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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작성자명관**
조회수2788
등록일2007-05-09 오후 5:28:50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유시주



차 례

추천사
책머리에
1.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2. 판도리에게 찬사를
3. 살아있는 지구의 이름, 가이아
4. 이성과 광기
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6. 마음은 힘이 세다
7. 아름다움은 어디에
8. 개혁은 어려워라
9. 신화와 역사 사이
10.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1. 황금을 사랑하면 별을 잊어버린다
12.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13. 내 운명은 나의 것
14. 모든 과오는 교만으로부터
15.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16. 잃어버린 남신을 찾아서
17. 아무도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8. 고사성어들
부록

지은이 유시주는 1961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면서 그간 번역, 취재,
기획 , 편집 등 주로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해 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인감됨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추 천 사

신화를 통한 자기성찰

요즘에도 그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학생들이 예외 없이 머리를 박박
깎고 학교에 다니면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던 유신시대에는 고전 읽기니
자유교양대회니 하는 괴상망측한 책읽기 대회 가 있었다. 필독서로 뽑힌 책들
가운데는 이순신 장군이나 임경업 장군의 전기를 비롯하여 제법 읽을 만한
소설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긴 했지만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거나 재미라고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책들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일 끔찍했던
것이 논어와 그리스 로마신화였다.
독서 지도에 일가견을 가진 선생님이 이끌어 주었다면 달랐겠지만 중요한
내용을 무조건 많이 외어 두어야 필기 시험에서 점수를 많이 딸 수 있는 그놈의
대회 방식 때문에 이런
책들은 암기에 도가 튼 고전읽기 선수 들에게도 기피대상이었다. 물론 논어는
인생 경험이 짧은 청소년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리스로마 신하는 어렵지는 않지만 얽히고 설킴 남녀 신들의 친인척 관계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름과 지명을 쫓아 다니다 보면 그만 내용을 놓쳐버리기
일쑤이다. 나도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는 읽어야 교양있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다 는 근거 없는 강박관념 때문에 두어 번 대들어 보았지만 끝까지 읽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돌이켜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재미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음미할 수 있는 눈이 없이 읽는 탓이 아닐까 싶다.
유시주의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바로 이런 면에서 무척 흥미롭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여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신하를
통해서 보는 현대의 사회와 인간이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신화가
담고있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꼼꼼하게 벗겨내 보이는 여자의 시선
이다. 이런 시간은 여자를 만악의 근원 으로 다루는 신화의 남성중심적 구조를
뒤집어 해석한 <판도라에게 찬사를>과 <잃어버린 남신을 찾아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여자의 시선 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
철옹성 같아 보이던 군부독재체재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움을 벌었던 가버린
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진보적 역사의식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시인 김남주를
가리며 쓴 <프로메테우스의 대답>이나 김영삼식 개혁을 다룬 <트로이의 목마>,
박노해의 시<그리운 사람>으로 마무리한 <이카로스>등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국적 해석 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눈에 드는 것은 이러한 여자의
시선 과 진보적 역사의식 이 건조한 논리전개나 생경스러운 자기주장으로
빠져들지 않고 여러 가지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시각과 의식 을 그렇게 풀어낼 줄 아는 그의 문학적 소양 덕분이
아닌가 싶다.
유시주한테 무슨 문학적 소양이 있다고? 당장 이런 반문이 나올 법해서 하는
말인데 그는 정말로 풍부한 문학적 잠재력 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련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에세이를 가지고 독서계에 신입신고를 하는 이 사태가 무언가
한참 어긋난 일인지 모른다. 유시주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나같이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몹시도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들을 써서,
그 당시 이름 깨나 있었던 학생잡지 문학상을 , 조금 부풀려 말해서 휩쓸다시피
한 예비작가 였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하필이면 전도환 일당이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해 대학에 들어갔다. 그 뒤로 15년 동안 그는 흔히 말하는 문학의
범위에 들어가는 글은 단 한 줄도 발표하지 않았고 쓰지도 않았다. 죄 없는
사람들이 백주대로에서 무더기로 총에 맞아 죽는 판국에 소설 나부랭이나 써서
상처받은 감수성이나 드러내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격한 도덕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시주가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쓰긴 썼다. 전자제품
공장에서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고 돌아와 연탄가스 냄새 풍기는 반지하
자취방에서 이런저런 활동보고서 를 쓰기도 했고, 싸움이 벌어지면 투쟁속보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때로는 살벌한 보안사 지하실에서 자술서도 썼다.
한마디로 그는, 구속된 전두환씨 본인이야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도 없고 능력이
있다 해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테지만, 1980년 5월의 쿠데타와 학살로 인해
인생 전체는 아니라고 해도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황금같은 20대 가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버린 수많은 대한 민국의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나는 유시주가 지난 시대의 젊은 지식인들을 가위눌리게 했던 그 무거운
역사의 짐에서, 더 나은 사회를 향해 가는 가시밭길에서 개개인이 입은 상처들을
애써 숨기게 만들었던 그 빛나는 이념의 중압감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물론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공동선에
봉사할 수 있는 , 그런 사회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아니, 나는 구가 알리라고 믿는다. 세상은 참으로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다는
것을. 해야 하는 일 만으로 인생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을. 한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여럿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이 그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는 첫 걸음이 될 수는 없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그런데, 당신이 뭔데 그렇게 유시주를 잘 아느냐, 이렇게 되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유시주를 잘 안다. 적어도
남들보다는 확실하게 안다. 그는 바로 두 살 터울진 손아래 누이이다. 남매간에
웃긴다 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그가
같은 시대를 일도 고생도 함께하면서 견뎌낸 동지이기 때문이다. 혹시 칭찬이
지나친 데가 있더라도 독자들께서 너그러이 보아주기를 부탁드린다. 아무리 한
시대를 나눈 동지라고는 하지만 나는, 안쓰러운 마음을 아주 버릴 수는 없는
오라비이기 때문이다.
독일 마인쯔에서
유시민

