 열고 물었다.
"너, 내 형님 김풍을 아냐?" "저희 자강도 체육단 감독님이신데요."
역시, 예상대로다. 혈육의 정은 모질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을 수 없는 나에게, 인연은 이렇게 고향 사람을
보내 또 한번 나를 괴롭힌다. 게다가 나는 또 뭔가. 왜 아픈 상처를 가만 놔두지
못하고 후벼파고 있는다. 그것이 이토록 괴로운 일인 줄 알면서도. 경철이는 강
계에서 태어나 강계에서 자란 아이다. 그와 나는 고향도, 졸업한 고등중학교까지
도 똑같다. 게다가 그는 자강도 체육단 탁구 팀에 속해 있었으며, 국가대표 선수
활동을 한 것도 나와 같다. 나는 경철이에게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뛰놀던 북천강의 강물은 아직도 그렇게 차고 맑은지,
함께 훈련하던 동료 선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냉면을 만들어주던 호
랭이 주방장 할아버지는 아직도 건강하신지. 그리고, 풍이 형님과 어머님은 잘
지내고 계신지. 나의 탈출이 두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부디 살아만
계신다면. 어디서 어떻게 사시는지. 경철이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모릅네다. 내레 러시아에 갈 준비라느라 정신 없었습네다. 잊어버립시다. 기런
생각 하면 형님 가슴만 아픕네다."
"웃긴자식."
그 역시 두고 온 가족생각에 가슴에 쥐가 나도록 울었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잊을 수 없다는 걸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는
내게 잊으라고 말한다. 경철이가 드디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1년후였다. 소주
가 필요했다. 그 녀석이 무슨말을 할지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불안했다.
나는 쓰디쓴 소주 몇잔을 연거푸 벌컷벌컷 들이켰다.
"너레 이 형에게 해줄 선물이 있다면, 형님과 어머니 소식을 사실 그대로 얘기해
주는 것이다."
"용이 형." "걱정마라. 내레 이젠 괜찮다. 다 들을 수 있다. 모르고 걱정하는 것
보단 알고 괴로운 것이 낫다. 얘기해라. 짐작은 다 하고 있다. 그러나, 하여간 듣
고 싶어 그래." 그때 경철이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대로 그림이 되어 내 가슴 텅
빈 방에 걸려 있다.
경철이는 꼭 한 번, 나의 어머니를 만났다. 91년 10월, 그러니까 내가 구소련을
탈출하여 안기부의 보호 아래 서울에서 잠적했을 때이다. 국가보위부 요원들은
나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하지만 내가 행방불명된 사실은 내 형님도 어머
니도 몰랐다. 두 분은 그저 내가 당의 명령을 받고 외국에 나가 열심히 일가혹
있으리라고만 믿고 있을 것이다.
매년 가을 마다 벌어지는 채소전투가 시작되었다. 채소전투란 10월말 대대적인
김장철이 다가오기 전, 밭에 있는 배추, 무 등을 거뒤들여 각 가정으로 배급하는
일이다. 어머니도 채소전투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들은 항상 집을
떠나 있지만 며느리와 조카 등 김치를 먹어야 할 사람은 많다. 그때 국가대표
속도빙상(스케이트)팀을 이끌고 있던 형님은 부전 호반 어디쯤 가 있었을 것이
다. 채소 전투가 시작됐단 말을 듣고 형님은 슬슬 걱정이 됐다. 그 많은 배추를
누가 다 실어 나를 것인가. 형님은 즉시 전보를 통해 자강도 체육단 선수들에게
부탁을 했다. '자강도 체육단 소속 선수 2명이 우리집 채소전투를 도와주기 바란
다. 우리집엔 칠순 노모와 내 아내, 어린 아이 뿐이다. 부탁한다. 김풍 지도원.'
그때 김풍 감독 집의 채소전투를 돕겠다고 자원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 바
로 경철이였다. 경철이는 구루마(리어카)에 배추와 각종 채소를 싣고 산중턱에
있는 우리집으로 땀을 흘리며 올라갔다. 나의 고향집은 강계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북천강 골짜기 위,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강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이 바로 우리집이었다. 집앞에는 넓은 텃밭이 있고 키가 큰 배나무가 아
담한 우리집을 그림처럼 에워싸고 있다. 경철이와 동료 선수가 배추와 함ㅆ께
도착했을 때, 나의 어머니가 그들을 반겼다.
"야들아, 고생이 많다. 우리 아들들이 없는데 도와주니 더 고맙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어머니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자세가 당당했다. 경철이는 내 어머니를
보고 두 명의 국가대표 운동선수를 길러낸 어머니답게 체격이 크고 성격이 시원
시원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 청년은 어머니가 퍼다 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
이켰다. 어머니는 항상 열심히 일하는 젊은 청년들을 좋아했다. 특히 자식들이
어려서부터 어머니 품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은이들을 보면 다 당신 자식같
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두 청년의 어깨를 두들겼다. 경철이는 나
무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며, 어머니와 함께 형님 소식을 주고 받다가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경철이가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은, 두꺼운 동복(솜옷)을 꺼내
들고 산중턱에 서서 두 청년이 멀어지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두 청년의 뒷모습에서
아들 풍이와 용이의 모습을 잃어내려고 그래서 그렇게 한없이 서 있었을 것이
다. 후에 경철이가 벌목공에 자원하여 가까스로 통과되어 소련행에 성공했을 무
렵, 산중턱의 아담한 기와집에 관한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됐다.
"그집 아들이 남한에 내려갔다는데?" "어젯밤 보위부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그
집 사람들 다 데려갔데."
"아유, 칠십 먹은 노인네가 끌려가는 모급이란, 쯧 쯧."
"그집 아들이 국가대표 선수도 하고, 작은아들은 중앙당에도 있다던데, 어찌 남
한을 갔나?"
"그 사정을 어띠 알갔어? 혼자 남은 노인네만 불쌍하구만."
그와 동시에 나의 형에게도 나쁜 일이 생겼다. 대표 팀을 이끌고 동계올림픽 행
을 준비하던 풍이 형님은 출국 직전 보위부에 의해 설명 한마디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경철이는 외국에 나갔어야 할 풍이 형이 강계로 내려온 것을 보
고 놀랐다고 한다.
경철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만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소주 3병을 해치웠다. 누군가 붙잡고 울고 싶은데,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이 술이다. 내
대신 경철이가 눈물을 흘린다. 동생 앞에서 울지 말자 하고 체면을 지키려고 해
도 그예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데 나도 어찌 할 수가 없다.

얼음 위의 추억
방송 출연도 없고 아무런 약속도 없는 한가한 봄날이었다. 나는 계획했던 그
대로 스케이트장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어떤게 제일 비싼 스케이틉니까?" "이건데요."
아저씨가 보여주는 스케이트는 까만 바탕에 흰색 무늬가 매섭고 두 날이 미끈하
게 빛나는 날렵한 디자인이었다.
"이게 제일 비싼 겁니까?" "그런데요."
"그럼, 제일 비싼 거 주세요."
나는 아저씨가 요구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두말었이 치렀다. 세게 최고의 스
케이트를 갖고 싶었다. 그것은 스케이트를 시작했던 아홉 살 때부터의 꿈이었다.
내가 북에서 신던 스케이트는 언제나 실오라기가 너덜너덜했고 날에는 녹이 시
커멓게 슬어 있었다. 해마다 내발은 사정없이 커갔고 나는 그때마다 새 스케이
트를 신는 꿈에 부풀었다. 스케이트만 새것이라면 얼음 판위를 씽씽 날아 아무
리 재빠르다는 미국 코쟁이들도 다 이길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게 배당되는
스케이트는 언제나 선배들이 신던 닳고 닳은 것이었다. 그런 스케이트를 신고
열아홉살 때까지 얼음판을 달렸다. 얼름 판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녹아
있다. 남한에서는 아이스 링크라 불리는 곳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내가 아
직도 코흘리게 아홉 살 꼬마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했음을 보았다. 나는 얼음판
저쪽 한구석에서 시린 손으로 호호 불며 겨우 장갑에서 손을 꺼내 바지를 내리
고 오줌을 싸고 있다. 뜨거운 오즘에 얼음바닥이 흐믈흐믈 녹아 내리는 것을 보
는 게 너무나 재미있다. 얼마나 추운지 오줌은 얼음 위에 떨어지자마자 신발과
얼음을 붙여 접착제처럼 쩍쩍 달라 붙는다.
"히히." 키득키득 웃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딱 때린다.
"아이 깜짝이야! 누구야!"
"야, 개구쟁이! 하라는 연습은 안하고 지금 하는 거얏!"
선배 형들이 나를 우르르 에워싸고 있다.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려들었다는 표정
이다.
"풍이 동생인데 그냥 봐주자."
"무슨 소리!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디. 얼음판 위에 오줌 갈긴 놈들은 발가
벗겨서 얼음판 위에 눕혀놔야 한다! 감독님 말씀도 못 들었나!"
"발가벗겨?:"
"그래." "지금?" "그래"
말이 떨어지기기가 무섭게 우왁스런 손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크, 도망가
자. 스케이트를 그대로 신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형들의 손을 미꾸라
지처럼 빠져 나갔다. 정신없이 발을 찼다. 낡은 스케이트가 오늘만큼은 잘 빠져
주길 바라면서 기를 쓰며 달렸다.
"저놈 잡아라! 용이 잡아라!"
나는 얼음판을 냅다 가로질러 얼음판 밖으로 뒤뚱거리며 나왔다. 그래도 스케이
트를 벗어든 나는 이제 영하 40도의 바깥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저놈 사끼! 얼어 죽으려고 환장했다!"
형들은 찬바람을 맞기 싫어서인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대로 밖으로 나
온 나는 부전고원의 눈바람을 한몸에 받았다. 1미터나 되는 눈밭에 발이 폭폭
빠졌다. 나는 뒤뚱거리며 몇 걸음을 걷다가 그대로 눈밭에 쓰러졌다.
"옴마! 훌쩍!"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아직도 엄마 품
에 안겨서 잠을 잔다는데, 나는 엄마 얼굴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됐다.
"옴마! 옴마! 훌쩍!" 얼음판위로 울고 있는 용이의 모습이 흘러간다. 지금이라도
그때처험 옴마를 부르며 울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나는 이렇게 세상에
서 제일 좋은 스케이트를 신고 뽐내며 서 있는데 우리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내 모습은 여전히 어리고 가엾다. 어머니에게 나는 어제와 내일이 늘 똑 같은
사람이다. 어머니의 기억 속의 내 모습은 국수 사달라며 징징 짜던 그 모습 그
대로 변함었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아저씨, 김용 아저씨 맞죠?"
생기 있는 표정의 서울 아이들이 나를 향해 우르르 몰려온다. 아이들은 한결같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스케이트를 신고 있다. 북한의 국가대표 스케이트 선수
조차 신지 못하는 새 스케이트를 서울 아이들이 신고 있다.
"김용 아저씨죠?" "와, 아저씨 스케이트 정말 잘 탄다!"
"야, 넌 그것도 모르냐! 김용 아저씨 북한 국가대표 선수 였어!"
"와, 그래서 잘 타는 구나!"
나는 아이들 틈에서 제일 작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듬성듬성 큰 형들 틈에서
커다란 눈망울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꽈당꽈당 넘어져서 내 시선을 끌었던 아이다.
"너 아저씨 손 잡고 탈래?"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을 때, 아이의 얼굴 위로 꼬마 용
이의 얼굴이 언뜻 스친다. 나는 아련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곳은 서울의 화려한 아이스 링크임과 동시에 꽁꽁 언 강계 북천강의
얼음판 위였다.

단 하나의 길이 있었다
내 나이 아홉 살 적, 자강도 최연소로 체육구락부 속도빙상(스케이트)팀 선수
로 입단했을 때, 나는 그것으로 내 인생이 모두 결정되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스케이트 선수이고 반드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리라고
그렇게 결심했었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어떠한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이렇게 냉면을 파는 장사꾼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뿐인가. 올림픽의 투지를
불태우던 열한살에서 냉면 장사꾼이 된 서른일곱 사이에도, 나는 꼬리 아홉 달
린 여우처럼 잘도 변신했다. 연예인이 되어 혁명가요와 영화음악을 불렀던 시절
이 있었고, 또 무역일꾼이 되어 북한 사람 치고 한 번이라고 비행기를 타보는
게 소원인데 나는 자주 타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귀순자란 꼬리표를
달고 남한 땅에서 가수로도. 마이크 앞에서 말도 잘하고 떨지도 않는다는 이유
로 덜컥 라디오 방송 MC를 맡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냉면을 파는
장사꾼이 된 것이다. 날더러 한울물을 팔 줄 모르는 변덕쟁이라 말해도 굳이 변
명하지 않겠다.남들 보기에는 내 모습이 밥이나 끊고 있는 솥뚜껑을 이것 저것
열어보며 어느 솥의 밥이 제일 맛있게 됐나 재보고 있는 것으로 비취질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내가 달려온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고. 무엇을 하느냐는 때에 따라 달라졌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한
결같았다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방향을 이끌어 준 사람은 나의 어머
니였다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꿈을 접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정일예
술학원에 입락하여 하루 3시간 잠을 자며 피아노와 음악 기초이론을 배웠다. 다
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배워 최우등학교 졸업장을 가져왔을 때였다.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죄송한 마음에 무릎까지 꿇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편안하게 앉
으라며 방석을 권하셨다.
"이제부터 나는 용이 니한테 관심 두지 않갔다. 니는 사막에 혼자 버려졌다고 생
각하거라." 나는 흠칫 놀라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지만 전혀 화난 얼굴이 아니었
다. 오히려 어머니의 얼굴은 침착하고 온화했다.
"니가 오마니 말없이도 잘 해나가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갔다. 앞으로 니는 혼자
뿐이니 아무도 믿지 마라. 너 자신만 믿어라. 네 운명은 네 머리로 사고하고 결
정해라."
나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어머니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회초리를 맞는 것보다
도 더 아픈 채찍이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믿음' 이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방식을, 어머니는 이미 내가 스물한살 애송이였을 ㄸ 있
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용이 저 녀석, 지 맘대로 살아도 앞가림은 한다" 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에겐 내가 스케이트를 타느냐 노래를 부르느냐
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놈이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도리를 잊지 않고 잘
살아갈 놈인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코흘리게 인민학교 시절, 어머니는 형님의
스케이트 시합이 있다며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엄마 따라 추운 얼음판에 나가
는 것이 싫어 나는 핑계를 댄다.
"오마니, 나 숙제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숙제가 중요하냐, 형님이 중요하냐?"
"그기야, 형님이지." "됐다. 그럼 가서 형님을 응원해야지. 숙제는 밤에 해도 되
지만 형님 응원은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알간?" "예"
무엇이 처음이고 무엇이 나중인가. 어머니는 그 정답을 어린 나에게 확실히 가
르쳐 주셨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사람에게 꼭 지켜야 할 것은 믿음
이라고.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도 나는 내 삶의 방식을 억지로 바꾼 적이 없다. 육수
를 끊이는 내 초라한 모습은 빙상위에서 씽씽 달리던 어린 선수 용이의 모습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꼭 닮았다. 내 삶의 변신은 똑같은 뿔리에서 시작된 것이기
에 탄탄할 수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처음부터 육수만 삶았다면 과연 지금의
육수 맛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스케이트 선수생활로부터 '땀' 의 가치를
배웠으며, 무역인으로 일하며 '인내'를 배웠고, 연예인으로서의 '섬세함'을 익혔다.
그래서 나의 인격, 지금의 육수가 완성된 것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나의
역사다. 마찬가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이 당신
의 역사다. 쓸데없이 낭비한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시간 역시 지금의 당신
이 있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 아니었던가.

울보가 됩시다
가끔씩 주위에서 "난 억울해!" 라는 비통한 목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누리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억울
하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몇 년 동안 열심히 모은 출연료와 인
세를 사기당했을 때도, 내 감정은 '억울'보다는 '슬픔' 쪽에 가까웠다. 아마도 같
은 경우 '억울'함을 느낀 사람들은, "나는 딴 생각 안하고 열심히 일만 했는데 이
런 예기치 않은 일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억울할 것이
다. 아마 이들은 신을 원망하고 이 땅을 원망할 것이다. 반대로 '슬픔'을 느꼈던
나는, "믿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사기를 당하다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도리어 내가 밉도록 슬펐다.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위하고 좋아했다
면 내게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법
이 옳은 방법이었던지 몹시 의심스러웠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래서 '억울'보다는 '슬픔'이란 감정이 조금은
더 건강한 감정이라고, 그렇게 자위해 본다. 자꾸 억울함을 느끼다 보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되는 일이 없을 것이란 염세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슬픔은 다르다. 슬픔은 함께 아파 할 줄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
래서 슬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밝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바쁜 현대에서는 슬퍼 하는 사람들을 좀처럼 만날 수 없으니
나는 이 역시 슬프다. 이곳저곳에서 '억울하다'는 목소리만 들려온다. 자신에겐
아무 잘못이 없는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어서 이런 신세가 됐다며 언성을 높
이며 화를 낸다. 이런 사람들의 핏대가 붉어진 힘줄을 볼 때마다, 나느 또 다시
깊은 슬픔에 빠진다. 나로 말하자면 하루에 열두 번쯤의 행복함을 느끼고 또 열
두 번쯤의 슬픔을 느끼며 산다. 행복함과 슬픔의 조화야말로 건강한 삶의 기초
라고 생각한다. 슬픔을 느끼기에 좋은 일이 있을 때 몇 배로 행복할 수 있고, 행
복하기 때문에 나쁜 일에 의연하게 대처한다. 나는 방송중에도 슬프면 슬픈 대
로 기쁘면 기쁜 대로 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방송이니까 절대로 우는 모습
을 보이지 말아야지"란 지키지 못할 생각은 애초부터 품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방송 중에 참 많이도 운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시청자들 앞에서 체면
불구하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내일 모레면 마흔줄에 접어드는 사람이 무얼 그
리 흘릴 눈물이 많으냐는 핀잔도 듣지만 모르시는 말씀이다. 내 살아온 생애가,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 모든 것이 눈물의 바다인데 날 더러 어쩌
란 말인가. 나는 신문을 읽다가도 울고 육수를 끓이다가도 운다. 북한의 굶주리
는 아이들 사진을 보고 눈물 흘리고 유괴되어 짧은 생애를 마친 초롱초롱빛나리
의 예쁜 얼굴을 보면서 또 울었다. 몇 달 전 KBS 아침 프로그램인 엄앵란,이택
림의 사랑방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양복을 입고 두 손에 동치미와
육수를 한 사발씩 들고 사랑방 위로 올라갔다. 내 누님 같은 엄앵란 씨는 당장
동치미 그릇을 열고 손으로 무를 집어드셨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이택림씨도 육
수를 들이켜보고 "시원하다"며 좋아했다. 그리곤 군침을 흘리는 방청석의 주부들
을 놀려대자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한20분 동안은 이렇게 행복했
었던 것이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르익다가 진쟁자 두 분이 내 눈물보
를 건드린 것이다. 모란각에서 육수를 끓이는 법을 실감나게 설명하다 보니 자
연스럽게 이야기는 혼자 사는 애환, 모란각에 자주 들르시는 실향민 어른신들,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나는 어머니 얘기를 하며 울먹였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우리 모란각에 유난히도 어르신이 많이 나들이 오셨어
요. 대부분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 어르신들이죠.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
며 '용아 오늘은 고향에서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냉면이 먹고 싶다' 하시며 제 손
을 꼭 잡으셨어요. 머리가 희끗해지고 팔다리가 자유롭지 않은 그 나이에도 어
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똑같다더군요.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해도 그 그리움
이 가시겠습니까? 그날 저는 어르신들꼐 달아드릴 카네이션을 7백송이 준비 했
습니다. 차례차례 줄서서 식권을 구입하시는 어르신들의 가슴에 내가 직접 꽃을
달아드렸습니다. 한분 한분이 내 아버지 같고 내 어머니 같았습니다. 눈물이 자
꾸만 안경을 적시곤 했지요. 어르신들이 놀라실까봐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울음
을 꾹꾹 삼키며 한분 한분께 '행복하세요. 어머니. 오래 사세요' 라고 말씀드렸습
니다.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어르신들게 꽃송이를 달아드리는 나의 모습을 주방
에서 지켜보던 동생들도 그만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습니다. 내가 주방에 들어
서자 동생들이 절 보고 '울보 형님이 오늘은 참 독종이야요!' 하는 겁니다. '고롬,
고롬, 독종이 돼야 하지 않갔어? 나까지 울어불면 손님들이 음식 맛이 나갔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동생들을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참았던 울음보를 터
뜨리고 말았습니다."
엄앵란 씨도, 이택림 씨도 울었다. 방청석의 주부들도 훌쩍거리며 손수건을 꺼냈
다. 물론 그들 중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나
처럼 가족들과 생이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쁨이 남과 나눌 수 있
는 감정이듯, 슬픔 역시 이렇게 함께 나눌 수 있다. 우연히 이렇게 한방에 모인
엄앵란, 이택림 씨, 방청객, 그리고 나. 우리 모두 이렇게 한 장소에서 울고 웃었
으니 얼마나 행복했던가. 가끔씩 "북한 남자는 다들 김용 씨처럼 잘 우나요?" 란
질문을 받는다. 그렇지 않다. 북한에서도 남한처럼 남자는 잘 울지 않는다. 하지
만 나는 살아가면서 내가 받은 교육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기쁠 때 웃을 줄 알고 슬플 때 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신
나게 웃을 줄만 알고 웬만한 슬픔에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 과연 그들에게 슬픔
을 감당할 능력이 있을까. 나처럼 날마다 조금씩 우는 사람은 어떤 슬픔이 오더
라도 펑펑 울고 털어 버릴 수 있겠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좀처럼 울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앞으로 슬픔이 닥쳐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 우리 모두 조금씩
울어보자.

어머니께 보내고픈 내 사진
사람들은 흔히들 사진을 찍으면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나올 지 궁금해 한다.
그래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자기 얼굴을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나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다. 성격이라고나 할까? 습관이기
도 하다. 워낙 얼굴이 남과 달리 몬상(못생긴 녀석)이라서인지 사진을 보고 실망
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참으로 귀하게만 느
껴진다. 내가 형제들을 만난지도 꼭 10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일까? 10년이면 강
산도 변한다는데. 그렇다면 나의 얼굴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며칠 전 문득 최근
에 찍은 사진을 보다가 야릇한 의문이 떠올랐다. 이 사진을 어머니께 보낸다면
과연 아들로 알아보실 것인가? 나의 사진을 내가 보면서도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만약 어머니나 형제들, 혹은 친구들에게 이
사진을 보낸다면 나로 믿어주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눈가에 절로 눈물이
고이곤 한다. 내가 이렇게 변했는데 어머님은 얼마나 늙으셨을까? 그리고 누나
와 형님, 그렇게 아름답던 형수님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을 해봐도 상
상이 가지 않는다. 그저 어제, 아니 10년전의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다. 자나 깨
나 떨칠 수 없는 가족들 생각. 어떤 때는 가족이라는 게 뭔데 이렇게 못 잊고
보고 싶은가,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을까? 하는 멍텅구리같은 생각을 해보곤
한다. 사진 한 장이라도 가져왔으면 좋았으련만 잠깐 다려 오리라는 충장 개념
으로 떠났던 것이 영원한, 아니 기약없는 이별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나는 최근 들어 찍은 사진 몇 장을 항상 품에 넣고 다
닌다. 한 장은 어머님께, 한 장은 형님께, 또 다른 한 장은 누나에게. 이 사진이
비록 가닿지 못할지라도 나의 변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형제들에게 보내겠다고
품에 넣고 다니느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사진 한 장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 가 없다.

2부.사는 게 왜 이리 힘드나

세상 밖으로
무더웠던 92년 7월 여름, 안기부의 교육이 끝나고 나는 드디어 알을 깨고 세
상으로 나왔다. 안기부 직원들이 내게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이고, 일없시다(괜찮습니다). 내레 비만 피하면 그만입네다. 고저 지붕 안 새
는 것으로 골라주시면 됩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남한에서 처음으로 내 집을 갖는다는데 그 기대가 얼마
나 컸겠는가. 나는 TV에서 보았던 하얀벽과 화려한 조명등, 곱게 깔린 나뭇결
무늬 마루와 반질반질한 싱크대를 떠올렸다. 하지만 내 모습은 전혀 그 집과 어
울리지 않는다. 나는 기껏해야 팬티 바람에 촌스러운 양말을 신고 이방 저방을
기웃거릴 뿐이다. 일없다. 허름한 벽지에 노총각 냄새가 퀴퀴하게 밴 구들방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다. 막상 안기부가 구해준 집은 서울 북아현동에 위치한
빨간 벽돌건물의 낡은 빌라였다. 2층까지 올라가는 좁은 계단은 먼지가 뽀얗게
덮여 있고 아무렇게나 발라낸 거친 시멘트 벽엔 맨살이 긁히기 십상이었다. 옆
집에서 부부싸움 소리, 아이의 울음 소리가 그대로 내 귀에 꽂혔다. 첫날밤, 가
구도 없는 텅빈 집에 누워서,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부러워했다. 내겐 집과 방
세칸이 있는데 마누라도 없는 것이다. 내겐 함께 살 가족이 없는 것이다. 나의
첫 서울 전세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음날부터, 나는 마음이 바빴다. 세탁기,
냉장고, 식탁, TV등을 어서 빨리 집으로 불러들여야 했다. 이제 앞으로 이런 것
들이 나의 친구요 가족이 되지 않겠는가. 유일한 낙이 있다면, 집 근처에 재래시
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름 투성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상춰, 깻잎, 오이, 감자 등을 파는 모습. 금방 모가지가 비틀린 닭
들이 벌거벗은 채 널려 있고 방금 짜낸 말간 참기름이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김
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나는 눈에 띄는 속옷가게에 들어가 흰색 팬티와 러닝,
양말등을 잔뜩 사들고 나왔다. 똑같은 양말인데 가격이 5~6백원씩 차이가난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양말과 저 양말이 뭐가 다른 것일까. 어떤 사람들
이 양말 한 짝 사러 백화점에 간다는데, 이런 좋은 양말들을 놔두고 왜 백화점
에 가는 걸까. 내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전셋집이 장만됨과 동시에
나의 방송생활도 더욱 구체적이 됐다. MBC라디오 남과 북을 진행함과 동시에
같은 방송의 TV에도 바쁘게 출현했다. 유쾌한 스튜디오, 이야기쇼 만남 등이 당
시에 출연했던 TV프로그램들이다. 낮시간을 바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의 나에겐 행복이었다. 뜨거운 한여름에도 집은 춥기만 했다. 문을 열면 인간 냄
새가 아닌 시멘트와 전자제품의 기계 냄새만이 확 풍겨온다. 그나마 매일 아침
마다 여의도로 나가 사람 냄새를 맡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그 냄새에 질식했
을 것이다.

투캅스와 고스톱
"용이,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겠는데. 혼자서 저녁 먹고, 내일 보자고."
"뭐요? 집에 오지 않갔다구요? 안돼요! 내레 아침에 열쇠 가지고 나오지 않았시
오. 집에 못 들어가요."
"허허, 열쇠를 안 가지고 나오다니?"
"김 형사님이 가지고 있디요? 날래 가서 문 열어놓고 기다리시라요."
"이봐, 용이."
딸깍.
김 형사, 이 영감. 오늘도 그냥 보낼 줄 알아. 내 덫에 걸려 들었다. 이제 홍 형
사 차례다. 나 때문에 며칠째 두 형사가 집에 못 들어가 마누라에게 전화만 한
다. 그러나 나는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형, 우리집에서 같이 자지요. 집에 가면 뭣 해요. 자, 우리 집으로 갑시다."
빈집에 들어가는 건 죽기보다 싫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나 체육단에서나, 연애
인 시절부터 무역일꾼 시절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 번도 외로워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많은 친구와 선배들 틈에서 시끌벅적하게 살아왔다. 그런 내게 침
묵은 무거운 짐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은 더욱 견디기 힘
들다. 정말이지 이런 낯선 곳에서 외롭고 싶지 않다! 김형사와 홍형사. 두사람은
경찰서가, 아니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물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 셋은 무
슨 잘 끼워 맞춘 틀리라도 되는 듯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놈이 남한의 형사들인 줄 알았는데, 김 형사와 홍 형사, 이 투캅스는 얼
마나 순진한지 내 짓궂은 장난에 잘도 속아 넘어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홍 형사
가 잔뜩 불어터진 얼굴로 현관을 열어준다.
"어, 홍 영감님도 와 계시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자, 내가 뭐 해줄까요? 라면 끊여
줄까요? 뭐가 먹고 싶어요? 소주 드실래요?" "괜찮아. 너 왔으니 우린 갈래."
"아니 간다구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형들이 집에 가면 나도 집 찾아 북으로 다
시 갈 수도 있어요."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지금 길이 얼마나 막히는데. 저
녁 먹고, 고스톱 한판 하고 가야디요." "용이 너, 이럴 땐 완전히 어린래 떼쓰는
수준이다." 김 형사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한다. 나는 얼른 침대 밑에 있던 화투
를 꺼내 왔다. "어서, 내가 라면 끓이는 동안 한판 하고 있으라요." 잔뜩 불어 있
는 두 사람이 마지 못해 화투장을 잡는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면 이미 성공한
셈이다. 두 사람은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간다. 랄랄랄랄! 라면이 부글부글 끓일
때쯤이면 이미 김 형사와 홍 형사는 고스톱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벌써 "피가 보자란다." "광을 팔아야겠는데." 하면서 싸우고 있다. 세 개의 큰 대
접에 라면을 나눠 담으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우하하하하! 인생은 이렇
게 즐거운 것이엿! "자, 영감님들! 라면 들고 하시디요! 시장하시갔는데 금강산도
식후라지 않습니까?" "아이, 좀 가만 있어봐. 아니, 이게 어떻게 배판인가, 엉?"
"아니, 이사람이. 아까 내가 흔들었던 거 기억 안 나? 어서 천원 내놔. 배판이라
면 배판이지 왜 말이 많아?" "오백원만 받아! 도대체 흔들긴 언제 흔들었다 그
래?" 이쯤 되면 내가 끼어들어야 한다. "아유, 이 판은 무효예요. 다시 하시라
우!" 나는 두 사람이 기껏 쳐논 고스톱 판을 뒤엎는다. "어이, 용아 그러지 마!"
두 사람의 항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능숙한 솜씨로 화투를 섞은 후 다시
나눠 준다. "이 녀석, 완전히 공산당이야." "맞아, 어떻게 너는 그렇게 니 맘대로
냐?" 그렇게 고스톱의 밤이 무르익어 간다. 라면은 먹는 둥 마는 둥 싸우고 따
지며, 1백원짜리 동전이 왔다갔다 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덧 새벽으로 흐른다.
"아이쿠, 집에 전화해야겠는데." "이밤에 전화는 무슨, 자던 식구들이 다 깨갔시
오." "아냐, 그래도 해야 돼." 가정적인 홍 형사님이 전화기를 든다. 그리곤 곧바
로 낮은 목소리로 아내와 함께 얘기를 나눈다. 아이들은? 당신은? 아냐, 내일은
꼭 들어갈게? 당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는 막간을 이용해 김 형사와 고스
톱을 치면서 입을 삐쭉 내민다. "남자가밖에 나왔으면 나온 거디 집에는 무슨 전
화야. 참 남한 남자들은 왜 그렇게 간지러워요?" "야, 용이 너도 한번 우리처럼
살아봐라. 집에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은 줄 아냐? 마누라 얼굴 일주일
에 한번이나 볼수 있으면 다행이다. 용이 너도 장가 가면 저렇게 해야 돼. 하긴
어떤 여자가 널 데려갈지 걱정이 된다만." "허, 내 마누라? 난 결혼하면 홍영감
처럼 저렇게 하딜 않아요. 여자한테 저렇게 쩔쩔 매다니. 남자가 밖에서 하는 일
에 여자가 무슨 상관이에요. 들어가면 들어가고 나오면 나오는 거디." "어디, 남
한에 그렇게 살 여자가 있는지 두고 보자." " 언제 내가 남한 여자 하고 결혼한
데요? 내 고향 강계에 미인이 더 많아요!" "그래, 너 통일될 때까지 총각 귀신이
나 돼라!"
투캅스와 나는 이렇게 티격태격하며 2년이란 세월을 함께 보냈다. 내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이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낯선 남한 땅에서
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귀순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담당형사
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나처럼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귀
순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담당 형사를 짜증
스럽게 생각한다. 담당형사는 또 그들 나름대로 말 안 듣고 건방지게 구는 귀순
자들에게 기분이 상한다. 이렇게 되면 양측 모두 피곤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
의 경험으로 말하건데, 담당형사의 말을 잘 듣는 것이 귀순자에겐 여러 모로 도
움이 된다. 나도 처음에는 쉴새 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두 형사를 피곤하게 생각
했었다. 그러나 두 분의 입장에서는 남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안쓰러
웠던 것이다. 어서 빨리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던 것이었다.
저축이나 적금에 대한 것만 해도 그렇다. 남의 말이라면 지독히도 듣지 않는 나
를 홍 형사는 한 달 동안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주택청약저축에 가입하도록
만들었다.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주택은행으로 데려간 것이다. "아니, 내가 그
런 걸 왜 들어야 해요. 벌써 적금도 두 개나 들었는데 또 무슨 저축이에요?" "용
아, 그게 아니야. 니가 앞으로 결혼해 살려면 집을 마련해야 하잖아. 그럴 때 아
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이 주택청약저축이야. 이건 꼭 들어놔야 해." 그렇게
홍 형사님의 우격다짐으로 들어둔 청약저축이 지금 나의 든든한 보물이 되었다.
그 후로 5년이 지난 지금 아파트 분양시 나는 청약순위 1위다. 정말, 홍형사님
말대로 여자만 없을 뿐이지 모든 것을 갖춘 1등(?) 신랑감이 된 것이다. 담당형
사와의 관계가 무난 할수록 남한 사뢰에 적응하는 것도 빨라진다. 나의 고향 후
배 귀순자 경철이의 경우를 들어보자. 생긴 모습은 얌전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녀석의 조그만 머리는 끊임없이 장난거리를 찾느라 재빠르게 돌고 있다. 담당형
사는 녀석이 귀순 후 처음으로 찾아낸 만만한 상대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경
철이 같은 장난꾸러기를 24시간 수행해야 했던 그 순진한 담당형사는 날마다 그
녀석의 장난에 땀을 뻘뻘 흘렸다. 알고도 속아주는 것이 이 담당형사의 특징이
다. "경철아, 지금 학생들이 너를 기다리잖아. 늦어도 3시5분전까지 강의실에 도
착해야 해. 어서 옷좀 입어라." "아니 아니에요. 오늘 몸이 불편합네다. 이거 영,
으슬으슬한 게 열이 나는데요. 형님이 가서 내 대신 강연하시라요." "아니, 경철
아! 그러면 안되는 거 알잖아. 오늘 아침만 해도 간다고 했잖아." "아니, 아침엔
이렇게 아프지 않았디요. 내레 옷 입을 힘도 없수다." "아유, 경철아! 이 형님 좀
살려줘라. 너 안 가면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냐." 그제야 실눈을 뜨는 경철
이. "그럼, 내가 갈 테니, 용돈 줘요." "용돈! 그래 내 줄게. 얼마 줄까? 3만원?"
"3만원은 약값도 안돼요. 5만원 줘요." 경찰관이 무슨 돈이 있으련만 허둥지둥
호주머니를 뒤져 5만원을 꺼낸다. 그 돈이 경철이의 손으로 넘어가자마자, 경철
이는 이불을 툭 털고 풀짝 일어난다. "형님, 늦갔시오. 빨리 가요." "야, 경철이
괜찮겠어? 말보다 5만원이 약이라니까!" "아프긴 어데가 아파요? 내레 몸이 날
아갈 것 같습네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침 9시에 학교수업을 들어간다며 형사와
헤어진 경철이. 오후 5시쯤 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형님, 저 경철이에요." " 오!
그래 수업 다 끝났냐?" "몰라요." "엥? 수업 들어간 애가 수업 끝난 줄 모른다
니?" "답답해서 기차 타고 여행 왔어요." 순간 담당형사의 간담이 서늘해진다.
귀순자가 담당형사와 동행하지 않은 채 지방을 내려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담당형사는 책임추궁을 받게 된다. "이
이고, 경철아! 너 지금 도대체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여행을 가고 싶으면 형한
테 얘길 해야지. 그렇게 혼자 가면 난 어쩌냐? 거기가 어디야?" "여기가 어디냐
고요?(수화기 너머로) 아주머니, 여기가 어디예요? (아줌마의 목소리 : 부산이라
예)" 수화기를 잡고 있는 담당형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부산! 경철이 너,
내가 갈 때까지 거기 가만히 있어. 알았어?" "형님, 나 돈이 한푼도 없어요. 용돈
좀 가져오세요.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게, 배도 고파요. 형님이 그렇게
용돈을 안 주니까 답답해서 기차를 탔잖아요." "아니, 경철아! 용돈이 모라자면
나한테 얘길 해야지. 그렇게 무턱대고 부산엘 가면 어쩌냐. 그래, 이 형님이 미
안하다. 지금 용돈 가지고 떠날 테니, 거기 가만히 있어라." "오데로 오려고요?"
"부산! 너 지금 부산역에 있는 거 아니냐?" " 그러지 말고요. 용돈 가지고, 저 ,
신촌 학교 앞으로 오시오. 내가 그리로 가겠수다." "아니, 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 지금 학교 앞에 있으니까 용돈 그리로 가져 오시라우.
알갔죠? 끊어요." 딸깍. 그렇게 담당형사와 친형제처럼 개구쟁이로 살고 있는 경
철이. 세월이 흘러 형사의 품을 벗어난 후에도 경펑이는 놀랍도록 남한사회에
잘 적응해 냈다. 귀순자들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고 하던데 경철이는
예외였다. 오히려 동생들이 재미있는 형이라며 졸졸 쫓아다닐 정도였다. 입학 후
몇 개월이 지나더니 과에서 여자 후배들도 생기고, 아예 미팅 장소에 까지 진출
했다. 미팅 장소에서도 특유의 실실거리는 미소로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여자들
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담당형사를 울리고 웃겨 온 그 녀석의 유머감각이 오
죽하겠는가. 이처럼 귀순자들은 시시콜콜 가르켜 주려고 하는 형사들이 귀찮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잔소리가 하나하나 쌓여서 생활에 도움을 준다. 혼
자서 잘 해낼 수 있다고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담당형사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
이 좋다. 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후배 귀순자들이 하나 둘씩 생겼을 때, 그들에게
쉴개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후배들은 "이렇게 해야
해!" "이건 안돼!" 하며 야단치는 나를 많이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때 잔소리하던 내 마음이 바로 김 형사와 홍 형사의 마음이었다. 나는 그 두 사
람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약속했던 시
간이 흐르고, 두분이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는 날, 나는 몹시도 섭섭하고 한
편으론 화가 났다. "용이, 우리가 자주 놀러올게." "일 없시오. 마누라 걱정하느
라 바쁜 분들이 날 생각하갔시오?" 나는 공연히 심통을 부렸다. "아니, 이 사람
아. 정말이야. 우리랑 같이 고스톱 쳐야 할 것 아니야!" 그제야 나는 마음을 풀
고 씩 웃었다. "그럼, 오늘 밤도 우리 집에서 고스톱 칠 거지요? 주무시고 가실
거죠?"

내 직업은 귀순자?
내겐 아무리 도망치고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꼬리가 있다. 한때는 그 꼬
리가 너무나 싫어서 덩달아 그 꼬리를 달아준 남한이란 사회가 밉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꼬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이 아닌가. 땅 위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있다면. 그 두쪽 어디에도 속
하지 못하는 '귀순자' 가 있다. 귀순자. 바로 그것이 앞으로 평생토록 짊어지고
살아야 할 나의 꼬리다. 러시아를 탈출하여 반 미치광이 같은 몰골로 드디어 서
울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남한 사람들이 나를 '동포' 혹은 '형제'라는 말로 반겨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칭한 말은 '귀순자'였다. 요즘은 '탈북자'란 말로
통일했다고 하니 그 어감은 더 당혹스럽다. 내가 무얼해도 귀순자라는 꼬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MC, 가수를 해도 귀순 가수, 지금처럼 냉면집을 경영해도 귀
순자 출신 장사꾼이라 불린다. 한때, 아무도 내 얼굴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 살
고 싶었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좀더 짧게 깍고, 무지막지하게 먹어서 살도 찌
우고, 이름을 바꾸고 옷을 바꾼다면, 그렇게 한다면 아무도 나를 몰라보겠지. 그
렇다면 이웃들도 내가 귀순자라는 것을 모르겠지. "저는 홍길동입니다"라고 말한
다면 사람들은 나를 홍씨 아저씨, 혹은 홍길동 씨, 혹은 길동아라고 불러주겠지.
지금처럼 '귀순자 김용' 이라고는 부르지 않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 도망가 ㅅ갈
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은 나의 말투였다. 1년을 살아도, 6년을 살아도, 내 말투는
어디까지나 내 말투였다. 그렇게 서울말씨를 흉내내려고 해도 잠깐 긴장을 푸는
사이 이북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저는 홍길동입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 내레 홍길동이야요."한 투박한 북한 사투리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그러나 이웃
들은 난리가 날 것이다. "우리 동네에 수염을 기른 뚱보가 이사를 왔는데 말씨가
간첩말씨같다. 수상하다."는 신고가 경찰서에 접수될 것이다. 경찰들이 출동하여
내게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하고 대답해야 하는 건가.
결국 "내레 귀순자야요" 라고 말해야 하겠지. 결국 나는 귀순자로 돌아온다. 그
리고 그 무거운 꼬리를 조금은 가볍게 달고 다니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결국
그 꼬리를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 꼬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애초에 귀순을 결심했던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귀순자들
은 이곳에 와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도대체 가족들과 헤어져서 이 낯선 땅
에 와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귀순자라는 알량한 꼬리 하나? 그 꼬리가 밥을 먹
여 주던가, 집을 사주던가? 그렇게 후회하며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숨만 쉰다.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차라리 거꾸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알몸뚱이로 무일푼
으로 온 아에게 이런 엄청난 꼬리가 주어졌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내겐 아무것
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꼬리를 주었으니 이엇으로 내가 뭔가 해봐야겠다! 이
렇게 생각하게 된 후부터, 나는 결코 내 꼬리를 무거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하
거나 미워하지도 않는다. 남들은 팔다리밖에 없는데 내겐 꼬리까지 있으니 얼마
나 부자인가. 한 번 그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 본다. 바람이 펄럭 일면서 길가의
가을낙엽을 끌어 모은다. 가을 아침의 싸늘한 공기가 살아 있는 것 같다. 꼬리를
가지고 산다는 것, 재미있고 멋진 인생이 아닌가.

아직도 나를 가수로 기억해 준다면
92년 아직은 겨울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던 이른 봄, 나는 '아, 평양아'란 독집
앨범을 취입하고 가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곤 내가 평소에 눈물을 흘리
며 즐겨 보던 KBS TV의 가요무대에 출연했다. 그날 나는 하얀 윗도리에 까만
양복바지를 입고 까만 구두를 신었다. 내 차례가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로
걸어나가자 방청석에서 '와하하'하는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회자가 다
가와 "김용씨, 너무 멋 있습니다"라며 촌평을 했다. 나는 더욱 주눅이 들었고 불
편해 진 옷 속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방청객들은 더 크게 와하하 웃었다. '아,
평양아'의 슬픈 멜로디가 흘러 나오자 그제야 웃음이 멈췄다.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지만 오래만은 내게 꼭 맞았으리라. 그때 무대 위에서 나를 보
았던 방청객들, TV를 보았던 시청자들은 지금도 그때를 기억할까. 기억한다면
어느 쪽의 나를 기억해 줄까., 아니면 '아, 평양아'를 목놓아 부르던 구슬픈 목소
리의 가수 김용일까. 가끔 방송국 동료들과 녹화를 마치고 노래방을 들락거렸다.
북한 연예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나의 경력을 아는지라 동료들은 끈질기게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했다. 나의 레퍼토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흥을 돋우고 싶을
ㄸ는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비단같이 고와야 여자가 정말 여자지'를
불렀다. 분위기를 잡고 싶을 때는 노사연 씨의 '만남'을 불렀다. 그리고 정말로
우울하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불렀던 노래는 최백호 선배님의 '애비'였다.
'애비'의 구슬픈 가사를 흐느끼며 부른 직후였다. 누군가가 내 목소리가 배호씨
와 비슷하다고 했다. 배호 씨가 누구냐고 물으니 60년대 유명했던 남한의 가수
였다고 한다. "김용 씨도 가수 한번 해봐. 목소리가 호소력이 있는 게 트로트가
잘 어울리는데."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일 뿐이었는데. 나는 그 칭찬이
왜 그리도 좋았는지. 나는 내가 '평양영화 및 방송음악단'의 3백여 명 가수들 중
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독창가수였음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냥 노래를 잘 부르는 게 아니라 성악 교육을 받은, 남한에 오기 이전부터 이
미 가수였음을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 내 맘을 알았는지 대 작곡가이신 백
영호 선생님이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곡을 줄테니 노래를 불러 보겠냐고, 그
렇게 담백하게 물어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꼭 해보고 싶었던 일
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의 첫 음반'아, 평양아'가 탄생한 것이다. 북한에서 아무
리 가수였다지만 독집 앨범을 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 평양아'를 부
르다가 목놓아 꺼이꺼이 운 것이 삼세번이다. 녹음실밖에 있던 스태프들이 뛰
어 들어와 뭐가 잘못 됐냐, 왜 이렇게 우느냐고 물었다. 나는 "뭐가 잘못 됐나구
요? 그게 아니라 너무 잘돼서 눈물이 흐르는 게 아닙니까"라고 대답해 주었다.
완성된 앨범을 처음으로 손에 쥐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앨범 한 장
에 내 설움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처럼 나
의 노래는 대중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한 장의 앨범과 함꼐 가
수 김용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가요무대는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았고 음반
상점들도 내 앨범을 주문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이 현상을 다각적으로 분석했
다. 노래가 전반적으로 너무 어두웠다는 의견이 있었다. 가사가 너무 청승맞다는
의견도 나왔다. 내 발성이 아직도 북한 스타일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또 앨범이
실패한 것은 순전히 홍보부족이란 말도 나왔다. 하지만 내가 그냥 조용히 웃고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눈치챘을까. 누가 뭐라던 그 앨범은 나에게 소중
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내 앨범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나로 말하자면, 촌스러운 양복을 입고 가요무대에서 울먹이며 노
래하던 나를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김용이가 그런 아픔을 노래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좋다. 10대 가수상을 받지는 못했을
지언정, 고향 잃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그리
고 지금도 나는 계속 가수다. 내가 가수라는 것은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닌 진행
형이다. 나는 끊임없이 내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다. 무대ㅔ에 오르지 않을 뿐,
내 가슴은 계속 노래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아직은 한번의 무대가 더 남아 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날, 다시 한번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날, 그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겠다. 단 한 사람의 관객, 나의 어머니를 위해서.

