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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해학을다룬작품
작성자명관**
조회수1774
등록일2007-04-07 오후 4:04:02
풍자와해학을다룬작품
kje12700 (2007-04-03 22:24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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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덕여왕의 지혜
27대 임금 덕만은 시호가 선덕여대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년(63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16년 동안 다스렸다. 미리 알아낸 일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 일은 이렇다.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 서 되를 보내 오니,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다."
이내 뜰에 심었더니 그 꽃이 피어서 떨어질 때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두 번째 일은 이렇다.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 떼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상스럽게 여겨 왕에게 물으니, 왕은 각간 알천, 필탄 등에게 급히 명해, 정예 군사 2천을 뽑아 서울 서쪽으로 급히 가, 여근곡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터이니 덮쳐서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군사 천 명씩 거느리고 서울 서쪽으로 탐문하니, 부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병사 5백인이 거기 와서 숨어 있으므로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란 자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어서 포위해 쏘아 죽였다. 또한 후속 부대원 1천 3백 인이 오거늘, 공격해서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 일은 이렇다. 왕이 병이 없을 때,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라." 신하들이 그 자리를 몰라 어느 곳인가 물으니, 왕이 말했다.
"낭산 남쪽이니라."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거늘,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십여 년 뒤에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다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했다. 그래서 대왕이 신령스러운 줄 알았다. 그 당시에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째서 모란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런 줄 아셨습니까?&uot;
왕이 말했다.
"꽃은 그렸으면서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줄 알았다. 그것으로 당나라 황제가 짝 없는 나를 놀렸다. 개구리는 성낸 모습이라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은 여자 성기이다. 여자는 음이라서 그 색이 희다. 흰색의 방위는 서쪽이다. 그래서 병사가 서쪽에 있는 줄 알았다. 남자 성기가 여자 성기에 들어갔으니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쉽게 잡을 줄 알았다."
이에 신하들이 그 뛰어난 지혜에 탄복했다. 세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줄 알아서인가. 선덕, 진덕, 진성이라는 이들이 세 여왕이다. 당나라 황제도 알아맞추는 능력이 있었다. 선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 스님의 전기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삼국유사>
2. 김효성의 기지
김효성(金孝誠)은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다. 부인도 또한 질투가 지나치게 심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공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문득 보니 부인의 자리 옆에 검정색으로 물을 들인 모시가 한 필 놓여 있었다. 이에 공이 물었다.
"저 검정 모시는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이기에 부인의 자리 곁에 놓아두었소?"
그러자 부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하였다.
"당신이 뭇 첩들에게 혹하여 본 아내를 원수처럼 대하시기에, 저는 결연히 중이 될 각오를 하고 물을 들여 놓았던 것이오."
공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본래 호색하여 기녀(妓女)·여의(女醫)로부터 양인(良人)·천인(賤人)·현수(絃首)·침선비(針線婢)에 이르기까지 자색만 있다 싶으면 반드시 모두 정을 통하였소. 그런데 여승의 경우에는 아직 한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소. 그대가 여승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정작 내가 바라는 바요."
부인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검정 모시를 접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뿐이었다.
<청파극담>
3. 해학을 즐김
임백호(林白湖) 제(悌)는 기개가 호방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가 병이 들어 장차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으니 그가 말하기를
"사해(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황제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 나라 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방(陋邦)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하며, 명하여 곡(哭)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하는 말이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한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했었다.
임진(壬辰)의 변란에 이르러, 한음(漢陰) 이정승(李政丞)이 명(明)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반접(伴接)하자, 그는 한음의 인물을 대단히 추앙하여 심지어는 감히 말하지 못할 말까지 하는 것이어서, 일은 비록 진정이 아닐지라도 역시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다.
이백사(李白沙)는 회해( 諧)를 잘하는데 어느날 야대(夜對)가 있어 시골 구석의 누한 습속까지도 기탄없이 다 아뢰는 것을 즐겁게 여겼으며 마침내 임백호의 일에까지 미치자 주상은 듣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백사는 또 아뢰기를
"근세에 또 웃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니 주상이
"누구인가?"