책 머리에

1
내가 속한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아마 다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하여 내 머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자유교양 읽기 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자유교양 읽기 에 포함된
필독서였다. 학교 대표로 뽑혀 자유교양 읽기대회 에 출전해야 했던 까닭에,
어쩌면 재미있었을 수도 있는 그 책을 나는 아주 지긋지긋해 하며 읽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길고도 낯선 이름들을 외우고, 얽히고 설킨 사건들의
선후와 인과 관계를 따지느라 말이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교양 을 넉넉히 쌓을
수 있었던 지라 그 뒤로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련된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면 어느 자리에서나 잘난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머리에 박힌 것은 그리스 문화는
기독교와 더불어 서구문명을 꽃피운 두 뿌리 중 하나 라는, 중고교를 다니면서
수도 없이들은 대명제였다. 그리스 문화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와 대립된다는
기독교 정신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서구문명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인지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줄로만 알고 지냈다. 세계사 시험에
서구문명의 기둥을 이루는 두 가지 정신을 쓰시오 라는 문제가 나오면 척하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이라고 쓰면서 말이다. 하긴 어떤 말이나 명제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살이의 퇴적층과 그 거대한 부피를 깨닫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어떤 문명을 관통하는 정신 의 실체와 그것의 토대인 동시에
결과로서의 삶의 구체성 에 눈뜬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적어도 내게는 얄팍한 상식 또는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플라톤의 <항연>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필시 지적 허영심
같은 것 때문에 책을 잡긴 잡았는데 내용이 얼른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짜증을 내던 나는 어떤 구정 앞에서 멈칫했다. 제우스신께 맹세코 라는
구절이었다. 내가 아는 제우스와 아테네 논객들의 입에서 나온 제우스는 분명히
다른 제우스였다. 내가 아는 제우스는 종잇장 같았지만 그들의 제우스는 고유한
이미지와 역사, 담론을 거느린 살아있는 제우스였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은 저 먼 옛날에, 우리와 다른 어느 땅에서는 박제된
전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경건한 섬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섬겼던
옛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신화를 이해하는 깃이었다. 당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그때까지의 내 교양 은 플라톤의 책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모든 지식이 천박한 교양 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걸 부끄러이 깨달았다. 아울러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내
삶의 무게까지도. 유구한 삶 앞에 나는 아직 유치한 어린아이 였던 것이다.
2
예로부터 서구의 문학과 예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수많은 예증과 상징,
영감을 빌어 왔다.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심리학, 교육학 같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심심찮게 신화 속의 사건이나 인물을 원용하였다. 그런 저런 독서
편력과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 으로
살아오면서 내가 깨달은 것들에 기대어, 그리스 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중신주의 이다. 흔히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신으로 세
가지를 든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말로 언표되는 인간 중심주의, 이성과
절제, 중용을 높이산 합리주의, 민주주의하는 정치체제를 이룩한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그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나로선 길게 논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다만 그리스인들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 인간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 으로서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인간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세계는 늘 모순과 갈등, 탐욕과 다툼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세계를 더러운 곳 으로
부정하고 저 먼 어딘가에 있는 이상향이나 아니면 신이 다스리는 천상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비록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지만 현실의
세계를 기꺼이 긍정하였다. 또한 그 속에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귀중히
여겨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았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꿈의 나라로 도망가지
않았고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영원하고 장엄한 것보다 유한하고 자연적인 것을 사랑하였다.
신화야말로 그들의 그런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의 신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그들의 신은 인간을 확대시킨
존재에 불과했다. 그들의 신은 인간을 확대시킨 존재에 불과했다. 인간이 그렇듯
그들의 신도 결점 많고 연약한, 선악의 이름 아래 인간을 경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문화는 낙천적이고 명랑하여 생동하는 개성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 문화를 서구 문명의 뿌리로서뿐만
아니라 전체의 빛나는 유산으로 스스럼 없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책의 성격을 말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좀 밝혀야 될
듯하다. 3년이나 전에 어느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그리스 신화를 단서로
한 교양서 를 한 번 써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남에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번듯하게 소개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내 친구가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아마도 내가 이것저것 책을 많이 읽었고 또 그간
번역, 취재 같은, 글쓰기와 관련된 호구지책을 이어왔으므로 제가 아는 것을
남에게 전달할 글솜씨는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였으리라.
친구의 격려에 힘입어 그럼 한 번 해 볼까 하던 참에 그 친구가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었다. 내가 무슨 책을... 하는 주저와 머뭇거림에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어서 나는 책의 내용을 놓고 뒤적뒤적 이어가던 생각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데 그참에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교양서를 기획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출판사가 청소년 교양 잡지를 창간하는 중이어서 얼떨결에 거기다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멈추었던 생각을 다시 이으며 쓰기 시작했던 글이 이
책으로 묶이게 되었다. 반쯤은 잡지에 연재되었던 것이고 반쯤은 새로 쓴
것이다. 다써 놓고 보니 영락없이 친구의 표현 그대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단서로 한 교양서 가 된 것 같다.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것을 이유, 원용한 문학, 예술 및 여타 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 놓은 책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실마리 삼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훑어 보는 식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역사, 철학, 고고학, 여성학, 교육학 등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은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부분을 추려내어
신화의 이야기와 짝을 지어준 것이다. 그러니 만큼 이 책은 그다지 창의력 있는
저술은 아니다. 내가 읽거나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른 분들이 읽기 좋도록 잘
구성하고 엮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나의 해석과 설명도 약간 붙어 있다.
하지만 나는 신화를 이 있게 연구한 학자가 아니니 만큼 그 해석과 설명은
인간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 의 해석과 설명일 뿐이다.
또 이 책은 신이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빚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만든 것이라 믿는 편인 나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리라. 꽤나
잡다한 이야기가 망라되어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이 책의 이에는 한계가
있다. 각 꼭지마다의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은 분들은 보다 전문적인
저서를 찾아 보기 바란다.
4
마냥 부끄러울 줄로만 알았는데 원고를 끝내고 나니 약간은 기쁜 마음도 든다.
책을 쓰라고 권유했던 친구 젬마, 연제의 기회를 준 한샘 출판사에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는 평생
이런 책을 쓸 마음을 내지 못했을 것이고, 마음을 냈다 한들 시작하지도, 더욱이
끝마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쓰면서 참고한, 일일이 밝힐 수 없이
많은 책들의 저자들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특히 탁월한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이윤기 씨의 여러 역서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읽고 나서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1996년 1월
유시주


1.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프로메테우스의 대답)