가족 만들기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부산의 한 기업체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당시
나는 나를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었다. 분단이 한 민족을 어떻게
이질화 시켰는지. 남북이 쓰는 언어가 얼마나 다르며 그 문화의 창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리고 싶었다. 칫솔과 치약을 챙기고, 연분홍색 타월을 한 장 넣고, 그
렇게 부산에 내려갔다. 부산공항에 도착했을 때 얼굴이 매끈한 웬 젊은 청년이
내게 다가왔다. "저, 김용 씨죠?" "내, 제가 김용입네다." "임정욱입니다. 오늘 하
루 제가 모시겠습니다." 청년은 기업체 측이 고용한 일일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나를 마중 나오고 강연장까지 태우고 가고, 밥을 먹이고 부산시내를 관광시켜
주는 것이 청년의 임무였다. "타세요. 제 아버님 자가용인데 오늘 하루 동안 빌
렸습니다." 1백80cm에 가까운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서글서글해 보이는 맑은
눈동자.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청년에게서 한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처음 본
아이가 아닌 것 같은, 친동생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어긋나지 않았다. 강연이 끝
나고 푸짐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소주 한잔까지 얼큰하게 걸친 나는 정욱, 바로
그 이름의 그 청년에게 엉뚱한 제한을 했다. "정욱아, 너 나랑 같이 서울 가자."
"네?" "서울에서 나랑 같이 살자." "?" "형 위해서 운전해 주고 내 일 좀 도와주
면 어떻캇니?" 정욱이는 승낙의 말 대신 그냥 씩 웃었다. 나는 정욱이의 아버님
어머님 앞에 무릎을 끓었다. "정욱일 제게 주시오. 내레 동생처럼 데리고 살갔습
네다." 북에서 왔다는 생면부지의 남자가 아들을 내놓으라는데 놀라지 않을 부모
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정욱의 부모님은 의연하셨다. "우리 아들이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지 얼마 안됩니다. 하지만 군생활이 너무 짧았는지 아직도 배워
야 할 점이 많습니다. 김용 씨가 이 녀석을 데려다가 좀 더 가르쳐 주십시오. 그
리곤 정욱이에게도 호통을 치듯이 말씀하셨다. "서울로 가거라. 군복무 더 한다
고 생각하고 용이 형 잘 돕거라." 나는 정욱이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옷도 짐도
필요 없으니 지금 당장 올라가야 한다며 다그쳤다. 우린 택시를 잡아타고 부리
나케 공항으로 달려 마지막 비행기를 잡았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성공한 기분
이었다. 신이 났다. "이제 앞으론 니가 내 매니저다."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은
후 내가 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 다음 대사를 조리고 있었다.
이제 앞으론 정욱이가 내 가족이라는 것.
우리는 틈만 나면 집 근처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축구공을 뻥뻥 찼다. 러닝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날이 어두워져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로 발이
걸리고 몸이 뒤엉켜 결국 장딴지에 시퍼런 멍이 들 때까지, 공을 쫓으며 운동장
을 가로질러 달렸다. 가끔, 씩씩대며 뛰어 다니는 두 아저씨 가까이로 어린 학생
들이 모여들었다. "아저씨, 우리도 끼워줘요. 같이 편먹고 경기해요." 내가 원하
던 바이다. 이래 봬도 운동깨나 했던 몸이 아니던가. 운동장은 금세 아이들의 고
함소리, 야유소리로 가득찬다. 그중에는 투박한 북한 사투리도 끼어 있다. "날래
날래 차라우야! 고 좀 빨리 움직이딜 않고 뭣들 하는 거야! 야잇! 임정욱! 너레
그짝으로 공을 차면 어떡해!" 공이 내 앞으로 왔다. 적들이 한꺼번에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에라, 따돌리기 작전이다. 나는 힘껏 공을 하늘 높이 뻥찼다. 공은
하늘을 넘고 학교 덤벼락까지 넘을 기세로 뻗어 나간다. 담벼락 아래는 웬 아이
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야, 위험하다. 피하라우!"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공은 아이의 머리를 향해 정통으로 달려간다. 그대로라면 아이의 머리를 쪼개고
도 남을 힘이다. 그때였다.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작은 몸집인 줄 알았는데 일
어서니 키가 꽤 크다. 다만 나처럼 삐쩍 마른 것이 약해 보일 뿐이다. 벌떡 일어
선 아이는 위로 껑충 뛰면서 날아오는 공을 멋지게 헤딩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달려가서 헤딩된 공을 한번에 받아냈다. 나는 아이의 머리가 괜찮은지 알고 싶
었다. "너 머리 괜찮은가? 아프지 않나?" "안 아파요. 괜찮아요." 아이는 짧게 말
한 후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나는 아이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얼굴은 이목구비
가 뚜렸하다. 쌍꺼풀이 짙게 진 두 눈에 코도 남자답게 오뚝하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구김 투성이고 신발에는 때가 꼬질꼬질하다. 엄마가 있는 아이라면
이런 차림으로밖에 나다닐 리가 없었다. "너 이동네 사는 아인가?" "예." "늦었
는데 집에 안들어가나?" 아이는 고개를 들어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저씨, 북한에서 온 김용 맞죠?" "그렇다." "아저씨가 여기서 축구 하는 거 많
이 봤어요." "쪼그만 게, 왜 자꾸 아저씨란 말을 쓰냐.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
"형?" "고렇지. 형." 옆으로 정욱이가 다가왔다. "야, 너 머리 괜찮니?" "괜찮아
요." "녀석, 헤딩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정욱이는 말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금세 내 얼굴에 나타난 걱정과 호기심을 읽어 냈다. "야, 집에서 엄마 아
빠가 기다리지 않냐? 들어가야지." "." "집이 요 근처 어디냐?" "아무도 안 기다
려요. 나 혼자 살아요." 영빈이 (그 아이의 이름이다)란 그아이는 정말로 혼자
사는 아이였다. 영빈이는 북하현동 건너편인 아현동의 단칸방에 혼자 살고 있었
다. 아현동은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글세 방들로 악명 높은 곳이 아닌
가. 나는 영빈이를 따라갔다가 그 참상을 처음으로 보았다. 서울에 와서 내가 처
음으로 뿌리내린 곳은 여의도 방송국, 연예계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의 중상류층만을 접한 셈이다. 화려한 고층빌딩, 방송국의 쾌적한 스튜디오, 구
색을 갖춘 아파트와 빌라만 보아왔던 나에게 영빈이의 단칸방은 충격이었다. 그
것도 내가 사는 집에서 1백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런 집이 존재한다
니. "영빈아, 너 우리집으로 와라." "그래, 우리 집엔 방이 남아 돈다. 니가 들어
와서 형들한테 재롱 좀 떨어라." 나와 정욱이는 고집센 영빈이를 설득했다. 도와
주겠다는 표현보다는 형들에게 네가 필요하다는 말로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성화에 못 이겨 짐을 옮기겠다고 결심한 후에 서야, 영빈이는 속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은, 겨울이면 연탄가스를 자꾸 마셔서 힘들었어요. 비가
올깨는 질식 할 정도였어요. 영빈이는 고아가 아니었따. 전라도 순천에 어머니가
계셨고 고등학생인 영빈이는 이른바 서울로 유학을 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무슨 공부가 가능하겠는가. "짜샤, 이젠 아저씨라 하지 말고 형이라 불
러!" 우리 셋은 신이 났다. 나는 오랜만에 골목대장 노릇을 하게 됐다. "짜식들,
날래 안 일어나! 기상" 나는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을 닦달했다. "날래 일어나 청
소해! 새끼들, 형님이 너희들 뒤치다꺼리 해야겠냐!" 나는 잔소리 대장이었다. 특
히 청소에 관한 한 두 동생은 나의 청결기준의 반도 따라오지 못했다. "누가 화
장실에 오줌 갈겼어? 날래 자수하라우! 이 새끼들이 군가가 빠져서 이 모양인
가?" 동생들은 미끈미끈 잘도 빤질거렸다. 이 녀석들은 어느덧 내 북한 사투리
를 흉내내면서 나를 약올리기까지 했다. "고것, 냄새로 판단하건대 형님의 오줌
갔습네다." "한 시간 전 형님이 소변을 본 후 바지를 치키다 지퍼 사이로 오줌
한방울을 흘린 것을 목격했다는 당 간부의 보고가 있었습네다. "이놈 새끼들, 당
장 걸레로 닦지 못해!" 내 불호령이 떨어지면 녀석들은 후다닥 걸레를 집어들고
욕실로 방으로 뛰어나녔다. 우린 팬티 한 장이면 좋았다. 남자 셋이 맨 윗통에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치고 라면을 끓여 먹고 TV도 보고, 틈나는 대로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가끔씩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영빈이가 수저를 마이크처럼 붙잡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그때도 영빈이는 팬티 바람이었다. 정욱이와 나는 영빈
이가 그 모습 그대로 TV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배를 움켜쥐고
웃곤 했다. 귀순한 지 1년 만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이젠 내게도 가족이 생겼다.

물 좋은 우리동네
장마철이었을까. 천장에서 비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영빈이가 잽싸게 양
동이를 받쳤다. 그때 거실에서도 뚝뚝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정욱이가 후다닥 움직였다. 뚝, 뚝, 뚝. 세 남자는 팬티 바람으로 빗물 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영빈아, 커피좀 맛있게 끓여주라." "." "이영빈! 날래 안 움직여?"
"형, 언제까지 이렇게 청승 떨며 살 거야?" "청승?" "여름에는 빗소리 들으며 팬
티바람으로 청승 떨고, 겨울에는 내복 바람으로 청승 떨고." "무신 말이가? 내레
니 무신 말 하는지 모르갔다." "형, 비도 새지 않고 겨울에도 따뜻한 데로 이사
가자." "이사?"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고 보니 이 집에서 산 지도 벌써 1
년이 됐다. 영빈이 말처럼 결점이 많은 집이다. 아무리 땜질을 해도 비는 계쏙
새고 겨울에는 보일러가 자꾸만 말썽이었다. 게다가 허구한 날 수돗물이 끊기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사라구? 나는 불편해도 그냥 살 수밖에 없다고만 생각하
고 있었다. 이사? "그래, 형. 우리 이사 가자." 정욱이까지 합세했다. 이 자식들이
벌써 미리 짜고 입 맞춰 놓은 것 같은데! "에잇, 형 돈 없어 야. 이사는 무슨 이
사!" 두 동생은 야유를 퍼부었다. 야 구두쇠 영감, 노린내 단다.! 그래계속 비 맞
으며 청승이나 떨어라! 동생들의 야유 속에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 안될
것 없지! 세 남자는 그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언제 갈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집으로 갈것인가. 나는 성격상 생각한 것을 즉시 실행하지 않으
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일단 이사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지금 당장 해야 옳
았다. "형, 우리 물 좋은 동네로 가자." "어디가 물이 좋은데?" "저기, 이화여대
근처." "이화여대? 야, 거기가 무슨 물이 좋냐? 북아현동이랑 뭐가 틀린데? 물이
야 다 똑같지." "아유, 그런 물 말고!" 두 동생은 나를 답답해 했다. "그런 물 말
고. 여자 말이야!" 나는 한참이 걸려서야 두 사람이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남
한에서는 미끈한 여자들이 많은 곳을 '물 좋다' 고 표현하는 구나!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화여댄,ㄴ '물 좋은 곳'이 아니라 '살벌한 곳' 이었다. 아직까지 북
에서의 고정관념을 다 깨지 못한 나에게 이화여대는 '깡패여대'로 인식돼 있었
다. 남자들보다 더 억센 여성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곳. 따지길
좋아하고, 남자들에게도 서슴없이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여성들이 다는 학교.
"아유, 형 그렇지 않다니깐!" 정욱이가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짜식, 내가 니
속마음 모를 줄 아냐? 부산에서 자라고 대학생활을 그 곳에서 보낸 정욱이는 서
울 아가씨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한창 피는 나이라 정욱이를 따라 다니
는 아가씨들도 꽤 많았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정욱이를 찾는 여자들 전화가 부
쩍 늘었다. 풍요속에 빈곤이라고 할까, 다들 제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까짓것, 가자!" 내 승낙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동생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부터는 동생들보다 내 마음이 더 바빴다. 동생들은 한 한달은 더 살다 나갈
수 있다며 천천히 하자고 했지만, 나는 하루도 더 지체하기 싫었다. 당장 복덕방
에 달려가서 이화여대 근처에 깨끗한 아파트가 있느냐고 물었다. 복덕방에서 권
한 아파트는 32평형의, 아무도 살아본 적 없는 새 아파트였다. 이사하는 날, 나
는 동생들에게 50cm짜리 모다구(못)을 구해오라고 당부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동생들이 신이 나서 발을 들이밀 때,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들이,
부정타게! 저리 떨어지라우!" 새 집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독'을 없애야 한다.
아무도 살지 않았던 새 집에는 사람 냄새가 없어서 공기가 음산하고 탁하다. 그
공기가 그대로 독이 되어 온 집안에 퍼져 있다. 북한 미신에 따르면, 이럴 때는
집 문지방을 넘기 전에 벽에 커다란 못을 박아 독의 흐름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중의 누군가가 시름시름 앓는 등, 자꾸 나쁜 일이 생긴다. 나
는 망치로 긴 대못을 씩씩하게 박았다. 대못은 망치에 부딪칠 때마다 탱탱 소리
를 내며 벽속으로 기세 좋게 빨려 들어 갔다. "다 박았다! 들어가자!" 우리는 발
소리를 쿵쾅거리며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얀 벽지, 매끈한 문지방, 얼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반들반들한 거실
바닥. 모든 것이 새것이다. 그 누구의 손때도 타지 않은 완전한 새것이다. 세 남
자는 당장 소핑에 나섰다. 영빈이는 앞으론 더 이상 방바닥에서 궁상 떨지 않을
것이라며 침대를 사달라고 졸랐다. 정욱이는 침대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자기도
방바닥에 이불깔기는 싫으니 매트리스를 사달라고 한다. 밖으로 나가니 세상은
별천지다. 웬 여자들이 이렇게 많을까. 울긋불긋한 소매 없는 웃옷에 손수건 만
한 치마조각을 걸친 아가씨들이 이끈한 다리를 드러내고 깔깔 웃으며 걸어간다.
어떻게 태웠는지 흑인처럼 가무잡잡한 아가씨들도 많다. 그런 아가씨들은 대개
어ㄲ를 과감하게 드러내 놓고 치마 길이도 다른 아가씨들보다 한 뼘이나 짧다.
"와! 섹시하다!" 두 동생들이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난 아직까지도 섹시하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북한 촌놈이 그런 언어를 사용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하지
만 그날 이화여대 앞에서 마주친 여자들은 정말 '섹시'했다. 방송국에서 마주친
연예인들도 누부셨지만, 이렇게 햇볕 아래서 벌거벗은 여자들을 보니, 너무 눈부
셔서 눈을 뜰수가 없었다. "형, 거봐! 내 말이 맞지. 여긴 정말 물이 좋지?" 나는
그저 물이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갈증이 났다. 이 물 좋은 동네에서의 생활을
나느 1년도 채 견디지 못했다. 석 달쯤 지나자, 지나치게 산만하고 분주해진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일단 방송일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참새가 방
앗간을 들르듯 옷가게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값비싼 정장이나 향수를 사
는 것도 아니었다. 정욱이하고 영빈이에게 입힐 팬티, T셔츠, 양말 따위를 고르
는 재미에 해 저무는 줄 모르는 것이었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등학
생인 영빈이의 외모가 점점 이대 주변을 방황하는 10대들의 모습과 닮아 갔다.
무스와 스프레이로 머리를 잔뜩 올리고 헐렁한 힙합 바지에 여자 처럼 몸에 끼
는 쫄티를 입은 영빈이의 모습은 내가 감당하기에 힘들었다. 영빈이를 탓할 수
만은 없었다. 사람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영향을 받고 살게 마련인데, 신촌이란
동네가 보여주고 들여주는 것이란 옷과 구두, 돈과 소비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다. 이런 환경에 계속 동생들을 둔다면 오히려 내 죄가 커지리라.
동생들을 설득하여 과감히 짐을 싸기로 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다행
인 것은, 나느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유인이 아니던가.

너, 뭐하고 살 거니?
졸지에 연예인이 된 북한 촌놈은 과연 남한의 연예계에 잘 적응했을까. 북에
서 이미 연예인으로 활동했던 나였기에, 나는 처음부터 한국의 연예계를 만만하
게 생각했다. 그러나 TV와 라디오에 몇번 나가면서부터 연예활동에 대한 나의
모든 고정관념이 흔들렸다. 북한의 연예인들은 적당한 예술적 자질과 혁명의식
만 있으면 두려운 것이 없다. 하지만 남한의 연예인들은 예술적 자질이 충만하
더라도 이것이 없으면 맥을 못 추니, 바로 그것은 '인기'였다. 북에서 아무리 연
예인이었다지만, 나는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음악단 소속이었던 나는 공
연 때마다 '군기', '조선의 별', '봄날의 눈송이' 등의 혁명가와 영화 주제가를 불
렀고 이 노래들이 인민들의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주길 바랐을 뿐이다. 계속 그
렇게 열심히 노래했다면 20~30년 후에 연예인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칭호를
얻었을 지도 모르겠다. 인민배우 칭호를 얻는다면 남한의 연예인들처럼 팬레터
(북한 말로는 '성과 편지')도 받고 인기의 위대함을 느껴 봤을 지도 모른다. 하지
만 나는 스케이트 선수에서 연예인으로 변신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또다
른 인생을 꿈꾸며 무역일꾼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러니 인기라는 것이 무엇인
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안다 해도 이해한다는 것은 더 어려웠다. TV, 영화, 라디
오,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첨단 매체까지 남한사회를 지배한다. 하루에도 수백명
의 인기인들이 이와 같은 매체들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수
백명에 바로 나, 김용이 끼여든 것이다. 갑자기 아파트 우편함이 팬레터로 가득
차고 출연요청이 밀려들면서 전화 벨이 끊일 새가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자동
차가 필요하고 매니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자동차
도 사고 동생 정욱이에게 매니저도 부탁했다. 여기저기, 되도록 많은 프로에 얼
굴을 내밀고,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겨야 인기가 지속된다고들 말해줬다. 내 일과
표는 하루에도 3~4건의 방송녹화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인기를
먹고 살겠다고 나선 것인가. 어느 날, 한 TV 프로에 등장해 바보처럼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았던 날인 것 같다. 그날 나는 내가 연예인이라는 것이 진저리 나
도록 싫어졌다. 차라리 땅을 파고 막노동을 했다면 그런 허탈감은 없었을 것이
다. 뭔가 구체적인 것에 매달려 살아야 할 텐데, 내가 의존하고 있는 거싱 겨우
대중의 '인기'라니. 어머니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내가 아무리 이
방송 저 방송을 쫓아다닌다 해도 어너미 눈에는 그저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꼴로
보일 것이 아닌가. "너, 뭐하고 살 거니?" 내속의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계속
이렇게 인기를 먹고 살고 싶니?" 아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인생
을 살고 싶다. 여느 남한 사람들처럼 삶의 현장에서 쓴맛 단맛 다 보면서 땀 흘
리며 돈도 벌고 싶다. 나는 원래 땀 흘려 번 돈만 믿는 사람이다. 나를 광고모델
로 기용했던 회사들이 선뜻 2천만원씩이나 거금을 주었을 때, 내 손은 벌벌벌
떨렸다. 그 돈은 내 땀의 대가가 아닌 '인기'의 대가임이 분명했다. 언제까지 그
런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부끄러웠다. 당장 뭔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했다. 땀흘려 돈도 벌면서, 뭔가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을. 단 하나
의 아이디어가 스쳤는데 썩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유치원을 운영해 보는 일이
었다.

어째서 유치원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북한 귀순자 김용이 꿈꾸는 유치원은 어떤 유치원일까. 그리고
그는 왜 낯선 남한 땅에 와서 하필이면 유치원을 세우려고 했을까. 그것은 충동
적인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에 대해 밤새도록 고민하고 곱씹
고 또 곱씹었다. 기나긴 고민의 시간 후에 "그래도 해야 겠다" 는, "반드기 하고
야 발겠다는 확신이 생긴 후에야 시작한 일이었다. 남한의 유치원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나는 적잖이 실망했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먹는 음식은 북
한의 유치원 수준을 월등히 앞섰다. 그러나 유치원의 규모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북한 유치원의 텃밭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한창 뛰어 놓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좁은 공간을 강요할 수 있을까. 운동장조차 없는 유치원이
될 법이나 한 소린가. 나는 어느 해 추석 명절째 TV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서
울 시내 유치원을 방문해 보는 기회를 가졌었다. 그때 목격한 것은 손바닥 만한
유치원 교실에서 되도록 정숙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아이
들은 몸을 비비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뛰어 놀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만 말했다. 뭔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
이 순간적으로 밀려왔다. 그 후 서울시내 곳곳에 걸려진 유치원의 간판을 살펴
보니, 대부분 비슷한 구조였따. 아파트 상가나 직사각형 모양의 시멘트 건물 구
석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유치원 간판. 남한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유치원이란
초등학교 입학전에 한글을 뗄 수 있는 곳. 국민학교 1학년 산수 과정을 미리 배
울 수 있는 곳.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맡기는 곳 정도로 인식돼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유치원이란 아이가 처음으로 부모의 품을 벗어나 한 사람의 사회인으
로 발을 딛는 곳이다. 아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엄마나 아빠의 힘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친구를 사귀고 여러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즐기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일을 해결한다. 옛날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유치원의 첫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덧셈 뺄셈을 잘 가르치는 유치
원이 최고의 유치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이가 인생을 맛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유치원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유치원이다. 하다 못해
아이들끼리 엎치락 뒤치락 싸울 공간이라도 있어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 두 아
이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어쩌면 아이들은 팔을 휘두르다 문고리에 세
게 손가락을 부딪칠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밀려 넘어지다가 벽면에 머리
를 세게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장난감을 휘두르다가 유리창을 박살
낼 수도 있다. 좁은 공간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북한의 유치원은 남한의 초
등학교 수준의 규모다. 내가 다닌 강계 유치원만 유독 큰 것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모든 유치원이 다 그만하다. 반드시 운동장이 있고 널찍한 교실하나를 20
명의 아이들이 함께 썼다. 운동장 한구석엔 개, 토끼등의 동물을 키웠다.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도 있었다. 봄에는 선생님의 가르침 아래 친구들과 함께 고사리
같은 손에 흙을 묻혀가며 화단에 꽃씨를 심었던 기억도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북한에서 유치원은 국가의 의무교육이다. 따라서 만5세가 되면 누구나 자동적으
로 들어가는 곳이 유치원이다. 남한 사람들이 가끔 잊을 수 없는 초등학교 선생
님, 친구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북한 사람들은 이 경우 대개 유치원
을 회상한다. 실제로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되는 경우가 일반
적이며 선생님 역시 해마다 잊지 않고 찾아뵙는다. 북한 사람들에게 유치원은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으로 날아보는 하늘과 같다. 따라서 내가 세우려는 유
치원은 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운동장이 있고, 춤을 출 수 있는 널찍한 마루가
있는 곳이었다. 봄에는 아이들에게 직접 꽃을 심게 할 것이고 겨울에는 한바탕
눈싸움도 신나게 할 수 있는 곳. 그런 근사한 곳에서 밤톨만한 아이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흐믓했다. 바로 그거야! 유치원을 세우는 거야! 마음
이 바빠졌다. 나는 그동안 모아둔 돈이 얼마인지 처음으로 계산해보았다. 워낙
돈을 별로 쓰지 않는 체질이라 번만큼 모았을 터였다. 출연료와 고아고모델료,
그리고 <머리를 빠는 남자>와 <빨래하는 남자>등 2권의 책으로 받은 인세 등
모아둔 돈이 제법 될 것 같았다. 나는 그 중 상당 부분을 영빈어머니에게 빌려
준 상태였다. 일산에 이사올 때쯤, 피아노 학원을 차리겠다고 하기에 생각없이
꾸어주었던 것이다. 이제 피아노 학원도 꽤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돌려달라고
말씀드려도 괜찮겠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영빈 어머니의 피아노 학원 전화번호
를 돌렸다.

상실의 여름
나는 또다시 텅빈 집에 혼자 누워 있다. 집안을 가득 채우던 동생들의 웃음소
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젊은 땀 냄새도, 친근했던 발냄새까지도, 모두 이
집을 빠져나갔다. 언제 청소를 했던가? 식탁위에 1cm 두꼐로 뽀얗게 쌓인 먼지
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왜 외로우면 청소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외로운 사람은 무언가가 빠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
다. 먼지는 뽀얗게 쌓여야 하며, 냉장고는 부패한 음식으로 가득 차고, 설거지
통은 그릇으로 넘쳐야 한다. 그런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야 좀 덜 혼자인 것
같다. 나는 먼지의 두께를 가늠하며 입가에 슬슬 자조의 웃음을 흘린다. 멋지다.
모두 떠났다. 나는 가족을 잃어 버렸다. 전화 벨이 울린다. 아마 정욱이가 걱정
이 돼서 한 전화일 것이다. 고집 세게 울리는 전화를 나는 고집 세게 받지 않았
다. 정욱이는 복학을 해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영빈이는, 영빈이는. 영빈
이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젯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찾아온 영빈이를,
나는 야멸차게 내쫓았다. "형, 나도 우리 엄마랑은 못 살겠어. 엄마가 그럴 줄은.
형, 용서해줘. 내가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어. 여기가 내 집이야." 나는 말 없이
영빈이에게 뜨거운 커피를 끓여 줬다. 그리고 정작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차가
운 맥주를 들이켰다. "가라!" "형!" "니 오마니 있는 데로 가라. 거기가 니가 살
곳이다." "형!" "너는 내 동생이다. 어디서 살아도 내 동생이다. 하지만 오마니를
버리는 동생은 필요없다!" "형! 제발." "가라구! 언젠가 오마니가 보고 싶어도 못
보는 날이 있어! 그땐 이형을 버리갔냐?" "!" "가라!" 나는 영빈이에게 등을 돌리
고 내 방문을 닫았다. 영빈이가 우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나느 영빈이에게 우는
것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가르친 적이 없는데도 그는 저렇게 혼자 우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영빈이는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빈이도 혼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 나갈 것
이다. 소리없이 울던 영빈이가 집을 나간다. 어서, 저 녀석을 붙잡아! 어서! 무언
가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위
에 쌓인 먼지를 바라보며 이제 저것들을 거둘 때가 됐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영빈 어머니, 내레 유치원을 차리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저축한 돈이 얼마나 됩
니까?" "유치원? 갑자기 왜?" 나는 신이 나서 영빈 어머니에게 나의 계획을 말
해주었다. 말하다 보니 가슴이 벅차올라서 유치원의 건물구조와 운동장의 모습
까지도 자세히 묘사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 30분쯤 장황하게 떠들었던 것 같다.
영빈 어머니가 내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유치원을 지금껏 모아둔 돈으로 차리
겠다는 건가?" "엇, 그러니까. 모아둔 돈이 부족하면 빌릴 수도 있고. 어머니 피
아노 학원 차릴 때 빌려준 돈, 그거 돌려 주실 수 있죠?" 영빈이 어머니에게 돈
을 주고 전라도 순천에 있는 땅문서를 받아들 당시 서로의 약속은 돈이 필요하
면 임의의 시간에 되돌려 주기로 약속했고 그때로부터 오늘이 만 1년째다. 미안
한 생각에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몇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영빈 어머니의 목소리는 무척 언짢게 들렸다. "알겠네. 그러지.
뭐, 문제없어. 피아노 학원도 잘 되고, 이제 돈도 갚아야지." 휴우, 다행이었다.
혹시 그녀가 좀더 기다려 달라고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었는데. 나는 그날부
터 당장 일산 부근의 부동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괜찮은 유치원 터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일산 신도시 강선마을에서 적당한 땅을 찾게 되었다. 땅
주인과 계약을 하고 우선 계약금 10%를 치렀다. 그리고 영빈어머니가 어서 돈을
돌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영빈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긴 것은.
영빈이도 없어졌다. 전날, 갑자기 엄마가 부른다며 집을 나갔던 동생이 밤이 깊
어도 들어오질 않았다. 영빈 엄마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아무리 연락을 해
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라졌었다. 피아노 학원을
파리라고 영빈 어머니에게 빌려줬던 돈도 고스란히 사라졌다. 두 사람이 돈을
들고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은 내게 경찰에 신고하여 지명수배 조치를 취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도망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 동생이
고, 다른 한 사람은 동생의 어머니가 아닌던가. 게다가 영빈이에게 무슨 죄가 있
는가. 동생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강요로 같은 배를 탄 것이다. 사라
진 사람은 찾지 않는 법이다. 사라진 사람은 어딘가로 떠나서 다시 그곳에서 새
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집을 갖게 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겠다고 결심한다. 영빈이의 어머니도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녀는 내가 2년여에 걸쳐 모은 돈을 모두 가지고 떠났지만, 지금 어딘가에 자리
잡은 그녀의 마음은 그 어느때보다 깨끗할 것이다. 이제 저 먼지들을 털어버려
야 겠다. 그리고. 이사를 가야겠다. 아파트를 바꿔야겠다.

그래도 살맛 나는 세상
내가 소주병을 비우며 방바닥을 뒹구는 동안, 세상은 벌써 김용의 화려한 출
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신문에는 "김용, 유치원 원장 된다"는 기사가 대문
짝 만하게 실렸다. 자녀를 가진 방송국 지인들과 동료 연예인들은 "이봐, 용이!
그 유치원 언제 문 열지?"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직 중도금을 다 해결하지 못
한 유치원 건물 주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독촉 전화를 해왔다. 이미 활은 당겨
졌다. 이제 와서 "돈이 없어서 못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스타트
총성이 울렸고 나는 어쨌든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내 인생은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한눈 팔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쉬지 않
고 달리는 것이다. 선수시절처럼 스케이트를 신고 계속 달려야 한다. 남한에서의
나는 '김용'이란 이름 두자만을 달랑 가졌을 뿐이다. 이름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과연 그것만으로 떳떳이 버텨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름만으로
나를 믿어줄 사람이 있을 것인가. 나를 격려해 주신 MBC 구본홍 해설위원의 말
씀이 생각난다. 김용이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구 위원은 일부러 나
를 찾아 오셨다. "용이, 수강료를 내고 공부 좀 했다고 생각하게나"라며 나를 위
로하셨다. "수강료가 좀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 배운 것은 평생 못 잊을
걸세." 그리고는 그분은 이렇게 덧붙였다. "용이, 너무 남한을 원망 말게나. 그래
도 남한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아!" 구 위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니, 세상의 이치가 그랬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고, 겨울이 있으면 봄이
있고, 눈물이 있으면 웃음이 있는 법이었다. 사기를 당했다고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다. 인생은 계속되고, 나는 또다기 웃는다. 먼저, 귀순자들이 허겁지겁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용아, 니가 어캐 이리 됐어? 세상에, 어캐 이런 일이 다른 사
라도 아닌 너 한테 생긴거야?" 하며 나보다도 더 분노했다. 그리곤 정부로부터
받은 얼마 안되는 보상금을 "이거라도 어서 갖다 써라"하며 내미는 것이었다. 아
무리 한푼 두푼이 아쉬운 때였지만, 보상금만은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보상금
이 귀순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가족과 고향을 귀에 두고, 조국과 사상
을 버린, 눈물의 대가가 아닌가. 내겐 그 눈물을 넙죽 받아 마실 자격이 없다.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그들은 "미친놈" 이라며 잔뜩 화를 내며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화를 낼수록 내마음은 따뜻해졌다. 가슴 깊숙이에서 봄날의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세상은 이토록 훈훈하고, 그래서 살아볼 만한 곳이다. 바
로 그때였다. 평소에 나를 눈여겨 보시던 이북5도민회의 실향민 어르신 중 한
분이 내게 사람을 한 명 소개해 주셨다. 그분은 "마침 유치원을 차리고 싶어 하
는 사람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게나"라고 짧게 말하셨다. 바로 그것이 후에 문화
유치원의 원장이 된 김선혜 씨와의 만남이었다. 김 원장은 영국과 일본 등 선진
국의 유아교육을 두루 섭렵한 분이었다. 단 한 시간의 대화를 통해, 나는 우리의
생각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세우고 싶은 꿈의 유치원과 그
분이 구상해온 유치원이 같은 것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김선혜 원장이 "좋
아요. 김용 씨와 함께 해보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함께'하는 말을 썼지만,
실질적으로 재정적인 것은 모두 김 원장이 부담하는 셈이었다. 나는 여전히 돈
한푼 없는 신세였다. 아무것도 없고, 단지 열의만을 가진 나를 김 원장은 이렇게
선선히 받아주었다. 나는 유치원에서 월급을 받지도 않고 어떤 결정권도 없지만
그래도 이사장이란 명예를 얻었다. 처음으로 명함을 받은 날, 내 마음은 몹시도
설레였다. 앞으로 나라의 미래를 짊어 질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대기업의 사장직보다도, 어떤 높은 자리의 정치인보다도 더욱 명예로운 것이었
다.


천사들의 출발
장대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고운 모래를 깊게 깔아 놓은 운동장이 차분히 젖
어 들억간다. 비오는 여름날의 유치원은 텅빈 듯이 고요하다. 해가 있는 날 이렇
게 차를 끌고 유치원 안으로 들어오면 금세 아이들이 뛰어온다. "김용 이사장님
왔다! 이사장님 왔다!"하며 차를 쫓아다니며 폴짝거리는 것이다. 따라붙는 아이
들이 없는 비 오는 날은, 여러모로 재미가 없다. 운동장 한 구석에 차를 세워두
고 내리려고 하니 우산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최대한으로 빨리 뛰기로 했다. 나
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비 사이를 뛰어갔다. 건물 앞에 가까이 가자 창문 안
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꼬마 아이가 싱긋 웃으며 조그만 손을 흔든다.
비디오가 켜져 있고 아이들이 손발을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몬테소리를 배
우고 있는 듯하다. 나는 대충 몸을 털고 복도의 맨 끝에 있는 원장 선생님 방으
로 향했다. 원래 전에 이곳에서 유치원을 운영했던 사람은 이 건물 안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을 원장실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김선혜 우너장님은 그 좋은 방
을 쓰기를 마다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배움터가 될 수 있는 그 방을 혼자 쓸 이
유가 없다"며 스스로가장 초라한 구석방으로 옮겼다. 처음엔 너무 작고 쓸쓸해
보이는 방이었지만 책상을 들여놓고 산뜻한 소파와 함께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걸어두자 금세 분위기가 변했다. 또 그 방은 건물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양면이 큰 통유리로 널찍하게 창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서 운동장을 내다보면
아이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네와 시소를 타는 작은 몸집의 천사들. 미
끄럼틀레엇 내려오면서 아이들이 자아내는 까르르 웃음소리. 너무 빨리 미끄러
져서 하늘을 보고 완전히 모래 위에 누워 버린 아이. 혹시 다친 것은 아닐까. 걱
정하며 지켜보면 이내 작은 발가락이 꼼지락 거린다. 곧 깔깔거리며 "재미있다!
또 타자!"는 아이의 고함소리가 틀린다. 원장실 통유리창 밖으로 아이들을 바라
보고 있으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없다. 노크를 하고 물을 열자, 예상대
로 김원장은 책상에 거의 얼굴을 파묻고 뭔가를 쓰는데 골몰해 있다. "안녕하세
요! 별일 없죠?" "어서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했어요." "또 무슨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계세요?" 김 원장은 일을 만들어서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
다. 힐끗 책상위를 바라보니 '원아모집'이란 글씨가 눈에 뛴다. 분홍색 도화지 위
에 매직으로 또박또박 씌어져 있다. "한1백장은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일
산 신도시 아파트 곳곳에 붙여야 하니까요." '원아모집. 북한 총각 김용이 만든
문화유치원에서 원아를 모집합니다. 넓은 운동장과 쾌적한 교실에서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세요. 연락처.' "이사장님! 도와달라니까요. 뭐하세요?"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김원장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는 나에게, 김원장은 매직과 도
화지를 내밀었다. 죽었다. 앞으로 2~3시간은 꼬박 전단 만드는데 바쳐야 한다.
"좀 있으면 봄학기에요. 봄에 새로 들어올 아이들을 모집하는 거예요." "지금까
지 신청한 학생 수는 모두 몇 명이죠?" "지금 배우고 있는 학생들까지 합해서
51명이에요. 51명. 많이 발전한 것이다. 한 달 전인 95년 8월 18일. 처음 문화유
치원이 문을 열었을 때, 우너생은 겨우 스물일곱명에 불과했다. 한 달 만에 입소
문으로 10명이 늘었다. 그래도 아직 한참을 더 모집해야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
하다. 내년 봄학기에는 백 명 정도는 모집해야 할 텐데. 매직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김 원장과 함께 세 시간을 들여 만들어 낸 백장의 전단지. 나중
엔 팔이 너무 아파서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글씨가 저 혼자서 춤을 추었다. 다
른 유치원처럼 빳빳한 컬러 인화지에 인쇄해서 폼나게 붙이고 싶었지만, 우리에
겐 그런 사치를 부릴 만한 돈이 없다. 어쨌든, 나는 김용이고 나의 유치원은 문
화 유치원이다. 그것만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날, 비는 개이고 날
씨는 화창했다. 방송국 촬영을 마치고 부리나케 뛰어 나오는 나를 탤런트 현석
선배님이 붙잡았다. "용아, 너 어디가? 점심 같이 안할 거야?" "어, 선배님! 저
지금 급하게 가야 할 데가." "무슨 급한 일인데 밥도 안 먹어? 너 연애질 하냐?"
현석 선배님은 나를 볼 때마다 푸짐한 밥을 사주지 못해 안달을 하는 분이다.
귀순 이후 자꾸 꼬챙이처럼 말라만 가는 나를 볼때마다 현석 선배님은 마음 아
파한다. 그런 현 선배님에게 나는 가끔씩 외로움을 드러내고 고민을 털어놓곤
한다. "사실은, 오늘 유치원에서 전단 붙이는 날이에요. 내가 빨리 차 가지고 가
야지 일이 시작돼요." "전단?" "예." "그거 여기저기 전봇대하고 벽에 종이짝 붙
이는 거냐?" "예" "고거, 재미있겠구나. 나도 같이 하자." "예?" "나도 같이 가자
구. 그런거 한번해보고 깊더라." 괜찮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는 나를 현석 선배님
은 한사코 따라 나섰다. 자기는 그런 거 하면서 주위 사람들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취미이고 그렇게 하면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면서 부득부득 우기는 것이었
다. 선배님은 "얏! 내가 가고 싶다니깐!"하더니 그대로 주차장으로 돌진해 갔다.
오히려 내가 주뼛거리며 현 선배님의 뒤를 쫄래 쫄래 따라갔다. 현 선배님은 그
날 엄청난 자원봉사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 날 나, 현 선배님, 김원장, 그밖의 여
러 사람들은 일산 신도시의 여러 아파트 단지를 온통 분홍과 노란 도화지로 도
배했다. 게다가 얼굴을 알아보는 신도시 주민들에게 현선배님은 탤런트 기질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여기 이 말라깽이 놈이 북한 총각 김용 아닙니까. 이 놈이
유치원을 만들었어요. 굉장히 커요. 여러분들 많이 찾아오세요." 워낙 발성이 좋
은지라 현석 선배님에겐 마이크가 따로 필요 없었다. 그날 현 선배님은 점심을
굶었다. 일이 있으면 밤먹을 시간도 잊어 버리는 나 때문에 덩달아 밥을 먹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현 선배님은 날이 어둑해져서 더 이상 전단을 붙이지 못할
때 까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이날 선배님은 하루종일 드라마를 찍을 때
보다도 더 많은 땀을 흘렸고 나에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을 말없이 가르쳐 주
셨다. 이렇게 전단과 찌라시를 들고 봄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무려 40일 동안 일
산 신도시를 뛰어다녔다. 붙여 놓은 전단이 떨어지면 다음날 뛰어가서 다시 붙
이다가 아파트 쉬위 아저씨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무렇게 나 구겨
진 청바지에 꾀죄죄한 점퍼를 걸치고 뛰어다는 내게 아파트 아주머니들은 "저
사람이 김용이야?" 하며 수군거렸다. 나의 정성이 세상을 움직인 것일까. 한참
봄학기 원생모집에 열을 올리던 겨울, MBC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유
치원을 뉴스데스크에서 보도하겠다는 것이었다. 귀순자가 세운 유치원이라는 것
도 뉴스감이었지만, 그보다도 운동장이 딸린 연건평 2백평 이상의 국내 최대 규
모 유치원이라는 것도 뉴스감이라는 설명이었다. 과연, 뉴스데스크의 보도가 나
간 후 문화유치원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수도 없이 걸려오는 문의전화 때문에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전화기에 대고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
복하면서도 마음은 너무나도 행복하였다. 한통 한통의 전화가 그저 고마울 따름
이었다. 드디어 봄학기가 되었을 때, 처음 개원때 불과 27명에 불과햇던 원생수
가 무려 1백50명으로 불어났다. 1백50명의 천사 같은 아이들은 운동장에 줄지어
세워두고 입학식을 할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노란 원복을 지어 입은 아이들
은 참새처럼 쉴새없이 재잘거리고, 아직 혼자 서 있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은 엄
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칭얼거렸다. 콧물이 잔뜩 맺힌 아이의 코를 손수건으
로 닦아주는 어머니, 벌써 친구를 사귀어 운동장에 있는 모래를 던지며 신이 난
아이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천사들이 세상에 첫 번째 발걸음을 딛고 있
다. 지금부터 출발이다! 나는 괴로운 줄 알면서도 북에 두고 온 조카가 생각났
다. 내가 북을 떠나던 해, 조카의 모습이 꼭 저만 했었다. 어렸을 적 내가 다녔
던 바로 그 강계 유치원에서 오재미공을 쫓아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던 조카의 모
습이 눈에 선하다.

짝사랑
"용이 삼촌! 삼촌, 삼촌!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응 원주필 가져오란다." "원주
필?" 뜬금없이 무슨 소릴까. 올해 겨우 다섯 살 된 어린 조카 훈이가 원주필을
찾다니. 원주필이란 북한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볼펜을 일컫는 말이다. "선생
님이 한 상자 가져오라 하셨다. 삼촌한테 원주필 많디?" 훈이 말대로 내겐 원주
필이 많았다. 아니 많다기 보다는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일제 원주필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백두산 건축이 직영하는 연화무역의 실무자로 일하고 있었다.
소련과 일본등을 자유롭게 넘나들었기 때문에 외제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지
갑에는 웬만큼의 달러가 항상 있었기 ㄸ문에 달러 상점에 가서 원주필을 구입하
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응? 삼촌! 원주필 줄 거디? 그렇디?" "알았다. 여기
12자루 한 상자 가져가라." 고사리 만한 손에 원주필 한 상자를 쥐어주니 훈이가
좋아서 펄쩍 뛴다. 형님과 똑같이 생긴 눈과 입이 배시시 웃고 있다. 훈이에겐
항상 이렇다. 엄하게 대해야지 하다가도 그 녀석의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진
다. 형님도 나도 일 때문에 일년의 절반이상을 밖에서 보내기 때문에 훈이에게
는 항상 미안할 뿐이다. 그건 그렇고 왜 유치원 선생님이 원주필을 가져오라고
한 것일까. 훈이를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님을 알고 있다. 요전날 훈이 와 훈이
친구들과 함께 유치원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던 중에 만나 뵌 적이 있다. 훈이
가 "삼촌, 저기 지나가시는 분 우리선생님이다!"라며 좋아라 소리를 지르는 듯하
더니 금세 선생님 앞으로 달려가 폴짝거렸다. "훈이구나. 너레 저녁 안 먹고 뛰
어 노는 거냐?" "선생님! 선생님! 내레 우리 삼촌하고 같이 왔시오. 삼촌! 이리와
라. 우리 선생님이다!" 훈이의 부산함 속에 우리는 얼떨결에 갑작스런 인사를 나
눴다. 선생님은 단정하게 뒤로 틀어올린 머리와 깨끗한 이마를 갖고 있었다. 이
제 갓 스물을 넘겼는지 뽀얀 피부에 앳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훈이가 나를 소
개하자 살짝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계 처녀였다. "삼촌, 우리 선생님
곱디?" 훈이의 천진스런 당돌함에 선생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한눈에 참 마
음에 드는 처녀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 내가 뭘 어쩔수 있겠는가. 나
는 또 내일이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어딘가를 헤매고 다녀야 할 팔자인데,
내가 여자를 사귄다는 건, 그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하는 거다! 그 당시의 나는 이
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여자를 사귀지 못하
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훈이가 학교에서 삼촌 자랑을 많이 합네다. 훈이는 좋갔
다. 이렇게 씩씩한 삼촌도 있고." 선생님은 훈이 머리를 잠깐 쓰다듬고 다시 뒤
돌아 떠났다. 뒷모습 역시 참 고왔다. 그런데 그 여선생이 왜 훈이한테 원주필을
가져오라 한 걸까. 수줍음이 많고 조심스러워 그런 말은 못할 사람처럼 보이던
데.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그날 나는 소련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후 다
기 강계로 기차를 타고 올라온 길이라 몹시도 피곤한 몰골이었다. 면도도 하지
못한 까칠한 얼굴, 잠이 모자라 반쯤 잠긴 눈, 몇시간 동안 내 체중에 눌려 있는
통에 꼬깃꼬깃 주름진 양복. 그렇게 비몽사몽 걸어가는 나를 뒤에서 누군가 부
르고 있었다. 그것도 예쁜 여자의 목소리가. "저, 혹시 훈이 삼촌 아닙네까?" 휙
돌아보니, 예의 그 고운 얼굴의 여선생이 함초롬히 서있다. "아이쿠, 이거 훈이
유치원 선생님이시군요." 저런, 하필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을 ㄸ 만날
건 또 뭔가. 당활한 나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은, 지난 번 훈이 편으
로 우너주필 한 상자를 보내셨기에. 인사가 늦었습네다. 정말 고맙습네다." 원주
필? 아하! 훈이 고 녀석이 내게 공갈을 친 것이구나. 선생님이 원주필을 가져오
라 한 것이 아니라 그 녀석이 선생님께 원주필을 선물하고 싶었던 개로구먼!
"제가 원주필이 잘 나오지 않아 종이에 문대가며 쓰다가 얼떨결에 애들에게 누
구 집에 원주필 있으면 하나만 가져올래 하고 얘기했거든요. 원주필도 되는 것
이 없고, 볼펜도 마땅찮고. 훈이가 그걸 보더니 자기 집에 원주필 많다고, 삼촌
한테 말하면 금세 구할 수 있다고 합디다. 일없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가져왔시
오. 어쨌든 삼촌께 감사드립니다." 얼떨결에 예쁜 아기씨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
으니 기분이 좋다. 나는 양치질 하지 못한 누런 이빨이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히죽히죽 웃어댔다. "아이, 원주필이야 저희 집에 그냥 굴러다닙네다. 언제든 필
요하면 훈이한테 말씀하시라요. 제가 훈이 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일없시오.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아껴서 혼자 쓰면 1년을 넘게 쓰겠는데요." 더 좀 얘기를
하고 싶은데, 여선생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리고 가려고 한다.
"저, 훈이 선생님!" "예?" "아니, 저, 정말입네다. 원주필 떨어지면 말씀하시라요.
제가 꼭 보내드리갔습네다." "에, 예. 그럼 안녕히 가시오."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아쉽다. 산보(데이트)라도 하며 얘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집에 돌아와 생
각하니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된다. 거울을 보니 내 꼴이 참 못 봐주겠다. 이 모
양으로 산보를 신청했다간 퇴짜맞기 딱 좋겠다. 아니, 그 여선생이 벌써 내 생김
새에 실망했으면 어쩌나. 이일이 있은 뒤로 나는 훈이 눈치만 살폈다. "야,선생님
이 무슨 말씀 하지 않던?" 하고 넌지시 물으면 녀석은 "아니, 무슨 말씀?"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자 나는 점점 좀이 쑤셨다.
"훈아, 너희 선생님 원주필 떨어질 ㄸ 안됐나?" "원주필? 저번에 갔다드린 거 계
속 쓰고 계신다." "음음. 그래?" 훈이는 다시 공책에 얼굴을 파묻고 숙제를 한다.
"훈아! 혹시, 선생님이 삼촌 소식 묻지 않던가?" "소식? 그게 뭣인데?" 말문이
탁 막혔다. 내가 이게 뭣하는 짓인가. 어린 조카한테 별걸 다 물어본다. "우리 선
생님 요즘 바쁘다. 결혼 준비 하신다." "뭣, 결혼?" 얼굴에 식은 땀이 흐른다. 표
정이 대책없이 마구 구겨졌다. 공책에서 눈도 떼지 않던 훈이가 고개를 들더니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삼촌 왜 그리 놀라는가?" "놀란다구? 내가 아, 아니다."
"놀랐나 본데. 삼촌 우리선생님 좋아했나?" "뭐? 내가 좋아한다구? 쪼그만 게 무
신 말이가. 어서 숙제나 해라." 나는 흠 헛기침을 하고 재빨리 내 방으로 돌아왔
다. 뒤에서 훈이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어린 조카한테 웬 망신인가.
삼촌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어쨌든 내 짝사랑은 이렇게 맥없이 끝났다. 그
때는 웬 망신인가 부끄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순수했던 당시의
내 모습이 예뻐 보인다. 언제 다시 그런 감정을 느낄 날이 올 것인가.