고 묻자, 대하기를
"이덕형(李德馨)이 왕의 물망에 올랐답니다."
하여, 상은 크게 웃었다. 백사는 이어 아뢰기를
"성상의 큰 덕량이 아니시라면 제놈이 어찌 감히 천지의 사이에 용납되오리까?"
하자, 상은
"내 어찌 가슴 속에 두겠느냐?"
하고 드디어 빨리 불러오게 하여 술을 내려 주며 실컷 즐기고 파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희학(戱謔)을 잘하도다.]하였는데 백사가 그 재주를 지녔다 하겠다.
<성호사설>
4. 공당 문답
공(맹사성)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더니, 행차를 성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綠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가는 자였다. 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도 하였다. 공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무슨 벼슬인공"
하매,
"녹사(綠事) 취재(取才)란당"
하였다. 공은 또,
"내가 마땅히 시켜줄공"
하매,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 후일에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로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떻게 되었는공"
하매,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여지이당"
하니, 한 자리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매,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의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5. 정지상과 김부식
시중 김부식과 학사인 정지상이 한 시대에 문장으로 명성이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지상의
"절에서 염불소리 끝나니 하늘빛이 유리처럼 맑다."
라는 싯구가 있었는데, 부식이 좋아해서 자기의 시로 만들려고 요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나중에 지상은 부식에게 죽음을 당해서 무서운 귀신이 되었다. 하루는 부식이 봄에 읊는 시에,
"버들빛은 천가닥이 푸르고 복사꽃은 만 송이가 붉도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천 가닥, 만 송이를 누가 헤아려 보았느냐? 어찌 '버들빛은 실실이 푸르고, 복사꽃은 송이송이 붉다.'고 하지 않느냐?"
하였다. 부식이 마음 속으로 매우 싫어했다.
나중에 어느 절에 들렀다가 우연히 변소에 갔다. 정지상의 귀신이 부식의 불알을 꽉 붙잡고 묻기를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찌 얼굴이 붉느냐?"
하였다. 부식이 천천히 말하기를
"건너편 산 언덕 단풍이 얼굴에 비쳐서 붉다."
라 하였다. 정지상 귀신이 더욱 불알을 꽉 잡고 말하기를
"무슨 가죽주머니냐?"
하니 부식이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쇠주머니냐?"
고 하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정지상 귀신이 더욱 힘주어 불알을 잡으니 부식은 마침내 변소에서 죽었다.
<백운소설>
6. 목은 이색의 대구(對句)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했다. 이때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경솔히 여기고 글한 짝을 지어서 조롱하는 것이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느냐?"(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하여 구양현을 놀라게 했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다니느냐 ? 한 것은 우리를 극도로 멸시하여, 너희들 새나 짐승같은 것들이 어찌 감히 우리 중국 땅을 더럽히느냐 하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에 화답한 목은의 시가 더욱 묘하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옵니다. 즉 이것은 우리 조선을 새나 짐승으로 취급한다면 당신네 중국은 역시 개나 닭이지 뭐냐는 기막힌 풍자였다. 구양현은 기이히 여기고 또 글 한 짝을 지었다.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도다."(持盃入海 知多海)
하자, 목은은 또 즉석에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坐井觀天 曰小天)
하고 회답하니, 구양현은 크게 경탄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목은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비유해서 어느 중국 사람이 목은을 조롱하는 말로,
"인상여와 사마상여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성은 서로 같지 않네."(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姓不相如)
하자, 목은은 즉시 대답하기를,
"위무기와 장손무기는 옛날에도 꺼릴 것이 없고 지금에도 꺼릴 것이 없네."(魏無忌 長孫無忌 古無忌 今亦無忌)
하였더니, 그 사람은 일어서서 절하면서,
"동방에는 이런 글재주가 있으니 우리가 공경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고 목은을 자기들의 스승으로 대우했다는 이야기다.