전봉준, 김남주, 프로메테우스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한 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없는 투쟁
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녹두장군 전봉군을 추모하는 김남주 시인의 시, <황토현에 바치는 노래>의 한
연이다.
김남주는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그랬고 그의 삶이 그랬다.
그는 1946년 전남 해남의 어느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들이 커서 제발 덕분
면서기로 출세 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지대를 저버리고 그는 전남대 재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과의 싸움에 들어섰다. 검정고시를
거쳐 들어간 대학에서 그는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을 이끌었으며
급기야 73년에는 유신에 반대하는 지하신문을 제작하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제적되었다. 그 뒤로도 굽힘없이 반유신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79년 구속될 당시 그는 서른네 살이었는데
감옥문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9년 3개월 뒤인 마흔세 살 때였다. 들어갈 때는
까맸던 그의 머리가 나올 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종이도 연필도 허락되지 않는 옥중에서 그는 못토막을 갈고 갈아 우유곽 속의
은박지 위에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불타는 투혼의 시편들을 써냇다. 그
시들은 80년대의 빛나는 저항 정신을 더할 수 없이 치열하게, 아름답게
그려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지상을 떠났다. 1994년 2월 13일, 그는 마흔여덟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꽃다운 젊음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석방된 지 5년만이었다.
그를 쓰러뜨린 것은 그가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군사 독재 정권도, 10년간의
엄혹한 감옥살이도 아닌 암세포였다. 그가 죽은 뒤 어느 평론가는 그를 기리는
글에서 앞서 인용한, 그의 시 한 대목을 인용한 뒤, 우리는 그를 김남주라
부른다 고 썼다. 전봉준을 기린 그의 시가 그 자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그가 남긴 뜨겁고도 맑은 시들 가운데 <나 자신을 노래한다>는 시가 있다.
감옥 생활 초기에, 남민전 사건을 과격파들의 경박하고 무책임한 모험쯤으로
비판하는 식자들을 향해 시인 특유의 직설적인 어법으로 써내려간 이 시는, 이런
대전제 아래 시작된다.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

이어지는 1연에서 식자들의 비판을 열거한 뒤, 2연에서 그는 묻는다.

나는 묻고 싣다 그들에게/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엉거주춤 똥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불를 달라 프로메테우스가/제우스에게 무릎끓고
구걸했던가/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의해
접수되었는가/......./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프로메테우스, 인간을 만들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과 영웅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칭송받는 이는 아마도 프로메테우스일 것이다. 바이런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시에세 묘사했듯 그는 인간의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더라도/ 신들이 능멸해도
좋을 것으로는 여기지 못하게 했던/불멸의 눈을 가진 이 였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가치-인간과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부당한 고통을 견디는 고결한 정신,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제도와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불온한 사람들에게는 늘 그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청년 마르크스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대던 <라인신문>이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폐간되자, 다른 일간지에서
일제히 그 사건을 만평으로 다루었는데, 마프크스가 사슬에 칭칭 묶여있는
모습을 그린 그 만평의 제목은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였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 신족이었다. 티탄 신족은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권좌를