북한에 스승의 날이 있다면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스승의 날을 맞았을 때, 나는 달력의 5월 15일 글자 밑
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스승의 날'이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봐, 남한에
서 스승이 누구지?" "뭣? 스승이 스승이지 누구냐니?" 남한에서 사귄 친구녀석
에서 물으니 그 녀석 역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달력에 스승의 날이
라고 적혀 있는데, 그 스승이 누구냐고? 대통령인가?" 내말에 친구는 뒤로 넘어
갈 듯이 웃어댔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가? "이 자식, 무슨 스승이 대통령이
냐? 스승은 학교 다닐 때 우릴 가르쳤던 선생님을 뜻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니
스승하고 내 스승은 틀리다구." 아, 그렇구나. 물론 북한에서도 스승이란 말은 쓴
다. 그러나 이 스승은 일반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김일성 수령을 뜻하는 말이다.
심지어 '어버이'라는 단어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니 내게
'스승의 날'이란 표현이 제대로 이해될 리가 없다. "야, 그렇다면 스승의 날엔 도
대체 뭘 하는 거냐?" "제일 기억나는 고마운 선생님께 선물 들고 찾아 뵙는 거
지." 안타깝게도 내겐 찾아볼 스승이 여기 없다. 그렇다면, 만약에 내가 지금 북
한에 있다면, 이 스승의 날에 나는 누구를 찾아볼 것인가. 몇 해가 지나면서 사
람들을 쭉 지켜보았다. 그들이 찾아뵙는 스승은 대학시절의 교수님, 고등학교 3
학년 때 선생님, 회사의 윗사람 등 다양했다. 다 보기 좋았다. 하지만 왜 좀더
먼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는 것일까. 남한 사람들이 찾아뵙는 스승은 대개 머리
가 클 만큼 큰 이후에 만난 스승들이었다. 예컨대, 진학문제를 잘 상담해 준 고
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든가, 혹은 좋은 직장을 소개해 준 대학 교수님이라
든가. 왠지 사람냄새가 덜 나지 않는가. 이것을 좀더 확실히 느낀 것은 내가 중
앙대학교 최고경영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대학원 학생들은 스승의 날을 마치 어
려운 숙제를 풀 듯 까다롭게 보냈다. 어떤 교수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며
칠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유, 큰일이야.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 우리 지도교
수님이 또 선물을 오죽 밝히냐!" "난 와이셔츠 한벌 사드릴래. 뭐, 마음에 안 들
면 논문 통과 안 시켜 주겠지. 하지만 내 주머니 사정이 그것밖에 안되겠어." 지
나치는 두 여학생의 대화를 듣고 나는 무척이나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스승의
날이 이런 이해관계에 얽힌 행사라면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로 뵙고 싶
고, 궁금하고, 잊을 수 없는 스승. 그래서 선물의 가치가 아닌 그 정성만으로도
훈훈해 하는, 그런 스승을 찾아 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승의 날조차 '뇌물화'
가 된 듯 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중고등학교 촌지문제가 심각하다
던데, 이런 분위기라면 스승의 날에 학생 시켜 돈 갖다 바치는 부모들 꽤 많겠
다. 나도 학교하면 꽤 많이 다녀본 사람이다. 강계유치원, 강계 북문 인민학교(남
한의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강계고등학교 등 정규 학교는 물론, 김정일 예술학
원, 그리고 또 몇 년후에 나이가 꽉 차서 들어갔던 김책공대까지, 정말 많은 학
교를 다녔다. 그만큼 내겐 스승도 많다. 만약 통일이 되어 내가 다시 북에 갈 수
있고, 그래서 북에도 스승의 날이 생긴다면, 나는 아마도 그날 엄청 바쁘게 보낼
것 같다. 예술학원에서 나의 제 멋대로식 발성을 처음부터 다시 교정해 주신 심
상봉 성악 선생님, 김책공대에서 내게 늙은 학생이라며 친구처럼 소주를 나누기
도 했던 박원성 교수님 등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분들 말고도 꼭 찾아 봬야 하
는 스승이 한 분 있다. 바로 강계유치원 시절 나를 가르쳤던 석정숙 선생님이다.
수년 전 남한에서 <내가 알아야 할 모근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베스
트셀러였다는데, 그 말에 정말 동감한다. 석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 준 인생의 법
칙은 지금까지도 나를 지배한다. 예컨대 밥을 흘리지 않고 먹는 법이라든가, 어
르신들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법, 연필 쥐는 법, 손톱 깎는 법, 오줌 싸는 법 등
이 그렇다. "오줌 눌 때는 말이디, 허리를 쭉 펴야 한다. 바지를 고추 아래까지
내리고, 한손으론 고추를 잘 잡고, 다른 한손으론 살짝 눌러주고. 딴 생각하디
말고 오줌만 생각해라. 그래야 오줌이 나오디. 바지는 오줌 방울이 다 나올 때까
지 기다린 다음에 올려야 한다. 안 그러면 속옷에 오줌이 묻어요. 그리고 선생님
은 소변을 보기 전에 한 번, 그리고 보고 나서 또 한 번, 꼭 손을 씻으라고 가르
치셨다. "오줌 누기 전에 꼭 손을 씻어야 해요. 씻지 않은 손으로 고추를 만지면
안돼요. 고추는 깨끗한 손으로 만져야겠디요?" 남한에 와서 보니 사람들은 모두
볼일을 본 다음에만 손을 씻소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볼일 보기 전과 후에 꼭
한 번씩 손을 씻도록 훈련된 내겐 남한 사람들의 그런 행동이 참 어리숙해 보인
다. 볼일 본 후에 손을 씻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볼일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남이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다. 생각해 보자. 운전대 핸들을 만
졌던 손으로,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던 손으로, 혹은 머리를 긁적거렸던 손으로,
그런 손으로 고추를 만지면 되겠는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남자 한 명이 멋지게
차려입고 하장실에 들어온다. 그는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화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아유! 손도 씻지 안고! 나는 그 남자가 스테이크를 썰던 손으로 고추
를 만질 것을 상상하면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멋지게 생긴 남자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내겐 볼품없게 보인다. 유치원의 경영자가 된 나는, 어린이들에게 처
음부터 이것을 가르쳤다. 밥은 꼭 밥상에 앉아서 먹어야 한다. 밥 먹은 후에는
꼭 양치질을 해야 한다. 자고 일어나서와 잠자기 전에 꼭 세수를 해야 한다. 그
리고 오줌 누기 전과 후에는 꼭 비누로 손을 씻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에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ㄸ 석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다. 내 인생의 첫발을 떼주
시고, 마흔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분. 내가 스승의 날
가장 찾아보비고 싶은 분이다. 우리 유치원 학생들은 자라서 나를 찾아올까. 오
줌 누는 법을 가르켜준 이 김용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헤쳐
나갈 세상이 지나치게 물질적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아이들이 종종 유
치원 시절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기만을.

풍경이 있는 유치원
아이들은 우리 유치원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런 자부심이 아니었다면 나
는 유치원 이사장 생활을 그렇게 오래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유치원 이사
장 생활을 한 것은 꼭 1년 6개우러 동안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었다. 결국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유치원을 그만두게 되었을ㄸ 마음이 많이 아
팠다. 그새 어린 친구들에게 정이 깊게 들었던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기
ㄸ문인지 아이들 역시 나를 첫눈에 좋아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첫눈에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구별해 낸다. 그들에게 나는 좋은 사람 쪽인
가 보다. 지금까지 내 얼굴을 보고 뒷걸음질 친다거나 두려운 표정을 지은 아이
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내가 씩 웃으면 아이들도 슬며시 웃는다. 그리곤 장
몸을 부짖쳐 오며 장난을 걸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이들과 엉켜 뛰놀다보면 문
득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아빠가 된다면 참 좋은
아빠가 될 텐데. 내가 책상에 앉아서 경영만 하는 이사장이 아닐었기에, 이렇게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뛰노는 이사장이었기에, 유치원 생활은 그만큼 재미
있고 활력에 찼다. 지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몇몇 풍경이 있다. 설날 명절전
그 조그마한 손으로 송편을 만들던 아이들. 나선형의 잘 생긴 송편이 아니라 빈
대떡같기도 하고 축구공같기도 한 재미있는 모양의 송편을 만들면서 깔깔대던
아이들. 김장철에 직접 김치를 담갔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 손에는 혹시
고춧가루 독이 오를까봐 비닐 장갑을 끼워줬다. 아이들은 소금과 고춧가루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 그래도 신이 나서 히히거리며 배추를 버무렸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는 그대로 김치의 좋은 양념이 되었다. 지하의 마루방에서는 아
이들이 언제나 큰 거울을 바라보며 입을 방긋거렸다. 선생님이 "여러분, 지금부
터 모두 울어 보세요!"라고 말하면 다들 하늘이 꺼지라며 잉잉거렸다. "지금부터
는 웃어 보세요!"라고 말하면 금세 날씨가 개인 듯 방긋 거리는 것이다. 이 모습
을 거울을 통해 가만히 바라보면 너무나 흐믓하다.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거울은 아이들의 세상이었다. 너무나 맑고 순수한 세상. 급식에 얽
힌 풍경도 그 시절을 그립게 한다. 처음 문화유치원을 기획할 때부터 나는 반드
시 급식을 할 것이라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콜라와 햄버거, 과자 부스러기
와 피자에 있었다. 북한 속담에 '부잣집에서 굶는 자식이 나온다'는 말이 있더니
바로 남한이 그 지경이었다. 젓가락 쥐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 일
찍부터 피자의 간사한 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밥상 앞에서 "싫어, 안먹어, 싫
어!"를 당돌하게 한다. 그 결과 남한의 아이들은 키는 쑥 늘었지만 체력은 모두
약골이다. 체력뿐만 아니라 의지력도 약골이다. 북한 식으로 '맥가리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 표현이 딱 맞다. 아이들에겐 한국음식을 먹여야 한다. 드래야 한
국 사람이 된다. 작은 고추라도 매운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작은
손에 귀여운 만화 그림이 그려진 급식쟁반을 쥐어줬다. 아이들은 한 줄로 줄을
서서 밥과 반찬, 국을 받아간다. 밥과 국을 퍼주는 사람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여기서도 장난을 친다. 친한 친구가 쟁반을 내밀면 맛있는 반찬을 한움큼 집어
준다. 미운 친구가 쟁반을 매밀면 반찬은 안주고 밥만 산만큼 올려준다. 밥만 받
은 아이는 곧 "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왜 그래? 왜 우니?" "잉. 쟤가 밥
만 이렇게 많이 줬어요! 잉" 선생님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진다. "그럴 땐 그
렇게 우는 게 아니에요. '밥이 너무 많아요. 좀 덜어주세요'라고 말해야지. 어서
해봐." "밥이 너무 많아요. 좀 덜어주세요" 밥주걱을 쥔 아이가 얼른 쟁반에서
밥을 덜어 다시 솥에 넣는다. "자, 됐지? 이제 '반찬도 주세요' 라고 말해야지."
"반찬도 주세요. 감자볶음 많이 주세요." 아이의 요구대로 많은 양의 감자볶음과
그밖의 반찬들이 쟁반 위에 올려진다.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치원 주방을 들
락거렸다. 유치원 내에 영양사 1명과 조리사 1명을 두고 있었지만, 자꾸만 부엌
일에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는 내가 직접 만든 것을 억이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아니, 이사장님. 왜 부엌에
들어와요. 여긴 저희들이 할게요." "오늘요, 제가 미역국을 끓여 보겠습네다. 저
한테 한번 맡겨 보시라우." 처음엔 한사코 말리던 두 분도 결국 내 고집에 양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나게 미역을 씻고, 삶고, 쇠고기를 썰어 펄펄 끓는 국
물에 넣고, 그렇게 신나게 요리를 했다. 아이들에게 먹일 때는 국물을 반쯤 식혀
서 주었다. 그래도 뜨거운지 미역국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모습. 가슴 가득 뿌듯
한 마음이 퍼진다. 그 기운이 온몸을 감싸면서 내가 참 행복한 인간이라 깨닫는
다. 아이들이 떠먹은 미역국은 몸안으로 흡수되어 피로 운반되고 곧 뼈와 장기
에 골고루 스며들 것이다. 95년 여름부터 1996년 겨울까지, 나는 그렇게 아이들
과 함께 살았다. 그 아이들은 내가 그들의 뼈와 살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밤무대 위의 눈물
유치원은 잘 됐다. 원아들이 늘어나면서 시설도 더욱 좋아졌고 점차 일산지역
의 최고 유치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내겐 힘든 일이 많았다. 보람만으
로 버티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먹고 살 걱정에 앞이 막막했다. 방송일에 몰두
하려고 노력했지만 매니저 월급주기도 빠듯한 게 방송출연료가 아니던가. 급기
야 나는 밤무대에 나갈 결심을 했다. 유치원 이사장이 밤무대에 선다니 부끄러
운 생각이 앞서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서 빨리 사기 당한 만큼의 돈을
다시 벌어야 했다. 2년 동안 모은 돈을 잃어 버렸으니 앞으로 2년 동안 4년치의
돈을 모아야 그동안의 세월을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밤무대면 또 어떠
랴. 김 형사, 홍 형사님이 "서울에 왔으니 지랄 말고는 다 해보라"고 하지 않았
던가. 나는 수원에서 일식집을 하고 있는 친구 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넓
은 유 사장이라면 내게 꼭 맞는 나이트 클럽을 물색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전화번호는 돌렸지만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밤무대에 나갈 생각이라고
힘겹게 운을 떼자 유 사장은 나를 극구 말렸다. "김용씨, 거기 무척 험한 곳이야.
자네처럼 순진한 촌놈은 견디기 힘들어." "해보지 뭐. 안되면 금방 손 털게. 지금
은 뭐든 해야 한다구." 결국 유사장은 나를 자신의 승용차에 태우고 이곳 저곳의
밤무대 알선업체에 데리고 다녔다. 그때 나는 밤무대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으로 알았다. 밤무대에 가수를 공급하는 에이전시들이 수두룩히 많아서 가
수들은 그 에이전시들과 전속계약을 맺도록 돼 있었다. 일단 전속계약이 맺어지
면 가수들은 에이전시가 요구하는대로 이 나이트 클럽, 저 나이트 클럽을 오락
가락하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한 에이전시가 내게 전속료로 3천만원을 주겠다
고 했다. 그 정도면 괜찮지 하고 승낙하려는데 유 사장이 5천만원이야 한다며
버텼다. 나는 그렇게 뻣뻣하게 나가다가 계약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3천만원으
로 하자며 유 사장의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유 사장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
와 버렸다. "아니, 돈 벌어야 한다며!" "유사장. 어떤 에이전시가 나 한테 5천만
원을 주겠냐. 생각좀 해 보고 덤벼야지." "그렇게 싸구려로 굴리면 안돼. 이것도
다 자존심이야. 너 스스로를 비싸게 생각해야 돼!" 갑자기 유 사장이 낯설게 느
껴졌다. 싸구려라니, 비싸다니, 그런 언어로 사람을 묘사한다는 것이 잔혹하게
느껴졌다. 분명 저 사람이 내 친구라서, 날 위해서 저토록 흥분하며 화를 내고
있을 터인데.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유 사장의 우정과 그 우정을 이해하지 못하
는 내 빌어먹을 근본 사이에서 한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유 사장은 밀고 당기기
를 계쏙하여 4천만원이란 계약금을 끌어냈다. 그리곤 나를 어느 옷가게로 데리
고 가 무대의상을 사주었다. TV에서 노래 부를 때는 보통 양복이면 족했는데,
유 사장은 밤무대 복장은 다르다며 반짝이가 잔뜩 붙은 옷을 입으라고 했다.
"꼭,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 기야?" "내 말대로 해라. 제발." 나는 유 사장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하라는 대로 화장도 하고 머리에 무스도 발랐다. 너무 창백해
보이니 립스킥 좀 바르라고 하기에 갈색 입술연지까지 칠했다. 그렇게 차려입고
우리가 간 곳은 어느 나이트 클럽. 싸모님들과 제비들이 쌍을 이룬 채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나는 거울을 보았다.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무스
를 바른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나는 혼잣말을 하며 나를 위로했다. "잠깐만
내가 아닌 다른 가면을 꺼내 써보는 거야. 괜찮아. 잠깐이면 끝날 거야." 힘호흡
을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다. 그날 내가 부른 노래가 무엇이었던가.
잊어버린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만약 잊지 않았다면 오래도록 그날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잊고 싶은 것들을 잊고 산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가사를 다 부르고 후렴구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텅비면서 가사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 몇 초 동안 나는 잠깐 정신을 잃어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한 박자를 놓친 상태였다. 게다가 가사도 생각나지 않았다.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는 게 엉뚜하게 앞자리에 있는 관객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대고
말았다.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올라 있는 나이트 클럽
지배인과 마주했다. 그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당신이 가수야? 가
수가 가사를 까먹어! 그의 주먹이 내 눈앞에서 흔들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긴커
녕 고개 숙인 채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내 모습. 말하지 않는 내 모습은 오히려
더 오만해 보였다. 유 사장과 나는 포장마차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 3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유 사장은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나, 난."
"아니, 정말이디. 무대에 서본 게 처음도 아닌데 와 이리 떨리냐.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더라." "됐어! 잊어 버리자. 내가 말했지? 넌 밤무대는 아니야. 생긴 대로
살아야지." "그, 그래." 결국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어떤 나이트 클럽도 나를
원하지 않았고 에이전시는 계약을 파기했다. 유 사장이 사준 반짝이 양복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자식, 안되면 툴툴 털고 일어난다 그랬었지? 그렇게 하면돼."
"그래." 소주 두 병을 다 비운 후, 우리는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빗속에 서 있는 남자
비오는 아침이다. 벌써 물 웅덩이가 군데군데 패일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유
치원 운동장도 흥건히 젖어 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이제 초조함을 지나 절망
적인 심정이다. 9시면 도착해야 할 아이들을 실은 3호차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뱃불은 이미 꺼지
고 비에 젖어 눅눅해지고 있는데도 나느 여전히 담배를 물고 있다. 1분이 멀다
하고 초조하게 시계로만 눈이 간다. "아직 연락 없었어요?" 우산을 갖고 뛰어 나
오는 김 원장에게 묻는다. " 아이오. 호출해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들어오는 중
인가봐요.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요. 이러다가 감기 걸리겠어요." "괜찮아요. 버
스 들어올 때까지 여기 있을랍니다. 김 원장님은 들어가세요." 내가 이렇게 고집
을 부리면 김 원장은 마치 말 안듣는 남동생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본다. "이사장
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비 올 때마다 이러시면 어떡해요? 항상 아무 일 없었잖
아요. 길이 미끄러워서 좀 늦는 것 거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비 올ㄸ마다
이렇게 늦으면 어떡합네까? 그 버스가 얼마나 중요한 버슨데. 혹시 무슨 사고라
도 났다면." "그런 생각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이사장님 좀 여유를 가
지세요.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김 원장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몇
차례 쓰러질 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때마다 눈을 감고 벽에 한참을 기대
서 심호흡을 하면 진정이 됐다. "자기 몸도 돌봐가면서 일하셔야죠. 그렇게 신경
쓰다간 병나요." 김 원장의 말에 원생 요한이 생각이 울컥 치민다. 좀처럼 내 귓
전을 떠나지 않는 요한이의 웃음소리. 병아리처럼 귀여웠던 요한이의 얼굴. 유독
내 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녔던 요한이. 그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
니, 더 이상 볼 수 없다. 요한이는, 요한이는,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갔기 ㄸ문
이다. 그날 요한이는 엄마와 함께 백화점 쇼핑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양손에 무
거운 쇼핑 백을 들고 있던 엄마는 요한이가 등 뒤로 잘 따라와 주기만을 바랐
다. 버스 운전사는 미처 요한이의 작은 머리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요한이
의 핏자국을 만지며 대성통곡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단 말인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꾸 불길한 예
감이 들고 초조해지는 것이다. 밥맛도 잃어가고 아이들에게 곧잘 대꾸하던 유머
감각도 사라졌다. 아이들이 그네에 매달려 뛰노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았다. "저기, 버스가 오네요. 제말이 맞잖아요." 노란 색으로 예쁘게
색칠한 문화유치원의 미니버스 3호차가 교문 안으로 들어온다. 버스 속의 아이
들은 기운차게 재잘거리고 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또, 저 아이들이 ,
저 아이들이. 나는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채 지켜보지 못하고 원장
실로 들어왔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원장실의 소파 위
에 널브러져 누웠다. 눈을 감으니 눈물이 주룩 흐르면서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
다. 요한이 얼굴, 조카 훈이 얼굴, 형님 얼굴, 어머니 얼굴. "김용 이사장님. 유치
원 일이 이사장님께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잠시동안 제게 맡기고 쉬시는 게 어
떨까요?" 언제 들어왔는지 김 원장이 근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
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쉬다니요?" "휴가를 드릴께요. 너무나 몸과
마음이 허약해졌어요. 한달 동안 다른 생각 마시고 잘 먹고, 잘자고, 푹 쉬세요.
아이들한테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김원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떻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 스스로도 실망스럽다. 결국 나는 김 원장의 말을 받아들였다. 한
달 동안 유치원 아이들 생각이 간절했지만 되도록 전화도 걸지 않으려고 노력했
다. 보약도 한첩 먹었다.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이렇게 되뇌면서. 한달
후, 나는 유치원에 가서 사직 의사를 밝혔다. 김 원장도 예상하고 있었던지 순순
히 받아들였다. 월급도 받지 않았으니 계산할 퇴직금도 없었다. 정리해야 할 것
은 내 마음뿐이었다. 1년6개월 동안 정들었던 이 유치원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
두고 살 수 있을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김 원장이 나를 불안한 듯 쳐다
보며 물었다. "그래, 앞으론 뭐 하실 건가요?"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냉면집
을 차려볼 작정입네다."

3부. 냉면을 꿈꾸는 남자
꼬마 요리사
'국수(냉면) 맛의 비밀은 육수에 있다. 육수를 어떻게 끓이느냐에 따라 국수
맛이 달아진다.' 냉면, 북한에서는 국수라고 일컫는 이 음식을 어렸을 때부터 나
는 유난히도 좋아했다. "국수의 맛은 육수에 따라 좌우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그때 나는 주방장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이 뜨거운 육수를 언제까지 끓여야 하는가, 이 말
랑말랑해진 쇠고기를 언제쯤이면 뜯어먹을 수 있는가였다. 주방장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다. 주무시는 것 같다. 나는 서서히 꾀가 나기 시작했다. 팔도 아프
고, 잠깐 앉아 있으면 안될까. 국자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빠진다. 순간 졸고
있는 줄만 알았던 할아버지가 금세 뒤통수에 알밤을 때린다. "이놈! 육수 끓는
것 보라니까 뭔 딴 짓이야!" "아야! 잘못했시오!" 할아버지에겐 어떤 꾀도 통하
지 않는다. 눈을 감고 계신 것 같지만 볼 건 다 본다. 바짝 마르고 머리도 호호
백발인 이 할아버지의 어디에서 이런 거친 힘이 나오는 것일까. "육수 끓일 때는
딴 생각하면 안돼. 육수만 생각해. 보약을 달이는 것과 똑같은 거야. 그래야 진
짜 육수 맛이 나와." 치. 어차피 국수는 다 맛있는 것. 우리 오마니가 끓여주는
국수도 얼마나 맛있는데! 형들도 아무렇게나 끓여줘도 다 잘 먹는다, 뭐. 할아버
지는 괜히 나만 힘들게 해. 정말, 다른 건 몰라도 국수만큼은 내가 대장이다. 체
육단에 들어오기 전에도 보통 국숫집에 가면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도 성에
차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형님, 누나 할 것 없이, 우리 집 사람들 모두 국수
귀신들이다. 어릴 적 딱 한 번, 온 식구가 국수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할머
니, 아바지, 오마니, 형, 누나,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나간 것이다. 나는 너무 신
이 나서 발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함께 가니 더욱 뿌듯했다. 국숫집에
서 풍기는 식초와 겨자, 고깃국물의 구수한 냄새, 형과 나는 뱃속에서부터 안달
이 났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 냉면인가. 힐끗 보니 식권 판매대에 늘어진 줄이
너무 길다. 아유! 저거 다 기다리려면 국수 다 팔리겠다. 어떡하디? 나는 조그만
머리를 재빨리 굴려보았다. 껴들기(새치기)를 해야겠는데. 아! 저 아주머니 신세
를 좀 져야겠구만.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아줌마 옆에 섰다. 그리곤 순진한 아이
처럼 몸을 흔들흔들하며 딴청을 부리다가 아줌마 뒷자리에 끼여드는데 성공! 아
마 뒷사람들은 나를 그 아줌마의 아들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식권을
사는 동안 형님은 식사 자리를 잡아두었다. 오마니와 아바지, 할머니, 누나는 그
때서야 국숫집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먹을 준비 다 됐냐?" "옛!" 우리들의 씩
씩한 목소리와 함께 국수 먹기가 시작된다. 후르륵 쩝쩝. 오마니가 천천히 먹으
라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빨리 먹고 한 그릇 더 먹어야디. 형님보다 많
이 먹어야디. 아니, 형님 냉면에는 웬 소고기가 저리도 많아? 후르륵, 짭짭. 저
집 누나는 아까운 국물을 왜 다 남기는 거야? 그거 내가 다 먹어 버렸으면 좋겠
다. 쩝쩝.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던 국수도 생각난다. 국수 만드는 날, 우리 집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뒷마당의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 목을 비틀었다. 닭의 털을 벗기고 물에 담가 반나절을 푹 삶는다. 향긋한
닭냄새가 코를 찌를 때면 어머니는 육수통을 어린 나에게 들려주며 강가에 나가
식혀 오라고 하신다. "이눔 새끼! 먹을 생각하디 말고 날래 식혀 와라!" 찬 샘물
에 육수통을 담가놓고 나는 애써 물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옆에선 계속 고
기국물 냄새가 코를 간질이는데. 그냥 후르룩 마셔 버릴까? 그랬다간 오마니한
테 된통 맞을 테고. 육수를 식히는 일은 내겐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식
힌 육수를 낑낑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형님은 분틀 위에 올라서 국숫발을 뽑고
있다. "형님! 내레 같이 해보자!" 형님 하는 짓이 너무 재미 있어 보여서 나도
분틀 위에 올라가고 싶다. 두 팔을 분틀 위로 올리는 내게 형님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놔두고 가서 누나를 도와라." 누나는 뒷마당에 묻힌 독에서 동치미 국
물을 잔뜩 퍼왔다. 세상에! 그 맛있는 닭국물에 동치미를 섞을 모양이다. "엄마!
동치미 섞기 전에, 고기국물 딱 한 고푸(컵)만 먹어보자. 응? 딱 한 고푸만!"
"야! 저리 가!" "엄마! 딱 한 고푸만! 고기국물 좀 마셔보자. 내 소원이다!" "이눔
새끼! 엿다!" 어머니가 공기그릇에 고기국물 한 국자를 떠주신다. 나는 형님과
누나가 볼세라 국물을 얼른 마셔 버렸다. 야! 맛있다. 황홀하다! 바로 이 맛이다!
조금만 더 먹었으면. 짭짭짭. "이눔 새끼! 뭘 그렇게 히죽거려! 육수 다 끓인 것
야?" "앗! 할아버지!" "이 녀석이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날래 이리 와서 무
썰라우!" 고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야채를 썰어 놓아야
할 시간이다. 알통 만한 크기의 무, 파, 배, 사과 등이 도마 위에 수북이 놓여 있
다. 나는 무부터 손에 잡았다. "자, 저번에 할아버지가 가르쳐 줬디? 어디 한 번
잘 썰어 보라우!" 나는 칼자루를 잡았다. 무는 먼저 원통형 그대로 얇게 자른 다
음에 다시 또 얇게 채를 썰어야 한다. 채를 썰 때는 칼잡은 손목에 힘을 주면
팔이 금세 아파온다. "손목에 너무 힘주디 마라. 야채를 썰 때는 칼을 들어올릴
때만 힘을 주고, 내려올 때는 칼 무게로 그냥 내려오는 거야. 너 오마니가 다듬
질하는 것 봤디? 그거랑 똑같은 거야."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기억해 내며 칼질
을 시작했다. 착착착착. "옳디! 고 녀석! 잘하는구만! 그렇디! 그렇게 하는 거디!"
할아버지 얼굴이 잔뜩 주름을 만들며 웃는다. 야! 할아버지가 웃었다! 나는 웃는
얼굴의 주방장 할아버지를 보며 장난이 하고 싶어진다. 오늘은 무슨 얘기로 할
아버지를 웃길까? "할아버지, 할아버지! 덫에 잡힌 토끼 얘기 알아요?" "무슨 토
끼?" "배고픈 토끼 한 마리가 덫에 잡혔거든요. 지나가던 배 고픈 사람 하고 배
부른 사람중에 누가 토낄 잡아먹을까요?" "이눔 새끼! 그야 배 고픈 사람이 잡
아먹지!" "아니래요! 배 고픈 사람은 토끼가 불쌍해서 그냥 놔준데요. 오히려 배
부른 사람이 잡아 먹는데요." "이눔 새끼! 싱겁다! 그만 쩔쩔대고 어여 야채나
썰라우!" "히히히!" 잠시 동안, 나는 할아버지가 파 써는 소리에 넋이 빠진다. 참
희한하다. 할아버지가 파를 썰 때는 칼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칼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손놀림이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다. "봤디? 너 속도빙
상 할 때도 일케 해야 한다. 니 다리가 얼음을 차는 게 아니라, 얼음이 니 다리
를 쭉 미끄러뜨리는 거야. 요리하는 건 운동이랑 똑같다. 알겠디?" 육수는 얼음
에 넣어 차게 식히고, 얇게 저민 사과와 배를 띄우고, 먼저 준비해 둔 쫄깃쫄깃
한 메밀 국수를 담아낸다. 오늘의 저녁이 준비됐다. 야! 형님들 신나겠다. 일케
맛있는 국수 처음일 테지! 나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건 주방장 할아버지하고
나하고 같이 만든 거야!" "용아, 내일 또 이 할아부지랑 같이 저녁 만들래?" "할
아버지, 그래도 되겠시오?" "그래, 내일 강도훈련 끝나면 주방으로 와라." "내일
은 뭐 만들 건데요?" "용이 너레 뭐 먹고 싶냐?" "음, 만두! 내레 만두가 먹고
싶어요!" "만두! 거 좋지. 옳구나! 내일은 만두 쪄주마. 누나들 많이 데려와라. 만
드눈 여러 사람이 같이 빚어야 제 맛이지." "알았시오. 내일 올게요." 주방장 할
아버지와 나는 둘만이 아는 은밀한 미소를 주고 받았다. "용아, 고기 좀 건져 먹
고 가라. 천천히 많이 먹어라." "이게 용이 니가 만든 국수가?" "응." 형들의 후
르르 쩝쩝 소리가 내겐 음악처럼 들린다. 나는 벌써 두 그릇을 먹었다. 주방에서
집어먹은 것도 있어서 배가 너무 부르다. 형들은 세 그릇, 네 그릇 잘도 먹는다.
"내일은 할아버지랑 만두 찌기로 했다." "만두?" "그렇다. 누나들 데리고 가기로
했다." "잉. 누나? 여자들!" 형들 표정이 이상하게 이그러졌다. 다들 왜 그러지?
"아유. 더럽게 여자들이 만든 만두를 어케 먹어!" "내일 저녁은 벌써 다 먹었네.
용아, 너두 니가 만든 만두만 먹어라. 알간?" "야, 오늘 경숙이 봤어? 어기적 어
기적 하는 게 틀림없이 월경하는 거 맞디?" "경숙이뿐이가! 민숙이도 오늘 아예
훈련에 나오디도 않았어." 형들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풍이 형님
이 말해분 바에 의하면 여자들은 한달에 한번씩 월경을 하는데 그게 아주 불결
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행동도 아주 굼떠져서 훈련을 받느니 차라리 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 후로 지켜보니 정말로 누나들은 한달에 한번씩 이상해 지는
것 같았다. 언제나 나를 예뻐만 하던 누나들이 어떤 날은 뽀로통한 표정을 짓고
내가 다가가도 말도 하기 싫은 얼굴이다. 형들은 "야, 저럴 땐 건들리지 마. 용이
니만 화 입는다"라고 속닥거렸다. 그런 날이면 누나들은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주방에서 할아버지를 도왔다. 형들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면서 "오늘 저녁
다 먹었다!", "차라리 굶는 게 낫디!"라며 푸념을 한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형
들이 밥을 굶는 것을 본적이 없다. 더럽다, 더럽다 하면서도 잘만 먹었다. 누나
들도 주방에 자주 들락거렸지만. 주방장 할아버지의 조수는 바로 나였다. 나는
자강도 체육단에서 가장 나이 어린 선수였기 때문에 올림픽을 목표로 죽어라 훈
련하는 형들보다는 비교적 시간이 많았다. 50명에 이르는 그 많은 선수들을 할
아버지는 혼자 요리해 먹이기는 역부족이었다. 할아버지가 "용아, 이리 와라"하
면 감독님 역시 "날래 가서 도와드려야"하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내 나이
열두 살에 북한 최고 요리사의 수제자로 일했던 것이다.

냉면 장사꾼이 되다.
나는 바로 그 국수(냉면)가 먹고 싶었다. 남한에 와서 내노라 하는 냉면 집에
많이 가봤고 모두들 제각기 맛있는 냉면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주방장 할아
버지가 만들어 줬던 그런 냉면을 파는 집은 없었다. 향수병이 심해질수록, 어머
니가 그리워질수록, 그 냉면 맛은 진한 추억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세상에 먹고
싶은 냉면이 딱 하나 있는데 지금 그 냉면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슬프고
막막했다. 동료 귀순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시원한 평양냉면은
어딜 가야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옥류관에
서 먹던 냉면 맛은 여기 없어. 평양냉면 먹고 싶으면 통일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냉면 맛은 하나가 아니야. 지방마다 다 틀리잖아. 평양냉면은 평
양에만 있으니 그냥 서울 냉면 맛에 길들이라우." 나는 억울했다. 분명히 그 냉
면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것 같은데." 영빈 엄마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또
요한이의 죽음 때문에 유치원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 큰집에 덩그러니 누워
답답한 가슴을 쓸면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냉면이었다. 냉면이 미치도
록 먹고 싶었다. 고향 냉면만 먹으면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렸다. 어이, 용이, 국수(냉면) 좀 끓여봐. 배고프다. 소련에서 연화
무역회사를 이끌 때였다. 밤만 되면 출출해 지는 동료들에게 냉면을 끓여주곤
했었다. 동료 중 한 명이 슈퍼마켓에서 면을 사오는 동안 나는 국물을 만들었다.
고기국물은 아니었지만 소금을 살짝 녹인 물에 오이를 썰어 넣고, 식초와 겨자
를 푼 후 사과와 배와 얼음을 동동 띄우면 꽤 괜찮은 국물이 됐다. 동료들은 "용
이 지도원, 아예 국수 장사로 나서지 그래!" 하며 놀려대곤 했다. 국수 장사! 아
니 냉면 장사!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먹고 싶은 평양냉면을 내가 만들어서 파
는 거야! 멋진 생각을 해낸 것 같았다. 냉면이라! 다른 냉면이 아닌 내 고향에서
내가 먹었던 냉면이다.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귀순자 2백여면은 물론, 2만 5천
실향민들이 꿈에도 그리워하는 바로 그냉면이다! 그것은 흔히 보이는 보통 냉면
집이 아니다. 내가 만들 냉면 집은 '고향' 이다. 귀순자들과 실향민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고향을 만들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냉면 집의 풍경
이 아스라히 그려졌다. 문 밖으로 풍기는 향긋한 육수 냄새. 백발이 성성한 실향
민 어르신들이 냉면을 먹는다. 서로 고향 얘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고기는 연하고 냉면은 쫄깃하며 곁들여 나온 동치미 국물은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다. 수더분한 식탁에 편안한 의자면 족하겠다. 호사로운 고급 냉면집이 아니라
언제든 들러서 냉면 한 그릇 먹으며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
문제는 돈이었다. 사기를 당하고 밤무대에까지 서려 했던 내가 아닌던가. 그런
나에게 돈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평소에 있는 티를 내면서 내게 잘난 척하
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혹시 도와주실지도 몰라"하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드렇게 자만하던 그 사람들의 입에서 한결같이 우는 소리가 나왔다.
"미안해, 용이. 지금은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해", 혹은 "어쩌지, 지금 금방 동생한
테 돈을 꿔줬는데". 혹은 "지금 가진돈이 50만원밖에 없는데"하는 째째한 소리도
들었다. 온통 빈말 투성이였다. 어려울 때는 꼭 전화를 걸라며 무슨 귀중한 물건
이라도 되는 듯 명함을 내밀던 모 회사 사장님, 나이트 클럽에서 하룻밤에 술값
으로 5백만원을 쓰던 모 회사 중역, 모두들 갑자기 구실이 많아진다. 하긴, 말
많은 집 된장이 쓰다고 말 많은 사람 치고 신용 잘 지키는 사람 없다더니. 내
주위의 친구들과 귀순자 선후배들이 큰 힘이 되었다. 그 들은 없으면서 있는 척
하지 않았으며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그
들의 격려와 우정뿐이었지만 일확천금을 가졌다고 나만큼 부자일 수 있겠는가.
나는 은행을 박차고 들어갔다. "내 이름은 김용이고 담보도 없다. 친구가 보증을
서주겠지만 그 친구도 부자는 아니다. 이런 나에게 대출을 해줄 수 있겠는가. 내
가 담보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내 이름 두자밖에 없다."
96년 12월, 드디어 나는 냉면 집의 사장이 되었다. 간판에는 '모란각'이란 이름을
붙였다. 모란각은 평양 모란봉 위에 있는 유명한 냉면집 이름이다. 원래 평양에
서 가장 유명한 냉면집은 모란봉 위의 '옥류관'으로 이곳은 지난 89년 북한 방문
단이 직접 냉면을 먹었던 곳이기도 하다. 음식 맛 좋고, 접대원 아가씨들이 예쁘
기로 소문난 옥류관은 식권을 사려면 1~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90년부
터는 외국 관광객들까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하루에 팔리는 냉면이 무려 8천
그릇이라고 하니, 양이 적어 두 그릇을 먹는 손님이 있다고 친다면 하루에도 족
히 5천명 이상이 옥류관을 찾아오는 것이다. 이 많은 손님이 냉면 한 그릇을 먹
으려고 몰려들다 보니 무질서와 혼잡이 문제가 됐다. 결국 옥류관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모란각'이란 냉면 집을 차려서 몰려드는 손님들을 받아야 했다. 나
는 옥류관에는 많이도 들락거렸다. 지방에서의 강도훈련이 끝나거나 해외 전지
훈련이 끝나면 반드시 모란봉에 올라가 시원한 냉면을 몇 그릇씩 먹었다. 냉면
먹는 재미도 중요했지만 형들이 진짜 관심 있는 것은 옥류관의 아름다운 접대원
아가씨들이었다. 실제로 형들 중 몇몇은 이 아가씨들과 사귀기도 했다. 나는 그
때도 열다섯, 열여섯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형들과 접대원 누나들의 틈에서
쪽지 심부름을 참 많이도 했었다. 지금도 형들의 쪽지를 전하면 살짝 얼굴을 붉
히던 옥류관 누님들의 모습이 선하다. 평양도 역시 변해가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북한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 냉면 집의 이름을 '모란각'으로 결정했다.
모란각의 위치는 경기도 일산 신도시 호수공원 근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항
동. 마을버스만이 달랑 한 대가 다닐 뿐, 자동차도 드물고 수십년간 범죄 한 건
없었다는 조용한 마을이다. 사람들은 내게 서울 시내 한복판에 가게를 차려야
잘 된다며 그렇게 외진 곳에 냉면집을 낸 나를 불안해했다. 물론이다. 장사를 하
려면 서울 시내 한복한에 그럴싸하게 터를 잡아야 한다. 아무리 북한에서 온 촌
놈이지만 내가 그걸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겐 서울 시내에 가게를 마련할 만한
돈이 없었다. 나는 은행을 찾아가 내 이름 두자(보통 사람은 석자지만)를 저당
잡히고 1억원이란 돈을 빌렸다. 내 생애 최고의 엄청난 돈이었다. 하지만 장사꾼
이 사업을 시작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아쉽지만 서울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의 모란각이 제비마을이
아닌 서울의 명동이나 압구정동에 있었다면? 과연 실향민 어르신들이 좋아하셨
을까? 그분들이 시끌벅적한 행버거 가게와 화려한 옷가게들을 뚫고 냉면 한 그
릇을 잡수시려고 모란각을 찾아주셨을까? 모란각은 그냥 스쳐 지나가다 들러보
는 냉면가게가 아니다. 이곳에 오는 분들은 모두 사연이 있고 뜻이 있는 분들이
다. 그래서 길을 물어 물어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이다. 종로나 압구정동이 아닌
것은 차라리 기쁨이었다. 모두들 어려운 발걸음으로 모란각을 찾아오시고, 그래
서 그분들은 나의 부모이자 누이요, 형이며 친구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에
게 고향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은 냉면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고향을 잃은 채 수
십년 세월이 흘러 머리는 그렇게 하얘졌지만, 내가 만든 냉면 한 그릇으로 잠시
나마 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고향 맛을 담아낸 냉면 만들기. 바로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이맛이야!
모란각 주방은 완전히 실험실이었다. 나는 찜통크기의 솥 세 개에 각기 다른
육수를 끓이고 있었다. 첫번째 솥에는 60%의 쇠고기와 20%의 돼지고기, 또
20%의 닭고기와 10%의 꿩고기가 끓고 있다. 두 번째 솥은 이와 좀 달라서 각각
의 비율이 50:30:15:5다. 세번째 솥은 아예 파격적으로 닭고기와 돼지고기의 비율
을 높여서 30:30:20:20으로 끓고 있다. 어떤 육수가 가장 맛있을까? 어떤 육수가
고향 맛에 가장 가까울까? 벌써 일주일째 이 힘겨운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고
기가 어떤 비율로 들어가느냐만이 실험과정의 다가 아니다. 어떤 부위의 고기를
넣는가. 고기를 어떻게 잘라서 넣었는가. 뼈는 통째로 넣을 것인가 아니면 토막
을 쳐서 넣을 것인가. 쇠고기를 먼저 넣을 것인가 아니면 토막을 쳐서 넣을 것
인가. 쇠고기를 먼저 넣을 것인가 닭고기를 먼저 넣을 것인가. 도대체 고기를 얼
마나 오랫동안 끓여야 하는가. 온 동네 강아지가 나를 따라다닐 정도로 몸에 고
기 냄새가 깊숙히 배었다. 끓는 육수 물에 절여진 하얀 셔츠는 노랗게 변해 아
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하루종일
고기 냄새를 맡고 있으면 밥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가끔씩 바싹
여윈 음식점 주인들은 볼 때면 도대체 밥집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랐을까
궁금했는데 바로 내가 그 꼴이었다. 육수 실험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3kg이
빠졌다. 배는 고픈데 고기 냄새 때문에 더 이상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 없다. 무
엇이든지 뚝딱 잘 먹는 그때는 정말 '살기 위해서' 억지를 먹었다. 그렇게 공을
들였건만, 내 기억 속의 그 육수 맛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주방장 할아버지가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때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
았던 것일까. "할아버지, 꿩고기는 왜 이렇게 뼈를 분질렀시오?" "고 녀석! 꿩고
기는 뼈 안쪽에서 단물이 나온다니까. 이렇게 분질러 주지 않으면 끓여봤자 헛
수고라구." "쇠고기 뼈는 그냥 그대론디요?" "예끼! 소뼈는 생긴 모습 그대로 삶
아줘야 탁한 맛이 없어. 괜히 분질렀다간 국물 맛만 느끼해!" "그런 기 어딧시
오? 다 똑같은 뼈다귄데. 할아버지! 이 소뼈다귀 하나만 누렁이 갖다 줍세다. 누
렁이가 배고픈가 봐요. 계속 멍멍 짖어요." "이눔 새끼! 개새끼가 멍멍 짖지 그럼
야옹거리냐! 쩔쩔대지 말고 날래 기름이나 건져 내라우!" "할아버지, 내가 육수
물에 삶길 뻔하다가 살아난 소 얘기 해줄까요?" "이 녀석! 요 개구쟁이! 날래 기
름 건져내라니까 왜 이렇게 쩔쩔대! 육수 물에 콱 처넣을까 부다!" "주방장 할아
버지가 육수에 집어널려고 잡아논 소를 누가 풀어줬대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이 녀석이! 그래, 그게 누구냐?" "용이래요. 착한 용이요. 착한 용이가 무서운
주방장 할아버지한테서 불쌍한 소를 구해냈대요!" "요놈!" "히히히!" 착한 용이는
지금 불쌍한 소를 육수에 넣고 끓이면서 주방장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북한 국가대표 체육단 소속 최고의 요리사. 평생을 가족과 떨어져 선수들과 함
께 했던 분. 이렇게 육수를 끓이며 생각해 보니 그분이 내게 가르쳐 주셨던 것
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내게 인생을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다. 교만한 자가 스포츠에서 승리할 수 없듯이 겸허한 자만이 좋은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육수는 할아버지의 인품이었다. 애초부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감히 할아버지와 똑같은 육수를 끓일 수 있단 말인가. 어
떤게 그런 당돌한 생각을 품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역시 나의 교만이었던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비율 따위
가 아니다. 음식의 맛과 계량컵과 저울질의 정확성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했던 나
의 단순함을 탓하자. 고향에 있는 우리 어머니들에겐 저울 따위는 필요가 없었
다. 나는 그날 밤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그리고 보글보글 끓어 오르는 육수를 바
라보며 고향과 주방장 할아버지와,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때요? 맛이."
평소 친분이 있던 이북5도회의 어르신께서 내가 밤새 끓인 육수를 직접 맛봐주
시겠다고 하셨다. "어떻습네까?" "음, 그러니까." "그대로 말씀해 주세요. 아니에
요?" "용이!" "예?" "고맙네." "예??" "이 냉면이 말이야, 이 냉면이 내가 월남하
기 전인 서른 살 때 먹어보고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어르신?" "내 살아생전
다시 그 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 했는데. 용이, 자네 덕에 이렇게 먹어보는 구만."
"어르신." "정말 고맙네. 고마워."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주책없이 어른 앞에서
눈물이 흐른다.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과 안도가 먼저여야 할 텐데, 이토록 슬프
고 서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내가, 이 백발의 어르신이, 수만의 실향민들이
냉면 한 그릇 앞에서 이토록 슬퍼야 하는가. 그래서일까. 육수 한 방울이 내겐
피 한 방울이다. 한 방울이라도 쏟으면 피를 흘린 것처럼 몸이 아니다. 후에 이
육수를 인천과 여의도의 분점으로 공수할 때, 바쁜 마음에 용달차에 육수를 실
어 보낸 지배인님은 내게 한참 동안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두 시간 찻길
에 시달린 육수들은 이리 출렁 저리 출렁 쏟기고 엎질러지고, 분점에 도착했을
때는 양이 반으로 줄어 있었다. 어떻게 끓인 육수인데 그렇게 함부로 짐짝 취급
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때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한편으론 슬펐다. 그건
나의 피와 같은 것인데. 나의 하루는 육수에서 시작되고 육수에서 끝이난다. 모
란갓의 탄생과 더불어 나의 시간은, 나의 세계는, 나의 현재와 미래는 육수가 되
었다. 온몸에 고기 냄새가 배면 좀 어떤가. 운동화에 육수 물이 꼬질꼬질 배면
좀 어떤가. 온 동네 강아지가 내 바지 가랑이에 달라 붙으면 좀 어떤가. 오히려
내겐 내 모습이 예뻐 보인다. 내 평생 처음으로 김용은 사람답게 살고 있을 것
같다.