아아! 목은의 이 세 차례의 회답한 글은 다만 대구로서만 용할 뿐이 아니라, 실로 문장과 이치가 모두 구비해서 하늘의 조화로 자연을 이루어놓은 것과 같으니 실로 그는 동파(東坡)나 그밖의 이와 대등한 여러 사람에게 못지 않다 하겠다.
<순오지>
7. 김일손의 편지
김일손(金馹孫)이 젊었을 적부터 재주가 있다는 소문들이 사방에 퍼져서 한 무장(武將)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일손은 일부러 문장을 못하는 척 방구석에 들러앉아서 {십구사략}만 읽었다. 산사(山寺)에 올라가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장인에게 편지라도 보낼 일이 있으면 짤막하게 용건만 말할 뿐 인사말 같은 것도 없었다. 하루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문왕이 죽으니 무왕이 나왔다. 주공주공 소공소공 태공태공(文王沒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 간단하기 짝이 없는 글이요 무슨 말을 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장인은 편지를 보고서는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얼른 소매 속에 감추었다. 무식한 사위를 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 때 마침 글 잘하는 선비 한 사람이 한자리에 있다가 김일손의 편지라기에 한 번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서 그 장인에게 편지를 좀 볼 수 없느냐고 하였는데 장인은 굳이 감추고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떼를 써서 억지로 빼앗아 보니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글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선비는 필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번 세번 거듭 읽어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색이 공손해지면서 몸을 바로 하였다. '실로 천하의 기재로다.' 그 선비가 풀어본 글의 뜻은 이러하였다. 문왕의 이름은 창(昌)이요, 무왕의 이름은 발(發)이다. 창은 방언으로 신발 밑을 창이라 하고 발은 사람의 발과 음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창이 죽어서 발이 나왔다는 말은 곧 신발 창이 떨어져서 발이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었다. 또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니 이것은 아침을 이르는 조(朝)요, 소공의 이름은 석(奭)이니 이것은 즉 저녁 석(夕)과 음이 같은 것이다. 태공은 망(望)이니 이것을 정리하면 조조석석망망(朝朝夕夕望望), 즉 아침마다 저녁마다 바라고 바란다는 말이었다. 곧 신발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장인은 크게 기뻐하여 곧 신발을 사서 보내주었다.
<어우야담>
8. 연암의 술낚시
조선 정조팔·구년경의 일이었다. 기나긴 봄날의 해가 서산에 걸릴 때 서울 남산골에 살고 있었던 현직 승지 이모가 그날밤 당직이어서 시간을 맞추어 대궐에 들어가기 위하여 북다른재(현 명동 천주교당)에 이르니 길가의 조그마한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문 앞에 팔척 장신인 헙수룩한 중노인이 망건도 쓰지 아니한 머리에 정자관(程子冠)만 삐뚜름하게 얹고 섰다가 이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승지의 남여(藍與) 앞을 가로 막고 두 팔을 들어 길게 읍을 한다.
이승지는 난데없이 길 가에서 초면 인사가 그것도 몸차림마나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인사를 받은 이상, 하는 수 없이 남여에서 내려와 답례로 읍을 하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승지더러
"영감 이 집이 내 집이오. 잠간 들어와 수어(數語)나 합시다" 한다.