차지하기 전에 세상을 다스리던 신들이었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
어머니인 레아를 포함해 티탄 신족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남신이 여섯, 여신이
여섯이었는데 프로메테우스는 남신 가운데 하나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었다.
이아페토스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맏이는 아틀라스였고, 그 밑으로
프로메테우스(미리 내다보는 자)와 에피메테우스(나중에 깨닫는 자)가 있었다.
아틀라스는 감히 대적할 신이 없을 만큼 힘이 장사였고, 프로메테우스는
지혜롭고 신중했다. 막내인 에피메테우스는 이름 그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서야
허겁지겁 수습을 하는,좀 철딱서니가 없는 신이었다.
티탄 신족과 일전을 치르고 최고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제우스는 어느 날,
지상에 살고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아래로는 뭇 짐승들을 다스리고 위로는 우리 신들을 섬길 인간을 만들도록
하여라.
제우스가 하필 프로메테우스에게 그 중차대한 일을 맡긴 데는 까닭이 없지
않았다. 티탄과 올림포스 신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동생과 더불어 티탄 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제우스 편을 들었다. 이름 그대로
앞날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지라 대세를 따른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 덕분에, 다른 티탄과 함께 무한
지옥 타르타로스에 유폐된 아버지 이야페토스,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야
되는 형벌을 받은 형 아틀라스와 달리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런 공로도 있었으려니와 프로메테우스는
뛰어난 예지력과 지혜, 신중한 처신으로 제우스라고 쉽사리 대할 수 없는 그만의
위엄을 갖춘 신이었다.
제우스의 명을 받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프로메테우스는 우선 질좋은 진흙을
구했다. 그리고 거기다 물을 붓고 이겨서 신들의 형상과 비슷하게 인간을
빚었다. 그것을 이레 동안 볕에 말린 뒤 생명을 불러넣으려는 할나, 지나가던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나비 한 마리를 나려 보냈다. 나비가 인간의 콧구멍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인간에게 마음이 깃들이게 되었다.(그리스어 프시케 PSYCHE는
나비라는 뜻과 마음, 영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윽고 그들은 몇 배로 불어나 땅을
가득 채웠다. 프로메테우스는인간에게 우선 직립할 능력을 주었다. 덕택에, 다른
동물들은 모두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 보는데 인간만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을 뿐, 그들은 처음에는 다른
동물과 다를바 없는 가엾은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몸을 가리는 따뜻한 털가죽도
없엇고, 사자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었으며, 거북이처럼 단단한 등껍질도,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된 데에는 에피메테우스의 책임이 컸다. 그는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 살라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능력, 이를테면 용기, 힘, 속도 같은
것을 부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동생이 그 일을 해내면 프로메테우스는 그
결과를 점검, 감독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량없는 에피메테우스가
신바람이 나서 닥치는 대로 선물을 나누어 주는 바람에 막상 인간의 차례가 되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당황한 에피메테우스는 헐레벌떡 형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징징 짜는 동생을 달래놓고는 속이 빈 회향나무 막대기 하나를
품속에 숨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제우스의 전용 무기인 벼락에서 불씨를
옮겨붙여, 들고 갔던 막대기 속에 숨겨가지고 돌아왔다. 프로메테우스는 이튿날,
인간을 불러모아 불씨를 건네주고, 나무와 나무를 비벼서 불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이 선물 덕분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었고, 사냥용 무기와 농사짓는 연모를
만들 수 있었으며 아무리 추워도 거처를 덥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나아가서는 갖가지 기술을 개발하고 화폐까지 만들어 쓰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위에 집을 짓는 법, 날씨를 미리 아는 법, 셈하고 글쓰는 법,
짐승을 길들이는 법, 배를 만들어 바다를 향해하는 기술까지 가르쳐 주었다.