이것이 진짜 '평양냉면'
모란각 냉면이 왜 그렇게 맛있냐,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하
지만 그 비결은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 며느리도 모른다. 언
젠가는 내 후계자에게 내가 개발한 냉면 육수의 비밀을 텅어놓을 날이 오리라.
아마도 통일이 가까워 올 즈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때가 오면 나는 후계자에
게 모란각을 맡기고 어머니가 있는 강계로 뛰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모란각의 냉면 육수가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냉면은 냉면 집마다
맛이 틀리다. 만드는 사람 나름대로 맛을 내는 비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
고 그 맛에 대한 자존심도 무척 강해서 함부로 내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간 큰
코 다친다. 내가 교과서를 삼은 냉면 맛은 어릴 적 주방장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던, 그리고 옥류관에서 지금도 하루 8천 그릇이나 팔려 나가고 있는 바로
그 평양냉면이었다. 얼마 전 평양을 다녀왔다는 일본 교포 한 분이 모란각을 찾
아왔다. 내가 만든 냉면을 먹어보더니 그분이 하는 말은 걸작이었다. "옥류관 냉
면 맛이 시원치 않다 생각했더니, 그 맛이 여기 와 있구먼!" 아무래도 북한의 좋
지 못한 식량사정 때문에 냉면에 들어가는 고기의 양도 줄이고 채소의 양도 줄
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쨋든 모란각 냉면이 옥류관 냉면보다 한 수 위라는 그분
말에 나는 빈말인 줄 알면서도 우쭐해졌다. 모란각 주방으로 나서기 전, 나는 나
름대로 맛있다고 소문 난 냉면집을 순례하였다. 놀란 점은 서울과 수도권에 있
는 냉면 집들이 대부분 녹마(녹말) 국수, 즉 함흥냉면을 다루고 있었다. 북한에
서 함흥냉면이란 감자 농사가 잘 되는 함경도 일부지역과 양강도 일부지역에서
만 즐겨 먹는 먹거리다. 그외 지방은 평양냉면을 진짜 국수로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남한 사람들은 함흥냉면을 유독 좋아하는 것일까. 평양냉면의 맛이 전체적으
로 은은하다면 함흥냉면은 자극적(실제로 북한의 함흥냉면은 그렇지도 않지만)
이라서인지,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는 함흥냉면이 더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평
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해 보자. 우선 면의 재료과 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이고
평양냉면은 메밀이다. 따라서 재료에 따라 냉면이 제 맛을 내는 시기도 달라진
다. 메밀의 향기는 수확기인 가을부터 겨울까지가 더욱 짙은 데 비해 감자 전분
은 해를 묵히면 면발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자고로 평양냉면은 추운 겨울
동치미 국물의 얼음을 깨면서 먹는 시원한 맛에, 함흥냉면은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이열치열의 맛에 먹는다고 했다. 북한에서 함흥냉면을 먹어본 기억은 손가
락을 꼽을 정도로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남한에서 만들어 내는 함흥냉면
과는 완전히 달랐다. 진짜 함흥냉면은 여기서 보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 이북5도
회의 어르신들꼐 여쭤 보니 여기처럼 맵게 고춧가루로 범벅한 것은 함흥냉면이
아니라고 한다. 진짜 함흥냉면의 색깔은 1백% 감자 녹말로 만들어졌기 ㄸ문에
속이 훤히 비칠 정도로 투명하다고 한다. 나 역시도 북에서 함흥냉면을 먹었을
때 유리알처럼 말간 면발에 놀랐었던 기억이 있다. 차진 기가 얼마나 강한지 쭉
뽑아보면 족히 3m는 뻗을 것 같았다. 짙은 갈색의 평양냉면과도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흔히 보는 함흥냉면은 감자 녹말에 고구마 전분, 밀가
루 등이 혼합되는 것 같다. 색깔은 투명하기보다는 하얗다. 그래서인지 입에 씹
히는 국수 감촉이 원래보다 좀 가볍게 느껴진다. 다시 말하자면, 함흥냉면은 1
백% 감자 녹말로 국수를 삶아 동해안에서 많이 아는 생선을 식혜 담듯 매콤하
게 무쳐 국수 위에 얹어 참기름과 함께 비벼 먹는 것이다. 함흥냉면은 가자미
버무린 것을 국수 위에 얹어 빨갛지도 맵지도 않다. 이에 비해 평양냉면은 좀더
복잡하다. 어쩌면 가장 만들기 힘든 음식일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연중행사 및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에 "겨울철 최고의 음식"으로 기록돼 있는 평양냉
면은 질과 향이 좋은 메밀을 재료로 한다. 여기에 정말 맛있는 고기로 육수를
끓여 국수에 부어 먹어야 한다. 과거 평양 사람들은 한겨울 먹이를 찾아 인가로
내려오는 꿩을 잡아 뼈를 잘게 다져 갖은 양념을 해 완자(꿩알)와 쇠고기 사태
를 함께 삶아 육수를 냈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꽁꽁언 동치미 국물을 얼음째로
혼합하는 것이다. 그 위에 얇게 썬 동치미 무와 배, 쇠고기 편육, 꿩완자, 계란지
단 등의 고명을 얹는다. 먹을 때는 뜨거운 아랫목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치미의 와삭한 얼음을 깨물 때마다 치아를 덜덜 떨면서 육수를 후
르르 마신다. 바로 그 맛이 진짜 평양냉면의 매력이다. 모란각의 평양냉면 역시
이와 같은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재료를 쓰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내가 가장 고민했던 점은 쇠고기, 닭고기, 꿩고기,
돼지고기의 비율이 어떻게 다른가, 또 어떤 고기에 어떤 야채를 넣어 끓여야 가
장 맛있는 육수가 만들어지냐였다. 고기와 야채의 궁합은 육수 맛의 미묘한 차
이를 자아낼 정도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현재 모란각 평양냉면에는 육수에만
12가지의 재료가, 냉면에만 32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다. 구체적으로 어떤 야채가
어느 고기에 들어가느냐는, 앞에서 말했듯이 나의 후계자만이 알아낼 일이다. 고
기의 비율은 쇠고기를 60%로, 그리고 나머지 꿩고기, 닭고기, 돼지고기를 40%로
섞어 끓인다. 꿩고기와 닭고기가 단물을 낸다면 돼지고기와 쇠고기는 구수한 향
기를 돋운다. 육수에 섞어 내는 동치미의 맛도 냉면을 좌우한다. 동치미가 평양
냉면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다. 국수의 원료인 메밀 자체가 체내 기름기와
지방분을 빼내는 음식이기 때문에 겨울철에 먹으면 몸이 허해지고 맥이 빠진다.
따라서 동치미에 동동 떠 있는 무를 함께 먹어줘야 기운을 펼 수 있다. 육수를
끓일 때 폭 고아두었던 각종 고기도 함께 먹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유난히
추위에 잘 견뎌내는 것도 바로 평양냉면의 원리와 똑같다. 열은 열로 식히득히
추위 역시 추위로 다스리는 것이다. 평소 북한 사람들은 좀처럼 따뜻한 차를 마
시지 않으며 목욕도 냉욕을 한다.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도 무스탕을 꺼내 입는
남한 사람들과는 무척 다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냉면을 좀더 맛있게
먹는 방법은 없을까. 가장 권하고 싶은 것은 냉면을 먹기 전에 절대로 가위로
자르지 말라는 것이다. 가위를 사용하면 국수에 금속이 닿은 것이기 ㄸ문에 맛
이 금세 변한다. 특히 모란각의 메밀 냉면은 질기지 않아서 이빨로도 충분히 끊
긴다. 좀 길다 생각되더라도 쭉 잡아당겨 빨면 쪼르륵 빨려 들어오는 냉면이 재
미 있지 않은가. 더불어 겨자와 다대기, 고춧가루 등으로 자신의 식성에 맞게 간
을 맞추는 것도 맛있는 냉면을 먹는 한 방법이다.

냉면 먹고 맴맴
하늘은 유난히도 높고, 태양은 난데 없이 이글거리고, 강물은 유난히도 차가웠
던 해. 여느 째 같은 면 스케이트 훈련에 여념이 없어야 할 그 해 봄부터 여름
까지, 나와 동료 선수들은 농촌혁명화를 받아야 했다. 농촌혁명화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받는 장계로 주로 강제노동이 주어진다. 광산노동, 공장노동, 산업
체 노동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에겐 '농촌혁명화'가 떨어졌다. 원인은 '패거
리 싸움', 그해 4월 스케이트팀과 축구 팀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있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표팀 기물을 둘러싼 사소한 말싸움이 발단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단체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화가 난 우리는 팀의 자존심을 걸고 10명 대
10명으로 패싸움을 벌였다. 피가 튀고 이빨이 다 빠질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
다. 감독님과 지도원들이 뛰어와 호루라기를 불 때까지, 우리들은 작은 전쟁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축구 팀과 스케이트 팀이 함께 농촌혁명화를 하
게 된 것이다. 그것도 지역이 같은 마을에서. 덕분에 두 팀은 한솥밥을 먹으며
친형제보다도 친해졌다. 아직도 승부가 결정되지 않았다며 서로를 흘겨보던 처
음의 긴장감은 농촌의 맑은 공기와 넓은 논밭에서 소나기에 씻긴 듯 사라졌다.
스케이트 팀, 축구 팀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뒹굴고 얽히고, 봄기운이 채 피지
도 않은 추운 4월부터 뜨거운 8월까지, 우리는 무려 5개월 동안을 함께 보냈다.
8월 말이 되어 혁명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린 선수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올해 농사가 잘 될 것 같다고 대견해 하시던 마을 어른들이 우리를 위해
맛있는 저녁을 지어주겠다고 하셨다. "뭘 먹고 싶은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호미와 괭이를 들고 다가온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우린 먹고 싶은 음식을 하늘이
흔들리도록 외쳤다. "된장찌개요! 콩국수요!" "국수(냉면)요! 국수가 먹고 싶어
죽겠수다!" 우리의 아우성에 아주머니들은 한편으로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동안 밥 못 먹은 귀신들만 남았나. 다른
동네 사람이 보면 우리가 아이들을 몇 달 굶긴 줄 알겠구만!" "국수요! 시원한
국수 좀 먹게 해주시라요!" "내레 뱃가죽이 달라붙었시오. 5개월 동안 뼈빠지게
일했는데 너무들 하십네다." "아이구 배고파라. 배고파라. 농촌혁명화 두 번 했다
간 해골 되겠시오!" 결국 국수로 낙찰이 됐다. 그 많은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오로지 국수만을 드높이 외쳤던 선수들 속에는 내 목소리도 섞여 있었
다. 우리가 이토록 저녁식사 한끼에 광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긴긴 5
개월을 보낸 곳은 북한에서도 춥기로 소문난 중강진. 봄철에도 야채가 귀하고
먹을 게 없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혁명화 동안 마을에서 양식을 제공하고 요리
는 우리가 하도록 돼 있었지만 기껏해야 감자를 삶아먹거나 강냉이 죽을 끓이는
것이 전부였다. 5월에 내 생일날에도 친구들이 옥수수를 볶아서 조출하게 축하
했었다. 하늘에서 국수 한 사발만 뚝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선수촌에서 좋은
음식만 먹고 생활하던 우리에겐 농촌혁명화는 혀와 위에 가하는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드디어 냉면(국수)을 만들던 날. 마을은 온통 잔치 분위기다. 선수들 20
명이 먹을 냉면이라면 족히 백인분은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마을 아이들, 어르
신들이 먹을 것까지 합하면 냉면의 양은 어마어마해진다. 언제나 우리를 부를까,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논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수들, 어서 와서 국수 먹게
나!" 멀리서 마을 당간부의 사모님이 우리를 손짓하신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우리는 삽과 곡괭이를 내던지고 좋아라 달려갔다.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 더 빨
리 먹을 수 있다! 맛있는 냉면이 기다린다! 30미터쯤 가까워지자 냉면의 알싸한
식초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밭일에 여념이 없던 밀짚모
자를 쓴 마을 어르신들이 우르르 뛰어가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허허 웃으신다.
어서 가서 많이 먹으라는 듯 손을 흔드신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먹고 죽으려
야 없다. 대신 양계를 하는 여러 마을 여러분들이 닭 몇 마리를 가져왔다. 닭을
푹 삶은 물을 냇물에 식힌 후 오이와 양파를 동동 띄웠다. 면은 전분에 옥수수
를 섞어서 손으로 직접 반죽한 것이었다. 한입 떠먹는 순간, 몸안으로 그 알싸한
맛이 싸늘하게 퍼지며 소름이 끼친다. 친구들도 모두들 한입 맛보더니 허공을
향해 몸을 부르르 떤다. 위가 놀라 깨어나고 오장육부가 전율을 하고 있다! 젓가
락 숫가락은 팽개친 지 오래다. 그릇을 입에 대고 한번만 후루룩하면 한 그릇이
뚝딱이다. 다섯 달 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맛본 우리들은 이게 꿈이냐 생시냐, 서
로를 꼬집으며 냉면을 먹었다. 그렇게 한참을 먹었으니, 도대체얼마나 먹었을까.
내가 먹은 냉면만 무려 여덟 그릇이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두배 크기
의 쟁반으로. 친구들은 누가 더 많이 먹었냐는 듯 서로 몇 그릇을 먹었는지 확
인하고 있었다. 일곱 그릇, 여덟 그릇, 아홉 그릇, 열 그릇. 그날의 기록은 열두
그릇을 축구 팀 주장 영훈이였다. 모두들 너무 배가 불러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
고 엉금엉금 기어서 숙소로 돌아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덟 그릇을 다 먹
고 쟁반에서 입을 떼는 순간 드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걷기는커녕 일어서기도
힘이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겨우 숙소까지는 내 발로 온 것 같았다. 그대로 방
바닥에 등을 깔고 쓰러지는 나.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때 열두
그릇을 먹었다는 영훈이가 나를 불렀다. "용아, 우리 배불러 줄갔는디, 강가에 멱
이나 감으로 가자." 영훈이는 헐떡거리고 누워 있는 나를 일으키려고 애썼다.
"배가 너무 부를 땐 움직이는 게 좋대.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더 답답하다구!"
"그래, 그래. 알갔어."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배를 척
내밀고 친구들과 함께 어기적 어기적 강을 향해 걸어갔다. 배가 아래로 내려앉
으려 하니 영 걷기가 힘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모두들 임산부처럼 배
를 내밀고 금방 아이라도 낳을 듯 어기적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강가에 도착. 모
두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웃통과 바지를 벗어 던졌다. 모두들 강가에 뛰어드는
것 외에는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었다. 배가 부르다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그날 처음 알았다. 웃을 벗고 팬티바람이 된 나는 급한 마음으로 강에
몸을 담갔다. 그런데 배가 무거워서 자꾸만 앞으로 발이 휘청거리며 나가는 것
이다. 어어어, 이러면 안되는데, 어어 하며 나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물이 가슴
까지 차는 강물 한복판에 와 있었다. 친구들은 아직도 저쪽 기슭에서 발장구를
치고 있는데. 윽! 실수를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버렸다. 이렇게 잔뜩 먹고서 물
속에 덜컥 몸을 담그다니! 수압에 눌린 맷속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
고 있었다! 부글부글, 우글우글, 우우우우우, 우우우우, 웩! 강물의 압력에 힘을
받은 내 뱃속의 냉면은 마치 방아쇠를 당긴 듯 입 밖으로 발사되었다. 기운차게
쭉 뻗어가며 강물 위로 흩어진 나의 냉면들! 기슭에서 이 모습을 바라본 친구들
이 좋아라 웃는다! 용이 좀 봐라! 저 녀석! 꼴 좋다! 낄낄낄! 나는 친구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또 한번 발사! 이번엔 친구들의 머리위에 명중했다. 웃음소
리가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윽! 차가워! 이게 뭐야! 웩!" 아직 옷을 벗느라 강변
위에 있던 아이들이 몸이 뒤집어지도록 웃는다. 배가 무거워서 웃다가 그냥 주
저앉아 버렸다. 그동안 나는 계속해서 발사에 발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다섯 달
만에 먹은 아까운 냉면을.

모란각의 건방진 서비스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공산주의 사고방식 속에서 자란 나의 딱딱한 머리통
까지도 번개처럼 뚫었다. 그렇디! 손님은 왕이디! 최고의 친절과 최고의 서비스!
그것이야말로 음식점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모란각의 문을 들어
서는 손님들은 처음부터 불만을 터뜨린다. 이건 손님 대접이 영 말이 아니다. 그
멀고 힘든 길을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출입문 앞에는 이런 푯말이 세워져 있다.
"영업시간 오후12시!3시, 오후6시~9시30분." 잉? 그렇다면 지금이 4시니까. 영업
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니, 정말 손님이
단 한명도 없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 "저, 식사 안돼요?" "아유, 너무 일찍
오셨네요. 저녁 식사시간은 6시부턴데요." "아니, 전 점심 먹으러 왔는데요." "이
를 어쩌나. 점심 시간은 3시에 끝났어요." "아니, 그러면 이렇게 찾아왔는데 냉면
을 안 판단 말이에요?" "시간이 아직 안됐는 걸요. 저기 앞에 호수공원에서 산책
하시다 6시에 다시 찾아와 주세요. 지금은 준비가 안됐어요. 죄송합니다." 할 수
없이 손님은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무려 2시간동안이나 호수공원을 지겹도록
산책한다. 드디어 6시, 다시 모란각으로 돌아온 손님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환
영인사조차 없다. 그저 눈에 띄는 테이블을 찾아 우선 앉아본다. 아무리 기다려
도 메뉴판도 갖다주지 않는다. 종업원들을 좀 불러 세우려 하지만 다들 바빠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봐, 아가씨! 아가씨!" 기어코 소리를 질러야 다가오는
종업원. "부르셨어요." "여기 냉면 세 그릇하고, 만두 하나, 북한 순대 하나." "식
권 사셨어요?" "엥?" "저기, 개산대에서 식권 사시고 테이블 위에 놓고 기다리세
요." 말을 마치고 종업원은 총총히 사라진다. 식권? 냉면 집에서 식권 사라는 말
은 처음 들어본다. 어디, 여기까지 왔으니 별수 있나. 하라는 대로 해야지. 계산
대를 바라보니 벌써 10여 명이 한줄로 서 있다. 식권을 사려면 저 줄의 맨 끝에
서 기다려야 한단다. 출출한 배를 참고 기다려서 드디어 식권을 구입.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식권을 건네준다. 그제야 주문이 제대로 이루
어진 것이다. "물좀 주세요." "물은 셀프서비스예요." 그러고 보니 테이블마다 분
홍색의 물컵이 놓여져 있고 이곳 저곳 물병이 있으며 가게 한쪽 구석에는 냉온
정수기도 있다. 그래, 뭐. 물도 내가 떠다 먹어야지 뭐. 모란각의 서비스는 이처
럼 건방지기 짝이 없다. 걸쭉하게 한끼 식사를 한 후 폼나게 계산을 하고 "안녕
히 가세요." 란 종업원의 황송한 인사 속에 음식점 문을 나가던 한국인들은 모란
각의 이런 건방진 분위기에 당황을 한다. 이게 뭐야! 장사 하겠다는 것야, 뭐야!
지금이 어느 땐데 선불제야!" 우선, 이런 불쾌함을 느꼈던 손님들에게 지면을 빌
어 사과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지만 내 설명을 들으면 다들 이해해 주시리라 믿
는다. 사실 선불제는 철두철미한 북한 식이다. 북한의 어떤 최고급 레스토랑도,
최고급 음식점도, 모두 선불제다. 남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모란
봉의 모란각도 식당에서 백미터 떨어진 곳에 별도의 식권 판매소를 마련해 두고
있다. 선불제가 규격으로 돼 있는 북한에서는 어떤 대단한 손님도 선불제를 불
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란각을 열면서, 나는 이 선불제가 계속 생각이 났다.
북한 음식점을 열기로 한 이상 서비스도 북한 식으로 하고 싶었다. 북한을 알리
기 위해서 시작한 냉면집인데, 손님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남한식을 사용한다
는 것이 웬지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욕을 먹더라도 모란각은 북한
깃으로 운영한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규칙을 세운 것이다. 통일이 된 후에
북한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와 같은 선불제를 수도 없이 경험하게 될 것이
다. 미리 모란갓에서 통일시대를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북한은
왜 하필이면 선불제를 고수하고 있을까.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거부라고 설명한
다면 설득력이 있을까. 후불제는 서양의 문화이고, 자본주의의 문화라는 것이 북
한의 생각이다. 후불제로 음식값을 치르는 경울 계산대 앞에서 여러 가지 잡음
이 많이 나타난다. 계산이 잘못 됐다는 항의나 트집에서부터 종업원에게 주는
팁 문제까지. 서양에서는 팁이 예의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팁이란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것으로 인식돼 있다. 한국에서는 서양의 이와 같은 팁문화를 많은
부분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가 있다. 치르는 음식값보다 팁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과연 이게 잘 이해된
팁문화일까. 팁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려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허울과 허영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닌가. 서울에서 여러 음식점과 술집에서 잘못된 팁 관행을 지
켜 본 나는, 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반드기 선불제를 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어
느날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여러분들, 팁 받을 생각 꿈에
도 하지 말아요! 여긴 선불제니까요!" 그리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혹시, 손님
한테 팁 받은 경우가 있다면, 제게 꼭 알려주세요." 순간 종업원들의 얼굴이
어졌다. 내가 팁 받은 종업원을 무자비하게 윽박지르며 혼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선불제인데도 불구하고 팁을 받아낸
종업원에겐, 내가 보너스를 주겠습네다! 약속해요!" 종업원들이 내 말을 이해하
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한두 사람이 배시시 웃더니 다들 와르르 웃었
다. 나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모란각의 이 건방진 서비스 가운데에서 팁을
받을 수 있는 종업원은 얼마나 열심히 일했을까. 얼마나 친절했을까. 나는 매일
누가 팁을 받았는지 체크한다. 그 사람이야말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자기 부
모 모시듯 했기에 단돈 천원이라도 팁을 주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팁을 받은 사
람에겐 영락없이 두툼한 보너스 봉투가 돌아간다. 그리고 정말 수고했으니까 '감
사합니다'하는 인사도 곁들인다.

5천원짜리 냉면이 2만원짜리가 된 날
7월말, 남들은 한창 휴가계획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휴가를 반납한 모
란각 식구들은 밀려드는 손님 ㄸ문에 정신이 빠지도록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특히 에어컨도 없이 일하는 주방 식구들은 등이며 겨드랑이에 땀띠가 날 정도였
다고 한다. 그날은 유난히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이렇게 여름날이면 사람들은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이 먹고 싶은 모양이다. 그날따라 아침 11시부터 식권을 사
겠다는 행렬이 문앞으로 길게 늘어섰다. 식권을 반쯤 팔기 시작했을 때였다. 지
배인님이 헐레벌떡 육수를 끓이고 있는 내게 달려왔다.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
다. 이거 야단났다. 손님은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물이 안 나온다니. 그렇다면 그
냉면을 어떻게 삶을 것이며 만두는 어떻게 찔 것인가. 말이 안되는 얘기다. "장
항동에 물이 끊긴다는 말이 있었나요?" "아뇨.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봤더니 수돗물이 조금씩 나온다는데요." "아니, 그러면 모란각 수도
만 고장났단 말이에요?" "아니에요. 가정집에서는 조금씩 나오지만 일산 신도시
가 다 물이 안 나온다고 하데요. 그래서 다른 식당들은 저리 문을 닫았다고 하
는데 우리도 이 기회에 좀 쉬는 것이 어떨는지." 이거 미칠 노릇이었다. 어제까
지만 해도 멀쩡했던 수도가 하룻밤 사이에. 구청에 전화를 해봤더니 미리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물이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다. 배고프다고 기
다리고 있는 손님들이 있는데 어서 빨리 물부터 구해봐야 할 것 이었다. 나는
수무 명이 넘는 모란각 식구들을 주방으로 불러 모았다. "다른 방법이 없는데요.
수고스럽갔지만 동네에서 물을 좀 얻어야갔습네다. 서빙하는 아주머니들 몇분만
남고 모두 좀 도와주셔야갔어요." 우리는 모두 하나씩 큼지막한 양동이를 들고
구걸에 나섰다. 모란각에 와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모란각 주변에서 그리 많은
집들이 없다. 주변에 한 다섯 채쯤의 집이 있고 다시 한 10분을 걸어야 음식점
과 집들이 있는 또다른 동네가 나온다. 먼 동네까지는 봉고차를 운전하여 들려
보냈다. 나는 황급히 떠나는 봉고차 운전사에게 만원짜리 다발을 쥐어 주었다.
홋시 물 주인들이 언짢아 할 수 있으니 돈으로 사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
다. 근처 주택가에서는 사정 설명을 듣더니 인심 좋게 큰 양동이 하나 가득 물
로 채워주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렇게 금세 양동이 세 개가 물로 꽉 찼고
오전 손님만큼은 감당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것은 '설거지'
였다. 한편에선 계속 음식을 내놓고 한편에서 계속 설거지를 하는 것이 주방일
이 아니던가. 요리할 물도 물이지만 그릇을 씻을 물도 참 많이 필요했다. 생각보
다 물은 더욱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잠시 후 봉고차가 도착했다. 봉고차에 좌석
하나에 작은 양동이 하나씩을 부둥켜 안고 있었다. 먼 거리여서 봉고차로 다녀
오긴 했지만 소득면에서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다시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그때 웃는 얼굴로 다시 양동이에 물을 채워주었던 여러 이웃분
들게 정말로 감사하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그분
들께도 만원짜리 몇장을 건네드렸지만 오히려 내게 화를 버럭 냈다. "아이구, 나
중에 냉면 한 그릇 공짜로 먹여주면 될 것을, 무슨 돈을 내미세요. 이웃끼리 이
래도 되는 거예요?" 돈을 내민 내 손이 부끄러워서 얼른 거두었다. 이렇게 따뜻
한 인정이 있으니 더욱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 이날 우리는 물을 수십통, 아
니 수백통을 지하수가 있는 곳에서 차로 날랐다. 그 물로 냉면을 씻고 삶고 설
거지하고. 오히려 평상시에 냉면 팔 때보다 이날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물이 안 나온다고 하니 좀 쉬었으면 하던 직원들의 인상. 그러나
찾아오신 손님들을 위해 물을 길어서라도 해야 한다는 사장의 말에 두말 없이
다들 통을 들고 나서던 모습. 물을 들고 뛰어다니며 온몸에 물을 뒤집어 쓰고도
웃던 직원들. 그러기를 낮 1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날 냉면은 그야말로 2만원짜
리는 되고도 남을 냉면이었다. 손님들은 그 사실을 알고 고마움에 맛있게 냉면
을 드시고 가신다. 가시면서 하는 말이 오늘 냉면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냉
면이 되겠네요. 돈으로 치지 못할 냉면이지.


중소기업으로 우뚝 서다.
97년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땀을 흘리고 가장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샌 해
로 기록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어야 했다.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모
자라 복제인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의 생각에 새삼스레 동조가 되기
도 했다. 자동차를 어디에 주차시켰는지, 키를 어디에 놓아 두었는지, 정신을 못차리는
나를 보고 한 친구는 "니 옆에 있으니 지구가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지구는 팽팽 돌고 있다. 해는 왜 그리 일찍 뜨고 또 달은 외 그리 빨리 저
무나. 이대로 식나이 잠깐만 멈춰준다면 자동차 와이퍼도 고치고, 은행에 가서 밀린 전
화요금도 내고 싶다. 그런데 지구는 날마다 회전을 하며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나는
이렇게 일만 벌여 놓으 채 가을 안에 서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보람도 있었다. 96년 12월, 조촐하게 문을 열었던 평양냉면 집 모
란각이 이제 분점까지 2백여명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자란 것이다.
내가 사장으로 경영하는 일산 신도시 모란각 본점을 기점으로, 여의도에 첫 분점을
낳았고 이어서 포항과 인천, 상계동과 강남점이 이어졌다. 여름이 끝나면 체인 문의도
줄어들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도 분당, 송파, 수원, 양평 등에 분점이 생겼으니 모란각
은 전국규모의 체인으로 당당히 서게 됐다.
물론 각 분점의 투자자는 모두 틀리다. 하지만 똑같은 육수와 만두를 제공하기 위해
서 모든 분점의 가족처럼 똘똘 뭉쳐야 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이 분점들을 번갈아 방
문하여 손님들께 인사하고 육수가 끓고 있는지 돌아본다. 그것만으로도 일주일이 빠듯
한데 또 그게 내가 할 일의 전부가 아니다. 그 와중에도 TV와 라디오 방송은 계속해
야 했다. 고정출연이니 펑크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방송은 내가 가장 즐기는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일주일에 3일은 반드시 KBS와 MBC에서 라디오 방송분 녹음
에 매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나의 본분은 일산 모란각 본점의 주방장. 그렇게 바
쁘게 보내면서도 육수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켜야 했다. 겨우 4-5시쯤 늦은 점심을 한
술 뜨다가도 육수를 옮겨야 할 시간이면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한 번 놓은 숟가락을
다시 찾을 때쯤이면 이미 저녁 손님을 한바탕 치른 후인 밤 10시, 11시가 된다. 방송이
예정된 전날 밤에는 이틀 치의 육수를 미리 끊여두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그 결과가 전국을 잇는 체인점이라니, 스스로도 대견하다. 처음 모란각을 시작할 때,
내가 이렇게 큰 일을 저지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귀순자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고 실향민들에게 잃어버린 맛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가장 북한적인,
그래서 가장 세계적인 냉면을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나타났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사장님, 체인 좀 내주세요
간장을 재느라 정신없는 나를 종업원 아줌마가 부른다.
-사장님, 저기 손님이 좀 보자는데요.
-예, 잠깐만요.
종종 있는 일이다. 특히 오랜만에 고향의 맛을 보고 가슴이 뿌듯해진 실향민 어신들
은 모란각을 떠나기 전에 꼭 내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어하신다. 식당 안에 들어섰다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돌아간다. 하지
만 나를 보고 싶다는 실향민 어르신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어디, 어느 손님이셨죠?
나는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되물었다.
-저기, 저쪽에 양복 입으신 분.
종업원 아줌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회색의 여름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30대 중
반쯤의 남자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모르는 얼굴인데...... 실향민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가니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인사를 한다.
-아이구, 김용 사장님! 뵙고 싶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로 벌써 세 번째 왔습니다. 올 때마다 안 계시더군요.
-네, 그러세요. 냉면은 맛있게 드셨구요?
-그럼요, 그리니까 내리 세 번이나 일부러 찾아왔죠.
-아, 예. 고맙습니다.
-장사가 참 잘되는군요. 어떠세요. 장사 잘되죠?
-아, 예. 그럭저럭. 덕분에 잘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김 사장님, 제가, 여기 자꾸 와 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혹시 체인
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 해서........
-체인?
-예. 볼수록 자꾸 욕심이 나서요.
-체인이라니........., 무슨 체인?
-벌써 목도 좋은 곳으로 봐뒀습니다. 이렇게 잘되는데 혼자만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
죠? 잘되는 사업은 체인으로 자꾸 늘려야 더 잘되는 법입니다.
-..........?
-여기 오기 전에 김밥 집도 가 봤고 자 나아간다는 갈비 집에도 가 봤습니다. 그런
데 체인을 하기엔 영 아니더군요. 그런데 모란각에 오는 순간 바로 이거다, 그런 필이
팍......
-..........?
-혹시, 이미 예약된 체인이라도 있나요?
-예약된 체인이라니?.........
-아, 괜찮습니다.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데 이미 여러 사람이 체인 달라고 찾아왔겠
죠. 그렇죠. 제가 처음이 아니죠?
-저, 죄송합니다만, 전 그 체인이라는 게 도통 뭔지........
-예?
-아니, 전, 손님께서 왜 냉면 집에 와서 체인을 찾으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데.....
-잉?
-체인이라면 굵직한 쇠사슬 아닙네까. 그걸 왜 여기서 찾으시는지, 전 정말 모르겠습
네다.
-.......푸, 푸하하하하하!
-!..............
-푸하하하! 김용 씨. 아직도 한국 사람되려면 멀었군요!
-?........
-죄송합니다. 그만 웃을게요. 푸하하하! 제가 말씀드릴게요. 체인이란 말이죠. 아 왜
그 체인 사업이란 말 있잖아요. 여기저기 모란각 분점을 세우는 거죠. 일산이 워낙 후
미진 곳이니 서울 시내에 분점을 내면 어떻겠어요? 괜찮겠지요?
-부부, 분점? 분점이 체인입네까?
-그렇죠! 바로 그거예요.
휴우!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다. 갑자기 처음 남한 땅에 왔던 그 때로 되돌아간 느
낌이었다. 그때 속사포처럼 내뱉는 남한 사람들의 언어를 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
했었다. 내 목소리는 점점 개미처럼 작아졌고 누가 내게 말 걸지 않기만을 바라며 고
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6년이 지난 지금 재현된 것이다.
-부부, 분점이요, 전 한 번도 분점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푸하하하! 그러시겠죠. 체인이 뭔 줄도 모르셨는데. 푸하하하!
-.........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체인 사업, 그거 참 좋은 사업입니다. 모란각이란 상호
도 괜찮고, 무엇보다 냉면 맛이 이렇게 좋으니 분명히 성공할 겁니다.
-글쎄요. 저는 지금 막 얘길 들어서 당장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러시겠죠. 제가 며칠 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동안 한 번 주위 분들에게 체
인 사업에 대해서 많이 물어 보세요. 제가 직접 말씀드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얘긴 믿을 많나 분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겠죠.
-아, 예.
경우 있는 분이었다.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직접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분
은 나 스스로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헛걸음을 했는데도, 그저 허
허 너털웃음만 흘린 체 돌아갔다.
손님이 자리를 뜬 후 나는 다시 육수 통을 쫓아갔다. 머리엔 풀어야 할 숙제를 안은
기분이었다. 분점이라......... 정말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물론 서울에도 모란각을 하나 두
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 지만, 일산의 모란각 하나라도 튼튼하게 키
워낸 이후의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서울에 분점을 내려면 일산에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까 그 손님의 말투는 분점을 내더라도 자기가
내겠다는 말투인데....... 그렇다면 나는 이름만 빌려주면 되는 건가?
갑자기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

여의도에 모란각을 띄우다.
97년 5월 19일, 모란각의 첫 아들이 태어났다. 그것도 나의 제2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여의도에서. 평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방송국 동료들에게 냉면을 대접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짐이었다. 먼 일산까지 오시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냉면을
싸들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의도 땅에 분점이 생긴 것이다. 개
업식 날은 많은 동료 연예인들이 찾아와 "이제 점심 걱정은 덜었구만"하며 축하해 주
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 상기된 표정의 종업원들 틈에서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분이 있었다. 바로 모란각 여의도 분점의 김형덕 사장님이시다. 180cm가 넘는 거
구의 김 사장님은 "음식점에는 이렇게 큰 놈이 버티고 있으면 안되는데....."하며 구석에
서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큰 체격에 비해 조심스럽고 나긋나긋한 말투, 소주 한 잔만 마시면 빨개지는 얼굴,
아무리 바빠도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몸가짐. 어떻게 이런 분이 과거에 국가대
표 농구선수를 하셨을까. 나에겐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았다. 김 사장님이 불
쑥 나를 찾아온 것은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날 나는 여의도에서 라디오 방송을
녹화하고 늦은 9시가 되어 모란각에 도착했다. 손님 두 분이 기다린다고 해서 가보니
내가 전혀 모르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작은 몸집으로 뭔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
었고, 다른 한 분은 엄청난 거구인데 그저 상대방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두 분의 얼굴이 모두 달아올라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쿠! 김용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하시는데 방해가 되진 않았는지........
- 무슨 말씀을요, 저희가 눈이 빠져라 사장님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어디 앉을까 하다가 몸집이 작은 분의 옆자리를 택했다. 그때까지도 앞에 앉아
계신 거구의 사나이는 사람 좋은 미소만을 흘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김용 씨, 앞에 앉아 계신 분이 내일 모레 여의도에 음식점을 오픈 합니다.
-아, 그러세요. 축하드립니다. 어떤 음식점이죠?
-그게, 아직....... 제가 지금 그 말씀을 드리려고요.
-?........
-실은, 저는 부동산 중개업자이고 이 분은 원래 국가대표 농구선수를 하셨어요. 선수
생활이 끝나고 이것저것 사업을 하셨는데, 사기도 당하고 배신도 당하고, 산전수전 다
겪으셨습니다.
-아, 예.........
-이번에 다시 음식점을 내고 일어서 보려고 하시는데, 제가 좀 확실히 돕고 싶어서
요. 내일모레 음식점이 곱창전골 전문으로 오픈을 할 텐데, 아무래도 곱창 전골로는 성
공할 것 같지 않고......,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한테 말해죠. 일산에
모란각이라는 곳에 가봤냐고. 그런 음식점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죠 형님?
말씀 좀 해보세요!
거구의 사나이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넓은 이마는 솔직함을 드러내고
있고 두툼한 입술은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말을 꺼내기 전 그 분은 시선을
내 눈에 고정시켰다. 맑은 눈빛이다.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허락해 주신다면 곱창전골 집을 냉면 집으로 바꾸고 싶습
니다. 제가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면 안되거든요.
-그래요. 형님! 이번에는 정말 성공하셔야 돼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요.
생판 모르는 두 사람이 지금 내게 대답을 원하고 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나로선 분점의 위치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여의도는 나 스스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이라 직접 투자도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습니까. 김용 씨, 저희 형님에게 분점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
-와아!
두 사람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여의도 분점은 이렇게 싱겁게 탄생했다. 곱창갈
비 전문으로 오픈 3일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김 사장님은 갑작스럽게 인테리어를
바꾸고 모든 내부단장을 새롭게 해야 했다. 개업일에는 일산점의 직원들이 직접 만두
와 순대를 싸들고 원정을 나가야 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번갯불에 맞아 충전이라
도 된 듯이 열심히 움직여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보통 한 달이 걸리는 분점 오픈이
어떻게 3일 만에 가능했겠는가.
내가 그날 김 사장님의 부탁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
까. 여의도 분점이 오픈하고 한참 후에 김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덥석 분점을 줄 수 있었느냐"고. 마땅한 대답을 찾아보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저 김 사장님에 대한 느낌이
좋았다는 것밖에는.
'계산하지 말고 인간을 보자'
체인 사업을 결심했을 때 내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떠올랐고 그대로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이곳 저곳을 재는 짓은 하지 않겠다. 더 중요한
것은 긴 시간을 쌓아 나갈 수 있는 신뢰다.
김 사장님과 나는 같은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통하는 데가 있었다. 남들이 보
기에는 활동적이고 가장 털털할 것 같은 것이 운동선수들이지만, 실제로 우리들은 부
끄럼도 많이 타고 신중하다. 하지만 일단 친해지면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의리 있고, 마
음 씀씀이가 깊은 것이 또 운동선수들이다. 과거에 기업은행 실업팀에서 활약했었고
한국일보 신인 체육상까지 받았다는 김 사장님. 지금은 냉면 집 사장이 되어 제2의 인
생을 살고 있다. 이제 김 사장님과 나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김
사장님이 "매끼마다 꼭 먹으라"며 보약 한재를 안겨주셨다. 육수 냄새가 온 몸에 배어
서 밥맛을 잃은 내게 그 보약은 거짓말처럼 식욕을 자극했다. 지금도 주방장 냉장고
안에 챙겨두고 아침마다 먹고 있다.
여의도 분점이 오픈된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 2-3일씩 꼭 그곳에 가서 찾아오는 손님
들을 맞는다. 아직 육수 끓이는 법과 양념장 담그는 법을 전수하지 못해서 날마다 미
니버스에 직접 비슷한 맛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어디서든 똑같은 맛을 제공해야
한다는 나의 고집 때문이다. 여의도 분점의 탄생과 더불어 체인에 대한 점화 문의가
빗발치듯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전화에 일일이 응답할 수 없다. 나는 육수를 끓여
야 하며 방송국에도 나가야 하고 그밖에 지하 카페에 앉아 한가하게 고스톱도 쳐야 한
다. 누구든 나와 얘기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직접 일산 모란각으로 찾아
오는 것이다. 냉면 한 그릇이라도 먹어 본 다음에 나와 얘기하자.

나를 한번 감동시켜봐!
-아니, 저 양반, 또 왔어!
돌려 보내고 또 돌려 보내기를 삼세번. 그는 오늘도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모란
각 계산대 옆에 멀거니 서 있다. 깡마른 체격에 키는 또 지나치게 커서 젓가락 한 짝
이 서 잇는 것 같다.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잽싸게 내 뒤를 쫓아온다.
-사장님, 사장님.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제도 그에게 거절의 뜻을 분명
히 했었다.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닐텐데, 오늘 또 오다니. 대단한 열성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확고하다. 그 먼 포항에 분점을 내다니.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
친 짓이다!
-모란각이 아니면 전 아무것도 안됩니다. 모란각이어야만 됩니다!
-이미 끝난 얘깁네다. 포항은 무립네다. 약속드린 대로 시기가 되면 연락 드릴게요.
지금은 안돼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믿어 보세요. 전 젊지만 이미 여러 번 식당을 경영해 봤습니다.
자신있어요!
-사장님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이 김용이가 자신이 없습네다. 생각
해 보세요. 육수는 어떻게 끊이고 또 순대는 어떻게 만들 겁네까?
-제가 다 배우겠습니다. 한 달이 걸리건 두 달이 걸리건 제가 열심히 배울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제도 똑같은 입씨름을 하다가 마침 주방 하수구가 막혔
다길래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댈까. 정말 못 말리는 분이
다! 우선 붐비는 식당을 벗어나 지하 카페로 그 분을 데리고 갔다. 내 사정을 설명하고
포기시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좀, 앉으세요.
-사장님!
-앉으셔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아니, 집을 지어도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하는 법
인데, 지금 어떻게 포항에 분점을 냅니까. 대구에서도, 또 부산에서도 절 찾아왔었지만
전부 거절했어요. 그뿐만이 아닙네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분점을 내겠다고 찾아왔
었어요. 기분이야 좋지만 그게 됩네까?
-사장님, 이건 캐나다가 아니라 포항이에요.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니, 제가 수시로
드나들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아니, 사장이 그렇게 가게를 비울 수 있어요? 개업과 동시에 가게에 계속 붙어 있
어야 하는 게 사장이에요. 여기서 육수 끓이는 거 배우는 동안에는 누가 어떻게 육수
를 끓여냅니까. 적당히 이름만 가져가서 흉내만 낼 수는 없어요. 제겐 제 명예가 걸려
있는 문젭네다.
-그럼, 제가 한 달간 배우고 그 후에 오픈 하면 되지 않겠어요? 예?
-어휴, 정말 고집이 대단하십네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이 분 나이가 어떻게 된다더라? 올해
로 겨우 서른하나? 반바지 차림에 하얀 얼굴, 쌍꺼풀까지 진 눈빛 탓인지 그보다 더
젊어 보인다. 처음 나를 찾아와서 불쑥 던진 말이 자기는 장사에 살고 장사에 죽는 사
람이라나? 끈질기다!. 그야말로 장사꾼 기질이다. 안된다. 그래도 안된다. 자꾸 약해지
려는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지금이야 서로 허허 웃으며 좋아할 수 있겠지만 그 뒷
수습은 누가 하랴.
시간이 9시가 넘고 내가 바쁜 듯 가게로 향하자 그분도 돌아섰다. 하지만 "안녕히
가세요"란 나의 인사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나도 역시 지지 않고 이렇게 맞받아 쳤다.
-오늘은 여관에서 주무시지 마시고 꼭 집으로 돌아가세요. 갓난아기 아들도 있다면
서요.
그러나 그분은 그날도 역시 여관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
에게 전화 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가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로 서울
로 올라온 것이다. 포대기로 등에 아이를 업고서. 다음날, 처음에 남편을 보았을 때 그
저 "아휴, 또 오셨군"이라는 답답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애, 응응응응.
포대기에 업힌 아이를 달래고 있는 어린 엄마. 그 옆에서 큰 키를 움츠린 채 그 촉
촉한 큰 눈으로 아내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남편.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한 잔의 빛바랜 사진 같은 장면. 오래 전에 찍은 흑백영화를 보는
느낌, 아니, 그 옛날 우는 나를 어르고 있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만남 느낌.
이 가족이라면 모란각이 분에 겹다. 이 아름다운 가족이라면 불가능이 없을 것이다.
그토록 여러 번 이 사나이를 거부했건만, 나의 고집은 갓난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무너졌다. 이 위대한 어머니가 나서겠다는 데, 세상의 무엇이 그녀를 막을 수
있겠는가. 포항점은 8월의 무더위속에 문을 열었다. 역시 지방 분점을 탄생시킨다는 것
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찾아가보니 간판이며 화환이 전혀 모란각의 것이 아
니었다. 간판과 포스터 등을 일산점과 동일한 모양으로 포항의 한 간판가게에 주문했
는데 영 딴판의 것이 배달된 것이다. 덕분에 수수하면서도 세련되어야 할 모란각의 분
위기가 터무니없이 구겨져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육수를 끓이
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칼을 외 갈지 않았냐, 간장은 ××간장을 준비해야지 왜 진간장
밖에 없는냐, 만두 속이 이렇게 부실해서 맛이 있겠느냐, 싫은 소리를 마구 해댔다. 한
참을 그러고 나니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 숙소로 들어가 누워야 했다. 결국 내 화에 내
가 당한 꼴이었다. 포항점 사장님은 숙소로 찾아와 끙끙거리는 내 머리 위에서 "하나
씩 고쳐 나가겠다."고, 흔들림 없이 말했다.
육수는 귀순자 후배인 북한 요리사 출신 명남이를 내려보냈다. "자리 잡을 때까지
네가 옆에서 돌봐 줄 수 있겠냐"는 내 부탁에 명남이는 선선히 포항으로 내려갔다. 그
녀석이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육수 맛이 일
산 본점 맛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있으니, 어쩌면 명남이는 한동안 포항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포항 모란각은 하루가 다르게 포항의 명물로 자리를 잡
아가고 있다. 터미널 가까운 편리한 위치, 또 포항 MBC도 바로 옆에 있어서 방송국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어렵게 낳은 자식이니 만큼 튼튼하게 키우고 싶다.
포항점 사장님의 갓난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면, 우리 모란각도 부쩍 커 있
을 것이다. 그날이 기대된다.