이승지는 첫째 그 다답지아니한 모양도 는꼴이 틀리고 들째로 번(番) 시간도 되었으므로
"지금은 공무로 입직하러 가는 길이니 이 다음에 다시 심방(尋訪)하겠소"
하며 남여로 올라가려 하니 그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기세도 대단하게 승지의 길을 막았다. 이승지에게 그 사람은
"아따! 근근(近君)하는 시종신(侍從臣)이라 자세가 대단하군. 해가 아직 늦지 아니했는데 담배 한대 피우고 갈 여가도 없단 말이오"
한다. 이승지는 그 사람의 책망 비슷한 말씨에 할 수 없이 발을 돌려 그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살펴보니 먼지가 가득한 한간 방이나 웃목에는 서책이 가득하였다. 주인은 다시 승지에게 읍하고 아랫목에 놓인 초방석(草方席)으로 인도하니 승지는 그 말대로 그 방석에 앉았다. 그 다음 주인은 아무 말없이 앉았다가 안문으로 향하여
"손님이 오셨으니 술 내오너라"
고 한다. 조금 뒤에 헌 누더기로 간신히 앞을 가린 여하인이 걸직한 막걸리 한 뚝배기와 프르둥둥한 서산 상 사발 하나와 김치 한 보시기를 모 떨어진 소반에다 얹어 내다놓으며 손님을 기웃기웃 쳐다보고 간다. 주인이 그 상을 손님 앞에 놓고 뚝배기에서 상사발에다 막걸리를 따르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이승지는 당초부터 주인이 하는 짓이 이상하여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불안한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인데 그 막걸리 따르는 것을 보고 속마음으로 크게 놀래어 불안하였다.
'자 막걸리를 먹으라고 하면 어쩔까'
하고 주인의 거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술을 따라 놓고도 말없던 주인은 혼잣말로
"귀한 손님이 이러한 막걸리를 자실 수야 있나 내나 마시지."
하고는 훌쩍 들어마시고는 김치국을 조금 마신 뒤에 다시 한사발을 더 따루어 놓더니
"이것은 내 차례니 손님의 말 기다릴 것 있나?"
라고는 또 훌쩍 들어마신다. 그리고 나서는 안문으로 향하여
"술상 내가라"
고 한다. 승지가 살펴보니 뚝배기 술이 원래 두 사발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여하인이 와서 상을 치운 뒤에 주인은 승지에게 다시 읍하고
"영감 대단히 미안하오. 오늘 영감이 내 술 낚시에 걸렸소. 바쁘실 텐데 어서 가십시오."
한다. 이승지가 답례를 하며
"대체 단신은 누구시며 술 낚시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
하고 물었다. 승지의 물음에 대하여 주인은 껄껄 한바탕 웃고 나서
"술 낚시질꾼 성명은 알아 무엇하겠소. 내 집이 가난하고 내가 술을 좋아하므로 가속이 간신히 반주 한잔씩은 준비하여 주나 다시는 아니 주고 손님이 오셨다면 손님술 대작할 한 잔을 내보내 주는구려. 오늘도 저녁에 술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얻어 먹을 방법이 없고 보니 통정할 수 있는 친구가 혹 지나가면 들어오라 하여 술을 낚구어 낼가 하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오늘은 아무도 못 만났기에 해는 저물어가고 해서 초조하여지는데 마침 영감이 지나가시니 인급계생(人急計生)이라고 내가 영감을 내 집으로 유인하여 집에만 들어오시게 하면 내 계획은 달성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고체면하고 인사를 청한 것이나 인사를 아니 받으셨다면 모르겠거니와 받은 이상에는 초면 치구를 괄시는 못하는 것이라 꼭 따 라 오실 것이 아니오. 나는 이 방에 손님이 있는 것만 보이면 술은 마실 수 있거든여. 아까 계집하인이 기웃기웃한 것은 전에 내가 없는 손님을 있다 하고 술을 낚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손님 술을 내왔다가도 손님이 없으면 도로 가져가는구려. 그래서 참말로 손님이 있나 없나 보아 없으면 도로 가져가려고 기웃거린 것이오. 오늘의 이 신기 묘산이 적중하였으니 누추한데 오래 앉아 계실 것이 없소. 어서 가오."
하며 문 밖까지 전송을 하여주는 것이었다. 그 집에서 나와 다시 남여를 타고 대궐로 향하는 이승지는 방금 자기가 당한 일이 맹랑하기도 하거니와 그보다도 술꾼의 술낚시질의 이용물 노릇을 한 것이 지극히 분하였다. 그날 밤 승정원에서 이승지와 함께 번을 들은 승지 남공철이 이승지의 안색이 좋지 못함을 보고
"오늘 밤에는 영감의 기색이 좋지 못하니 댁에 무슨 연고가 생겼소?"