사랑의 형벌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노발대발했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씨를 훔친 곳은
제우스의 벼락이 아니라 제우스의 조강지처 헤라의 신전 부엌이었다는 설도 있고
또 태양신 헬리오스가 모는 태양 마차였다. 는 설도 있으나 어디였건 간에
도둑질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훔친 죄도 죄려니와,
우쭐대기 좋아해서 그렇잖아도 하마나 신들에게 대들지 않을까 앞날이
걱정스러운 인간에게 그걸 주었으니 뒷감당은 누가 한단 말인가, 게다가 한번쯤
프로메테우스를 손봐야겠다. 마음먹은 구원도 있었던 참이었다.
인간들이 소를 한 마리 잡아 제우스에게 바칠 때의 일이었다. 맛있는 고기와
기름은 죄다 제우스에게 바치고 먹을 수도 없는 뼈와 가죽만 인간의 몫으로
남기는 걸 보고 프로메테우스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고기는 보잘 것 없는
가죽으로 싸고 뼈는 먹음직스런 기름덩어리로 감싼 뒤 제우스에게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제우스는 물론 가죽보다 기름을 택했고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속여넘긴 걸 알고는 심히 언짢았다. 인간을 만들라 명했던 뜻은 신을 공손히
받들 존재가 필요해서였건만 그 뜻을 묵살하고 오히려 사사건건 인간편을 드니
여간 위험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감히 불까지 갖다주다니!
제우스는 당장 자신의 아들이면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청동
쇠사슬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는 크라토스(권력)와 비아(폭력)를 시켜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에다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
버렸다. 그것으로도 분이 안 풀린 제우스는 독수리로 하여금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게 했다. 독수리가 간을 다 파먹으면 그때마다 간은 새로이 돋아났다.
프로메테우스의 죄,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인간을 창조하고,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을 이롭게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숭앙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르친 진실로 위대한 교훈은 따로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프로메테우스는 언제라도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신상에 관련된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제우스는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죽이고 올림포스의 왕좌에 올랐는데 일찍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이아는 크로노스의 어머니였으니 제우스에겐 할머니다)로부터 너 또한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는 예언을 들었다. 제우스로선 자신에게 반기를 들 그
자식이 어떤 어미의 몸에서 태어날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름난 호색한인
제우스에게는 처첩이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문제아를 낳을 어미가
누구인지만 알 수 있다면 미리 조처를 취할 수 있으련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가 바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프로메테우스였다.
제우스는 감언이설 잘 늘어놓기로 유명한 전령신 헤르메스를 보내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했다. 그 비밀만 귀띔해 주면 당장 풀어줄 뿐만 아니라
두둑한 상까지 얹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일신의 안락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는 그런 행위를 경멸했다.
어리석은 이여, 말 한 마디면 당장 이 고통에서 벗어날 텐데 어찌 이리
고집을 피우나?
헤르메스의 말에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헤르메스여, 이 정도 고생이면 말 한 마디를 아끼는데 그대는 어찌 그리도
비굴한가?
마침내 헤라클레스가 와 사슬을 끊어주기까지, 무려 3천년 동안을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정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였다고 한다 참혹한
고통 앞에서도 무릎끓지 않았던 이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이 그에게서 받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었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김남주 시인이 <나 자신을 노래한다>는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죽음 으로 받아들였다. 10년을 감옥 안과 밖으로 갈라져 지내다 어렵게
결혼한 지 5년만에, 남편을 영영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아내는 그의 시가 이제
쓸모없는 세상이 돼 버려서 그는 떠났다 고 썼으며 한 문학평론가는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이 천해지고 시의 길에 그늘이 짙어지자 그는 굴욕 대신 차라리
육신을 벗고 말았다 고 했다. 시인 자신도 췌장암 선고를 받기 직전에 발표한 시
<근황>에서 이제 나는 아무짝에도 쓰잘 데 없는 사람 이라고 자책했다.
김남주 시인의 시대, 그와 함께 사라져 버린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저
고난의 7,80년대, 고난과 함께 의로운 투쟁이 있었던 시대, 가혹한 탄압이 있어
그만큼 뜨거웠던 시대-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 간절한 신념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에 뒤이은 새로운
시대는 시인의 표현대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 한 시대요 맑지도
탁하지도 않은 흐리멍텅 한 시대였다. 첨예했던 민주.반민주의 대립이
흐트러지면서 사람들은 적당히 자조하고 그럭저럭 체념했다. 가혹한 억압이 없는
대신 순결한 이상을 향한 투쟁도 사라졌다. 김남주를 비롯해 그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근본주의자들 -인간의 손으로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에게는 이
모든 상황-근본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마치 모든 것이 달라진 듯
흘러가는-이 당황스럽고 쓸쓸하고 낙망스러웠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질문 -역사의 진보를 향한 모든 의식적 노력의 근저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깔려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을 던졌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가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하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사실 이 물음은 수천년 인간의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던 질문이다.
철학과 사상의 역사는, 역사의 구비마다 특히 시련과 혼돈과 정체의 시기마다
사람들이 이 근본적 질문 앞에서 회의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전쟁과 대량살륙,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 부자유와 불평등-인간의 손으로 저질러진 참담한 죄악
앞에서 사람들은 늘 반문했다. 인간은 과연 제 손으로 사랑이니 평화니 우애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걸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인가. 꼭 격변의 시기가
아니더라도, 꼭 시대를 선도한 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역사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으리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다 간 김남주 시인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이제 그는 여기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의 유고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을 읽어 보니 어쩌면 나는 그 대답을 알
것도 같다.