너털 웃음의 사나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 너털웃음의 사나이. 내게 '체인'이 무엇인지 확실히 가르쳐 준
분.
-저, 죄송합니다만, 던 그 체인점이라는 게 도통 뭔지…….
-예?
-아니, 전, 손님께서 왜 냉면 집에 와서 체인을 찾으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데…….
-잉?
-체인이라면 굵직한 쇠사슬 아닙네까. 그걸 왜 여기서 찾으시는지, 전 정말 모르겠습
네다.
-……푸, 푸하하하하하!
그 후로 벌써 두 달이 흘렀고 그동안 여의도와 포항에 분점이 생겼다. 인천과 분당
에도 분점을 하자는 제의가 와 있는 상태이고 부산과 대구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
를 설명하느라 입이 다 아플 지경이다. 이렇게 열심히 분점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날
나를 찾아와 내게 처음 '체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던 그 분은 왜 연락이
없는 것일까. 가끔씩 모란각 분점 사업의 뿌리가 그 분에게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분이 몹시도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명함도 받아두지 않았었고, 어쩔 수 없이
그 분이 다시 찾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체인 사업이 무엇인지 직접 알아보세
요"라고 말한 후 벌써 두달이 지났으니. 그 분은 내게 꽤 많은 시간을 준 것이다. 그러
던 어느 날, 여의도 분점에서 일을 마친 후 일산으로 돌아오자 그 너털웃음의 사나이
가 계산대 앞 테이블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이제서야 오셨어요?
-김용 사장님, 절 기억하세요?
-아이구, 기억하다 뿐입네까? 제가 선생님 오시길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님 덕분에 여의도 하고 포항에 분점을 냈습니다. 냉면 장사가 아주 잘되고 있
어요. 다 선생님이 미리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아니, 무슨 말씀을. 전 그저 체인을 내 달라고 한 번 찾아뵀을 뿐인데…….
-바로 그겁네다. 선생님 말씀이 아니었다면 전 체인이 뭔줄도 모르고, 분점 낼 생각
은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네다. 너털웃음의 사나이는 오히려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요……."하며 겸손해 했다. 때로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코
던진 말이 남에게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너털웃음의 사나이가 무심코 던진 돌이 내겐
다이아몬드였던 것이다.
-그래, 저희 모란각 분점을 내보시려고요?
-생각은 있는데……. 때를 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 회장님 뜻이 있으시니까요.
-회장님이라면…….
나를 찾아온 이 너털웃음의 사나이는, 한 달 후 상계 분점의 대표가 된 김두응 사장.
김 사장에겐 위로 긴 턱수염을 기른 멋진 용모의 형님이 있고 아래로 젊고 핸섬한 동
생이 있다. 그리고 이 삼형제에겐 절대 복종해야 하는 회장님이 계시니, 바로 삼형제의
아버지였다. 회장님은 맨손으로 큰 사업체를 일궤낸 분이라 하신다. 그리고 지금은 큰
형님이 그 사업을 돕고 있으며 둘째인 김두응 사장 역시 형님을 돕고 있다. 이렇게 부
자가 일궈낸 사업체는 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내노라 하는 저작권 에이전시다. 부모에
대한 효, 자식에 대한 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일까. 이 회사는 열악한 출판 현시에도
불구하고 매우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린 아버지가 한 마디 하시면, 필승, 충성을 외치면서 따라야 해요, 아버지는 하늘
이거든요.
결국 모든 결정은 회장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김 사장님은 모란각을 요모조
모 관찰하여 회장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모란각이
관찰을 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냥, 저랑 가끔 술 한잔씩 하시면서 친해집시다. 그러다 때가 되면 체인을 꼭 내주
시는 겁니다. 그러깁니다!
-아, 물론이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께라면 꼭 분점을 드리겠습니다.
역시 출판계에서 일하는 분이라 서인지 내가 몇 년 전 출간했던 <머리를 빠는 남자
>와 <빨래하는 남자>를 모두 읽어보았다고 한다.
-참 재미 있게 읽었어요. 다음 후편은 언제 나오지요? 허허.
또 다시 너털웃음을 짓는 김 사장님에게 나 역시 큰 소리로 "지금 열심히 쓰고 있어
요!"하며 웃었다. 오랜만에 좋은 술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인연이 닿을 모양인지 모란
각 단골 손님이신 한 실향민 어른신께서 김 사장의 부친을 잘 안다고 하셨다.
-그 양반, 정말 사람이 좋은 분이시지. 법 없이도 살 분이야. 용이 니가 누군가와 동
업을 한다며 바로 그런 사람이랑 해야 돼. 자식 교육도 얼마나 잘 시켰는지 아들 세
명이 모두 예의바르고 의젓하지. 몇 주 후, 김 사장은 "드디어 회장님께서 허락하셨다"
며 나에게 달려 왔다.
-이제 됐어요. 회장님께서 모란각은 정직하고 따뜻한 기업이라며 잘 해보라고 하셨
어요.
-아니, 여기 와본 적도 없으신데……. 어떻게 그렇게 좋게 생각해 주실 수가……?
-김용 씨를 보면 다 안다고 하시던데요? "그 사람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어도 같
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사람 같으니 잘 사귀어 보라"하셨어요. 완전히 허락하신 거죠.
상계점 탄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계 전철역 부근 대로변에 녹색의 모란각 간
판이 큼지막하게 빛난다. 터가 좋은 만큼 손님도 많다. 상계점 오픈 이후로 김 사장은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빠졌다. 출판일을 거들랴 회장님 돌보랴, 거기도 모란각
까지 경영하고 있으니 김용에 맞먹는 '지독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김
사장은 절대로 사람을 기다리게 한 적이 없으며 시간 약속도 깔끔하게 엄수한다. 나처
럼 한 시간 두 시간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만드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분점 사장단 회의에도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 게다가 고스톱을 해봤더니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김 사장은 여로 모로 내게 굉장한 자극이 되는 존재다. 혹시
상계점이 일산 모란각 분점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면 어쩌나. 나는 괜한 걱정을 해본
다. 하지만 걱정하는 만큼 나도 김 사장 못지 않게0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나를 채찍
질 해보는 것이다.

고스톱 예찬
이 책을 꼼꼼하게 읽은 분이라면, 이곳 저곳에서 고스톱을 무척 좋아하는 놈이란 사
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고스톱을 좋아한다. 그것도 무척이나. 잠을자고 밥
을 못 먹는 한이 있어도 고스톱은 친다. 육수를 끓이다가 잠시 눈 붙일 시간이 있으면,
나는 단고기집 아래 지하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잠을 자는가. 천
만의 말씀이다. 그곳에 내려가면 작은 이불보와 화투가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이미 모
란각 식구들이 웅성웅성 모여 판을 벌이고 있다. 주차장을 관리해 주는 귀순자 이영우
형님, 경철이, 남한에서 사귄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유연호 사장-지금은 전혀 사장이 아
니지만-, 나의 매니저 상민이, 냉장고 사장님까지. 내가 끼여들 틈이 있을까?
우선 판을 들여다보며 어쩌고 저쩌고 한 마디씩 거들면서 내 존재를 알린다. 그래도
사람들이 무시하면 고스톱을 하느라 정신 없는 사람 한 명에게 막 말을 시킨다.
-야, 연호야. 어제 김 마담한테 전화 왔었는데. 통화했어?
화투를 손에 쥔 채 나를 실눈으로 째려보는 유연호.
-말 시키지 마.
살벌한 고스톱 현장에서 누군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내게 앉을 자리를 권한다.
-용이 형, 저 의자에 앉아.
서서 알짱거리는 것이 귀찮다는 말투다. 이쯤 되면 다른 수가 없다. 주머니에서 천원
짜리를 한움큼 꺼내서 사람들 눈앞에 흔드는 것이다.
-나도 껴줘라. 나 오늘 돈 많아.
그제야 누군가의 눈치를 받은 누군가가 자리를 떨고 일어선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
터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고스톱을 하겠다고 덤볐고, 이미 돈을 다 읽고서도 나중에
주겠다며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허, 참. 오늘 끗발 되게 안 서네.
모란각 지하 카페의 고스톱 현장은 인간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살벌한 곳이다.
한치의 양보가 없으며 예의도 없고 위 아래도 없다. 물론 누군가 이에 대해 비난받아
야 한다면, 그런 바로 나 자신이다. 모란각에 이 공산당식 고스톱을 전파한 사람은 바
로 나, 김용이기 때문이다. 착하기만 한 경철이도, 유 사장도, 영우 형님까지도 원래 고
스톱을 잘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모란각 생활을 시작한 몇 달만에
다들 이렇게 고스톱 귀신이 된 것이다.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는 귀신들이다. 다만 내
매니저 상민이 만큼은 원래 나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고스톱 전문가였다. 유쾌한 스튜
디오, 남과 북 시절부터 내 뒤를 돌봐줬던 상민이는 김 형사와 홍 형사에게 배운 나의
어설픈 고스톱을 단숨에 케이오 시켰다.
-형, 그것도 고스톱이라고 치시오? 어여 가서 돈 좀 더 갖고 오랑께.
전라도 해남 출신의 상민이는 과거에 유도를 해서 집채만한 몸집이 꼭 나의 세 배
다. 평소에 순한 놈이 고스톱만 하면 나와 똑같은 공산당이 되어 버린다. 아니 상민이
말로는 자신이 '민주화 투사'라고 한다.
-공산당은 무신? 꿋꿋이 민주화로 버티겠어!
공산당 고스톱이란 어감 그대로 질 줄은 모르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어거지식 고스
톱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여기저기 지뢰밭과 땅굴을 파놓고 상
대편이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이른바 우리끼리의 '월약'이라는 것이 있어서 외부 사람
이 잘 모르고 뛰어들었다간 큰코다친다. 결국 민주화로 버티던 상민이도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경철이, 영우 형님, 그리고 내가 합세하여 덤비자 상민이는 꼼짝을 못했다. 모
란각에 들어온 후 상민이가 우리 세 사람에게 뜯긴 돈만 아마 20∼30만원이 넘을 것이
다. 처음엔 나를 가르쳤던 상민이가 이제는 오히려 나에게 구박을 받는 신세가 된 것
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영우 형님은 지금도 유 사장에게서 받을 돈이 한 10만원쯤
있는 듯하다. 나 역시 분명히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돈을 줘야 하
는 입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도통 잊어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마치 우리 모란각 가족들이 거대한 사기꾼 도박단인 것 같다. 하지만 이토록
살벌한 도박단이 반드시 모란각 지붕 아래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휴시
과여유, 모란각 가족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육수를 끓이다 보면 어깨는 물론 전신
이 걸리고 쓰러질 것만 같다 .그렇게 아프다가도 '고스톱'이란 말만 들으면 신이나서
일어서는 것이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경철이도 영우 형님도, 상민이, 유사장 까지,
모두들 모란각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가. 고스톱이 없었다면 모두들 우울증에 걸리
거나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한 판의 고스톱으로 욕도 하고 고함도 지르다 보면 스트
레스가 저절로 풀린다. 언젠가 지배인님이 작업 중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주를 마신
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뜨거운 육수 국물을 식히고 냉면을 삶고 한편에선 만두와
순대가 끓고 있는 모란각 주방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20여평 남짓한 주방에서 서른 명
의 식구들이 북적거리며 숨 쉴 틈 없이 일을 하니 저녁 일곱 여덟시쯤 되면 다들 녹초
가 된다. 이때 지배인님이 모란각의 분홍색 물컵에 소주를 콸콸 부어서 식구들에게 돌
리는 것이다. 한잔씩 꿀꺽꿀꺽 들이킨 후에야 모든 육체적 고통을 잊어 버리고 다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다. 주방 식구들이 소주로 고통을 잊듯이, 주방 밖의 모란각 가족
들은 고스톱으로 시름을 잊는다. 누구에게나 그 정도의 빠져 나갈 틈은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대기업 총수들이 매주 골프를 하듯이, 샐러리맨들이 금요일 저녁마다 동료들
과 실컷 맥주를 마시듯이, 대학생들이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나이트 클럽에서 몸을
풀 듯이, 그렇게 고스톱은 모란각 식구들에게 고마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고스톱 현
장의 살벌함은 반경 채 5미터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 카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
는 다시 형님과 아우를 찾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본연의 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다. 만약 그날 고스톱 판에서 누군가 크게 돈을 땄다면, 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돈을 다시 모란각 가족들에게 돌려준다. 어느새 가족들의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씩이
들려 있는 식이다. "이게 웬 아이스크림이야?"라고 물으면 그날 끗발이 좋았던 영우 형
님이 어느새 한턱 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스톱에서 돈을 잃고 버는 것에
무감각하다. 내 돈이 우리 돈이고 우리 돈이 내 돈이니까. 백원짜리 동전 하나로 언성
을 높이고 싸운 것이 5분 전인데 일단 고스톱이 끝나면 그걸로 모두 잘된 일이다. 그
래서 우리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고스톱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것.
요즘 들어 나의 즐거움은 동생들의 고스톱 자금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끔 육수를 끓
이고 있는 내 옆으로 경철이가 고개를 빠끔 내밀 때가 있다.
-형, 돈 떨어져서 왔어요.
-어, 그래?
나는 즉시 주머니를 뒤적여서 만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건네준다.
-잃지 말고 꼭 따야 한다.
-아, 그럼요. 내가 따면 두배로 드리갔어요.
경철이는 또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사라진다. 요즘은 분점 사장님들까지 가세하여
모란각 도박단의 규모는 제법 커졌다. 모두들 일년에 한두 번 명절 때만 고스톱을 치
던 순진한 분들이었는데 나 때문에 다들 고스톱 귀신이 되어 버렸다. 여의도 사장님,
상계점 사장님 등은 이제 우리 고스톱 판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이토록 고스
톱을 좋아하는 김용이지만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
첫째, 절대로 모르는 사람과 고스톱을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윌
식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말도 안되는 말들을 씨부렁거리며, 백원짜리 동전을 두고 내
거다 니거다 다퉈가면서, 그렇게 아옹다옹 고스톱을 치고 싶을 뿐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돈을 따겠다고 옆에 끼여드는 것은 사양한다.
둘째, 고스톱을 치다 보면 상대편의 성격을 죄다 알게 된다.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
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사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가
된다. 결코 겉으로는 드러낸 적은 없지만, 나는 고스톱을 하면서 앞으로 이 사람을 어
떻게 다뤄야 할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정리한다. 어디까지 잘 해줘야 하고, 어디까지 경
계해야 할 사람인지, 또 그 사람의 이런 부분은 미덥지만 저런 부분은 허풍이 좀 있다
든지,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을 정확히 그을 수 있다. 나는 이 선들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다. 결코 남들에게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인 것 같아" 하는 식으로 얘기해 본 적은 없
다. 그 선들은 김용이란 사람이 자기 관점에서 그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까
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스톱은 내 인생의 오락이며 철학이다. 앞으로 내가 결
혼을 하더라도 식구들이 고스톱을 하고 있는 한, 집에 일찍 들어갈 생각은 없다. 고스
톱 때문에 집에 좀 늦게 들어가고 한달에 일, 이십만원씩 돈을 날린다 해도 내 마누라
는 절대로 잔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그래야 나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
문이다.

도박단 사건?
내가 처음으로 화투를 본 것은 대여섯 살 때쯤으로 기억된다. 형님과 누나가 막내인
나만 따돌리고 이불 앞에서 뭔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잠시 후 보니 엄마와 할머니
까지 합세하여 흥분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등에 매달리며 칭얼거렸다.
-오마니……배고프다. 지금 뭐하나? 나도 끼워주라.
-용이 너는 저만치 가 있으라. 어린 놈이 뭘 아나.
형님이 핀잔을 준다. 씨. 나보다 겨우 일곱 살 많으며서…….
도대체 가족들이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들여다보니 그저 빨간 색 딱지가 이불 위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뭔데 다들 이렇게 난리지? 화투라는 단어에 익숙
해진 것은 그 후로도 한참 뒤였다. 형님과 누님,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버지가 집을 비
웠을 때 몰래 화투를 쳤다. 그리곤 구경하는 나에게 "아바이한테 절대 말하면 안된다"
며 신신당부를 했다. 한 번을 네 가족이 나만 따돌리고 또 한 번 화투에 골몰하고 있
었다. 갑자기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벌컥 열렸다. 안방에서 화투 중이던 네
식구는 화들짝 놀라면서 이불을 화투째로 들고 얼른 장롱 안에 감췄다.
-뭣들 했는데 이리 놀라나?
아버지도 낌새가 이상했나 보다. 오마니는 "당신 피곤하시죠. 오늘 날씨가 왜 이리
더워요?"하며 딴청을 피웠다. 한참 후, 나는 발을 씻고 시원한 자세로 누워 있는 아버
지에게 쓱쓱 다가갔다.
-아바이, 아까 오마니랑 형님이랑 뭐했는지 나는 안다.
-오, 그래? 둘이 뭐하든?
-할머니랑 누나도 같이 했다. 나만 빼놓고, 빨간 딱지 만지고 놀았다.
-오호! 이것들이 화투를 했구만.
아버지는 입가에 씩 하고 미소를 띄웠다. 뭔가 큰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용아, 너…….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양복 바지 안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곤 내게 1원짜리를
뒤적거렸다. 그리곤 내게 1원짜리 지폐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음에 오마니랑 형님이랑 또 화투하면 나한테 말해라. 알간.
-예.
아버지는 내 짱구머리를 싹싹 쓰다듬어 주었다. 원래 북한 사회는 화투를 쳐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 딸은 물론 아내와 할머니도 화투를 못
하도록 단속했다. 하지만 당신 눈에 띄지 않는다면 몰래 눈감아 주시는 편이었다. 당신
의 어머니가 그토록 화투를 좋아 하셨으니. 물론 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화투는 인민들의 인기 있는 오락이었다. 초상집에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는 모습이
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는 화투가 일본문화의 잔재이며 또 노름성 성격이
짙다는 이유로 완전히 금시했다. 화투를 만들어 내던 공장도 폐쇄시켰다. 화투가 생산
되지 않으니 화투를 하던 인구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향수는 남
아, 어떤 사람들은 딱딱한 종이위에 아예 그림을 그려서 화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희귀한 화투가 어떻게 우리 집에 굴러 들어오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형님
과 누나는 화투를 금덩어리 다루듯이 소중히 여겼다. 한쪽 귀퉁이가 부러지거나 뜨거
운 방바닥에 녹아 흐물거리면 서로를 탓하며 싸우곤 했다. 한 번을 형님이 어떻게 잘
못해서 화투 한 짝을 잃어 버렸다. 누나는 버럭 화를 내며 물어내라고 호통을 쳤다. 형
님이 나 모르겠다며 집을 나가 버리자 누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한 참을 그렇게 펑펑
운 후에, 누나는 마분지와 물감을 준비하더니 잃어 버린 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그
림이 어찌나 실물과 똑같던지, 일하고 있던 어머니, 옆방에서 쉬고 있던 할머니까지 몰
려들어 감탄을 했다.
-아유, 어찌 그리 똑같게 그렸나. 꼭 사진 박은 것 같다.
늦게 들어온 형님도 그림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리곤 누나와 이러쿵 저러쿵 말을
주고받더니 다시 이불을 가운데 두고 한판을벌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화투
싸움은 칼로 물베기였다.
형님과 내가 속도빙상 선수생활로 집을 떠나면서부터 화투는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
혀져 갔다. 대신 선수단에서는 주폐라고 불리는 트럼프 놀이가 유행했다. 돈을 건다거
나 카드를 만진다는 점에서는 화투랑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단지 주폐가 일본이 아닌 중
국에서 들어온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 없이 북한 사회에 확산됐다. 아마 지금도
주폐는 북한 사회 최고의 심심풀이 오락일 것이라 생각된다. 스케이트 선수단은 나이
에 따라 나이 많은 선수들은 1조, 나이 어린 선수들은 2조로 방을 나눠 썼다. 가끔 심
부름이나 볼일이 있어 형님들 방문을 열면 열댓 명이 빙 둘러앉아 트럼프 놀이에 정신
이 팔려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의 형님도 있었다. 형님은 1조 선수들 중에서 제일 키
도 컸고 용모도 준수했다. 나의 형님은 트럼프 놀이에서도 지는 법이 없었다. 뭘하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형님이 국가대표 속도빙상 선수생활을 거친
후 지도원(감독)으로 직행했을 때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풍이 형님은 스케이트 실
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실력도 뛰어났다. 국가대표 선수단에서는 '김풍 사
단'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형님을 따르는 선수들이 많았다. 이들은 형님의 말이라면
메주로 죽을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형님이 선수들에게 독재적으로
대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아침 6시면 기상해야 하는 선수촌. 기상
나팔이 합숙소를 뒤흔들기 5분 전, 형님은 먼저 선수들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나직이 속삭이면서 창문을 두들겼다.
-기상. 기상. 기상.
훈련에 지쳐 곤히 잠든 선수들은 그런 작은 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형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기만 하다.
-기상. 기상. 기상.
이렇게 한참을 두드리고 있으면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부시시 눈을 뜬다.
창문 밖의 김풍 감독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형님과 똑같은 키로 목소리를 낮추고 다른 동료들을 깨운다. 시끄러운 기상나
팔은 선수들의 아침을 망친다고 늘 형님은 말했다. 선수들을 그렇게 아침부터 놀라게
하면 훈련이 제대로 되겠냐고 불평했다. 그래도 시정이 되지 않자 스스로 직접 새벽에
일어나 기상나팔이 불기 전에 선수들을 깨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내게 형님은 산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홉 살 철부지를 체육구락부에 집어넣은 사람도 형
님이었다. 내가 열두 살 되던 해, 형님은 혁명화-잘못에 대한 징계로 내리는 강제노동-
까지 무릅쓰고 나를 2·8체육단에 보내려고 애썼다. 나의 스케이트 실력을 확신한 형
님은 어린 동생을 도체육단이 아닌 평야의 중아 체육단으로 보내려고 물밑교섭을 벌이
다 발각됐던 것이다. "동생은 어디 있냐"며 다그치는 자강도 체육단에게 형님은 "모른
다"고 잡아뗐다. 그 대가로 형님은 체육단에서 보일러를 떼는 신세로 전락했다. 강제노
동은 내가 결국 백기를 들고 자강도체육단으로 돌아올 때까지 2주 동안 계속됐다. 얼
굴과 옷에 연탄을 잔뜩 묻히고 보일러실에서 비실비실 걸어 나오는 형님.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형님은 그저 "용이 왔냐?"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그토록 강
인하고 굳세기만 한 나의 형님이 꼭 한번 내게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형님은 애지중지 훈련시킨 스케이트 대표 팀 선수 7명과 함
께 러시아 공동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날짜를 받아둔 상황에서 갑자기 형님에게
처리할 일이 생겼다. 할 수없이 7명의 선수를 먼저 러시아로 보내기로 했다. 공항에서
선수들 한 명과 악수를 나누고 "곧 따라갈테니 먼저 가 있어라" 하며 배웅한 직후였다.
선수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늘로 치솟는 듯하더니 곧바로 땅으로 곧두박질쳤다. 연쇄적
인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사색이 된 형님은 추락한 비행기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사람들이 가로막았지만 형님은 기어이 불꽃에 휩싸인 비행기의 문
고리를 뜯어내고 내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미 아무 소용
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형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더욱 야
위고 말수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낸 선수들을 하루 아침에 잃어
버렸으니, 그 고통이 오죽할까. 심지어 형님은 대표팀 책임지도원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당은 여전히 형님을 원했다. "김풍만큼 훌륭한 지도원을 어디서 찾으란
말이냐"며 간곡히 남아주길 간청했다. 특히 남아 있는 스케이트 선수들이 김풍 감독이
돌아오기만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형님은 자신을 추스리고 책임지도원으로 돌아
갔다. 남아 있는 어린 선수들을 먹이고 훈련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형님이 고스톱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모란각 지하 카페에서 가족들과 고
스톱을 하다 보면 갑자기 여기가 거대 사기 도박의 현장이라면 어떨까란 상상에 빠질
때가 있다. 말이 거칠어지고, 언성이 높아지고, 자욱한 담배연기가 어두컴컴한 카페를
뒤덮고, 기침이 나올 정도로 공기가 탁해졌을 때, "바로 이곳이 도박단의 현장이었어!"
란 농담도 나올 법도 하다. 바로 나의 형님이 북한 최대의 사기 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노동소로 끌려갔던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형
님이 어릴 적 화투도 좋아했고 트럼프를 하는 모습도 종종 보며 자랐지만, 결코 사기
도박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됐음이 분명했다. 90년 여름, 러시아 공동훈련을
마치고 평양 공항에 도착한 형님은 대기하고 있던 안전원들에게 붙들려 수갑이 채워진
채 곧바로 강계로 이송됐다. 그리고 또다시 강계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탄광으로 끌려
갔다. 옷이 벗겨지고 잿빛 죄수복이 입혀지고, 삽과 괭이를 손에 쥔 형님은 지하 수십
미터 탄광 아래로 떨어졌다. 안전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3년 전 형님이 아이스하키
대표선수 지도원 탁구 대표선수 지도원들과 함께 대규모 도박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북한 역시 도박은 단속 대상이고 규제와 처벌방법도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
의 형님은 도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3년전 대표팀이 모두 어느 도시에서 합숙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호텔 지배인이 제안하여 형님과 동료 지도원들이 함께
트럼프를 한 적이 있었다. 형님이 기억하기로는 호텔측 영업부장, 아이스하키 지도원,
탁구 선수들 몇 명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돈을 걸어야 트럼프가 재미 있다고 누
군가 말하길래 종업원을 시켜 달러를 바꿔오도록 했다고 한다. 체육단 선수들은 대부
분 외국에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주머니 속에 어느 정도의 달러는 갖고 있다. 그렇게
이날 밤을 트럼프로 재미 있게 보낸 후, 형님은 이일에 대해 깡그리 잊어 버리고 몇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형님을 제외한 몇몇이 이날 이후로 계속 달러 돈을 불려가며
트럼프 도박에 재미를 붙여갔던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도박판을 늘려가며 회원을 끌
어들이던 이들이 드디어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형님과 함
께 대표 팀을 이끌고 있던 탁구 지도원이 포함돼 있었다. "관련자 이름을 불라"는 안전
원의 심문에 잔뜩 겁먹은 탁구 지도원은 엉겁결에 3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 냈다. 그렇
게 해서 나의 형님이 북한 희대 도박단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껍질이 벗
겨지자 당황한 사람들은 오히려 안전원들이었다. 도박단 리스트에 당원은 물론 고위
공무원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돼 있었던 것이다. 나의 형님만 해도 김정일이 직접 수
여한 국가1급훈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의외의 이름이 튀어 나오자 당황한 안전원들은
아예 사건의 해결을 김정일에게 부탁했다. 김정일은 도박에 있어서만은 철두철미한 원
칙주의자였다. 안 그래도 도박을 뿌리뽑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김정일은 "지금까지
의 공로는 무시하고 가차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하라"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누나는 평
양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엉엉 울었다. 어떻게 손을 써보려고 애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공산대학 조직비서로 학장을 좌지우지하는 파워풀한
인물인 매부까지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고행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일
반 노동자들의 두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날마다 털어 닭 한 마리를 샀다. 푹 곤
닭을 먹기 좋게 찢어 찬합에 담아들고 탄광 노동소로 향하는 1시간 반의 여정을 재촉
했다. 뜨거운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 놈이 노름으로 탄광촌에 끌려갔다는 주
위의 수군거림도 상관 없이, 그렇게 25일을 한결같이 찾아갔다. 결국 당신이 앓아 눕자
이번엔 형수가 나섰다. 탄광촌에 끌려간 죄수는 가족도 외면하는 법인데, 어머니와 형
수는 아들, 혹은 지아비를 외면하느니 차라리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길을 택했다. 형
과 함께 도박범으로 끌려간 12명의 동료들도 어머니와 형수의 정성에 눈물을 흘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들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직 김풍 감독의
어머니와 아내만이 그들 옆에 있었다. 평양에서 이 사실을 통보받은 나의 가슴도 찢어
지듯 아팠다. 무슨 짓이든 하지 않으면 평새토록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간부에게 뇌물을 먹인
것이다. 간혹 당간부에게 돈만갖다 바치면 뭐든지 안되는게 없다는 동무들의 말을 듣
기는 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었다. 당시 내
게는 무역회사 일로 모아둔 달러가 적지 않게 쌓여 있었다. 거기다 친한 동무에게 이
유는 묻지 말고 달러를 빌려 달라고 하여 몇백달러를 더 보탰다. 그렇게 만들어진 돈
을 평소 안면을 알고 지내던 공산당 고위간부에게 건네주었다. 형님 얘기와 어머니 얘
기를 넌지시 건네며……. 그 고위간부는 다음날로 김정일을 찾아가 "벌써 한 달 가까
이 사상개조를 했으니 이제 관대히 봐주자"며 김정일을 설득했다. 그리고 스케이트 대
표 팀을 훌륭히 이끌어 온 김풍 감독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김정일은 그 고
위간부의 얘기를 차분히 들은 후 결정을 내렸다. 원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되 6개월간
혁명화를 시킬 것. 혁명화 후에도 외국 여행은 1년 동안 금지시킬 것. 과연 김정일다운
결단이었다. 나의 형님은 이렇게 다시 대표 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어린 선수들
앞에서 6개월 동안 보일러를 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다른 대표 팀 감독들이 다 해
외 공동훈련을 떠날 때에도 형님은 묵묵히 북한에 남아 있었다. 91년 가을, 내가 귀순
하기 직전 출장으로 러시아에 있었을 때, 호텔 객실로 형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용아, 이제 러시아 전지훈련 허락이 떨어졌다. 1주일만 기다리면 거서 니 얼굴 볼
수 있갔다.
형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모든 징계가 풀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1주일
을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 형님이 선수단을 끌고 러시아로 왔을 때, 나는 이미 귀순자
의 몸으로 남한 땅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형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한 채 6년을 눈물로 보내고 있다.

다섯 살배기 꼬마 종업원
오랜만에 연락이 된 한 귀순자 친구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
-야, 용이 너한테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냐?
-이 자식이, 오랜만에 전화질 해서 무슨 소리야?
-정말이야, 그런 소문이 나돌아서 그래. 누가 모란각에 가서 냉면을 먹었는데, 거기
서 니가 쪼그만 남자 아이를 안고서 "내 아들"하며 엉덩이를 두들기는 걸 봤다던데?
-그래?
그제서야 내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아, 그렇구나, 참, 나한테도 아들이 있었지! 하루
에도 수십번씩 그 아이의 가늘고 작은 몸이 눈에 뛸 때마다 나는 달려가서 "윤상이 요
놈" 하며 녀석을 붙잡는다. 그리곤 달아나려는 그 녀석을 내 무릎에 앉히고 이것 저것
말을 붙여본다.
-너, 아빠 하고 아저씨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이잉, 몰라. 실여 실여.
내 몸을 바둥바둥 빠져 나가려는 그 녀석. 아마도 밖에서 메롱이랑 한바탕 뛰어노는
중인가 보다. 녀석에게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 안되지.
그래도 그 녀석의 조그만 얼굴은 너무나도 귀엽다. 북에 두고 온 내 조카 훈이 생각이
절로난다. 그래서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온다.
-내 아들. 이 녀석. 너, 내 아들 맞지?
-실여, 실여! 밖에 나가야 해.
누군가 손님 중에 이 장면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그래서 김용이에게 다 큰 아들이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난 것이다. 처음엔 "그런 헛소문이!" 하며 분개했지만,그
소문의 주인공이 윤상이인 것을 깨닫고 보니 화낼 일도 아니다. 윤상이는 정말 내 아
들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엿다! 아저씨가 천원 줄게.
-피! 빨간 돈은 실여. 나는 파란게 좋아!
여허! 이 녀석 돈에 있어서만은 다섯 살이 아니다. 모란각 생활 1년만에, 매일 돈 가
방을 들고 다니며 마감하는 지배인 아빠를 따라다니더니 확실히 배운 것이 돈이다. 간
혹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이 귀엽다고 내미는 백원짜리 동전을 쳐다도보지 않는 윤
상이,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그런 돈은 관심 없어!"란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문다.
고 녀석! 나중에 커서 사업하면 꽤 잘할 것 같다.
-파란 돈 안 주면 나 갈래.
꼬마는 내 우악스런 가슴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리곤 밖으로 뛰어나가 모란
각 주변의 호수공원과 어린이 놀이터 등 이곳 저곳을 누비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달려나가는 윤상이의 뒷주머니에 만원짜리 한 장을 찔러넣었다. 윤상이는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깔깔 웃는다. 윤상이는 모란각 지배인의 아들이다. 두 부자뿐만이 아니
라 지배인의 아내, 그리고 그 집의 애완견인 메롱이까지, 이렇게 네 식구가 날마다 모
란각으로 출근한다. 일단 출근하면 메롱이는 끈에 매달아 주방 뒤켠에 붙잡아 두고 엄
마 아빠는 곧바로 주방 일에 파묻힌다. 아들을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데리고 나왔지만
그렇다고 옆에서 돌봐줄 수는 없는 것이다. 가끔씩 설거지를 멈추고 주방 너머로 아들
의 모습을 확인해 보는 엄마 아빠의 표정은 그만큼 애틋하다. 다행히도 윤상이는 씩씩
하게 자랐다. 올해로 겨우 다섯 살. 밖에서 신나게 뛰어 놀다가도 갑자기 울음이 터지
며 엄마 품이 그리운 나이다. 그런데도 나는 윤상이가 단 한 번도 주방에 들어와 엄마
에게 안아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녀석은 놀이터와 호수공원, 지하
카페와 단고기집, 모란각을 수십번씩 드나들면서 신기하게도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단
고기집 누나와 깔깔거리다가 금새 주차를 관리하는 이영우 형의 품에 안겨 있고, 또
어느새 지하 카페에서 콜라를 홀짝거리기도 한다. 그리곤 호수 공원을 달리고 놀이터
모래밭에서 뒹굴다 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졸린 눈을 비비며 모란각의 현관에 나
타난 윤상이의 무릎은 오래된 상처들의 딱지와 금방 생긴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뒤범
벅이 돼 있다.
-윤상아, 너 다쳤니?
누군가 걱정하며 그 녀석의 무릎을 들여다보면 윤상이는 얼른 뒷걸음질 친다.
-괜찮아. 안 아파.
그리곤 꼬질꼬질해진 손바닥으로 피를 쓱쓱 문지른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윤상이는 그렇게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낯도 가리질 않는 그 녀석은 모
란각에 있는 몰든 어른들을 친구처럼 생각한다. 경철이에게 "이놈아! 이놈아!"하며 놀
리기도 하고 상민이의 알통에 매달려 "내려줘! 내려쥐!"하며 애원하기도 한다. 칭얼거
리지도 않고 모든 일을 혼자서 다 알아서 잘 해내는 윤상이는 모란각의 최고 종업원입
에 분명하다. 그런데 윤상이는 어째서 또래 아이들처럼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것일까.
보통 다섯 살짜리 아이들은 벌써 한글을 읽기도 하고 덧셈 뺄셈쯤은 보통으로 해치울
텐데. 윤상이네 가족이 모란각에 들어오고 한 달쯤 지나서였을까. 지배인 내외는 윤상
이를 유치원에 넣기로 결심했다. 마침 문화유치원이 가까워서 곧바로 등록을 하고 윤
상이를 맡겼다. 그런데 일이 터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친구를 사귀면 괜찮겠지 했는
데. 윤상이는 무려 3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다. 유치원에는 가기 싫다는 것이
다. 그 이유는 "조그만 애들밖에 없어서 싫다"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모란각에서 큰
어른들과 부딪치며 살아온 윤상이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작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야 할 나이에 어른들 틈에서
자란 윤상이는 오래 전에 아이들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렸다. 3일 동안 꺼이꺼이 울기
만 하는 윤상이를 결국 모란각으로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윤상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신나게 뛰어 놀았다. 하지만 지배인 부부는 앞으로 윤상
이가 어떻게 자랄지 큰 고민에 빠졌다. 결국 언젠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텐데,
그때도 저렇게 울기만 하면 어쩌나,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한글을 척척 읽고 영어도 술
술 말한다는데, 제대로 유아교육을 받지 못한 윤상이가 견딜 수 있을까. 두 부부의 시
름은 잘 날이 없다. 가끔씩 윤상이를 바라보는 엄마 아빠의 눈빛이 내 가슴을 흔들도
록 슬퍼 보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나는 잠든 윤상이를 껴안고 있는 지배인
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왈칵 솟은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
면임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그날 윤상이는 온종일 뛰어다니며 놀
다가 저녁 9시30분쯤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도 잠들기 싫어서 눈을 껌벅거리며 모란각
의 이곳 저곳을 헤매던 윤상이가 때마침 주방 밖으로 나와 냉장고 안의 맥주병을 정리
하고 있던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
윤상이는 곧바로 아빠의 푹신푹신한 가슴팍에 안겼다. 두 사람은 곧 모란각 밖의 어
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모란각으로 들어온 지배인의 품속에는 윤상이가 그
천사 같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고이 잠들어 있었다. 아직 손님들이 몇 팀이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아들을 그대로 껴안은 채 손님방으로 올라가는 귀퉁이에 걸
터앉았다. 아빠의 시선은 잠든 아들의 얼굴에 고정돼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빠
의 얼굴은 흐뭇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손님까지 빠져
나가자 아빠는 손님방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방석 세 개를 차례로 편 후 그 위에 잠
든 아이를 눕혔다. 따뜻한 아빠의 품을 빼앗긴 윤상이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뒤척이
고 아빠는 아들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들겨 다시 잠으로 빠지게 한다. 아빠는 잠든 아
들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방석을 요 삼아 곤히 잠든 윤상이의 모습은 더욱 작고 추워 보였다. 테이블 위를
청소하던 종업원 아줌마 한 명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주방에서 앞치마 하나를 가져와
윤상이의 몸에 덮어주었다. 잠시 후 일을 마치고 메롱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의 눈은
즉시 아들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리곤 방 한구석에서 앞치마를 덮고 잠들어 있는
아들을 찾아내곤 얼근 달려가 품에 끌어안는다. 윤상이는 그렇게 엄마 품에 안겨서 하
루를 마쳤다. 잠든 아들을 꼭 끌어안고 모란각 문을 나서는 엄마, 그런 아내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안은 아빠. 세 식구의 모습은 그렇게 슬픈 그림이 되어 내 마음을 어지
럽힌다.