한다. 이승지는 쓴 웃음을 지으며
"집에는 별 일 없지만 오는 길에서 괴상한 일을 당하였기 마음이 편치 못하오."
하면서 오는 길에 당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때에 承傳邑 내시가 나와 상감마마께옵서 입직한 승지를 부른다고 한다. 승지가 명에 의하여 어전으로 입시하니 정조가 하교하되
"오늘 밤은 하도 심시하기에 시종신들과 한담으로 소견할가 하여 부른 것이다."
하며 옥당들의 주담(奏談)이 끝난 뒤에 두 승지를 바라보시며
"너희들도 말을 해보아라."
하시는 것이었다. 이승지가
"오늘 번들어 오는 길에 당한 일을 말하려고 했으나 비설(鄙屑)하여 못 아뢰나이다."
하니 정조는
"군신의 사이는 가인 부자와 같으니 친구에게 말하려던 것을 임금에게 어찌 말 못할 것이냐. 본대로 당한대로 말하라"
하신다. 이에 이승지는 오늘 입궐하러 들어오다가 북다른재에서 당하였던 일을 자세히 주달하는데 도중에서
"술을 따라 놓고도 권하지 않더라……"
는 구절까지 이르렀을 때 정조가 싱그레 웃으시면서
"그만치만 들어도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짐작하겠다"
고 하신다. 이승지가 그 다음 일을 다 아뢴 뒤에
"신은 그 사람이 실성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 부언하니, 정조가 다시 웃으시며
"그 사람이 실례한 것이 아니라 네가 몰지식하다. 너는 문과도 하고 벼슬도 하였으나 사책에 오르지 못하되 그 사람은 지금은 방달한 미친 사람 비슷하지만 사책을 빛낼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정녕코 박지원일 것이다"
하시니 이승지는 자기가 고루하여 문봉으로 일세를 능가하는 연암선생 박지원을 못 알아 본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물러 나왔다. 그 옆에 시립하였던 남공철이 다시 부복하여 아뢰기를
"전하의 지금 하교를 듣자오니 옛말의 지신막여군(知臣莫如君)이 적실한 말씀이외다. 성명지치(聖明之治)에 아래에 그런 사람이 봉초( 草)에 매몰되면 옥의 티같이 성루가 될까 합니다. 이미 통촉하셨으니 유현(遺賢)의 탄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하였다. 정조가 남승지에게 대답하시기를
"내가 유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지원의 문장이 섬부(贍富)는 하나 정도로 아니 나가고 권도로 나가므로 그 버릇을 징계하려고 모르는 체하였더니 그대도록 기한에 빠진 것을 몰랐다."
하시고 즉시 초임을 시키시고 일년 이내에 안의(安義) 현감을 제수하셨다. 박연암은 소년시대에는 경제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허용을 아니하니 다시 문장변으로 들어가서 사백년래에 내려오던 고문사체를 개혁하려 하니 박제가, 이덕무, 김매순 등이 다들 그의 문도라, 이고증(泥古症)에 걸린 당시 문사들이 연암을 이단이라고까지 지목하고 정조에게 박지원은 세상을 버려놓은 사람이라고 아뢰어 정조도 그를 미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연암은 자기의 초지를 그대로 굳게 지키어 흔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인도 남편이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 본뜻을 지키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바느질 품도 팔고 갖은 고초를 당하여 가며 밤에 글 읽을 때 쓸 초와 좋아하는 술은 조금씩 이어주되 술의 거성인 연암을 만족되게까지 할 재력은 없으므로 매일 한두잔 정도의 술도 그 夫人이 진심 갈력하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 생각이 나면 연암은 가끔 그러한 짓을 하였던 것이며 그 날은 공교롭게도 입직할 승지에게 걸리어 큰 출세는 못되었어도 술의 해갈만은 면할 수 있는 길이 정조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오백년기담일화>
- 우리 고전 속에서 선인들의 생활지혜와 해학이 넘쳐 흐르는 작품 중에서 선덕여왕의 지혜, 공당문답 등 8가지를 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