시도 사람의 일/신이 아닌 신이 아닌 것도 아닌/일하고 노래하고 싸우고
그러나 끝내 죽고 마는/보통 사람의 일인 것이다/한술의 밥 때문에 할퀴고
물어뜯고 살해까지 하는 한 가닥 빛을 위해 세계를 거는/단순하고 당돌한
사람들의 일인 것이다/집을, 보습 대일 한 뙈기 땅을, 빛을 갖고
싶어하는/제새끼도 남의 새끼마냥 키우고 싶어하는/소박한 일인 것이다
-<시를 대하고>중에서

그의 말대로,사랑도, 평화도, 우애도, 평등도, 정의도-그 모든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것들도 모두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일이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애타게 바라지만 그것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사랑과 더불어
증오가 평화와 더불어 쟁투가, 우애와 더불어 질투가, 평등과 더불어 이기가,
정의와 더불어 불의가 들어앉아 있는 까닭이다.
김남주와는 다른 창법으로 노래했지만 곧고 맑기로는 그와 마찬가지였던
윤동주도 인간의 그 숙명을 이렇게 처연히 적어두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강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안락의 유혹에 시달림당한 사람이 어디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시인뿐이랴.
불의에 앞장서 항거했던 의인들뿐이랴. 우리들 보통 사람도 매일매일 그 유혹에
시달린다. 커닝을 해서라도 시험을 잘 보고 싶은 유혹, 남을 속여서라도 돈을
벌고 싶은 유혹, 말만 앞세워 명예를 얻고 싶은 유혹, 하다못해 남을 헐뜯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유혹까지,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불의의 참정이
도사리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들도 날마다 싸움의 와중에서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서,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싸움이야말로 인간을 인갑답게 하는 거룩한
전장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믿는다 함은 인간이 전적으로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존재라는 걸 믿는 게 아니라 알므답고 진실되고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추하고 거짓되고 악한 자신과 싸울 줄 아는 존재라는 걸 믿는 것인지 모른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코카서스 산정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들,
지상의 프로메테우스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모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삶으로 대답할 일이지요. 빛을 바라는
자, 거기다 세계를 걸고 스스로 빛이 되지요.
힘겨운 삶의 한복판, 거기 불멸의 빛이 있다고, 그러니 부디 쉬이 낙망하지
말라고 격려철머 위안처럼, 그는 속삭인다.