시간을 '뚝고 먹는' 사장님
북한에서 '시간을 뚝고 먹는다'는 말은 남한말로 '땡땡이 깐다'는 뜻과 흡사하다. 인
민학교 때는 감히 시간 뜯고 먹는 일은 없다. 남한의 초등학교 학생들처럼 선생님 말
잘 듣고 학교와 집만 아는 착한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굵어지면 슬슬 꾀가 나는 법. 고등중학교 에 입학하면서부터 숙제를 안해간다거나 수
업을 빼먹는 요령이 하나씩 둘씩 생기기 시작한다. 나 역시 고등중학교 2학년 때 시간
을 뜯고 먹은 적이 있다. 더운 여름날, 체육단에서 나눠준 간식을 먹지 않고 모아두엇
다가 학교에 가지고 간 날이었다. 동무들은 이 간식을 가지고 아예 학교를 빠져 나가
가자고 나를 꼬드겼다.
-누구 코에 붙인다고 여서 먹어! 강가에 가서 우리끼리 먹자. 응?
의기투합한 우리들은 학교 담을넘어 북천강으로 달려갔다. 옷을 홀랑벗고 물속에 첨
벙 빠졌다. 미역 감다가 지치면 나와서 간식을 먹었다. 간식 먹다 심심하면 다시 미역
을 감았다. 공부고 스케이트고 다 잊어버리고 물과 햇살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그때
멀리서 학생들의 무리가 줄을 서서 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반 아이들이라고 생
각하고 물 속에 있는데 갑자기 처녀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다 나왓!
깜짝 놀란 우리들, 들킨 것도 문제지만 벌거벗은 몸이 더 큰 문제다. 14∼15살의 사
춘기 소년들이 처녀 선생님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게 생겼으니. 하는 수 없이 대충 중
요한 부분만 손으로 가리고 물에서 나왔다. 이미 옷과 신발을 안고 서 있는 선생님. 그
래도 처녀 선생이라 보기가 짠했던지 팬티만 던져주었다. 그날 우리는 맨발에 팬티 차
림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오후반 여학생들이 등교할 때까지 서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
는 순간 배꼽을 잡고 웃어대던 여학생들. 완전히 개코 망신을 당했던 것이다. 어릴 적
땡땡이는 그렇게 형편 없이 끝났지만 다 큰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나
는 나의 땡땡이에 대해 상민이와 함께 심각하게 토론(의논)했다.
-상민아, 그래도 내가 사장 아니냐.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을 줘야 하니 치밀하게 계
획 좀 짜주라.
-그러면, 일단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고, 출발 시간과
접속 장소를 정하면…….
-이 녀석. 완전히 간첩들 교신하는 말투로 말하누만.
-실패해선 안되니까. 치밀하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팬티 바람으로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잠자는 것이었
다. 그러다 눈을 뜨게 되면 옆에 있는 상민이나 유 사장과 죽어라 고스톱을 치고 싶었
다. 그러다 배고프면 잠깐밖에나가 바닷바람 쐬면서 회 한접시에 소주 한잔 기울인다
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모란각 가족들이 알면 얼
마나 미안한 일인가. 3백65일 연중 무휴인 모란각인지라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여름
휴가를 챙기지 못했다. 나 역시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드는 유령
같은 생활을 반 년이나 계속해 온 터였다. 말은 안했지만 상민아 역시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난다면 상민이는 적어도 4시에 일어나 내 아파
트로 와야 한다.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가는 나를 데려다 주는 상민이는 3시쯤 되야 잠
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1시간 잠으로 하루를 버텨온 것이다. 대단한 녀석이다.
다음날, 나는 원래대로 새벽 5시에 기상했다. 상민이가 차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우리
는 윙크로써 서로가 같은 음모에 가담한 공범임을 확인했다. 하루치 육수를 다 마련한
후 상민이와 나는 "포항점에 급한 일이 생겨 빨리 가봐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영
우 형님이 "아침에 다 잘돼간다고 포항에서 전화 왔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상
민이의 임기웅변이 나를 앞섰다. "아니, 육수맛이 일산하고 틀리다고 손님들이 항의를
한 대요. 빨리 가서 봐줘야 한다구요." 영우 형님은 "뭐, 지금 내려간다고 갑자기 육수
맛이 달라지냐. 뭘 그렇게 급하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렷다. 그러다가 "그래 빨리
가봐라" 하며 선선히 물러났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달리는 순간 우리는 "야호!"하며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탈출 성공! 시간 뜯고 먹는데 성공한 것이다. 자동차가 자유로를
탄 순간 유 사장의 핸드폰을 눌렀다. 그때 막 오픈을 앞두고 있는 강남점을 돌아보고
일산으로 돌아오고 있던 유 사장. 핸드폰 소리가 울리자 누구의 전화일까 궁금해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 유 사장.
-지금 빨리 김포공항 1청사로 와라.
-뭐? 김포공…!
뚝. 영문도 모르는 유 사장이 김포공항의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상민이와 나는 이
미 서울발 제주행 비행기표 왕복 3매를 구입 해두고 승리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아, 이 귀신 같은 놈들. 뭐 어쩌자구?
-제주도로 가는 거야. 그냥 가는 거야.
-짐도 없이?
-무슨 짐이 필요하냐. 화투는 챙겨가니 걱정 말아라.
비행기에 오른 후에야 유 사장은 자신을 불러준 나를 고맙게 생각했다. 다음날 약속
이 이중 삼중으로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갑작
스런 여행으로 유 사장의 마음도 상민이와 나의 마음처럼 한껏 들썩거렸다. 드디어 숙
소에 도착. 커튼을 젖히니 제주도 중문 해수욕장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영복을
입고 설치는 여자들, 온몸에 꼼꼼히 오일을 바르는 여자들. 그 주변을 맴도는 젊은 남
자들의 모습이 깨알같이 눈에 잡혔다. 우리는 당장 차례로 뜨거운 물에 싸워를 했다.
그리곤 세사람 모두 팬티 바람이 되어 방바닥에 털썩 앉았다. 가방 속에 고이 모셔온
화투를 꺼낸 것이다.
-고놈, 참 예쁘게도 생겼구만.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심심하셨죠?
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가지고 있는 돈이 숙박비를 제외고 겨우 3∼4만원? 이런, 낭
패다. 하지만 뭐 괜찮다. 따면 되니깐. 잃지 않고 따면, 밖에 나가서 해물탕이고 파전이
고 멋지게 한턱 내야지.
-똥좀 작작 싸라. 더럽다, 더러워.
-이 여편네가 미쳤구만. 오늘 와 이리 내 말을 안 들어?
-형? 이거 배판이지? 그렇지? 둘다 3만원씩 내놔!
그날의 행운아는 상민이였다. 녀석은 우리 두 사람에게서 족히 10만원을 긁어모았다.
주머니가 꽤 두둑해졌다고 생각됐는지 녀석의 두 눈은 자꾸만 창 밖을 향했다. 잘 그
을린 피부에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뛰어 노는 곳.
-임마, 좀만 기다려, 아직 내가 딸 때까지는 못 나가.
-아유, 형! 배고파서 손이 떨린다! 그만하구 나가 놀자!
-야, 그럼 용이하고 나하고 둘이 할테니 너 혼자 나가라.
-무신 소리. 상민아, 형님이 자장면 시켜 줄까?
-이거, 완전히 모란각 지하 카페랑 똑같군. 도대체 누가 여기 오자고 한 거야?
결국 우리가 굶주린 배를 달래며 밖으로 나온 시간은 밤 11시. 해변에는 아리따운
아가씨족들은 다 사라지고, 신혼부부들만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벌써 실망해 버린 상
민이는 나이트 클럽에 가자고 난리다. 거기 가면 아가씨들이 있을 거라나? 하지만 30
대 아저씨가 둘이나 있는데 20대의 의견을 따를 리가 없지. 우리는 해변에서 영업 중
인 허름한 포장마차를 찾아냈다. 소라와 고동, 조개등을 시켜 놓고 소주 한잔씩 기울였
다. 여름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우리 이러고 있는 거 알면 경철이 섭섭해하겠다.
-모르게 해야지. 끝가지 모르게 해야 돼.
-영우 형님은 어떻고. 안 그래도 지난번 나이트 클럽도 젊은 사람들끼리만 갔다고
한마디 하시던데.
-야, 영우 형님은 형수님이 날마다 떡 버티고 계신데 어딜 같이 가자 그러냐. 너 형
수님한테 맞고 싶냐?
-그나저나, 윤상이도 불쌍하다. 이 좋은 여름에 엄마 아빠랑 바다 한번 못 가봤으니.
고 녀석 우리가 데려올 것 그랬나?
-그랬다간 시간 뚝고 먹는 거 다 들통났갔지. 사장이 웬 망신이냐. 다들 입 다물어
라.
바닷바람이 향긋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북한에서도 몇 번 이렇게 바닷바람을 마신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옆에는 조카가 재잘거리고 있었고 뒤편에 형님과 형수님이
환히 웃고 있었다. 그렇게 형제 식구가 모여 바다에 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마지막? 꼭 그렇지는 않겠지. 통일이 되면 형님과 내가 조카들을 안고서 이 제
주 바다로 다시 오겠다. "형님 이게 말로만 듣던 남해바다라요. 멋지죠?"라고 자랑스럽
게 말하겠다. 조카의 자그마한 몸을 따듯한 바닷물에 풍덩 던져도 보고, 까르르 웃어대
는 그 녀석의 발가락을 물속에서 간지럽혀도 보겠다.
-용아, 뭐하냐?
-으,응?
-들어가서 한판 더 하자.
-야, 나 돈 다 털렸어.
-형, 내가 꿔줄게. 고스톱 자금쯤은 죽을 때까지 내가 대줄게.
-이런, 녀석. 들어가자!
우린 아침 9시까지 눈에 불을 켜고 고스톱을 친 후 뻗어 버렸다. 오후 2시쯤 눈을 떴
을 때 방안은 온통 담배 냄새와 홀애비 냄새로 진동했다. 재떨이는 꽁초로 수북해져
틈이 없을 정도고 바닥에는 누가 홧김에 던졌는지, 자다가 발로 찼는지 화투가 사방팔
방 널려 있었다.
-야, 일어나자.
두 사람을 흔들어 깨우다 보니 문득 내가 모란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육수는 모자라지 않았을까. 손님들하고 무슨 마찰은 없었을까. 내 얼굴 보려고 달려온
친구들은 허탕 치고 돌아간 것은 아닐까. 경철이 이 녀석은 잘 지내고 있을까. 불과 단
하룻밤을 떨어져 있었는데 모란각이 이토록 그립다니.
-빨리 일어나! 돌아가야지.
-야, 좀 자자. 왜 그렇게 서두르냐?
-형. 난 3시간밖에 못 잤어.
눈을 비비며 도로 드러눕는 두 사람의 배 위에 나는 냉장고에 있던 얼음을 한 움큼씩
올렸다.
-앗, 차가! 이게 뭐야!
-날래 이러나라우! 내레 미치갔어! 빨리 모란각에 가야 돼. 우리 식구들 보고 싶어
미치갔다구!
모란각을 떠나올 때보다 더 빨리, 더 긴급하게, 우리는 제주도를 떠났다. 나를 기다리
고 있는 가족들을 볼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후계자
9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제 모란각의 주방장 모자를
내 동생 경철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여름 내내 방송국은 물론 여의도, 인천, 포
항, 상계, 강남까지 분점을 일일이 쫓아다녔고 더불어 일산으로 돌아와 육수까지 끊여
야 했던 나는 몸이 축날 대로 축나 있었다. 방송 녹화를 마치고 모란각으로 돌아올 때
쯤이면 하늘이 흔들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어딘가 딱히 아픈 것은 아닌데 갑자
기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식은 땀이 흐르는 걸 보니, 이건 분명히 과로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식한 짓이다. 부지런하다고 칭찬받
을 일도 아니고 성실하다고 인정받을 일도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자신의
건강만큼은 돌보고 일하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무식하게도 그 많은 일을 혼자 다 하
겠다고 거만을 떨었던 것이다. 그건 부지런한 것도 성실한 것도 아닌, 욕심일 뿐이다.
어쩌면 내가 믿는 것이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생들을 사랑하고 친
구들을 신뢰한다고 생각했건만, 실제로 내가 믿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다 하지
않으면 안돼"란 생각이 "내가 최고"란 생각으로 왜곡되었고 어느새 나는 모란각의 독
재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내가 전적으로 일임해 준다면, 나는 물론이고 당사자도 무척 편안하게 일을 할
텐데, 나는 끝까지 내가 한다고 우기면서 한편으론 사람들을 내 옆에 꼼짝 못하게 붙
잡아 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건방졌던 것이다. 경철이는 일찍부터 내 옆에서 육수
끓이는 방법을 배워두었다. 그 녀석은 육수를 끓이는 기술적인 방법뿐만이 아니라 육
수에 대한 나의 애정. 그 마음가짐까지도 그대로 습득하고 있었다. 경철이는 진작부터
혼자서 육수를 끓일 수 있었는데 나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그 녀석을 이
도 저도 못하게 옭아맸던 것이다. 일단 경철이에게 육수를 일임하자 모든 것이 수월해
졌다. 혹시나 염려했던 것처럼 육수 맛이 이상하다며 항의하는 손님도 전혀 없었다. 내
가 육수에서 손을 뗏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경
철이가 가시섞인 농담을 건네다.
-형, 이거 손님들이 항의를 하고 난리야.
-어? 왜? 육수 맛이 이상하대?
-아니, 이거 너무 맛있다고, 이렇게 맛있게 만들면 어쩌냐고 막 항의를 하는데.
그 후로 나는 육수에 대한 걱정 근심을 뚝 끊어 버렸다. 경철이 혼자서도 너무나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철이는 요즘 일산 본점은 물론 여의도, 상계, 강남점의 육수
를 모두 혼자서 끓여댄다. 새벽 2∼3시까지 함께 눈이 벌게지도록 고스톱을 치고도, 새
벽 5시면 어김없이 모란각 주방으로 들어가 육수를 끊이는 경철이의 모습을 볼 수 있
다. 경철이 역시 국가대표 운동선수 출신이라 나처럼 합숙훈련때 주방장 할아버지 옆
에서 요리를 거들곤 했었단다. 그래서인지 북한출신 남자답지 않게 요리하는데 거부감
이 없다. 육수를 책임지기 전에도 영업이 끝난 후 모란각 가족들을 위해 미역국이나
단고기탕(보신탕)을 뚝딱 끓여내곤 해서 종업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곤 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육수를 책임지기 위해 경철이가 학교를 휴학하게 된 것이다. 연세대 체육
교육학과에 재학중이었던 경철이는 2학년 1학기를 끝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다. 어서 빨
리 졸업해서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할 텐데, 또 하나의 기회를 내가 빼앗은 듯해서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쨌든 경철이가 끓이는 육수 맛은 기가 막히다. 내가 직접 육수를
끓일 때는 하루에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이젠 아침저녁으로 그 녀석이 끓
인 육수를 한 사발씩 들이킨다. 나는 이제 야윈 몸에 살을 찌우고 움푹 패인 볼에 바
람을 집어낼 생각으로 꿈을 부풀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조금은 볼 만한 얼굴
이 되겠지. 반대로 경철이는 점점 입맛을 잃어가는 듯하다. 육수 냄새가 온 몸에 배기
시작했는지 개들이 경철이를 따라다니고 더불어 경철이의 몸이 바짝 야위어 간다. 비
뚤어진 내 성격은 그 녀석에게 따뜻한 말조차 건네지 못한다.
-넌, 왜 그리 비실거리냐. 도대체 밥은 먹고 사는 거야?
버럭 화를 내는 나를 경철이는 특유의 실실거리는 미소로 놀려댄다.
-아니, 형은 거울도 없어? 자기 몰골은 보지도 않고 왜 내 몸매 가지고 시비야?
꿋꿋이 버텨주는 경철이가 정말로 고맙다. 분점 사장님들도 모일 때마다 경철이의 건
강을 걱정하며 그 녀석을 격려한다. 나의 후계자 경철이는 친동생 이상으로 내게 소중
한 존재다. 우리는 피보다 더 진한 육수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나는 경철이
에게 조그만 단독주택을 사주었다. 마당에는 은행나무와 대추나무를 심고 해가 들 때
마다 빨래를 빳빳하게 말릴 수 있는 소박한 집이다. 그 녀석이 그 집에서 아내를 맞이
하고 아이들을 낳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언제까지 내 옆에서 예쁘게 살아주길 기도한
다.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리는 것일까.

내 동생 경철이의 집안 살림
경철이의 집에 가끔 놀러가 보면 갖출 것은 다 갖춘 한 따뜻한 가정처럼 느껴진다.
그야말로 수저니 밥상이니 냉장고, TV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내 집에는 아직 없는 에
어컨까지돋 버젓이 놓여 있다. 냉장고에도 반찬 등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다. 넘어온 지
1년여밖에 안된, 총각 귀순자의 집이라고는 상상 조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무엇부터
시작해서 어떤 물건을 사 놓을까 하는 고민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어야만 하는데 이상
하다는 궁금증이 솟구치게 만든다. 남한에 왔을 때 처음 보았을 때 비틀거리던 모습과
는 분위기가 전혀 딴 판이다. 동생은 늘상 "나는 형님과 달라요. 부자예요. 형님은 냉
장고까지도 늘 텅텅 비어있고, 벽시계도 하나 제대로 없지만 내 집에는 없는 게 없잖
아요."하고 자신있게 자랑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같은 그의 자랑과 포근한
집안 분위기의 이면에는 뒤에서 말없이 경철이의 운명을 새 삶으로 바꿔주고, 가슴에
'자유와 사랑'일나 글자를 새겨넣어 주며, 오늘에 와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키워주고 계
시는 양아버지 목사님이 계신다. 구로 중앙감리교회 곽전태 감독님(67세)이다. 경철이
가 곽 목사님을 만난 것은 러시아에서였다. 내가 진행하는 KBS 사회교육방송 '행운의
남자 김용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삶의 일기처럼 매일 저녁 들으며 남으냐 북이냐 하
는 운명의 갈김길에 놓여 있을 때 바로 구원의 손길로 목사님을 만났다고 한다. 벌목
장에서 탈출을 시도하여 러시아 어느한 곳에 머물고 있었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
족한 나의 동생은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럴 때 러
시아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목사님을 만났고 그분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주시고 그
분의 도움으로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내 소중한 동생 전경철 '못난이'다. 어쩌면 그렇
게도 못 생겼을까? 남들은 다 잘생기겠다고 애 쓸 때 이 녀석은 낮잠을 잤는지, 아니
면 뒷산에 가서 나무를 했는지? 강계미인 예쁘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지만 이
강계 촌놈 경철이는 강계망신을 지지리도 시키는 몬상에 또 몬상, 못난이다. (하지만
지기 자신은 나보다 자기다 휠씬 잘 생겼다고 우긴다) 이렇게 못 생긴 녀석을 곽 목사
님 내외분은 무엇이 예쁘다고 막내 아들로 삼고 생활에 불편이 있을세라, 사회생활에
조그마한 실수라도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돌봐주시는 걸까. 경철의 아버지, 곽전태 목사
님이 한 마디로 존경스럽고 고맙기만 하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북한에서 탁구 국가대표까지 지내며 17
년간 선수생활을 하던 경철이가 러시아 벌목공을 지원한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에서
TV를 거뜬히 장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희망자들 중에서 운좋게 러시아로 간
셈이다. 그러나 이 '행운아'가 러시아에서 미국영화를 한 번 본 것 때문에 사상범으로
몰려 3개월간 감방생활을 한 것이 탈출을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나에게는 영화
한 편 볼 권리와 자유도 없는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가슴아팠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탈출을 꿈꾼들 넓고 넓은 러시아 대륙 허허벌판에서 받아주고 안아줄 사람도 없었고
갈 길도 없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지 곽 목사님을 만나 "한국의 품에
안겨라. 북에서 교육받는 것처럼 한국사회가 모질지않다. 꼭 살아서 돌아와라. 너의 운
명을 하나님과 내가 돌봐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에 힘을 받아 경철이가
한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한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철이는 불안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경철이는 이번에도 엄청난 행운아였다. 양아버지이자 신앙의 아버지인 곽 목사
님과 그 가족들은 기꺼이 모든 것의 길잡이가 되어주셨다. 어렵더라도 학비 걱정말고
공부해라. 이왕 온 바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고 물심양면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곽
목사님이 주도적으로 만든 '전경철 돕기회'의 회원이 40-50명에 이르러 정성껏 지원을
다 한다. 양어머니(이상화 여사)는 김치, 밑반찬, 쌀 뿐 아니라 철 바뀔 때마다 옷까지
챙겨주시고 매년 집 도배까지 해주신단다. 곽 목사님의 아들 3형제 중 미국에 이민간
큰 형님만은 자주 보지 못하지만 둘 째 주환이형, 셋째 민환이형과는 친형제처럼 지낸
다니 얼마나 좋을까? 경철이는 운동선수 출신답게 연세대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가 2학
년까지 다니다가 잠시 휴학하여 나를 돕고 있다. 신학공부를 해보라는 곽 목사님의 권
유를 따르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항상 떠나지 않는단다. 통일되고 나면 남북간 스포츠
교류에 앞장서고 싶고 꼭 성공해서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잃지 않고 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한 평을 요구하자 경철이가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용이 형을 지켜볼 때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이자 산 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물 많고 정도 많고
열심히 산다. 만원짜리 청바지만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하다." 어찌 보면 경철이도 나
와 비슷한 데가 많다. 경철이도 벌써 스물아홉 살이다. 나는 경철이가 좋다.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더욱 좋다.


보디 가드만큼은 걱정 없수다.
97년 2월,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선배의 아파트 복도에서 괴한들에게 피격됐을 때
의 일이다. 갑작스럽게 신문에서 귀순자들의 안전에 대해 떠들어댔다. 남파간첩이 수백
명에 이르는데 귀순자들에 대한 안전대책이 전혀 없으니 큰일 났다는 말들이었다. 지
금까지 전혀 신경쓰지도 않더니 왜 갑자기 걱정을 해주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날마다 걱정하는 기사만 날 뿐, 그 후로도 대책을 간구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
우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후 97년 여름,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반복됐다. 뉴스속보에
서 망명한 황장엽을 제거하기 위해 북에서 2인조 간첩을 침투시켰다고 떠들썩하게 보
도했다. 게다가 속보는 "간첩들이 황장엽 제거에 실패할 경우 대신 다른 귀순자들을
해칠 가능성이 짙다"며 겁을 주었다. 며칠 후 안기부가 간첩이 노릴 가능성이 있는 귀
순자들에게 경호원을 붙이기로 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제의가 전
혀 없었으니 아마도 나는 간첩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인물인가 보다. 만약 경호원을
여주겠다는 제의가 왔었다 하더라도 나는 거절했을 것이다. 나에겐 휠씬 민첩하고 날
렵한 두 명의 보디가드가 있기 때문이다. 유 사장과 상민이, 내겐 두 사람이면 충분하
다. 두 사람을 내 양옆에 두고 걸아가면 반대방향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짝
긴장한다. 모두들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추리지 못하겠는데……."하며 겁먹은 표
정을 짓는다. 1백80가 넘는 훤칠한 키, 태권도, 유도 등으로 단련된 다부진 몸매, 지금
은 관리소홀로 약간 튀어나온 배만 눈감아준다면, 유 사장의 몸집은 완벽에 가깝다. 고
등학교 시절까지 유도로 날렸던 상민이 역시 만만치 않다. 나 같은 놈 세 명을 합치면
그 놈 한 명이 만들어질까, 엄청난 거구지만 그렇다고 결코 둔한 몸은 아니다. 나이트
클럽에서 춤추는 상민이의 허리는 문어처럼 유연하기만 하다. 이런 두 사람이 내 옆에
버티고 있으니, 간첩이든 뭐든 올 테면 와봐라.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으니 두 사람의 경호실력을 테스트 해볼 기회는 없었다. 나는 다만 믿을 뿐이다.
알아서 잘 해주겠지 하고, 그리고 사실은 웬만한 젊은 남자쯤은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나 역시 운동을 꽤 했으니 그 가닥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하지
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유 사장이 나를 위해 몸을 던지며 희생했던 일이다. 그때 우리
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지하 술집을 나왔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
깨동무를 채로 술집의 좁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가 가까워졌을 때,
그때, 우리가 무슨 노래를 불렀던가, 취기에 몸을 흔든다는 것이 그냥 무게 중심을 잃
어버렸던 것이다. 어깨동무를 하고있었으니, 두 사람의 몸이 한 몸처럼 층계 밑으로 떨
어지고 말았따.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술이 번쩍 깬 유 사장이 본능적으로 내 몸 아래
로 몸을 겹친 것이다. 똑같이 층계 밑으로 떨어졌지만 내가 떨어진 곳은 유 사장의 듬
직한 배 위였다. 내 몸은 찰과상 하나 없이 말짱했따. 반면 유 사장은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쳤고 정강이 살이 찢겨져 나갔다. 후에 유사장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돈 벌
놈 살리고 보자"는 생각이었다나? 유 사장, 상민이. 두 사람 역시 평생토록 옆에 두고
싶은 소중한 동무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을 붙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
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한때 가수 송창식의 매니저로 눈부시게 활약했던 상민이는
누구보다도 꿈이 큰 녀석이다. 그 녀석은 자신의 결혼실에 1만명 이상의 하객이 찾아
오길 기대하는, 그래서 되도록 많은 사람이 그 녀석의 행복을 증언해 주길 희망하는,
세상을 상대로 도전장을 던진 놈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내겠다고 벌써부터
큰소리를 친다. 녀석읠 당당하고 힘찬 모습에 나는 가끔 눈이 부시다. 유 사장은 조금
씩 조금씩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내게 말은 안했찐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미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았기 때문에 붙잡을 면목이 없다. 동갑 친구지만 유 사
장을 "연호야"란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은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손님과 사장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원에서 귀빈들만 드나든느 고급 일식 집을 경영하고 있었
다. 안기부 반공교육을 받으며 가끔 드나들던 그 일식 집에서 유 사장은 단연 내 눈을
끌었다. 무슨 밥집 사장이 그리도 멋지게 생겼단 말인가. 북한에서 밥집이라면 천한 사
람들이 하는 것인데,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말끔히 면도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
유 사장은 멋쟁이 중의 멋쟁이였다. 우린 단숨에 친구가 되었다. 앞으로 몇 번 언급했
듯이, 전국을 무대로 술을 퍼마시며 인생을 논했다. 유 사장은 내가 사기를 당하고 밤
무대에 서는 것을 지켜봤으며, 유치원 문을 열고 고생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드디
어 모란각을 열었을 때, 도와달라는 나의 부탁에 유 사장은 자신의 가게까지 처분하고
달려와 주었다. 두 사람이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잃어 버린 보디 가드를 어디서 구
해야 하나. 이 걱정에 나는 가끔씩 엄살을 떨어본다. 너희 두 사람 없으면 나 죽는다고
우는 소리를 해본다. 그런 나의 엄살이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
시켜 주길 기대하며…….

제4부 아직도 혼자 살아요?

여자 여자 여자
아직도 내가 못다한 얘기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여자에 대한 그리움일 터이다. 서
울 생활 6년이니 낯선 도시에서 독수공방한 지도 꼭 6년이 도니다. 하지만 이불 속이
허전할수록, 옆자리가 썰렁할수록, 나는 더욱더 밖으로 나돌고 애꿎은 동생들과 친구들
만 괴롭히고 있으니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성격 탓이고 팔자 탓이라 자위해 본다. 이
러다 정말로 완전히 총각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내일 모레면 내 나이 마흔이다. 마
흔 되기 전에 내 아이를 두 팔에 안아 볼 수나 있을까.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사실 아
내의 자리 보다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 바로 아이들의 자리다. 초인종르 누르면 "아빠
다!"란 탄성과 함께 우당탕쿵쾅 뛰어나오며 내 가슴을 향해 돌진하는 아이들. 요즘 들
어 부쩍 꼬마들을 보면 가던 걸음을 멈춰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고, 이이를 품에
안고 걸어가는 중년 남자들이 때려주고 싶도록 부럽다. 이런 나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드디어 철이 든다. 장가갈 때가 왔구나"하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때를 놓쳤다는 생
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 아들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를 낳으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을 하려면, 일단 여자를 만나야 한다. 서울 생활 6년동안 여자 한 명 진득하게 사
귀지 못하고 뭐했나교 묻는 분들이 있다. 정말 글너 질문을 받으면 나도 할말이 없다.
나 스스로도 내가 한심하다. 그렇다고 내 주위에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주변에는 남자보다도 항상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여자들은 나를 많
이도 사랑해 주었다. 나이 많은 누나들은 친동생처럼 귀여워해 줬고, 나이 어린 여동생
들은 친오빠같다면 내게 기대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관계 하나도 연애감정으로 발전
한 적이 없으니, 그것도 내 성격 탓이고 운명 탓인가 보다. 남한으로 온 뒤에도 내 주
변엔 여자가 많았다. 방송국 동료들, 연예인 친구들, 이곳 저곳에서 스쳐 지나간 여자
여자들……. 나를 좋아한다며 날마다 공연장으로 찾아오던 팬들. 결혼하자며 날마다 팬
레터를 보내던 여대생들. 왜 그때 나는 이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생각을 못했을까.
순진했던 나는 그들을 그저 고마운 팬들로만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내 팬들은 이제 더 이상 20대 여대생도 아니고 혼기가 꽉찬 직
장 여성들도 아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게 박수를 보내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녕의 아줌마들로 변해 있었다. 나 역시 그 아줌마 팬들이 예전의 아가씨 팬들보다
훨씬 편안하니, 이건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대로 총각
귀신으로 늙어 죽을 생각은 절대로 없다. 나는 곧 한 여자를 만날 것이며 그녀와 죽도
록 사랑하고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야 말겠다. 그렇게 번듯한 가정을 이루어야 통일된
후에도 어머니 얼굴을 뵐 면목이 서겠다. 그렇게 죽을 고생해서 오게 된 남한 땅인데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살고 있단면, 어머니는 아마도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이눔! 내가 남한에 와서 대체 한 것이 뭐냐?
그럼 정말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대체 내가 한 것이 뭔가. 맨손으로 모란각을 일
궈 직원 2백명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키워낸들, TV에 얼굴을 내밀고 유명인사가 된들,
어머니를 태우고 자유로를 씽씽 달릴 벤 승합차를 마련한들, 그런 것들은 어머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진짜로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싹싹한 며느리와 똘똘한 손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제부터 노력하기로 결심한다. 우선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평범히 보아 넘기지 않으려고 한다. 인연의 기회는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서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는 최소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빗
으려고 한다.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릴 것가지야 없겠지만, 헝클어진 머리나 삐죽삐
죽 자란 손톱만큼은 내가 여자 입장으로 생각해 봐도 정이 뚝 떨어진다. 최소한 청결
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한 남자들의 매너를 배
우려고 노력해본다. 정말이지, 뼛속까지 북한 남자일 수밖에 없는 나 김용은 남한 여자
들이 보기에 가부장적이고 뻣뻣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나에게 잘 맞는 여자를 남한
땅에서 찾으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변하는 쪽이 훨씬 더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파이팅!

인연의 시작과 끝
'인연'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
다. 그냥 그녀를 '명자'라는 이름으로 불러보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맺어지려고
노력해도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헤어나려고 발버
둥쳐도 끝내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인생의 큰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흔적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명자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나는 명자와의 인연을 떠올릴 때면 흐뭇해지고 가슴이 벅차
오른다. 명자도 똑같은 감정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명자의 감정에 대해
서는 나도 자신이 없다. 결국 그녀는 내게 연락하길 멈췄고 그대로 나를 잊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나를 잊는다는 것은 즉, 자신의 과거를 잊는다는 것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자는 지금 꽤 유명한 CF 모델이 가끔씩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잇는 얼굴을
지하철에서, 신문, 잡지에서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인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서로 연락은 주고 받지 않지만 이렇게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
지 않은가. 내가 처음 명자를 만낫을 때, 그녀는 반쯤 벗은 몸으로 무대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른바 극장식 나이트 클럽. 그곳에서 춤추는 한 무리의 무희들 중 하
나가 바로 명자였다. 유난히 긴 다리, 하얀 피부, 명자는 아름다운 무희들 중에서도 단
연 아름다웠다. 그 날 나는 그렇게 벌거벗고 춤추는 여자들을 처음 보았다. 황홀함은
저편이고, 오히려 나는 여자들의 벗은 몸을 바라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것
이 자본주의 나라 여인들의 현주소구나. 어떻게 태어난 여자들이길래 이 여자들은 남
자들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춰야 하는 것일까. 슬픔에 빠져 있는 나에게 친구녀석은
엉뚱한 주문을 했다.
-용아, 너. 쟤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 한 명 찍어라.
-엉?
-찍어, 누가 니 눈에 제일 예쁘냐?
친구의 주문을 나는 단순하게 누가 제일 예쁘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망설
임 없이 손가락으로 명자를 가리켰다.
-저 아이, 참 곱다. 미인이 많다는 강계에서도 저런 미인은 드물 텐데…….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춤이 끝나고 무희들이 무대에서 사라졌나 싶더니, 어느새 내가 찍었던 그 아이가 우
리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자예요.
그리고 명자는 내 옆에 앉았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명자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 시간 있으면 나 좀 만나요. 오빠랑 얘기하고 싶어요.
-잠은 많이 잤냐?
-응, 잘 수 있는 만큼, 많이. 정말이야. 오빠랑 얘기하고 싶어.
나는 여의도 어느 커피숍으로 명자를 불러냈다. 대낮에 만난 명자는 밤무대의 무희도
아니고 술집 여자도 아니었다. 그저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평범한 여대생처럼 보였다.
명자는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휘적거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재빨리 말했다.
-나, 그동안 정말로 인간이 그리웠어. 알죠? 그런 곳은 여자를 사람 취급 하지 않는
데라는 거. 처음 만난 남자도 옆에만 앉으면 제 여자 취급해. 우리도 감정이 있는데.
낯선 손이 몸을 더듬어도 우린 그냥 웃어야 해.
여기까지 말하고서 명자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는 신사적이었어요. 날 만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조용히 얘기만하고. 어젠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오빠랑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서 얘기할 수
있다면, 그럼 이런 생활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명자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이트 클럽의 무희 생활이 2년째 접어들면서, 명자의 심신
은 지칠 대로 지쳤다. 가슴에 쌓인 울분을 제대로 터놓고 말할 상대도 없었으니 더욱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 명자의 심정이 내게 그대로 전달됐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다는
생각보다 어린 여동생을 대한느 기분이 들었다. 순간, 그녀가 나를 부를는 방식 그대
로, 나는 그녀의 오빠가 되기로 결심했다.
-명자야, 그럼 오빠 말대로 한 번 해볼래?
-응?
-너, 그 정도 외모면 모델도 가능하고 탤런트도 될 수 있는데. 당장 나이트 클럽 그
만두고 연기학원을 다니는 게 어떻갔어?
내 말에 명자가 피식 웃는다.
-오빤, 내가 그런 걸 안 해봤겠어? 다 실패했어요. 그리고 이젠 나이가 너무 들어서
신인 탤런트에도 공모할 수 없어. 먹고 살려면 나이트 클럽밖에는 갈 데가 없어.
명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방송생활이었지만 방송계가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곳은 아니다.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미모와 연기력, 말 그대로
'탤런트'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두고 있는 곳이 바로 방송계다. 나는 명자를
조금 더 설득하고 싶었다.
-명자야, 내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광고계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으니 혹시 사진
이 있으면 오빠한테 한 장 줘라. 니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때 나이트 클럽을 그만두는 거야. 알갔어?
명자는 뭔가 반박할 듯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가방을 뒤적거려 사진 한 장을
내게 건네줬다. 아마도 친구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인 듯했다.
뒤에는 무시무시한 청룡열차의 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서 명자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이었다. 사진작가가 찍은 홍보용 사진이라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사진 속의 명자는 예
쁘기만 하다.
-한 번 해보세요. 하지만 별 반응이 없어도 실망할 필요는 없어도. 난 이대로도 괜찮
아요.
명자는 별로 기대를 안했겠지만, 나는 적잖은 기대를 했다. 명자의 사진을 가지고 곧
바로 내가 아는 유일한 CF 감독 한 분을 찾아갔다. 그때 나는 막 한 제과회사의 신제
품 껌 모데롤 광고를 찍은 직후였다. 감독님은 내가 갑자기 찾아가자 매우 놀랐지만
명자의 사진을 보여주자 꽤나 꼼꼼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나이가 스물다서이라서 안될 거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글세……, 이 정도의 마스크람녀 괜찮은데. 스물다섯처럼 그렇게 많이 안 보여. 음
음…….가능성 있는 얼굴이야.
-정말요?
-그래.
내가 너무 기뻐하자 감독님은 나를 슬쩍 노려보았다.
-용이 너. 이 여자 누구야?
-도, 동생이야요.
-참말이야요. 얼굴은 예쁜데 하는 일이 없어서, 한 번 광고 모델이나 탤런트에 도전
해 보라고, 그래서 가져온 거야요.
내가 펄쩍 뛰자 감독님이 나를 붙잡고는 심각하게 얘기했다.
-야, 너 총각이 이렇게 처녀 사진을 들고 다니면 어떡하냐. 이 사진 또 누구한테 보
여줬어?
-아니,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어요. 감독님이 처음이야요.
-다행이군. 야, 너 이렇게 여자 사진 갖고 다니다 기자들 눈에 듸어봐. 당장 소문나.
얼른 나한테 넘겨.
-예?
-내가 갖고 있다가 친구 감독들한테 보여줄게.
감독님은 명자의 사진을 펄렁펄렁 흔들어 보였다.
-안되겠다. 이 사진은 안되고, 좀 잘 찍은 거 없냐. 전신사진하고 얼굴 클로즈업 사
진 한 장하고, 사진작가가 잘 찍은 사진을 구해봐라.
-그럼, 되갔시오?
-아니, 아직 확답을 줄 수 없짐나,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볼게. 그러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겠지.
다음날 아침,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명자에게 당장 연
기학원에 등록하라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사진을 제대로 찍어서 내게 달라고 호통을
쳤다.
-오빠.
-됐어. 괜찮아. 힘들더라도 좀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올 테니까. 알간?
-고마워요.
명자로선느 고생의 시작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잘났다는
어린 후배들 틈에서 다시 연기 수없을 시작한 것이다. 나이트 클럽을 다니며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학원비를 충당하기 시작했다. 학원비가 만만치 않으니, 모아둔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일자리가 나타나야 할 텐데. 경제적인 고생도 고생이지만,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명자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나이트 클럽은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다. 네가 나이트 클럽을 다시 나감녀 그길로 오빠로서의 인연을 끊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
다. 그리곤 어느 날 명자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며칠 동안 다시 나이트 클럽에서 일했
다고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오빠가 그렇게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잖아?
-오빠, 그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
-됐다. 이젠 니 맘대로 해라. 이젠 니 오빠 노릇 그만하겠다.
나는 전화가 부서지도록 딸깍 끊었따.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오온 명자는 제발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애원을 했다.
-오빠, 정말이야. 딱 3일만 나갔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 자식들이 마지막 달에
3일을 안 채웠다고 월급을 주지 않잖아. 그래서 월급 받아내려고 할 수 없이 딱 3일만
나갔었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쁜 놈들. 밤의 세계에서 일하는 놈들은 뺏속까지 냉혹하다.
가슴 속에 피 한 방울 흐리지 않는 놈들이다. 3일을 덜 채웠다고 한 달치 월급을 주지
않으려 하다니, 나쁜 놈들. 명자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도대체 명자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다. 가슴 한 구석이 쥐가난 듯 저려왔다. 그리고 며
칠 후, 명자는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왔다는 것이다.
-오빠, 나더러 내레이터 모델을 하래!
-내레이터 모델? 그게 뭐냐?
-아이, 오빤, 왜, 사람들 앞에서 회사 신제품 소개해 주는 모델 말이야. 한 번 나가면
30만원 준대. 괜찮지?
-야, 그거 괜찮구나. 축하한다.
나는 좀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하지만 명자는 미스코리아라
도 된 듯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나도록, 명자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
다. 내가 다시 명자의 얼굴을 본 것은 꼭 반 년 후였다. 어느날 방송국 로비에서 여성
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한 광고에 명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어, 그랬
구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그것을 시작으로 명자의 얼굴은 여기저기서 발견
됐다. 그녀의 얼굴은 신문 사이에 끼어진 광고 전단에도 있었고 백화점 카탈로그에도
있었고, 심지어 TV 광고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곤 했다. 명자가 드디어 해낸 것이
다. 나는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 오래간 만에 수첩을 뒤적거려 겨우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번호는 결번이었다. 호출번호도 돌려보았지만 역시 결번이었따.
모델 일을 시작함과 더불어. 명자는 과거와 완전히 이별했던 것이다. 전화번호를 바꾸
고 옛 친구들과의 인연을 끊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녀의 과거를 알
고 있는 나마저도, 명자에겐 짐이 됐을 것이다. 나는 명자의 결다닝 옳았다고 믿는다.
그녀는 훌륭했다. 완벽한 새 삶을 살기 위해, 명자는 자신의 과거의 발자국을 지워야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내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나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날 우연히 우리가 마주쳤을 때, 서로 모른 척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몇 마디 인
사를 나눌 수 있겠지.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그리고
그 인연 이후 이토록 각자 열심히 살고 있으니, 서로에게 한점 부끄러운 것이 없다. 서
로 당당하게 환히 웃어 주기. 바로 이것이 우리 인연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숙제다.

김용은 바람둥이?
나는 서울에 온 이후는 물론 북한에서도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세간에는 내가 지독한 바람둥이란 소문이 나돈다고 하니, 참 어이없는 노릇이다. 도대
체 어쩌다 그런 소문이 나게 됐을까. 주위 사람들은 "어차피 연예인에겐 그런 소문쯤
은 있어야 제 맛"이라고 말한다. 스캔들이 없는 연예인은 그만큼 인기도 없다나? 하지
만 모란각을 자주 찾는 어르신들마저 그런 소문을 믿는다면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는가. 이런 헛소문도 모두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내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나의 첫 스캔들은 아마도 내가 노사연 씨를 사랑한다는 신문
기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것도 벌써 한 5년 전의 얘기니. 이제 생각하면 오히려 그
리워질 정도다. 하지만 단시 스캔들의 당사자가 된 노사연 씨에겐 얼마나 미안했는지
방송국에서 얼굴도 들기 못할 정도였다.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92년 7월 나는 당시 노
사연 씨가 진행하는 '김승현 노사연의 100분쇼'에 초대손님을 출연했었다. 그때 처음으
로 노사연 씨를 알게 됐는데 참 마음씨가 곱고 이해심이 넣ㅂ은 여성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곤 곧 노사연 씨의 노래 '만남'을 알게 됐다. 무슨 굵직한 실연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 노래가 무턱대고 좋았다. 사랑 타령 없이 멋없게 살다가도 이 노래만
나오면 자꾸 있지도 않은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눈물이 나왔다. 그건 아마도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특히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는 구절에 이르면 어머니가 감상에
젖은 나를 큰소리로 꾸지즌ㄴ 듯하여 화들짝 놀라며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동안
나의 18번은 그렇게 '만남'이 되었다. 덩달아 좋아하는 가수도 노사연 씨가 되었다. 그
때 한 스포츠 신문의 기자가 내게 "노사연 씨르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당연하게
"노래가 좋으니 가수도 좋디요"라고 말했는데, 그 기자가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다음날 조간 신문에 '귀순가수 김용 노사연 짝사랑한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엉뚱한 기사를 쓴 기자에게 화가 났지만 그보다도 나를 오해할 노사연 씨를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이를 어쩐다. 결혼도 안한 처녀에게 이런 스캔들이 나면 어
떡하나, 나 때문에 노사연 씨의 혼사길이 막히면 어쩌나. 순전히 북한 식의 고민을 하
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결혼하고 싶다는 나의 말을 전해들은 노사연 씨는
"부담스럽다. 결혼은 아직 누구와도 할 생각이 없다"며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는 것이
다. 나는 노사연 씨의 라디오 방송 녹음시간에 맞춰 방송국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사과
해야 마음 풀릴까. 조마조마하며 녹음시간 두 시간을 그대로 기다렸던 것 같다. 마침내
녹음이 끝나고 지친 얼굴로 나오는 노사연 씨. 나를 발견하더니 마치 아무 일도 모른
다는 듯 환히 웃는 것이 아닌가.
-저 노사연 씨. 죄송합네다. 사실은…….
-신문 기사 때문에 그러시죠? 괜찮아요. 신문이라는 게 다 그래요.
-?…….
-마음쓰지 마세요. 그런데 하나하나 고민하다 보면 연예인 생활 잘 못해요.
-고, 고맙습네다. 사실 전 노사연 씨가 화가 났을까 봐서…….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용 씨가 그런 말은 했따니, 저도 믿지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아는 건 이렇게 좋은 것이다. 노사연 씨는 신문기사를 믿기보
다 평소 자신이 느꼈던 김용이란 사람에 대한 느낌을 믿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
라고 하든 내 생각을 신뢰하기, 신문기사나 TV보도에 유혹당하지 않기. 이것이야말로
연예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내겐 심심치 않
은 스캔들이 일어났지만 워낙 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어서인지 내가 이렇다
변명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한 예로 내가 처음으로 '머리를 빠는 남자'
를 출간했을 때다. 나는 이화여대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책 출간을 앞두고 내용을
상으하고 문체를 다듬느라 출판사의 여직원들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그때 나는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스스럼없이 그들의 출입을
반겼다. 남자 셋이 살 때였으니 손님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런데 이웃 사람들은 그
렇게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슈퍼마켓에 담배를 사러갔더니 보통 때 이말 저말
곰살맞게 물어보고 "담배 좀 작작 피워!"하며 어머니 같은 말씀도 하시던 슈퍼마켓 아
주머니가 뽀로통 한 것이었다.
-결혼은 안 할 거여?
-아유, 무슨 결혼이요. 아줌마도 잘아시면서 그러세요. 여자들이 절 쳐다나 본답니
까?
-무슨 오리발이여? 집에 젊은 여자들 서너 명이 드나들더구만. 엊그저께도 웬 여자
가 김용 씨 집이 어디냐고 물어봐서 내가 가르쳐 줬는데?
-아유. 그게 다 일 때문에 찾아온 손님이에요.
-일은 무슨? 아니 일할 여자들이 그렇게 예쁘게 화장하고 와?
-아유, 아줌마는! 남한 여자들 다들 그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던데요? 어디 화장 안하
고 다니는 여자가 있습니까?
한동안 실랑이를 했지만 슈퍼마켓 아줌마는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리곤 분을
삭이시더니 내게 아주 귀한 말을 해주셨다.
-아무리 일이라도 남자 사는 집에 그렇게 여자들이 드나들면 안되는 거여. 알지? 그
리고 김용 씨는 연예인이잖아. 한두명도 아니고 그렇게 자꾸 바귀니까 좋게 생각들 하
겠어? 어제 동네 아주머니들이 김용 씨가 이 여자 저 여자 하고 바람 핀다고 수군거리
잖아. 나도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 듣고 보니 하나하나
가 옳은 말이어 . 그렇지, 나는 연예인이지.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되는 거싱다.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
도록 반듯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게 연예인이다. 후에 동숭동에서 '결혼'이란 연극
을 할 때에도 이런 비슷한 스캔들이 생겼었다. 날마다 꽃을 들고 찾아오는 팬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서, 한 번은 커피숍에서 대여섯 명의 여성팬들과 한 시간 정도 얘
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연극이 끝난 뒤여서 시간도 10시가 넘을 정도록 늦은 시간이
었다. 피곤해서 하품은 나오고 팬들은 계속 질문공세를 해대며 나를 놓아주질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만 집에들 들어가셔야죠. 시간이 늦었습네다."라며 재촉했지만 팬
들은 오히려 호프지벵 가자며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어쨌든 빨리 일어서는 게 상책이
다 싶어서 "그럼 호프집에 갑시다"라며 계산대로 성큼 걸어갔다. 카페의 주인 아저씨가
싱긋 웃으며 "김용 씬 여복이 많아서 좋겠어"라며 놀린다. 역시 내일이면 동숭동 전ㅊ
에 "김용은 바람둥이"란 소문이 쫙 퍼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
오자마자, 여성들이 핸드백을 추스리고 옷매무새를 만지는 동안, 그리고 몇몇은 화장실
에 간 동안,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이곤 냅다 줄행랑을 쳤다.
-그럼, 안영히들 가세요. 저 열심히 할게요. 또 봅시다.
누가 쫓아오는 듯 헐레벌떡 달리는 내 모습. 뒤에선 나를 놓친 여성들이 "김용 씨!"를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굽의 신발을 신은 여성들이 스케이트
선수 출신의 나를 무슨 수로 붙잡겠는가. 미안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바람둥이로 만든 최대의 사건은 역시 '룸살롱 사건'일 것이다. 노래방과도 나이트 크럽
과도 또다른 별천지인 룸살롱을 처음으로 가 본 것은 93년. 순진한 나를 꼬신 사람은
지금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남한 사람 유연호 사장이었다. 귀순자 선배님들과 이
북5도청의 간사님들에게 한턱 내는 자리였는데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연호는 "룸살롱이 제일 낫다"고 적극 추천했다.
-그게 또 뭐하는 곳인데?
못미덥다고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있는 내게 연호는 "남한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
이라며 "앞으로 사업을 하려면 꼭 알아두어야 하는 곳"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
찬을 했다. 그래서 유 사장을 믿기로 했다. 남한에 온 이상 남들 하는 짓은 다 해보기
로 하지 않았던가. 대충 들어보니 룸살롱은 노래방처럼 노래를 할 수도 있고 더불어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게다가 돈을 내면 '파트너'라고 불리는 여자까지 한
명씩 붙여주는데 이들에겐 기본적으로 3-5만원의 팁을 주어야 예의라고 한다. 여자들
이 다들 예쁘고 늘씬하며 노래도 잘 부르는 등 분위기 잡는데는 그만이라고 한다. 과
연 유 사장의 설명은 틀림이 없었다. 덕분에 다소 딱딱할 수있었어던 그 날의 모임이
'룸살롱'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때문인지 흥겹게 풀려갔다. 평소에 쑥맥으로만 보였떤
귀순자 선배들이 어찌나 신나게 노시는지 내가 다 뿌듯했다. 아, 저분들에게도 저런 면
이 있었구나 하며 놀라울 따름이었다.
-야, 너는 왜 파트너가 없냐?
노래만 부르는 줄 알았던 유 사장이 불쑥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녀 묻는다.
-아니, 난 됐어. 그냥 재미 있다.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는데 너만 파트너가 없냐? 마담, 어서 빨리 파트너 한 명
데리고 와!
-아니, 난 됐다니깐.
유 사장의 명령에 마담이 잽싸게 움직였다. 사실 이 순간이 두려웠던 것이다. 남들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좋았지만, 여자를 전혀 모르는 내가 파트너를 어떻
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룸살롱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마담이 한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내 파트너라는
생각이 드니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예쁘다!","용아, 니 파
트너 얼굴 참 좋다!"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며 지금 생각해도 영 모르겠다. 그저 그 여자의 키가 꽤 컸으며 허
벅지가 훤히 드러난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ㄴ
데 그 여자가 내 옆에 앉더니 다짜고짜 애교를 떠는 것이 아닌가.
-어머, 김용 씨가 맞구나! 어머, 너무 귀엽게 생겼다!
그러면서 내 허벅지를 마구 더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 왜 이래요?"하며 화들짝
놀라 일어서 도망쳤고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어댔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
람들은 틈만 나면 룸살롱 얘기를 들먹이며 나를 놀려댔다. 나에게도 룸살롱은 공포의
장소였다. 그렇게 대가 센 여자들이 있으니, 나 같은 쑥맥은 두려울 수밖에. 하지만 얼
마 후 또 룸살롱에 가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다함께 가야하는 것이라 나 혼자만 빠질
수도 없고, 한참을 고민하는데 유 사장이 좋은 꾀를 생각해 냈다.
-아유, 난 키 큰 여자가 옆에 앉으면 정신을 못차린다구. 당황스러워. 좀 말이 없고
얌전한 여자가 파트너였으면 좋겠는데…….
-그럼 말이지…….
유 사장이 짜잰 꾀는 파트너가 들어온 순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턱을 살짝 만지고,
마음에 들면 코를 만지라는 것.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간 모든 남자들이 그의 제안을 마
음에 들어했다.
-그래, 참 그렇게 해야겠다. 요즘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도 환불한다는데, 여자들도
그렇게 해야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는 게 옳지.
나는 좀 덜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긴 했지만, 그것도 자본주의 사고방식이
란 걸 조용히 인정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바꿔달라 요구하는
것보다 이렇게 신호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신사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의
사를 전달했더니 마담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세요. 제가 잘 지켜보고 턱을 만지는 분들껜 파트너를 바꿔드릴게요.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 '코'와 '턱'을 혼동했다는데 있다. 마음에 들면 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인데, 나는 거꾸로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두고 게속 '코'를 만졌던 것이다. 한
참 재미 있게 파트너와 얘기를 하려면 갑자기 파트너가 "화장실에 다녀올게요"하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첫 번째 파트너가 돌아오지 않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하지만 두 번째 파트너는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한 10분을 얘기하더니 그냥 나가 버리
는 것이었다. 다음에 들어온 세 번째 파트너 역시 5분을 채 붙어 있지 않았다. 네 번째
파트너는 엄청난 꺽다리 나는 기가 죽어서 계속 턱을 만지며 신호를 보냈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떠날 생각을 안하고 계속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화가 나서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선 김에 마담에게 따졌다.
-아니, 왜 자꾸 파트너를 바꾸세요?
-예?
-마음에 든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자꾸 파트너를 바꾸니까 이거 술을 제대로 못 마
시갔어요!
-김용 씨가 자꾸 코를 만지니까 바꿔드린 거잖아요?
-예?
-맞잖아요? 마음에 들면 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
-아니디요! 마음에 들면 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턱!
-아이구! 생사람 잡지 마세요. 다른 분들은 다들 턱 만지고 일찌감치 파트너를 정했
는데, 김용 씨만 벌써 다섯 명째라구요. 벌써 우리 아이들은 김용 씨한테 단단히 화가
났어요! 바람둥이도 저런 바람둥이가 없다나요?
-예?
-그렇잖아요! 30분 만에 벌써 여자 다섯이 왔다갔다 했으니, 바람둥이가 아니면 누가
그러겠어요?
나는 그제야 내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코를 만지는 바람에 5분 만에 퇴
장해야 했던 그 여자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아이구! 이거 쥐구멍은 어디 있는
거야? 룸으로 돌아오니 다섯 번째로 들어온 꺽다리 파트너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아
유! 난 정말 키 큰 여자는 당황스러운데. 하지만 벌써 다섯 명이나 돌려 보냈으니, 나
는 감히 코를 만질 수가 없었다. 이 여자까지 돌려 보내면 바람둥이 앞에 '천하의' 바
람둥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판이다. 결국 그 꺽다리 파트너를 운명의 상대로 생각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죽음조차 용서 못한 사랑
공원, 영화관, 노래방, 나이트 클럽, 남한 남녀들에겐 데이트할 곳이 참으로 많다. 북
한의 남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배가 아프도록 부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데이트라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고 살고 있으며 부모님과 당이 정해주는 배
필이 천생연분이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남녀관계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사
람 사는 곳에 사랑이 없겠는가. 데이트라는 것은 없지만 '산보'라는 것은 있다. 이 산보
에는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뛰어넘은 은밀함이 담겨 잇따. 야밤에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 비밀스럽게 즐기는 데이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보는 십중팔구
부모와 당이 허락하지 않은 금지된 사랑이다. 깊은 밤, 사랑에 빠진 북의 남녀들은 안
전원들의 순찰을 피해 되도록 음침한 곳으로 몸을 피하낟. 안전원의 눈에 띄었다 하면
그 다음날로 두 사람은 헤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공개 자아비판을 해야 하낟. 당의 허
락이 없는 연애는 사상적으로 느슨한 것이며 혁명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다. 그래도 북의 남녀들은 '산보'를 감행하니, 그들의 사랑은 오죽이나 깊을 것인가. 간
혹 시린 겨울 아침, 두 구의 시체가 대동강 강물 위로 떠오른다. 아까운 젊은 청춘이
또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남한 같음녀 아직도 이런 순애보가 있을 수 있다니, 그들의
못 이룬 사랑을 서글퍼 할 것이다. 하지만 북은 그렇지 않다. 자살은 국가에 대한 가장
큰 배신행위이기에 두 남녀는 죽어서도 죄인이다. 북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까치 까치
살자'는 말이 유행한다. 길게 말하자면 '까치는 까치끼리 살고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살
자'는 속담에서 비롯됐는데, 이는 놈은 신분은 높은 신분낄, 낮은 신분은 낮은 신분끼
리 짝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다. 사랑에서도 까치와 까마귀의 경계는
명확하다. 우선 권력기관에서 일하는 남자 당원들은 호텔 직원, 외화 상점이나 백화점
의 판매원, 의사나 간호원 등 꽤 인기 있는 직업을 가진 신부감을 택할 수 있다. 만약
이 여자가 당 간부의 딸이라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들이 화교나 공장 노동자, 탄광
노동자의 딸과 결혼하려면 당의 저지를 받는다. 여자 집안의 혁명의식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권력기관에 몸담고 있는 자제들은 연예계의 눈에 띄는 미인들을
신부감으로 택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북한도 얼굴만 예쁘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북한에서 연예인의 지위는 꽤 높다. 이는 예술단이 당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으며 형성됐기 때문이다. 또 영화와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김정일의 기호도 많은
작용을 했다. 따라서 인민 배우 출신의 깜짝 놀랄 미모의 여자가 고위 간부의 자제와
결혼하는 것은 북한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모란봉 예술단의 무용수인
내 어릴 적 친구 동석이가 사랑한 여자는, 공교롭게도 화교였다. 현명한 남자라면 여자
가 화교라는 것을 알게 된 즉시, 마음에서 지워 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동석이는 그러
질 못했다. 그 녀석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친구 잘되길 바라는 나로
서는 그 녀석을 말리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녀석이 사랑하는 여자는 나의 누나가 간부
로 일하는 강계 편집물 공장의 노동자였다. 생긴 것이 참 곱고 한 눈에 봐도 참한 여
자였다. 하지만 '화교'라는 신분은 그녀의 집안이 사상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석이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출세는 물론 가난하게 살아야 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도 내겐 그녀가 있어. 적어도 사랑만은 잃지 않잖아.
그렇게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 만큼, 동석이는 절실하게 그 여자를 사랑했다.
결국 동석이는 모란봉 예술단에 결혼 허락을 신청했다. 단장 앞에 불려간 동석이는
"왜 꼭 그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단장의 얼굴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사랑, 그게 무시기 소립네까?
하얗게 질린 동석의 얼굴 위로 단장은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동무, 정신 있수까?
당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이상 결혼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여자는 이미 동석이를 포
기하고 연락을 뚝 끊었다. 하지만 동석이는 그럴 수 없었다. 어느날 불쑥 휴가를 내어
여자가 있는 강게로 가보겠단다.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한 번은 그녀를 봐야겠어.
그렇게 떠난 동석이는 밤이 늦은 무렵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여자
의 오빠들에게 된통 두들겨 맞고 여자는 만나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내 마
음이 무척 아팠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까치는 까치끼리 살아야 한다는
당의 원칙이 부당하다고 생각됐다. 이토록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있는데, 당의 원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한기 위해선인데, 사상이
니 혁명이니 하는 것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들의 사랑을 막는가.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강계행 기차를 타고 동석이의 애인을 찾아 나섰다. 두 사람의 사랑의 도피행을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니, 만약 당에서 발각되는 날이면 나 역시도 징계를 피하지 못했
을 것이다. 과연 동석이의 말이 맞았다. 여자는 도무지 만날 수 없었고 집 주변을 두리
번거리고 있자니 건장한 남자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여자의 오빠들이었다. 도망가는 내
뒤를 여자의 여동생이 몰래 따라왔다. 그리곤 "언니가 오빠들에게 두들겨 맞고 옷도
빼앗아가 속옷바람으로 갇혀 지내니 어쩌면 좋겠냐"고 울먹이며 말했다. 여동생만큼은
언니의 사랑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즉시 동생 편으로 편지를 써 전했다. 속옷
바람이라도 좋으니 아무 걱정 말고 내일 밤 10시까지 강계역으로 나와달라는 내용이었
다. 다음날, 초조한 마음으로 역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오지 는다는 쪽과 꼭 온다
는 쪽에 반반의 확률을 걸어보았다. 그녀의 마음이야 벌써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달리
고 있겠지만, 시퍼런 눈으로 감시하는 오빠들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더욱이 그렇게 가
족을 등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합친다하더라도, 앞으로 두 사람이 헤쳐나갈 일을 생각
하면 앞에 깜깜해질 것이다. 그녀가 오지 못한다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10시 5분
전, 이제 오지 않을 모양이다 생각하며 포기할 즈음이었다. 저만치에서 어떤 여자가 정
말 속옷바람에 끌신(슬리퍼)만 신고 정신나간 여자처럼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동석이
의 애인, 화교 처녀가 분명했다. 나는 당장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오
빠들의 감시를 피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속옷바람으로 뛰어온 그녀는 참
으로 용감했다. 평양 역에 도착하자 그녀는 동석이의 집을 알고 있다며 혼자 가겠다고
했다. 두 사람의 상봉 장면을 놓치는 것은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들러리가 되는 것도
내 취미에 맞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잘 될 겁네다.
그렇게 격려하고 버스를 태워 그녀를 보냈다. 여자는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고맙습네다. 정말, 고맙습네다.
예술단의 합숙소롤 돌아온 나는 저녁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쉬고 있어 . 나도 조
금은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문을
열어보니 동석이의 애인인 화교 처녀였다.
-용이 동무. 어떡해요. 동석 동무가, 동석 동무가 죽어가고 있어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쯤 두 사람이 눈물의 상봉을 하고 어딘가로 도망갔
으리라 생각했는데, 동석이가 죽어가다니?
-어떡해요. 어떡하면 좋아요?
속옷 바람으로 뛰어왔던 그 용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화교 처녀는 아예 합숙소의 내
방에 철퍼덕 주저앉아 정신없이 울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빨리 가봅시다.
울고 있는 화교 처녀를 일으켜 세운 후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동석의 집까지 몇
십분을 뛰었을 것이다. 도착했을 때 동석이의 몸은 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귀를 대보니 분명히 심장이 쿵더쿵덕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늦지 않
은 것이다! 대충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화교 처녀가 동석의 집에 도착 했을 때 이미
동석이는 약을 먹고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설마 설마 하면서 화교 처녀는 물도 끼얹
어 보고 뜨거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보기도 하고, 혼자서 살려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동석이의 몸은 점점 뻣뻣하게 굳어가기만 했다.
-그래도, 네 얼굴을 보며 죽으니 행복하다.
희미하게 정신이 들 때마다 동석이는 이렇게 말했다.
-동석 씨. 죽으면 안돼. 내가 이렇게 왔을데. 제발 눈을 떠봐요!
울며 애워하는 화교 처녀에게 동석이는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점점 그의 몸
이 굳어갔던 것이다. 나는 동석의 몸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설레 설레 고개를
흔들던 의사가 즉시 위세척을 시작했다. 워낙 많은 시간이 흘러서인지 의사 역시 장담
을 하지 못했따. 하지만 숨이 붙어 있다는데 그도 일말의 희망을 거는 듯했다. 그렇게
한식간 정도 위세척을 했을까. 동석이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따. 의사는 안도의 숨
을 쉬고 화교 처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동석이는 살아났다. 이제
는 당도 부모도 두사람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당과 간부의 무관심이야말로 세상에
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두사람은 양가 부모들이 불참ㅎ나 가운데 결혼식을 단행했다.
이제 세상에서 서로를 위해줄 사람은 단둘뿐인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부부를
손가락질하고 끝까지 따돌릴 것이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를 저버리고 당
을 배신한 동석이는 죄인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동석
이는 예술단에 계속 남을 수 있도록 선처가 되었다. 다만 출세나 좋은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내가 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잘 살았다. 어떻게 하게된 결혼인데 잘못
되겠는가. 어렵게 이룬 사랑인 만큼 더욱 애틋하고 아름답게, 그들의 사랑에 책임을 지
리라.