2. 판도라에게 찬사를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독일의 극작가 프란크 베테킨트의 희곡 가운데 <판도라의 상자>라는 작품이
있다. 이 3막짜리 비극의 주인공은 루르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남편을 두고도
연인과 밀애를 즐기는가 하면 동성애도 마다지 않는 육욕의 화신이다. 남편과
애인의 아들과 결혼한다. 남편과 애인이 죽은 뒤 그녀는 급기야 새로 얻은
남편을 살해하고 죽은 애인의 아들과 결혼한다. 한 마디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악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여자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을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존재로 여성를 묘사해 놓은 작품들은 이외에도
무궁무진하게 열거할 수 있다.
유태교의 경전 <탈무드>는 여자의 충고에 따르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고
충고하고 있고,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여자는 항상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불행한 쪽으로 인도한다 는 금언 을 남겼다. 여자가 없었더라면
남자는 시처럼 살아갈 것 이라고 한탄한 이도 있고, 여자를 지옥으로 가는 문
이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다. 또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는 난리는 하늘에서
내리지 않고 부인네로 인하여 생겨나느니라. 아무리 가르쳐도 효험없는 것, 그건
바로 부인네와 내시이니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여성을 타락과 불행의
근원으로 보는 습성에는 동서양의 차이도 없다. 그래서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처럼 여자는 팬티와 바지를 구별할 정도의 머리만 있으면 된다 는
극언을 하는 사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과 불행의 책임을 송두리째 여자에게 전가하는, 이런 가당찮은
모함을 즐기는 사람들-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남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흔히 갖다대는 것이 바로 판도라의 이야기이다. 앞서 예로 든 베테킨트의
작품 제목이 <판도라의 상자>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판도라의 원죄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판도라가 후세의
모든 여성에게 원죄 를 짐지우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산한 프로메테우스를 벌한 제우스는 이번에는 인간을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베우스가 보기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무리 불을 훔쳐다
주었기로소니 한 번 사양도 하지 않고 환호작약, 받아들인 인간도 괘씸죄 의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해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을 이겨 여신의
형상대로 만들고 거기다 인간의 목소리와 힘을 불어넣게 하였다. 여신의 모습의
모습을 본뜬 데다가 명장 해파이스토스의, 문자 그대로 귀신 같은 솜씨가
발휘된지라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이 여자에게 은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허리엔 금띠를,
머리엔 눈부신 면사포를 드리워 주었다. 사랑과 미의여신 아프로디테는 꿀물
같은 교태와 애잔한 그리움, 남자의 속을 태우는 가련한 한숨을 주었다.
헤르메스는 상업,외교,도둑질의 신답게 꾀와 염치없는 마음씨, 필요하면
거짓말도 마다지 않는 간사함을 주었으며 음악의 신 아폴론은 고운 노래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재능을 주었다. 물론 모두 제우스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제우스는 이 여성에게 판도라라는 이르을 붙여 주었으니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여자 라는 뜻이었다. 그런 다음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예쁜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 상자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인즉,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절대로 열어서는
안된다.
짐짓 다짐을 받은 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데려다 주었다. 일찍이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산으로
끌려가기 전 제우스라는 작자와 그가 주는 선물에 조심해라. 필경 음모가 숨어
있으리라 고 일러놓았건만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아름다운 자태에 이 빠져
앞뒤를 재지 못하고 덥석 그 아름다운 선물을 받고 말았다. 그리하여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어 지상에서 살게 되었다.
먹지 말라는 건 더 먹고 싶고 보아선 안 된다는 물건은 더 보고 싶은 법이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거듭거듭 다짐을 받은 것도 그 점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자를 볼 때마다 불같이 일어나는 호기심을 애써 누르던 판도라는
어느 날 궁금증을 삭히지 못하고 기어이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말았다. 판도라가
뚜껑을 여는 순간, 그때까지는 없었던 온갖 재앙과 질병이 쏟아져 나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육체적인 것으로는 신경통, 통풍, 역병 같은 것들,
정신적인 것으로는 질투, 원한, 복수심, 분노 같은 것들이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판도라가 애초에 상자를 들고 내려온 게