내가 찾는 한 여자
그날은 엄청 행복한 날이었다. 내 신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햇살 아래 눈부시
게 웃었다. 나도 내 얼굴에 잘 어울린다는 하얀 색 턱시도를 차려입었다. 우린 그렇게
손을 잡고 모란봉 꼭대기로 향했따. 신부는 가끔씩 산길이 험한지 다리를 삐끗하기도
했고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도 했지만, 나늘 바라보며 계속 행복한 미
소를 짓기를 잊지 않았다. 모란봉 산길이 이토록 가뿐할 수가! 갑자기 구름 위를 걷는
듯 두 발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신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신부도 나를 놓치기
싫은 듯 두 팔을 내 목에 둘러 단단히 매잡았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두둥실 떠올랐다. 바람과 구름과 비가 우리를 모란봉 꼭대기로 데려다 줄 것이 분명하
다. 나는 눈을 지긋이 감고 내 신부의 촉촉한 입술 위에…….
잠을 깨보니 아파트의 썰렁한 침대 위다. 참 좋은 꿈이었는데. 다시 잠을 자면 그 꿈
을 이어서 꿀 수 있을까. 꿈이라는게 항상 이렇게 감질나게 결정적인 순간에 끝나버린
다. 그후 모란봉 꼭대기에 도착한 나와 내 신부는 어떻게 됐을까. 하객들ㅇ느 어떻게
모란봉 꼭대기에 도착한 나와 내 신분느 어떻게 됐을까. 하객들은 어떻게 모란봉으로
올라왔을까. 결혼 축가를 불러주기로 약속한 가수 최백호 씨는 그곳까지 와 주었을까.
꿈속의 내 신부는 내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녀였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어딘가
에 분명히 있으니 이렇게 꿈속에라도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녀의 허리를 안았을 때 그녀의 이마가 내 코와 턱쯤에 닿았으니 키는 160을 약
간 넘었을 것이다 .항상 강조하듯이 내게 키 큰 여자는 버거운 상대다. 방송국에서 자
주 마주치는 미스코리아류의 장대들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볼도 꼬집어봐야 할텐데 그렇게 키가 크면 내가 사랑해줄 수 있겠는가.
키는 나보다 약간 작은 160이상을 거수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눈이 작기 때문인지, 나
는 굵직한 쌍거풀이 진 시원시원한 눈매의 여성을 좋아해 왔다. 한창 여자에 관심이
많았던 스물여섯 때에는 온통 쌍꺼풀 진 여자만 눈에 띄었다. 한 여자의 눈이 너무 예
뻐서 그 눈을 짝사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쌍꺼풀진 눈에 대한 신비
로움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젠 쌍꺼풀이 업더라도 눈이 크고 눈빛이 초롱초롱하면 그
걸로 족한다. 북한에서도 코는 작고 높은 것을 예쁜 코로 생각한다. 하지만 남한 여성
들처럼 성형수술하여 뾰적하게 세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뾰족한 콧날보다는
오똑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의 코를 좋아한다. 그녀의 몸매는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
했으면 좋겠다. 허리와 팔목 발목 등은 여성스럽게 가늘어야 하지만 엉덩이 허벅지 등
에는 웬마큼 살이 있어야 매력적이다. 다리는 곧고 번듯해야 한다. 2세의 골격만큼은
엄마 골격을 많이 유전받는다고 하니 아내의 몸매는 그만큼 중요하다. 아이가 후에 무
용수나 체육선수가 도니다해도 보족하지 않을 만큼의 몸매, 그런 골결을 물려줄 수 있
는 여자라면 좋겠다. 여기까지 들으면 내가 무척 여자의 외모를 따지는 남자라고 오해
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인정하듯이, 일단 외모에서 거부감
이 없어야 사랑도 해볼일이 아니던가, 게다가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깜짝 놀
라만한 엄청난 미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눈에 예뻐보이는 여성이면 그뿐이
다. 온통 아름다움을 뽐내는 다이아몬드 밭에서 단 하나의 진주알을 발견하고 싶은 것
이다. 또 내 스스로가 볼품이 없으니 아내라도 반듯해야 후에 태어날 아들 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도 못생긴 사람들을 놀리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뒷동산에 나무하러 갔땠냐"는 것이다. 결국 못생긴 건 엄마 아빠 탓이
란 뜻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한 시사잡지의 과학란에 실린 기사를 읽어보니 인간의 사
랑이란 행위에 대해서 꽤나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남자와 여
자가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기초는 '성적 매력'에 기인한다는 것
이다. 그리고 이 성적 매력이란 감정 자체는 "상대방과 닮은 자식을 낳고 싶은 유전자
적 충동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청혼을 할 때 "너와 결혼하고 싶
어"보다 "너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가 훨씬 강렬하게 들리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외모가 내 눈에 띄었다면, 그 다음은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겠
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천천히 조금씩 보아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경우엔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한 여성과 30분만 얘기를 하면 그 여
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낼 수 있다. 가정 교육이 제대로 된 여자인지, 행실에 절제가
있는 여자인지, 씀슴이가 헤픈 여자인지, 인정이 많은지 그렇지 않은지 대번에 알수 있
은 것이다. 이를테면 앉은 모습 하나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른 앞에서도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는 여성, 미니스커트를 입고서도 다리를 오므리는 것을 잊는 여성,
반대로 너무 짧은 스커트를 감당하지 못하며 불안한 자세로 엉거주춤 앉아있는 여
성…….이런 여성은 아무리 교양 있는 척, 당당한 척 말한다해도, 나는 속지 않는다. 몸
가짐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체험과 습득으로 몸에 배인 것이 아니면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다. 한껏 교태를 부리며 점잖은 몸짓을 하려해도 더욱 어색할 뿐이다. 나는 차라리
거칠더라도 솔직하게 원래의 몸짓을 보여주는 여성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겠다. 서울
에 와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요즘 젊은 여성들 중에 제대로 인사할 줄 아는 여성이
꽤 드물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른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법을 귀에 못
이 닳도록 배웠다. 어머니께서는 "인사를 못하는 사람은 나머지 모든 것이 글러먹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살아보니 어머니 말씀은 틀린 것이 없다.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
는 사람이 어떻게 윗사람에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 친절할 것이며, 또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일어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분하겠는가. 인사는 인감됨의
기본이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는 반드시 인사를 해야하는 것도 물론이다. 아무말 없이
쓱 사라지고 또 아무말 없이 쓱 나타나는 여자는 아니올시다. 글세, 여떤 여자들은 그
런 것이 꽤나 멋있고 신비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배워온
가르침은 그런 행동을 버릇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통일이 된 후 어머니와 형님
가족, 그 많은 조카들과 함께 살 생각이다. 그러니 내 마누라는 당연히 웃어른들을 모
셔야 할 것이고 그 많은 조카들의 빨래도 군소리 않고 뚝딱 해치워야 할 것이다. 그러
니 자신의 영역만을 챙기는 개인주의적인 서울 여성들을 바라볼 때면 이게 아닌데 하
며 정신이 버쩍난다. 남한에서도 요즘은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를 모시는 것은 거부한
다고 하니, 과연 나와 결혼하여 대가족에 파묻혀 살 여자가 있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
만 나를 믿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줄 것이다. 꿈속에 나타난 천사 같은 그녀
라면 분명히 그렇게 해줄 것이다. 하짐나 결코 내가 아내에게 보수적인 주부상을 강요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내는 시부모를 모시고 조카들을 챙기면서도 아내로서, 대한민
국의 한 여성으로서의 특권은 모두 누릴 수 있다. 그녀는 원하는 직장에서 신나게 일
할 수도 있다. 직장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그녀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잘 나타내주
는 지표일 것이다. 사실, 직업이 없은 평범한 여자가 나를 더 잘 이끌어주겠지만, 사회
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멋진 직업여성도 나쁘진 않다. 함께 가사를 분담하고 노력한다
면 그런 어려움쯤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모나 집안 배경으로 단숨에
출세한 여성은 싫다. 한단계 한단계 천천히 사회적으로 성장한 여성을 높이 사겠다. 중
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냐가 아닌, 지금까지 어떤 계단을 밟아왔느냐가 아닐까. 그
녀의 기호가 원한다면 담배를 피우는 것도 간섭하지 않겠다. 술 역시 주정이 심하지
않다면 즐겨도 상관없다. 아무리 술이 취하더라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목소리를 높
이지 않으면 합격이다. 내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어색해하지 않고 즐기는 여성이라면
더욱 좋겠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언짢아도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는 자신의 감정
을 드러내지 않고 분위기를 맞출 줄도 알아야 하겠다. 유행을 너무 민감하게 좇지 않
는 한에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으로 멋을 부릴 수도 있다. 사실, 옷차림이나 화장에
너무 신경쓰지 않는 여자도 매력 없다. 화장이 너무 지나쳐 분장이나 변장이 된다면
몰라도, 남한에 온 뒤로 바뀐 생각이 있다면 여성들의 가벼운 화장은 사회적인 '예의'
라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부부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줘야 한다. 내게 아내가 아닌
다른 인간관계가 있듯이 아내에게도 그녀만의 인간관계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인간
관계를 일일이 다 알아내려고 하면 그녀는 물론 나 역시 피곤할 것이다. 부부사이에도
적당한 무관심은 필요한 것이다. 적당한 무관심이 평화롭게 존재하려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야 한다. 내가 밤을 새우고 들어오더라도 드라마에서 보듯 팬티를 뒤집어
본다거나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있는지 검사는 아내는 무섭다. 서로 신뢰한다면
그런 짓이 왜 필요하겠는가. 한마디로 질투는 사절한다. 맹세하건대, 나 김용은 아내의
가슴에 못박을 짓은 절대로 안한다. 아내가 나를 믿는 만큼,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최
선을 다할 것이다. 집에 일찍 들어가지도 못하더라도 반드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
을 하고 있는지를 밝힐 것이다. 아내가 나를 믿는 만큼 그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
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질투심이 심한 여자라면 나 역시 나 스스로를 감당
하기 힘들 것이다. 그 질투가 싫어서 삐뚜로 나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여러분. 어디서 이런 여성을 보았다면, 즉시 내게 연락해주길 바란다. 세상은 이렇
게 넓은데 그녀는 단 한 명 뿐이다. 운이 좋아서 내일 당장 그녀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운이 나쁘다면 평생 못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주기 바란다. 정말이지, 내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귀순자의 눈물

귀순자에 관한 진실
지면을 빌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책을 읽는 독자
분이 나와 같은 처지의 귀순자이거나 실향민 어르신이라면, 잠깐 나의 이런 당돌한 질
문을 한번만 눈감아 주길 부탁드린다. 남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귀순자에 대해 어떻
게 생각하는가. 질문이 너무 광범위하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보겠다. 만약 여러
분 앞에 30대를 갓 넘은 애송이 같은 얼굴의 귀순자가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아직
청년기가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에 북한 사람 특유의 촌티와 깡마른 모습. 그는 어눌
한 말투로 어떻게 북한을 탈출하게 됐으며 고향에는 누굴 남겨두고 왔는지를 덛듬더듬
얘기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처음 남한 땅에 발을 디뎠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으며
요즘 귀순하는 젊은이들의 한결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귀순하고도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귀순자들의 처음 모습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이는 북한이 변화와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갈설하고 본론
으로 들어가자. 남한 사람들은 이 청년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질문에 대답하기 곤
란하다면 내가 대신 대답해보겠다. 우선, 일반적인 감정이라면 측은함과 동정심이랄까.
그런 막연한 감정일 것 같다. 하지만 그 감정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보인다. 어떻게 가족을 북한에 남겨두고 혼자 귀순할 수 있었을까. 북한에서는 귀
순자의 가족은 모두 아오지 탄광으로 보낸다던데, 그걸 알면서 어떻게 혼자 살아보겠
다고 남한에 왔을까. 갑자기 청녕의 어수룩한 얼굴이 냉혹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청년이 정부로부터 받게 될 돈의 액수를 가늠해 보기 시작하낟. 허, 그
청년, 꽤 많은 돈을 벌겠구만. 정부가 집도 사줄 것이고, 웬만한 직장도 잡아줄 것이고.
허! 그 친구 귀순한 덕분에 봉 잡았군만!
모든 독자 여러분이, 모든 남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겟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분들을 탓할 생각도 없다. 실제로 나 역시 정부가 마련
해준 전셋집을 받았으며 '한국관광공사'라는 번듯한 직장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래서 과연 그 청년 귀순자가 완전한 남한인으로 받아들여졌느
냐이다. 정부로부터 집과 돈과 일터를 선물받은 그 청녕은 과연 부족한 것 하나 없는
행복한 남한인으로 변신했을까. 남한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가치척도로 볼 때 이 청년
의 현재는 완벽하다. 그는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전셋집과 전망 좋은 직장과 보상
금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예금통장이 있다. 귀순자이니 직장에서 잘릴 이유도 없고 경
혼과 동시에 자녀들을 위한 교육비도 지급된다. 얼마나 좋은가, 대한민국 만세다! 하지
만 그래서 이 청년은 홀홀단신 남한 땅에서 행복한 삶을 찾았을까. 집이 있고 돈도 있
지만, 결국 이 청년은 남한 사회에서 이도 저도 아닌 북한 촌놈일 뿐이다. 직장에서는
꼭두각시처럼 이 부서 저 부서로 비실비실 옮겨 다닌다. 정 붙이고 마음을 터놓을 직
장 동료는 꿈도 꿀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다.
가족을 버렸다는 자책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순자에겐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열렬한 연애가 아닌 바에야
귀순자에게 결혼은 귀순보다 더 큰 모험이다. 잘못하다 직업적인 중매쟁이에게 걸리는
날에는 돈을 노리는 속물 가족에게 덜미를 잡힌다. 사랑 없는 결혼으로 평생을 후회하
는 귀순자도 있다. 이쯤 되면 이 귀순자는 자시느이 운명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 부모 형제와 헤어진 채 왜 이 낯선 땅에서 홀로 슬퍼해야 하
는가. 차라리 힘들더라도 북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헤쳐나갈 것을, 왜 내가 이 살벌한
남한 땅에 떨어져 있는가. 집은 온기 한나 없이 싸늘하기만하고, 직장은 계속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다. 무능력한 꼭두각시 직원으로 낙인 찍힌 지 오래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
만 둘 수도 없다. 도대체 이 낯선 땅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94년 이후로
귀순자의 실상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94년 새로 개정된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 따르면
그동안 지급하던 전셋집에 대한 조항이 사라지고 대신 7백-1천2백만원의 보상금이 지
급될 뿐이다. 직장을 구해주는 것도 담당형상의 몫으로 미뤄졌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
리는 담당형사가 귀순자 한 사람의 취업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조
금만 기다려 보라는 담당형사의 말에 귀순자들은 목이 빠지게 기다리지만 반가운 소식
은 들리지 않는다. 결국 95년 이후로 귀순자 실업률이 점점 늘고 있다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낳게 되었다. 실제로 귀순자의 22.5%가 일용직으로 하루하루를 근근히 먹고 살
아가고 있으며 한달 수입이 1백만원 이하인 경우가 73.5%, 이중 50만원 이하인 경우도
29.6%나 된다는 사실이 조사로도 밝혀졌다.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 많
다던 보상금은 어디 갔으며 안정된 직장의 약속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문제를 풀
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출발저 로 돌아가야 한다. 어색한 표정, 어눌한 말투의 청년 귀
순자, 그는 왜 남한에 왔는가. 나는 남한 정부는 우선 그 이유부터 다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귀순자의 귀순 동기는 대게 세 가지로 나뉠수 있다. 첫째, 생
활이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파서. 둘째, 북한 사회에 대한 배신감, 체재에 대한 회의, 남
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에. 셋째,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허황된 소문을 믿고 무
작정 남으로 넘어온 경우다. 언뜻 보면 이 세 가지 동기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하나로
집약될 수 있다. 과거 간첩들에게 자수를 권할 때 사용됐던 표어처럼 '따뜻한 남쪽나라
의 품에 안겨' 자유와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일단 남한에 오게 되면 귀순자
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 싶어한다. 결코 혼자 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흔들리는 북한 사회를 직접 경험한 이들은 멀지 않아 통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다시 만날 날도 멀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때
까지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두어 가족들을 편히 모실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
이 내가 남한 땅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귀순자들은 날마다 다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
한의 상황은 이런 귓누자들의 마음가짐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다. 처음에는 모
든 것이 순조로워 보인다. 집과 직장, 적당한 보상금,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귀순
자에겐 아무것도 없다. 처음엔 많아 보였던 보상금도 막상 정착을 위해 활용하려면 터
무니 없이 작을 뿐이다. 게다가 순진한 귀순자를 호리는 사기꾼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이들은 아직 한국 실정에 익숙하지 않은 귀순자들을 홀려 보상금을 탈취하려는 작자들
이다. 귀순자들은 초기에 보상금으로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둥, 어디에 투자하면 두 배
로 불릴 수 있다는 둥 각종 감언이설에 시달린다. 나는 틈나는대로 동료 귀순자들에게
이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94년 이후 귀순자들의 경우는 더 비참하다. 그들
이 이 살벌한 남한 사회의 분위기를 깨달았을 즈음이면, 그들에겐 집도 돈도 맘 붙이
고 일할 직장까지도, 아무것도 없다. 절망한 이들은 오히려 통일이 될까봐 불안해한다.
남한 땅에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낯으로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남한 정부가 북한 귀순자들에게 '씨앗'이 아닌 '꽃송이'를 주려는데 있
다. 꽃송이는 겉으론 그럴 듯하고 화려해 보인다. 그러나 시들면 그뿐이다. 만약 남한
정부가 씨앗을 주었다면, 당장은 어렵겠지만 그 씨앗은 곧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줄기가 자라고 마침내 꽃을 피웠을 것이다. 대표적인 '꽃송이'는 남한 정부가
귀순자들에게 제공하는 각종 공사의 공무원 자리다.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공사는
얼마나 좋은 직장인가. 안정된 월급에 평생 직장,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의 하나다. 대내적으로도 또 내외적으로도, 귀순자에게 공무원 자리를 주었다는 것은
굉장한 자랑거리가 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귀순자에게 적합한 직장인가. 남한 실정
을 잘 알지도 못하는 귀순자가 남한의 행정을 책임지는 공무원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내 개인적인 경우를 말하자면, 솔직히 그렇지 못하다. 그나마 나는 한국 관광공사에서
관광 홍보 역을 맡아서 비교적 즐거운 공무원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인맥과 학맥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북한 촌놈에 불과한 나는 언제나 겉돌기만했다. 윗살함은 하루
가 멀다 하고 바뀌었고 덩달아 아랫사람들까지도 우수수 교체됐다. 하루 아침에 실업
자가 되어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고, 하루 아침에 간부가 되어 승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직장에서 귀순자들이 얼만 버틸 수 있을까. 나는 2년을 버텼짐나 더 이상 적을
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곳은 생명이 없는 직장이었다. 아무리 물을 뿌리고 거름
을 준다해도 한 송이 뿌리 없는 꽃에 불과한 나는 그대로 시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정
부의 빈곤한 상상력을 탓하고 싶다. 어째서 공무원이어야만 하는가. 오직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철조망을 넘어 온 그들이다. 그들이 공사판 막노동이라고 마다하겠는가. 그들
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집가 돼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폼내기 위해서 귀순한 것이 아니다! 94년 이후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공무원 자리도
사라졌다. 남ㅎ나정부는 이제 대학교육까지 받은 인텔리 귀순자를 공장인부로 집어넣
기도 하고 건설현자에서 막노동을 했던 탈북자를 사무직에 앉히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
다. 이 때문에 귀순자들 사이에도 위화감이 조성됐다.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노동으로
한 달에 80만원을 버는 귀순자가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자기와 비슷한 출신의 귀순자
가 연봉 2천만원을 벌어들이는 사무원이더라고 하소연을 해온다. 귀순자의 능력이나
적성이 아닌, 단순히 '운'-담당 형사를 누굴 만나는가. 때마침 괜찮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가 등-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 경우였다. 우리는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잇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적오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디딤돌만을 마련해 달
라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한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은가. 귀순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나아가 통일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통일이
된 후에는 바로 이들이 남과 북을 맺어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북한 사람들
은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해도 남한인들을 곱게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아래 남한 사람들이 북한 땅에 포크레인을 들이댄다면, 그들이 쌍수 들어 환영할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붉한 사람들은 그렇게 호락홀가하지 않다. 91년 귀순하여
지금은 북한문제조사연구소에서 일하시는 고요환 연구위원님의 말씀처럼 북한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고달픈 이유가 '남한 괴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통
일이 됐다고 해서 남한 사람들을 넙죽 동포로 받아들일 것 같은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귀순자들 뿐이다. 귀순자들의 말 한마디가 북한
사람들에겐 확실한 고증이 된다. 남한 사람들이 과연 내 아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내 형제를 어떻게 대우했는가각 그들의 행동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그
들에게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가.

맞선, 그 신랄한 자아비판
평소 아끼던 후배 귀순자인 영선이가 나르 보자고 하여 신촌에서 만났다. 물론 나는
신촌이란 동네를 무척 어색해하다. 신촌의 복잡한 길거리에 5분만 서있으면 머리가 지
끈지끈 아파올 정도다. 약속 장소롤 신촌을 택한 것은 순전히 영선이의 편리를 위해서
였다. 그 녀석의 자취방이 연대 앞에 있기 때문이다. 영선이는 북한 인민군 중위출신으
로 지난 95년 귀순을 했고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따. 그 녀석을
볼 때면 내 야윈 몸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북한 출신답지 않게 큰키에 다부진 몸매, 남
자다운 생김새가 나를 주눅들게 한다. 게다가 항상 사람 좋은 그 웃음이 멋지다. 얼마
나 대견하고 흐뭇한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내 입이 양옆으로 찢어진다. 영선이는
그렇게 지켜보기 즐거운 후배였다. 하지만 오늘 그 녀석의 못브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형, 술사줘!
아직 저녁을 먹기도 이른 시간에 만났는데 이 녀석은 다짜고짜 술타령부터 시작한다.
-소주로 해. 맥주는 싱거워.
영선이 표정이 너무 비장새 보여서 내가 오히려 한 술을 더 뜨기로 했다.
-소주는 뒤끝이 좋지 않아. 양주로 하자.
신촌에서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몇 군데 그럴듯한 술집
에 들어갔다가 엄청난 굉음과 현란한 조명에 당황해하며 황급히 나와야 했다. 그러게
서너 군데를 돌아다닌 후에야 겨우 마음에 드는 술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교적 한
산하고 음악소리도 조용한 곳이었다.
-어때, 요즘?
-기냥길지 뭐.
-공분 잘 되고?
-기냥
주문한 양주가 얌전히 정리된 안주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그러고 보니 이렇
게 양주를 먹는 것도 아주 오래간만이다. 모란각에서 육수를 끓인 이후로 술도 잘 먹
히지 않았다. 기껏해야 늦은 저녁 때 한 두 잔 반주를 곁들이는 것이 고작인네. 영선이
덕분에 이렇게 신촌 땅에서 양주도 먹고. 아무튼 오늘은 좋은 밤이 될 것 같다.
-마셔라.
내가 먼저 영선의 잔을 채워줬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그쓴 양주를 한 입에 툭 털어
넣는다. 그리고 술잔을 입에서 떼는 영선이의 입에서는 '훅'하는 깊은 한숨 소리가 새
어 나왔다.
-너래, 왜 그래?
-형!
-왜 술을 기ㄹ기 마셔?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북에 있을 때, 살면서 자아비판도 여러 번 했었어. 형도 해봤지?
물론이다. 북한 주민으로 성장하면서 자아비판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일이다. 그
리고 북한의 자아비판은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
다. 정치비판이나 사상 비판이 아닌 바에야 자아비판은 그저 자신의 잘못을 많은 사람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정하고 반성하는 차원일 뿐이다. 내가 자아비판을 한 것은 열
일곱 살 때였다. 그때 나는 미성년자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육단에서 술을 마시다
고문에게 걸렸었다. 술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어린 나를 술자리에 끼어준 형님들이 고
마울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고문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고 나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
다 발목을 삐었다. 그렇게 얼마 달아나지도 못하고 고문에게 잡혀서 자아비판대에 세
워진 것이다. 자아비판은 솔직하게 진솔되게 잘 해야 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강제
노동이란 벌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형님과 지도원들 앞에서 비판대에 선
나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었다. 하지만 지금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나는 그 자
리에서 서 있어야 할만큼 잘못을 저질렀었고 그 점을 뼈에 사무치게 반성했다는 것이
다. 억울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여러 자아비판을 해봤지만 이런 자아비판은 처음이야. 형.
-?…….
-남한에도 자아비판이 있다는 거. 형은 알았어?
-말 돌리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보라우. 무신 일이 있었던 거야?
-형, 맞선이라는 거……, 그런 거 본 적 있어?
-맞선 너래 오늘 맞선 봤어?
-응…….
영선이는 두 잔째 양주를 말없이 털어넣었다. 맞선이라…….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나
이가 올해로 서른둘. 나이도 나이지만 귀순 후 몇 년을 홀로 보냈으니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결혼이 하고 싶었을그 녀석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이해한다.
-그런데? 아가씨가 버릇이 없던?
-후웃! 아가씨가 그랬다면 차라리 귀엽기라도 하겠다.
-그럼 누가?
-형, 남한은 북한과 너무 달라. 난 북한 식으로만 생각했어. 맞선보는 거, 그거 당사자
끼리 만나는 것 아니야? 남자하고 여자하고.
-당연하지.
-그런데, 오늘 맞선에 여자가 나오딜 않았어. 여잔 없고 아줌마만 나온 거야. 여자의
엄마라는데. 정말 그 여자 지독했어.
나도 서서히 양주에 손이 가기 시작한다. 영선이가 무슨 말을 할 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맞선 장소에 여자가 나오지 않고 어머니가 나왔다. 이건 남한 사람들의 사고
방식으로 보아도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그 여자가 어디가 갑자기 아팠다면 모를까. 어
느 여자가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 얼굴을 엄마더러 보고 오라고 맡기는가. 뭔가 잘
못된 만남이다.
-그 아주머니, 완전히 나르 공개비판하러 나왔더구만.
첫눈에 값비싸 보이는 외모의 그 아주머니는 첫인사부터 기분 나쁘게 나왔다. 아가씨
가 없어서 당황해하는 영선이에게 사과의 말조차 없이.
"자네가 임영선이란 북한 귀순잔가?" "예, 처음 뵙겠습네다. 그런데, 저 이소희 씨
는……?" "내 딸이야. 그앤 오늘 안 와." "예?" "북한 귀순자라 그러기에 자넬 만날 생
각도 없었어. 그런데 중매쟁이 말이 사람이 아주 똑똑하다 하기에, 한번 얼굴이 나 보
러 왔지." "!……." "그래, 언제 귀순했어?" "몇 년 됐습니다." "집 있어?" "예? 아니, 저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 "쯧쯧, 그 나이에 아직도. 그래도 듣자하니 정부에서 돈 많이
줬다던데. 얼마 받았어?" "예? 아니, 그건……." "벌써 다 써버렸구나! 이런! 그동안 벌
어둔 돈은 없어?" "저, 그런 질문은 ……." "이런 질문이 어때서! 결혼 하려면 이런 건
다 알아야 하는 거라구. 자넨 아직도 남한을 너무 모르는군!" "……" "자가용은 몰고
다니나?" "예" "사업체를 하나 한다고 들었는데, 돈은 잘 벌리나? 한달 수입이 얼마나
되지?" "아직 학생이라서. 사업은 그저 열성을 다할 뿐입니다. 돈은 아직……." "아휴!
이 친구 답답하네! 그럼 도대체 무러 믿고 선을 보겠다는 거야.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그렇다고 인물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돈 얼마나 벌어?" "저,
실례하짐나 제가 벼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이쯤에서 일어나……." "어서, 앉니 못해!
어른이 앉아 있는데 먼저 자리를 뜨는 법이 어딨어? 북한에서 그렇게 가르치던가? 아
직 내 질문이 끝나지 않았잖아!" " 전 아주머니 말씀대로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북한에
서 온 귀순자라서 남한 실정도 잘 모릅네다. 아주머니 귀한 따님을 잘 모실 자신이 없
습네다. 그러니 얘기는 이쯤에서 그냥 끝내는 게 어떨까요." "아니! 이 사람이 머리는
똑똑하다더니 그것도 아니구만! 어른한테 이렇게 말대답이나 하구! 내 말 똑똑히 들어!
그런 꼴로 무슨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남한에서 자네 같은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한다구! 자네가 뭘 볼 게 있나! 건방지게! 그 주제에 결혼을 하겠다구!"
-건방지게! 내 주제에 결혼을 하겠다구!
-임마, 그만해!
-형, 한잔 더 줘. 그 아줌마 말이 틀릴게 하나도 없어. 나 같은 놈은 그냥 가족 없이
혼자 살아야 해. 내가 어떻게 감히 결혼을!
-시끄러!
-정말, 내가 이렇게 못난 놈일 줄 오늘에야 알았어. 자아비판 중에서도 제일 혹독한
자아비판이더라구. 본임 임영선은 돈도 없고 집도 없어, 결혼을 할 자격이 안되는북한
귀순자로서……, 감히 결혼을 하려고 덤벼서 이 사회에너무나 큰 죄를 졌습네다. 물의
를 일으킨 점 깊이 반성합네다. 앞으로는 절대로 결혼할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네다. 절
대로, 절대로…….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오고 있다. 저 녀석의 뺨을 한 대 갈겨야겠다. 오늘의 상처가 저
녀석의 뇌세포에 각인 되기 전에 뭔가 수를 써야겠다. 영선아, 사실은 그게 아니다. 사
실은 원래 니 생각이 옳은 것이다. 비정상의 사회에서 정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너다. 온통 비정상이라서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남한 사회다. 너는 정상이야. 너를 미워해선 안돼! 나는 그날 영선이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영선이는 내가 그렇게 화난 것을 그날 처음 보았다고 한다. 뭔가에 대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나는 그 모든 화르 영선이에게 퍼부었다.
-미친 자식! 앞으로 혼자서 선보러 나갔가간 내가 니 다릴 부러뜨릴 테다.
-형, 난 결혼 안해. 안 한다니까. 이제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을 거야.
-이 미친놈. 내가 무신 일이 있어도 니 놈 하나는 결혼시키고 말 테다. 이 머저리 같
은 놈. 너 같이 멍청한 놈이 결혼 안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결혼하냐?
-난 안해. 안 할거야. 형처럼 혼자 늙어버리지 뭐.
-뭐! 이 새끼. 딱!
-윽!
우리는 그렇게 치고 받으면서 양주 세 병을 깨끗이 비웠다. 그렇게 술이 취해가면서
그 지독한 아주머니에 대해선 잊기로 했다. 영선이는 곧 두 번째 선을 볼 것이다. 그리
고 그 자리엔 꼭 내가 함께 간다.


내 딸은 보여줄 수 없네!
워낙 코미디 같은 기억이라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지만 영선이 얘길 하다보니 생
각이난다. 벌써 2-3년 전의 일이다. 얼떨결에 내가 맞선을 본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졸지에 맞선을 보았는데 모두 다 한결같이 "내 딸은 보여줄 수 없어! 내
딸과 결혼하겠나 안 하겠나? 어서 말하게!"라며 나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내겐 그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불과했기에 영선이와 같은 마음의 상처는 피할 수 있었다. 하
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은 했었다. "귀순자로 남한에서 살아가려니 별일을 다 당한다."
는생각이었다. 93년 신촌 청파극장에서 <결혼>이라는 연극에 몰두해있을 때였다. 연극
의 줄거리는 평양남자와 서울처녀간의 줄다리기 사랑싸움과 결혼으로 이르기까지의 과
정. 뒤로는 남북의 화해를 통한 통일염원이란 뜻있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매일 저녁마
다 팬들의 박수 갈채와 분장실까지 배달되는 꽃다발ㄹ로 뿌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
다. 그때 사인을 해달라며 분장실로 몰려오던 긴 생머리의 20대 아가씨들 틈에 파마머
리의 중년 여인이 한 분 있었다. 풍성한 장미꽃다발을 내게 선사한 그 아주머니는 관
객들이 다 빠져나가고 배우들이 분장을 지울 때까지도 극장 안에 남아 있었다.
-김용 씨.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커피? 남한 사람들은 중요한 할 말이 있을 때 커피를 마시자고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때 나는 막 은은한 향기를 내는 부드러운 갈색 커피의 맛에 반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커피를 마시자고 하면 처음에는 정말 오로지 커피를 마시러 가는 줄로
만 알았었다. 그러나 내가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거리며 마냥좋아한고 있을 쯤이면, 상
대방은 항상 어려운 주제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커피 마시자는 말
을 무서워하기로 했다.
-저,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저는 처음 뵙는데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김용 씨께도 꼭 필요한 얘깁니다. 같이 가시죠.
철부지 20대 아가씨도 아니고 50대 아주머니가 부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딱 30분만
앉아 있어야지. 그 이상은 곤란하다. 난 정말 커피만 마실 테다. 대포 한 잔 하자는 단
원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근처 카페를 찾았다.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는 우선 내 칭찬부터 시작했다.
-아이, 사람이 참 착하게도 생겼따. 연극하는 건 언제 그렇게 배웠어? 노래도 하고 방
송도 하더니, 재주도 많아!
-뭐, 그저, 감사합네다.
-실제로 보니 인물도 꽤 있네. 북에서도 처녀들한테 인기 좋았겠어!
-어휴, 그런 말씀 오늘 처음 들었습네다. 부끄럽습네다.
아주머니의 칭찬이 내겐 편하게 들리지 않았따.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칭
찬이 아닌걸. 카페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주머니의 말투에 희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뭔가
들뜬 듯한, 내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가식적인 말투……. 도대체 이 아주머니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어, 그거!
아주머니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다른 게 아니라, 자네, 결혼할 생각 아직 없나?
-결혼이요?
-뭐, 나이도 벌써 서른넷이라 들었는데, 어서 서둘러야지.
-글쎄요. 전 뭐, 때가 되면 하게 되리라 생각합네다.
-아유! 그렇게 답답하니 아직 장갈 못 갔지. 결혼은 자긱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나서야
할 수 있는 거야. 마냥 기다리고 있다간 좋은 시절 다 지나간다고!
-.
-그래서 말인데. 음, 내가 중신을 좀 서 볼까하고.
-예?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해하자 아주머니는 더 신이 났따. 핸드백을 뒤적뒤적하던 아주머
니는 당장 내 앞에 작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아이야. 예쁘지! 내 친구 딸인데. 나인 좀 많지만….아니, 많지도 않아. 서른 한 살
이야. 자네 나이가 그 정도니 딱 좋구만!
세상에! 내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주제였다. 기껏 내가 추측했던 것은 이 아주머니의
고향이 이북이라던가, 혹은 이북5도민의 며느리라던가, 그래서 향수를 달래고 싶어 나
를 찾았다든가, 그런 것이 전부였다. 중매를 하려고 나를 찾아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뭐해! 한번 봐! 사진 좀 보란 말이야!
-이게, 그 분의 사진인가요?
한 순간이나마 기대를 했던 탓일까. 내 목소리에는 실망이 배어 있었다. 사진 속의 여
자가 못생겨서가 아니다. 사진 자체가 너무 조잡했기 때문이다. 서울처럼 사진관이 흔
하고 자동카메라가 흔한 나라에서, 중매용 사진으로 증명 사진을 달랑 한 장 가져오다
니. 그것도 지하철에 있는 3분 포토에서 찍었는지 인화지 가장자리가 도르르 말려있었
다. 이건 성의 부족이 아닌가.
-아이, 그게. 그 아이가 워낙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아이라서. 워낙 성격이 조용조용
해. 기독교 신자라서 하느님밖에 모르는 아이야. 이 사진 한 장 얻어내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다구.
-그럼, 당사자도 결혼을 원하지 않는 것 아닙네까?
-아유! 아니야. 결혼하고 싶데. 김용 씨 정도라면 결혼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내 귀로 들었는 걸. 어때? 한 번 생각해 보겠나?
-저, 생각은 고맙습네다만, 경혼은 당사자끼리 만난 다음에 가능ㅎ나 게 아닐까요. 이
렇게 사진 한 장으로는…….
-무슨 소리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아이가 참하고, 그리고 집안도 참 좋아. 자네가
결혼만 함녀 사업체 하나 정도는 차려 줄 걸. 어떤가? 괜찮지?
-글세, 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사업체 하나 정도는 차려 준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기분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 이 아주머니는 이 대목에서 마치 좋은 미끼라도 내 놓은 듯 코와 눈을 찡끗거렸
다. 이건 마치 거래를 하는 듯하다. 결혼을 해주면 사업체를 차려주게다고? 딱 잘라 거
절할 수 없었던 것으 대한민국 식의 예의 때문이었다. 원래 북한 식은 싫으면 싫고 좋
으면 좋은 것이다. 내 성격 역시 예, 아니오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렇게 행
동했다간 건방지다는 말을 듣는다. 처음에 한국에 와서 남들의 호의나 제안에 대해 내
가 딱 부러지게 거절하는 것을 보고 한 친구가 말했었다. "용아, 그렇게 하면 욕먹어.
나중에 골치 아프더라도 지금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흐지부지 대답하는게 좋아.
" 흐지부지? 좋아, 흐지부지 작전이다! 어쨌든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아주머니. 제가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네다. 지금 당장은 너무 놀라서 잘
판단이 되지 않고요. 제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럼, 자네, 이 사진 가져가! 사진 가져가게!
얼떨결에 나는 그 자그마한 증명사진을 떠맡게 됐다.
-사진 들여다보념서 잘 생각해봐. 결혼하면 그 집에서 섭섭하지 않게 해줄 거야. 자네
도 이젠 잘 살아봐야지. 안 그렇나?
결혼으로 인한 신분상승, 물질적인 풍요……. 그런 것이 과연 내게 무슨 소용일까. 그
아주머니가 사람을 잘 못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 그 증명사진을 TV근천 어딘가에 팽
개친 후에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혼을 사랑이 아닌 '거래'로 생각해 본 적은 꿈
에도 없었다. 그런 것은 북한의 고위 간부의 아들이 예쁘장한 여배우를 아내로 맞아들
이는 경우, 혹은 한국의 내노라 하는 대기업의 아들 딸이 또 다른 대기업의 아들 딸과
결혼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왔따. 아니면 정치인의 아들 딸이 또 다른 정치
인의 아들 딸과 결혼하는 경우. 사랑의 결합이 아닌 돈과 권력과 배경의 결합. 까치는
까치끼리 살고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산다고 하지 않던가. 나로 말하자면, 나는 까치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여자르 죽도록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와
결혼하고 그녀와 나를 반반씩 닮은 아들 딸을 낳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돈? 그런
건 결혼과는 별개로 생각한다. 며칠 후, 이 일을 잊은 채 여전히 연극으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분장을 지우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용 씨? 나야 나?
-예? 누구신지…….
-아, 왜 글세. 지난번에 카페에서…….
그때서야 그 목소리가 기억났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 일이라면.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합네다. 사실은 제가 너무 바쁘고. 지금은 결혼
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말씀은 고맙지만, 죄송합네다.
-무슨 소리야! 생각해 본다면서? 아니 그게 고작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인가? 자네, 사
람 다시 봐야겠구만!
-아니, 저.
-됐네! 자네가 내 딸을 우습게 만들었구만.
-딸이라니요?
-그 아이가 내 딸이라구! 내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아닌 척했지.
그 아이가 어떤 아인 줄 알아? 인물도 좋고 일류 대학도 나오고, 자네한텐 과분하지.
암. 과분하고 말고.
-죄송합네다. 따님이 그렇게 참하니 저보다 더 좋은 혼처가 있겠지요. 그럼. 이만.
-이봐, 잠깐! 사진을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예?
-아니, 자네가 내 딸 사진을 갖고 갔잖아. 이렇게 거절할거면서 사진은 왜 들고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막무가내로 사진을 떠맡길 때는 언제고.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야 했다. 어쨌든 그 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 아닌가.
-알겠습니다. 사진은 돌려드리겠습네다.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우편으로 부쳐드…….
-이 친구가! 왜 이렇게 예의를 몰라? 손으로 받아갔으면 손으로 돌려주는 게 예의 아
닌가? 자네 북에서는 그렇게 배웠어?
나는 결구 그 일로 그 아주머니를 또 한번 만나야 했다. 엄지손톱 만한 증명 사진
한 장을 돌려주기 위해서. 호텔 커피숍으로 나를 부른 그 아주머니는 사진을 돌려준
다음에도 말이 많았다. 내겐 이미 끝난 일이었는데 그 아주머니에겐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내 다시 한 번 묻겠네. 정말 내 딸이 마음에 없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주머니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초조하게 딸을 결혼시키려는 것일까. 그것도 부르 미끼로 내걸어야 할
정도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중년여자의 아집 뒤에는 눈물겨운 모성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따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네다. 제가 문제죠. 아직 남한 땅에서 기반도 잡지 못
했고, 건강도 더 추슬러야 하고. 결혼을 생각하기는 너무 이릅네다. 제가 따님과 결혼
하긴 너무 부족하죠.
이 말 때문이었을까. 아주머니는 신선히 물러갔다. 증명사진을 지갑 속에 소중히 집어
넣고는 나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이렇게 나의 얼떨결 맞선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시
는 이런 일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마, 역시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어
느 날 받은 한 통의 팬레터가 화근이 되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인 할머닐세. TV로
자네를 볼 때마다 고향 생각이 나. 나를 좀 만나 줄 수 있겠나.' 편지를 읽은 후 나는
곧바로 어머니 생각에 빠졌꼬 뭔가에 홀린 듯 전화번호를 돌렸따. 팬레터를 보낸 할머
니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어디 어디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 만난 팬레터의 주인공은 향수에 젖은 실향민도, 머리가 희끗한 할
머니도 아니었다. 완벽한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는 중년여인이
었다. 전혀 고향 얘기를 꺼낼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서, 아주머니는 난데없이 '결혼'이
란 주제를 꺼냈다.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그 아주머니에게 서른네 살된 딸이 있
는데 내게 주겠다는 것. 아주머니의 얘기는 거창했다. 남편이 몇 년 전 죽었는데 국회
의원을 몇 번이나 했으며 집에 재산을 많이 남겼다는 것. 남편이 몰던 BMW, 볼보, 소
나타 등 차만 3대가 있다는 것. 집이 단독 2층집으로 으리으리하고 빈방이 너무 많아
서 나는 맨몸으로 그냥 들어와 살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따
님을 한 번 만나봐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씀드렸다. 결혼이란느 건 당사자끼리 아
해야 하는 것인데 따님을 보지 않고서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내 딸? 그 아이, 지금 이 커피숍 안에 있어. 자네가 오케이만 하면 당장 보여줄 수
있네.
-예?
-오케이만 해. 그럼 보여줄 테니.
나는 그럴 순 없다고 버텼다.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서려 했지만 어머니는 계속 말꼬
리를 붙잡았다.
-자네, 아직 집 없지?
-예.
-돈도 벌어 둔 거 없지?
-예.
-거봐! 내 사위만 돼봐. 그럼 세상이 달라질 걸. 잘 생각해봐. 자네, 머리 좋다면서!
커피숍 저쪽에서 여자 서너명이 나를 흘끗거리는 것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혹시 저
중에 한 명이 이 아주머니의 딸이 아닐까?
-어머님 따님 저 쪽에 있는 분 아닐네까?
-뭐야! 아니야! 내 딸은 금방 나갔어. 저기 없어. 어서 얘기나 마저 해보자구!
-저기 어머니 닮은 분이 앉아 있는데요. 혹시 따님이…….
-이 사람이 자꾸 왜 딴 얘기만 하나, 내 자네에게 하나 물어볼게. 자네 여자 인물 많
이 가리나?
-예?
-반반하고 땡전 한푼 없는 여자가 좋은가, 얼굴은 좀 못생겨도 돈 많은 여자가 좋은

푹하고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질문 치곤 너무 이상한 질문이다. 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두 쪽 어느 여자도
싫다. 나는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열심히 일하는 커리어 우먼형을 좋아하는데 그
런 여자가 땡전한품 없을 리도 없고, 또 그런 여자가 지나치게 돈이 많을 리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여자는 얼굴도 예쁘다. 미스코리아나 탤런트처럼 객관적
으로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나 김용의 눈에 예뻐 보일 것이란 뜻이다. 열심히 사는 사
람은 다 아름답다. 무려 한 시간 반 동아 그 아주머니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돈 자
랑 자식 자랑에 그 아주머니에겐 짧은 시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일분 일초가 지
루했다. 깊이 생각해보겠다고, 꼭 전화를 드리겠다고 둘러댄 후에야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가보니 아주머니와 내가 미신 음료수 외에도 다른
테이블의 음료수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 돈을 모두 지불하고 그 테이블이 어디냐고 물
었다. 역시, 아까부터 나를 흘끔거렸던 그 여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이다. 분명이 저
중에 한 명이 아주머니의 딸일텐데. 아무리 봐도 다펑퍼짐한 아줌마들일 뿐이다. 아가
씨는 없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커피숍 문을 나서려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옆의 복
도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 그 아주머니가 일행을 대동하고 이리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소리가 그대로 내 귀에 꽂혔다.
-아유, 사람도 쪼그만 게, 볼품이 없어!
-꼬챙이처럼 말라 가지고, 고집은 왜 그렇게 세!
-그만큼 말했으면 지도 알아들었겠지. 전화 안하면 지 손해지 뭐. 재수없이!
나는 커피숍을 박차고 나가는 여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됐어! 엄마, 나 결혼 안
해! 어린아이처럼 소리치는 여자의 뒷모습은 족히 내 몸집의 세배는 돼 보였다. 한눈에
꽉 차고도 다 들어오지 않는 우량돼지(뚱돼지)같은 몸매였다. 숨이 막히고 식은 땀이
흘렀다. 이 얘기를 동생들에게 들려주니 방바닥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웃어젖힌다. 당사
자는 죽었다. 살아나온 심정인데, 듣는 사람들은 재미있기만 한가보다.
-형, 그냥 결혼하지 그랬어. 덕분에 우리도 BMW 한번 타보고. 얼마나 좋아!
-자식들, 다신 말 꺼내지도 마. 그 여자랑 결혼했다간 내 갈비뼈 순서가 밤마다 바뀌
겠다. 결혼하고 날마다 침대 부러져서 침대 바꿀 일 있냐? 밤마다 그 몸무게에 눌려서
빈대떡 될 일 있냐?
-우히히히! 형 죽었다!

자살 충동
-형, 나 죽고 싶어!
-뭐!
잠이 확 달아났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죽고 싶다는 소리였다. 아
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응응거리고 있던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머리가 쭈뼛 일어섰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형…….
-다시 말해보라우! 무신 말을 한 거야?
-아무 것도 아냐. 그만 끊을게.
딸깍. 뚜뚜뚜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친 듯이 수첩을 찾았다. 녀석의 전화번호를 어딘가에
써 두었을 텐데. 미친놈. 사내 자식이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니래 가만
놔두지 않갔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몇 번이나 눌렀지만 녀석은 받지 않는
다. 나는 급한 마음에 그 녁석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다던 또 다른 후배의 집
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너 지금 시간 괜찮지?
-용이 형? 무슨 일이야?
-너 빨리 00내 잡으로 달려가 봐라. 지금 빨리.
-왜?
-글세, 어서 달려가서 얘기 좀 해봐. 녀석이 이상해서 그래.
-음. 그렇구나…….
-뭐 짚이는 거 있어?
-음, 요즘 많이 힘들어 하던데.
-혹시, 사기라도 당한 거야?
-아니, 직장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하더라. 고향 생각도 많이 하고. 외로워서 그러지
뭐.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외로우면 직작 나한테 올 것이지. 혼자서
끙끙거리다 드디어 마음에 병이 난 것이다.
-넌, 도대체 가까이 있으면서 뭘 했어? 야, 친구가 그 지경이 되도록 뭐 한거야?
나는 되려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서, 날래 달려가 보라우. 한동안 계속 옆에 같이 있어봐. 알간?
-알았어. 형, 연락할게. 걱정 말고.
무서운 일이다. 죽고 싶다고 말했떤 그 친구는 인민군 공작원 출신이다. 유사시에 자
폭 훈련까지 받았던 그 친구가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다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건 자살이다! 귀순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본 생각이 아닐까. 자살 충동. 왜 내가 목숨을 걸고 남한 땅에 왔을까에 대
한 회의감. 남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이 꼴로 살려고 부모 형제를 떠났던가란 자학.
이처럼 극심한 자기 혐오에 시달리는 시기는 대게 귀순 후 1년쯤이 지났을 때 찾아온
다.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의 그 대대적인 환영은 거짓이었던가. 따뜻하게 안아주던
어린이들. 이젠 걱정 말라고 등을 두드리던 안기부 직원들. 잘 왔다며 손을 잡아주던
귀순자들. 영웅처럼 모시며 꼬치꼬치 질문하던 기자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다.
드디어 희망을 찾았따고 생각하며 들뜬 그에게 사람들은 '공허'만을 남긴 채 사라진 것
이다. 절망 앞에서 귀순자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희망은 또 다시 북으로 돌아가는 것뿐
이다. 죽더라도 단 한번만 어미니를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죽더라도 내 고향에서, 내
가족 앞에서 죽고 싶다! 94년 탈북했던 나의 후배 김형덕은 한국 생활 2년을 채 견디
지 못했다. 그는 중국화물서을 통해 몰래 북으로 밀항하여다 해양경찰서에 발각됐다.
허름한 옷차림에 초췌한 몰고롤 체포된 그는 "아버지를 만나러 나는 가고 싶었다."는
말만 실성한 사람처럼 되풀이했다. 북에서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평남돌격대(건설단)소
속이었던 그가 남한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막노동뿐이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귀순
자가 늘고 있는 점에 대해서 일종의 체제 우월감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북
한보다 남한이 우월하다. 귀순자가 한국 땅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지켜봐
라"며 호들갑을 떤다. 귀순자에게 집과 보상금이 주어지고 괜찮은 직장이 주어진다.
"거봐, 귀순자에게 얼마나 대우를 잘해주는데." 이렇게 우쭐해하면서 한발 두발 발을
빼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 될 것인가. 전보다 탈북자에 대한 대우가 더
열악해진 상황에서 형덕이와 같은 제2, 제3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날로 커지고만
있다. 꼭 돈 때문만도 아니다. 귀순자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과
의 단절이다.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때만 되면 '우리의 소원은 통
일'을 부르면서 실제로는 통일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더구나 전쟁이란 말을 꺼내면
그저 치를 떨면서 그런 말 하지도 말라며 화를 낸다. 북한의 경우 두메산골의 세 살배
기 어린애까지도 남한이라면 치를 떨면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는데.
남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너무도 무신경하다. 안보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경고하면 보
수주의자로 몰아세우니 강하게 말도 할 수 없다. 사회에 나가면 귀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으로 무시당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남한 땅에 뚝 떨어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할 일을 찾아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지만 '귀순자'
라는 꼬리표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남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희들끼리 위
호하며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귀순자들 끼리도 그렇게 쉬
운 것은 아니다. 특히 94년 이후로 탈북자보호법이 달라진 이후로 귀순자들 사이에도
소위 말하는 '레벨', 즉 상류층과 하류층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는 동시에 귀순한 사람
들 간에도 운명의 장난에 의히여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길이 갈라진다. 귀순자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상처받는 가슴이 있는데, 이런 사정을 툭 터넣고 얘기할 상대를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탈북자가 점점 많아지는 요즈음, 나는 되도록 갓 귀순한 후배들에
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중 내가 하는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정신 똑바로 차
려. 여긴 너 혼자밖에 없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구! 정신 못 차리는 동안 코 베어
가는 게 남한 사회야! 절대로 한국 사람들 흉내내지 마! 니가 한국에 왔다고 한국 사람
인 줄 착각하지 마. 내가 왜 냉면집을 차렸는데! 내가 왜 육수를 끓이고 있는데! 춤추
지 마. 달리지도 마. 아차 하는 순간에 발목을 삔다구. 천천히 계속 걸어. 걸음마를 배
우는 아기처럼.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귀순자 폭주족
어느 하루는 동생 경철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승학이라는 아이 알지요?
-누구? 승학이가 누구야?
-아 거, 이북에서 국경경비대에 있던 도깨비 있잖아요.
-응, 그래. 그 도깨비 생각난다. 왜 그 녀석 장가라도 간다냐?
-장가가면 얼마나 좋을라구요. 그 녀석이 어제 술을 정신없이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앞차를 받으면서 앞 차의 뒷 유리창으로 몸을 뚫고 들어가 부부간에 나란히 타
고 가던 사람들을 덮쳤대요. 그래 가지구요, 파출소에 끌려가 족쇄(수갑)를 찼는데 더
가관인 게 난장판을 만들었대요. 경찰들한데 '내가 무슨 도적질을 했냐, 강도질을 했
냐? 내술 먹고 내 머리로 앞차 받았는데 왜 갔다가 족쇄를 채우냐'하고 떠드는 것을
승학이 전담 형사가 겨우 설득히켜서 지금 집에 와있는데요. 시간 있으면 형님도 면회
좀 와서 저꼴을 한 번 좀 보세요.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어지간해서는 보기
싫은 사람한테 오토바이를 사준다는 말도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앞차를 받
아서 뚫고 들어간 정도면 몸은 둘째 치고 머리가 정상이 아닐 터인데 하는 걱정이 내
머릿속을 온통 채웠다. 일을 대강 정리하고 가양동에 있는 도깨비 승학이네 집으로 향
했다. 귀순자들은 대체로 가양동에 많이 산다. 이 가양동 아파트는 12-15평짜리 서민
아파트로 귀순자들에게 영구임대 해주는 아파트이다. 집안에 들어서니 도깨비는 누워
있고 담담형사는 어젯밤도 한 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밝혔다면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를 보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어찌 보면 형사에게 마음 고생을 많이 시키는 그 녀석
이 밉기도 하였다. 승학이는 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내가 손에 들고 들어간
봉다리를 보더니 "어, 형님 오셨어요?"하고 인사를 하며 반가워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
이 말을 듣지 않는지 기우뚱한다. 상처를 보니 얼굴과 머리에 한 열 곳은 꿰맨 것 같
고, 다리나 몸은 실컷 얻어맞은 놈처럼 퉁퉁 부어올라 있다. 그 못브이 보기에 참으로
안쓰러웠다. 이런 모습을 만약에 부모님이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랴? 그러나
그 녀석은 대뜸 "형님 맥주 사왔어요?"하고 묻는다. 너무 한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
도 하여 눈물이 나올 듯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맥주를 달라고 보챈다. 농담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아파 죽어가는데 무슨 맥주야?
그러자 담담형사가 하는 말이 아침부터 병원을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뿌리치면서
방구석에 누워 맥주를 벌써 한 박스나 까먹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남한 사람들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나 나지 않았을까 오히려 근심이 되어서 안절부절하고 병원부터
찾아갔을 터이다. 그런데도 이 무지막지한 녀석은 "척추도 조금 아프구요. 다리도 좀
아프구요. 머리도 좀 띵한대요!"하면서도 마치 사돈 남말 하듯 얘기했다. 나는 맥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고 빨리 병원에르 가야 한다고 당부했진만 결국은 담당형사의 고생에
위로를 해주고 환자에게는 오히려 북한 식으로 욕지거리를 잔뜩 해주고 돌아왔다. 며
칠 후 이 도깨비 승학이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병원을 다녀왔느냐고 물었더니 녀석이
하는 말, "병원엘 왜 가요? 내가 뭐 병원에 돈 갖다 바치려고 남한에 넘어왔나요?"한
다. 터무니 없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 그래 몸은 좀 괜찮나?"
하고 묻는 말에 "아 거야 뭐 좀 아픈거야 다쳤으니까 아프지요. 세월이 약이니끼니 좀
지나면 낫겠지요"한다. 얼굴에 아직도 푸릇푸릇 멍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녀석은 아주
멀쩡한 놈처럼 태연자약하고 씩씩하기만 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유쾌하게 한바탕 웃
고 나서 앞으로는 절대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했다. 원래 경철이로부터 들은 말은
한국의 폭주족이 울고 갈 정도로 신발에서부터 가죽 점퍼, 오토바이까지 그럴 듯한 것
으로 일색을 다 갖춰놓고, 그 차림으로 '경철이형 갑시다'하면서 경철이를 오토바이 뒤
꽁무니에 태우고 대학(연세대)까지 가던 녀석이란다. 그러니 거이 내가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안탈 녀석이 아니지 않은가. 최승학은 지난 94년 12월에
북한 국경경비대 중사로 함경북도 두만강에서 군사복무를 하다가 중국과 홍콩을 거쳐
자유대한의 춤에 안겼다. 귀순 당시 나이는 22살. 처음에는 평안남도 체육구락부에서
수영 선수 활동을 했던 경력을 살려 수영강사를 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마땅한
직업을 찾기 위해 일은 힘들지만 수입이 괜찮다고 해서 인천 가좌동 진흥공단에 있는
작은 중소기업에서 도금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남한 사람들은 힘들다고 다 그만 두는
직장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안 힘들다'는 반응이다. 그후 녀석은 엉뚱하게도 유흥가에
서 여자를 오토바이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아는 사람이 돈을 많이 주겠다고 제의
하는 바람에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른 채. 그후 슈퍼에서 맥주 박스를 실
어 나르는 배달 일을 하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 맥주 4박스씩을 등에 지고 지하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았으니 강단이 센 녀석이다. 어디 그 뿐인가. 새벽에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뭉터기로 사다가 길거리에 놓고 팔면 돈을 번다고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이
일을 직접 하기도 했고,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생활비가 필요해서 단란주점, 카바레,
디스코테크 등을 누비며 웨이터 생활을 했다. 이때 녀석의 웨이터 이름은 '김건모'와
'차인표'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여기서 그친게 아니다. 녀석의 직업전선은 이후로
도 계속되었다. 젊은 사람들도 겁이 나서 올라가시 못하는 곳에 올라가 현수막을 거는
일로부터 현수막 주문을 받는 영업까지 따지고 보니 무려 17가지였다. 이런 것들이 보
통 귀순자들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고생 속에 승학이는 자본주의를
알게 되었다. 마침내는 나를 만나 요즘에는 대학을 휴학하고 나와 함께 우리의 보금자
리인 모란각의 지하에 자리잡은 커피숍 사장을 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사장이 되었으
니 사장 할 놈도 지지리도 없지. 이런 동생들에게는 더 없느 사랑과 포근한 정이 누구
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남한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귀순자들은 적지
않다. 그들을 위해 나도 우리 모란각 식구들과 함께 적은 힘이나마 지원사업을 준비중
이다.

씨앗
나 역시 낯설고 물선 땅에 아무런 대책과 준비없이 찾아왔다. 단지 한 핏줄 같은 고
국의 땅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내가 여기 와서 씨앗을 심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
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몇십년간 씨앗을 심고 농사를 짓고 꽃을 피웠다. 오늘에 와서
는 메마른 땅이라 모두 다 콘크리트를 쳐버렸다. 그 콘크리트 친 땅마저도 내 땅 네
땅이 있으니 어디가 오줌도 함부로 쌀 여유마저 없어져 버렸다. 이 어리석은 촌놈은
이 넓은 땅에 조그마한 씨앗 하나 심을데 없겠나 하는 자신감에 찼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나의 생각 나의 꿈은 바보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 처럼 느껴
졌다. 이러기를 몇 년. 일산 신도시 어느 한곳에 드디어 씨앗을 심을 땅이 안에게 주어
졌다. 그 땅에 나는 씨앗을 심으며 물대신 많은 눈물로 습기를 주었다. 남들이 밤마다
편안히 잘때면 나는 잠도 잊은 채 그 씨앗을 키웠다. 바로 오늘에 그 씨앗은 모란각으
로 꽃을 피워 이 꽃이 아름다워 서울 뿐 아니라 전국, 아니 미국, 일본까지도 꽃을 십
어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온 내 귀중한 후배들이여! 후배들
이 가지고 온 씨앗을 비록 한 알에 지나지 않고 그 씨앗을 어디에 심을까 하고 몸둘
바를 몰라 망설이겠지만 그 씨앗은 꼭 꽃을 피워 향기를 피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
향기를 피워낼 때까지 잠과 시간을 아껴가며 정성을 다 하기 바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하지 않던가.

소변과 샤워
잠이 모자라는 인생. 어젯밤에도 잠을 잔 것인지 안 잔 것인지 모르는 채 또 하루가
밝아왔다. 몸은 일어났지만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흐리멍덩한 정신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나는 샤워실로 간다. 들어가기 바쁘게 나는 거울도 보지 않고 샤워기의 코
크를 연다. 발잔등에 떨어지는 물은 따뜻하기만하다. 이 정도의 온도면 되겠지 하고 샤
워기를 머리나 몸에 대는 순가 '앗 차가워 왜 이렇게 수돗물 온도가 맞지 않을까?' 그
러나 정심ㄴ을 차리고 보면 수도코크를 연 것 뿐이지 발잔등에 떨어진 물은 수돗물이
안니 내 오줌물이다. 나처럼 이따금 이렇게 본의아니게 잠에 취해 오줌으로 발씻는 사
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잠이 모자라고
흐리멍덩한 기분에 샤워를 하고야 정신을 차리는 나의 인생의 하ㅜ는 시간을 아끼고
쪼개가며 일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귀중한 하루, 추억의 하루이다. 먼 훗날 통일이 되
는 날이면 가치있었던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되리라.

겉보기 속보기?
나는 목욕탕을 자주 간다. 옷걸이가 나쁘다는 비방과 야유를 들을 때가 있다. 먹은
것은 다 어디 가고 어쩌면 그렇게 말라비틀어졌냐고. 하기는 북한에서도 남자는 두리
두리하게 살집이 있고 아랫배가 좀 툭 나와야 간부체격이라고 말한다. 또 이런 몸집을
갖춰야 목욕탕에서도 함부로 반말을 못하고 간부겠거니 짐작을 한다. 하물며 북에서나
남한에서나 명태처럼 땅땅 말라빠진 내 몸은 볼 품이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부러워 한다. 목욕탕에 들어가 옷을 벗기까지는 보잘 것 없는 체격
이라 하지만 막상 사우나에서 물을 끼얹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다른 사람(남자)들의 시
선이 오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쏠린다.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 굳어진 나의 탄력있는
몸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골격과 구조 때문이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는
"멋있네요"라고 탄성을 올리곤 한다. 이 기회에 나는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어
떻게 항상 옷을 벗어 보여주고 자랑을 하겠는가. '겉보기 속보기'라는 속담이 있지만
옛날 속담은 세월과 더불어 한두 가지 씩은 틀린 것이 있거늘 나의 초라한 겉옷 입은
것을 보고 남의 몸까지 함부로 평가히지 말기를 바란다.

굶주리는 나의 아이들, 나의 어머니!
그 옛날 북천강에서 멱을 감던 우리들은 대부분 맨발 차림이었다. 한 겨울철 골목
길에서 팽이놀이를 할 때도 맨발인 아이들이 많았다. 그중 몇몇은 여기저기 구멍난 양
말을 신고 있었고, 또 그중 몇몇은 어디서 얻었는지 제법 커다란 어른 신발을 신고 있
었다. 신발은 앞코와 뒤코가 튿어지기 일쑤였다. 할 수 없이 노끈으로 동동 동여매 아
이들의 작은 발에 억지로 붙잡아두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신발을 신고 살았다. 나이
가 들어 내 가 제법 아저씨란 말을 들을 나이가 됐을 때에도, 길에서 뛰어 노는 아이
들의 신발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결혼한 내 친구들이 불쌍했다. 어떤 친구들은 변변
한 옷이 없어서 오랜 만에 고향에 들린 나를 만나기 힘들어했따. 그런 건 아무렇든 괜
찮다고 생각하는 편한 친구들도 정작 아이의 벗은 맨발만은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부모가 신발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애새끼가 맨발로 돌아다니며 발바닥
이곳저곳에 피를 흘리며 들어올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북한은 그렇게 가난하
다. 그나마 나는 스케이트 선수로 예술인으로, 또 달러를 만지는 무역인으로 살았기에
이런 가난에서 벗어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스케이트 선수 생활을 할 때도 나에0게
주어진 신발은 남한 어린이들이 신다가 질려서 버린 것보다도 못한 것들이었다. 어린
내가 얼마나 그 찢어진 스케이트 신발을 탓했던가. 신발만 새것이라면 미국 코쟁이도
다 이길 것만 같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1년 동안 신문지상에 가장 빈번
히 오르내렸던 화두중의 하나가 북한 식량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이다. 결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난은 이제서야 그 실체를 드러냈다.
세계식량기구가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의 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아메리케어스'도 북
한을 방문했다. 덩달아 미국 방송사인 ABC와 CBS도 그곳에 다녀왔다. 지난 추석 연
휴 때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도 갔다 왔다고 한다. 하짐나 그들이 하는 말은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북한의 식량난을 "엄살"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육을
먹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 지 한국 국민들은 헛갈
릴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월드비전의 앤드류 나치오스 부회장의 말이 가장 설득력있
게 들린다. 그가 둘러본 것은 식량난이 심가한 산간지방이 아닌 고장 평양 부근이었다.
아마도 그가 본 것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좋은 곳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어떤 장면과 마주쳤는가. 그가 평양에서 북쪽으로 2시간 이상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다른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연려난이 심가한 듯하다고"고 추측했다. 또
평양 시내 길거리를 걸어다는데 50세 이상의 노인이나 5세 이하는 너무 허약해서 외출
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말을 북한의 고위 관리로부터 들었다. '최고'라던 탁아소의
실정도 말이 아니었다. 나치오스 부회장은 그곳에 수용된 어린아이의 40%가 영양실조
에 걸려있었다고 증언했따. 어린아이들은 너무 무기력해서 나치오스가 관심을 끌려했
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 또는 미국 정부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다. "북한군의 전력강화 때문에 식량원조를 해선안된다고 생각하는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 아이들을 굶어 죽일 것인가." 그의 말은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는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굶주린 아이들은 정치를 모른다"말과 일맥 상통한다. 그렇
다. 굶주린 아이들은 정치를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너희 어르신들이 군비강화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한-미-일-북의 4자회담에 고분고분 참여할 때까지 미안하지만 좀
굶어달라"고 말한다면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까지 정치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무조건 도와야하는 것이 한 동포, 한 인간이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다. 결국 통일 후에 그 영양실조에 걸린 허약한 아이들을 짊어질 사람은 우
리가 아니겠냐고 묻고 싶다. 어찌 그렇게 모른척하고 정치와 안보만을 따지고 있느냐
고 꾸짖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귀
순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북한에서, 특히 그 지도부를 경험해본 나 이기에, 나는
남한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모아 보낸 감자와 옥수수가 어디로 갈 지 잘 알고 있다. 그
아이들은 그 옥수수를 결코 먹지 못한다. 확실하다. 84년 서울에서 홍수가 났을 때 북
한은 남한에 쌀을 보냈었다. 이 답례로 남한은 경공업생필품을 보내왔다. 쌀배에 실려
온 그 답례품들은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중아당사 직속차량과 사회안전부 기동대차로
옮겨 실렸다. 관계자들은 물건들을 재정경리부창고에 쌓아놓고 상표를 뗄 수 있는 것
과 뗄수 없는 것들로 분류했다. 상표를 뗀 상품들은 중아당 각 부원이상에게 팔았다.
살결물(스킨로션)이 3원, 머릿기름이 6원 50전, 치마 저고리감 1백 50원, 담요 3백 60원
쯤이었다. 이중 담요가 특히 좋아 나도 한 장 샀다. 한 선전부원은 담요를 고이 모셔두
었다 몇 년 후 딸이 시집갈 때 혼수로 줬다. 상표를 뗄수 없는 것들은 외딴 곳에서 불
태웠다고 들었다. 남한이 당초에 인민들을 위해 써달라던 그 답례품들은 이렇게 공산
다의 살을 찌우는데 쓰여졌을 뿐이다.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다르다고 말하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나마 먹을 것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굶어죽는 어린
이가 그렇게 많은데 설마 정부가 모른 척 하겠냐고, 그러니까 우리도 적극적으로 북한
동포들을 위해 힘으 모으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고마운 말이지만 맞는 말
은 아니다. 남쪽 적십자가사가 옥수수 5만톤을 보냈고, 경실련, 전경련 등의 단체가 1
만톤의 옥수수를 모으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북한 천연덕스럽게 수천톤의 옥수수
를 해외에 수출하는 상식 이하의 행도을 보였다. 지난 7월에는 비무장지대에서 총격전
까지 벌였다. 이 일로 한동안 북한 어린이를 도와야한다던 여론도 등을 돌렸다. 탑골공
원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북한동포돕기 행사는 공원내 노인들의 육탄 저지로 아수라장
이 됐다. 노인들은 "먹을 것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대포로 은혜를 갚는 놈들에게 무슨
지원"이냐며 핏대를 세웠다. 나는 모금운동을 저지하는 노인들이 야속하지 않았다. 한
말 한말 옳은 말씀만 하시기에 오히려 송구스러웠다. 북한 식량난을 돕는 문제는 단순
히 굶고 있는 이웃 아이들과 밥을 나눠먹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여기엔 식량문제뿐
만이 아닌 '안보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어떤 논리로 설득한다해도 촉을 겨누고 있
는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
까. 이렇게 그 아이들이 굶어 죽도록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냉면 집 사장으로 날
마다 남아 돌아가는 음식을 보고 사는 나는 그만큼 더 가슴이 아프다. 손님들이 먹다
남긴 김치 한 접시, 냉면 반 그릇을 다 모은다면 고향 어린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
을 텐데. 이곳 남한 아이들은 유난히 군것질도 많이 하고 오히려 비만아동들이 많아
걱정이라는데. 그들은 왜 이 한세상 잘못 태어나 그리도 말라가는가. 나는 내가 직접
트럭에 모란각 만두와 냉면을 싣고 강계로 달여보는 꿈을 꾸었다. 되도록 많은 음식을
실어야하니 덤프 트럭 5대는 빌려야할 것이다. 먹을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팬티만이라
도 몇천장 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칫솔과 치약도 실어야겠다. 그런데
강계에 도착해서 물건을 나눠주고 돌아올 때쯤이면 휘발유가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휘발유를 구할 수 없는 곳이니 여기서 떠날 때부터 가져가야 한다. 휘발유 싣고, 옷 싣
고, 음식 싣고 그렇게 몇십시간을 달려간 내 덤프트럭이 과연 몇 명의 북한 어린이를
구할 수 있을까. 달려가다가 인민군의 단속에 걸리면 모조리 빼앗길 테지. 빼앗긴 구호
물품은 다시 잘 포장되어 군대로 보내지겠지. 이렇게 고향 땅의 아이들을 구해보려던
내 꿈은 실패로 돌아간다. 어쨌든 그 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옥수
수도 감자도 쌀도, 결코 보내서는 안된다. 북한의 본심은 아직도 '적화통일'이다. 이것
만이 최대의 목표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굶어죽든 말든, 우선 가장 배부릴 먹어야 할
사람들은 군인들이다. 항생제 등의 기초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주민들도 의약품을 필요
로 하지만 우선 군인들이 먼저다. 남한이 의약품을 보낸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들 역시
군인들이다. 그렇다면 군인들이 손 대지 못할 것들을 생각해보자. 군인들은 흥미가 없
고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들은 없을까. 아이들이 먹는 분유. 연유 등이
어떨까. 아이들의 작은 발에 맞는 운동화는 어떨까. 아이들의 감기에 잘 듣는 기침약은
어떨까. 이런 것들은 인민군들이 가져간다 해도 별로 쓸데가 없지 않을까. 그리고 농사
를 지어야 할 농민들을 위해 호미와 괭이 등의 농기구를 보내는 게 어떨까. 농민들이
신을 장화를 보내는 게 어떨까. 농사를 지어 어서 빨리 곡식을 생산해야할 이들이 신
발이 없어 논밭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쌀도
옥수수도 아닌, 단단하게 잘 만들어진 신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해 성금
함에 백원짜리 동전 한닢을 넣어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부탁한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에
서 대포를 쏘고 남북적십자 회담을 거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은 북한 동포에 대한 애
정만 있다면, 무엇이 무서우랴. 언젠가 부둥켜 안게 될 한 민족, 한 가족인데…….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점 세가지
그래도 아직 북한은 부자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날더러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굶주림으로 50만명이 사망한 북한이 어떻게 남한보다 좋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으로 볼 때 남한은 북한보다 월등하다. 언뜻보기에 자본주의라는 것이 워
낙 기초없는 체제라서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공산주의보다 훨씬 튼튼한
질서를 갖고 있다. 사람은 이념이나 체제 안에 갇혀 있을 때보다 마음대로 살도록 그
냥 내버려졌을 때 훨씬 자신의 한계와 테두리를 잘 깨닫는 듯하다. 남대문이나 동대문
의 새벽시장을 가보면 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온 세상이 잠자고 있을 때 땀 흘리
며 일하는 젊은이들. 누가 그렇게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한국의 얼굴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사는 6년 동아 내가 그리워한 북한의 얼굴이 따로 있다. 그 얼굴들은 좀처럼 남한에서
는 찾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다. 어쩌면 좀 더 오래 전. 호랑이가 담배 피던 옛날에는
남한에도 그런 얼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졌다. 아마도 물
질적인 풍요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이유 중 첫 번째는, 그들이 쓰는 언
어에 빈말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남한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언어에 많이 희롱당했다. "밥 먹었어요?"란 말에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밥을 사주고 싶
어하는 줄 알고 "아직이요"라고 말하며 고마워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어유, 배고프
시겠네요"하며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닌가. 북하에서 "조간 잡샀수?", 혹은 "밥 먹
었난?"은 만약 안 먹었다면 지금 같이 먹자는 뜻이다.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이 말을
마치 "안녕하슈","잘 지냈어요?"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명함을 건네주며 "꼭 전화
하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를 헛갈리게 했다. 꼭 전화하라는 말에 나는 안하면 안
되는 줄알고 정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누구인줄도 기억하
지 못했다. "김용 씨,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도 이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진짜로 놀러오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남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열심히 사세요"란 말도 나를 헛갈리게 한다.
내게 "열심히 일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들 앞에서 열심히 일하겠다. "열심히 공부하세
요"라고 말한다면 되도록 공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겠다. 하지만 날더러 "열심히 사
세요"라고 말함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이 열심히 사는 모습인지 나
는 정말 모르겠다.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이유 두 번째는 인간관계의 성숙과 느림에
있다. 한국은 지나치게 빠른 것을 좋아한다. 음식은 빨리 만들어 지는 패스트푸드가 최
고고 옷도 금방 백화점에 출시된 신상품이 최고다. 옛날 노래는 다 구식이고 옛날에
샀던 신발은 다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도 옛 사람보다는 새 사람을 원한다.
사랑도 하루면 뜨거워지고 또 하루가 지나면 차가워진다. 하지만 북한에는 아직도 옛
것에 대한 향수가 있다. 새 신발보다 헌 신발의 가치를 아는 나라다. 인간관계도 이렇
게 '지금'보다는 '옛날'을 중요시 여긴다. 오늘 만난 사람이 아무리 좋았어도 어제 만난
친구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난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내 어깨를 툭
툭 치며 친한 척을 하는 사람들을 볼 대 무척 당황한다. 처음 만난 날 할 얘기 안할
얘기를 죄다 털어놓은 사람도 곤혹스럽다. 이런 사람들은대부분 얼마 후 전화를 해보
면 이미 나 같은 존재는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일 뿐. '누
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때 길게 뜸을 들인다. 그리고 결코
그 친구를 전부 알려고 덤비지 않는다. 너무 가까이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
천히 사귄다.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 오래 묵힌 된장처럼 진하다. 자주 만나지 않더라
도 서로를 믿으며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 좋은 말로 귀를 간질일 이
유도 없다. 마지막으로 북한이 남한보다 좋은 세 번째 이유는 안면몰수하는 사람이 없
다는 것이다. 툭하면 삐지는 남한 사람들. 여자들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더욱 웃긴 것은 이렇게 삐지면 우연히 만나도 나를 모른척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내
얼굴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금새 못 본척 얼굴을 돌린다. 마치 못볼 것 봤다는 듯이. 북
한 사람들도 물론 싸우고 토라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안면몰수하는 법은 없다.
싸운 것은 싸운 것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라도 길에서 만난 아
는 사람을 모른 척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는 것이다. 가진 것
많고 먹을 것도 많은 남한이지만 솔직함과 담백함. 인간밀에서는 북한이 한 수 위다.
비록 투박한 말투를 쓸 망정 가식적인 예의는 없으며, 먹지 못해 굶주릴지언정 친구를
생각하는 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아직도 부자다.

촌놈 귀순자를 감동시킨 남한의 명작들
내겐 좀처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기회가 없다. 남한에 와서도 보통 사람들처럼
영화표를 예매해서 영화를 본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모란각 지하카페에서 고스
톱을 치다가 누군가 틀어놓은 비디오르 얼떨결에 보기는 했어도 말이다 .아직 어떤 책
이 좋은 책이고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북한처럼 모
든 것이 당의 지시아래 일률적으로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살다 온 나는 모든 책이 놀랍
고 모든 영화가 충격적이다. 그리고 영화이름과 배우 이름은 아무리 외워두려고 해도
도통 외워지지 않는다. 곱고 잘빠진 것이 다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촌놈
귀순자를 감동시킨 몇몇 작품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나는 그 작품들이 나를 감동시켰
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명작'이라고 감히 칭해본다. 내 기준이 남과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의외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북한 촌놈을 감동시킨
것이라면 북한 전체를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을 것이다.
씨받이(영화) 모스크바로 출장을 갔을 때 누군가 몰래 구해온 이 비디오를 보았다. 남
조선 영화라고 해서 뭔가 건전치 못한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 영화는 북한 주민
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만한 한국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를 잇는 것
이 여성의 가장 큰 임무였던 조선시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한 여자를 위해 대신
씨를 받으러 또 다른 여인. 두 여자의 미묘한 심리전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 그러
나 씨받이는 아이를 낳은 후 쫓겨나고 결국 아이를 그리워하다 목매달아 자살한다. 영
화보다 더 나를 감동시킨 것은 씨받이 역을 맡은 배우 강수연이었다. 그녀는 미인이
많다고 소문난 강계에서 최고 미인에 속할 여자였다. 남남북녀라고 남한에는 미인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 강수연 같은 미인이 있다니. 남한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불러일으
킨 영화였다.
여명의 눈동자(드라마)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잃어버렸던 역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꿰맞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제 식민지시대 정신대로 착출된 한 소녀의 이
야기에서 시작하여 그 소녀가 한국전쟁을 겪고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변해
가는 모습, 동시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불타는 한 남자와 자본주의에 길들여지는
또 다른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를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를 통해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남한에 내려와 벌였던 갖가지 행태. 제주 4.3사
건, 그리고 북한에서 말한 제2전선이 빨치산의 사투였다는 것 등등. 이 방대한 역사를
한편의 드라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도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다.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
되는 수요일과 목요일이면,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들어갔다. 드라마 보는 재미
와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에 듬뿍 빠졌던 것이다.
모래시계(드라마) 한국 현대사는 내게 여전히 백지로 남아있을 때였다. 여명의 눈동자
팀이 이번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길래 조금 흥분했었다. 그 내
용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여명의 눈동자 팀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
다. 과연, 모래시계는 대단했다. 첫 방송부터 학생 데모대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웠
다. 북한에서는 이들이 공산주의를 원하며 남조선을 비난하는 시위대라고만 알고 있었
다. 하지만 학생들이 시위하는 이유는 그것과 또 달랐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원하는 것
도,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민
주주의'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광주항
쟁과 같은 집단학살로 끝나다니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설) 책을 다 읽은 후 이 책이 단지 소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역시 읽는 동안의 즐거움은 대단했다. 한국인 천재 물
리학자 이휘소가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고 정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가 결국 암살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북한의 역할도 비중있
게 다루었다. 과연 그날이 올지 모르지만, 꼭 핵무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처럼 남과
북이 공동으로 뭔가를 개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버지(소설) 지난 한여름 밤, 육수를 끓이면서 이 소설을 단숨에 읽었다. 육수를 끓
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육수통에 뚝뚝 떨어졌을 정도다. 한 가정의 기둥, 그
아버지들이 이렇게 힘없이 흔드리다니, 아내는 남편을 무능하다 생각하고, 딸은 냉랭하
기만 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덜컥 암을 선고
받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한 것은 가족을 위한 보험료와 자신
의 신장과 두 눈뿐. 언젠가는 나도 이런 모습의 아버지가 될까. 이왕이면 아내와 자식
들로부터 사랑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이렇게 외롭게 혼자 죽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는 않다.

에피로그- 인생에는 마침표가 없다.
이렇게 해서 내 인생 세 번째 자서전이 완성됐다. 사실 앞서 냈었던 두 권의 책은
남과 북의 실상을 알리고 두 나라간의 차이점을 좁히려는데 중점을 두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자서전이 아니다. 정말 나를 주인공으로 쓴 책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
책은 객관성을 잃었다. 이 책게 담긴 내용은 순전히 김용이라는 사람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담았을 뿐이다. 덕분에 이 책을 쓴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
다도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 감정 그대로를 안고서 이 글을 썼다. 내가 주인공이
니 남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고, 생각나는 그대로 써서 나 자
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그것은 대단히 색다른 체험이었다. 생각해 보라. 공
산주의하에서 자란 내가 어찌 나 자신만을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겠는가. 자유에 나라
에 온 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나를 하찮게 여기는 버릇은 여전했다. 하다
못해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내가 뭘 먹을 것인가 보다 남들이 뭘 먹는지가 더 신경이
쓰였다. 남들이 모두 김치찌개를 먹겠다하면, 나는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도 어쩔 수 없
이 김치찌개를 시켰던 것이다. 나에게 '나'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은 '냉면'이었다. 육수
를 끓이며 지샜던 그 수많은 밤을 통해 내 인생 처음으로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육수 맛도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의 미완성 상태의
김용을 청산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김용으로 성숙해가면서, 드디어 사람들에게
나의 육수를 자랑할 수 있었다. 맛있습니다. 진국입니다. 드셔보세요. 그렇게. 그리고
이제 이 한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여기엔 모란각 육수만큼의 맛과 향이 배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다 맞출 수는 없겠지만, 읽고 난 뒤 적당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면 족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간해주신 큰 바위 출판사의
이영수 사장님과 김주혁 주간님께 감사드린다. 두 분은 더운 여름을 핑계 대며 차일
피일 마감을 미루는 나를 잘 참아주셨다. 멀리서 지켜봐 주신 두 분의 인내가 없었다
면 이 책의 출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운 어머니와 나를 지켜봐 준 모든 분들게
이 책을 바친다. 97년 가을남자, 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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壺中居. 너무 외로워서 혼자 사는남자........김용
壺中居. 너무 외로워서 혼자 사는남자........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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