아니라 문제의 상자는 에피메테우스의 것이었다는 설이다. 인간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을 맡았던 에피메테우스가 당시로선 필요가 없었던 몹쓸
것들만 따로 상자 안에 모아 두었는데 판도라가 그걸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자의 소유자가 누구인가는 본질과 별로 상관이 없다. 제우스가 악의를 품고
판도라를 보냈고, 판도라가 문제의 상자를 열었다는 사건의 핵심 줄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이로써 판도라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던 인류에게 대재앙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뒤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은 판도라의 원죄로 말미암아
남성들로부터 갖가지 조롱과 경멸, 비난 때로는 저주까지 받으며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아온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면서 불행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미룬다는 건
어째 좀 불공편하다고 느끼는, 최소한의 공명정대함이라고 갖춘 남성이라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한번 의심해 보았을 것이다. 판도라는 인간을 벌하여는
제우스의 각본 때문에 자기도 알지 못하고 사이에 악역을 맡게 된 희생자
가 아닌가말이다.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역사학, 인류학, 고고학, 신화학, 여성학이 그가 ㄴ밝혀놓은 바에 따르면
판도라의 이야기 뒤에는 오히려 신화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조작한
남성들, 또는 가부장제 사회의 횡포가 아로새겨겨 있다.
잘못된 것은 죄다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식의 역사 왜곡이 시작된 것은
원시공동테 시대의 모계 사회가 무너지면서부터였다.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고
일반적으로 군혼과 난혼이 이루이지던 원시공동체 시대엔 지금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높았다. 하루 종일 들판을 헤매며 짐승을 쫓아다니고도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었던 남성들에 비해 열매나 곡식의 채취를 담당한
여성들이 가져오는 게 늘 더 많았다. 그때만 해도 사냥 도구란 게 기껏
돌멩이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군혼이나 난혼 아래에선 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려내기가 어려워서 자연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혈족이 꾸려졌다. 혈족의
중심이며 경제적으로도 더 가치있는 활동을 담담한 여성의 지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경과 목출리 시작되면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힘이 센
남성이 경제 생활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사유재산이
생겨났다.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 혈족이
확립되었으며, 점차 일부다처제가 자리잡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완전히
예속되었으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사회,경제,문화 전반을 장악했다. 모계
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이런 전환을 여성학에서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라고
표현한다.
그리스 신화는 바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이후에, 즉 가부장제가 확립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의 역사로 범위를 좁혀서 보면 남신 중심인 그리스
신화의 배경이 더욱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발굴한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고고학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가부장적인 종교가 등장하기 5000년
전쯤의 고대 유럽엔 모계 중심의 평화로운 농경 문화, 또는 해양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문화를 이뤄낸 초기 정착민들은 위대한 여신 를
숭배했다. 위대한 여신 은 아스타르테, 너트, 이스스, 니나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원초적 생명력 이었다.
우리가 흔히 만물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어머니 대지 와 통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기워전 4500년쯤, 북쪽과 동쪽에서 인도,유럽어 족이 침입해와
정착민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들은 기마민족 또는 유목민족으로서 부계
중심의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인도,유럽어족들이 정착민들을 정복해 감에 따라
여신 숭배의 사상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침략자들은 그들의 가부장 문화와
호전적인 종교를 정착민들에게 강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위대한 여신 은
침략자가 승배하는 남신의 비굴한 배우자로 격하당하고, 원래 여신의 속성이었던
덕목들을 남신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 결과 그리스 신화에서 보이듯이 남신이 여신이나 인간 여성을 강간하는
이야기, 위대한 여신 의 상징이었던 뱀이 영웅들에게 살해당하는 이야기가
신화에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패배함에 따라 여신도 남신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신이 여자였을 때>라는 책을 쓴 메를린 스톤은 이 위대한
여신 의 몰락이 인도,유럽어족의 침입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판도라가 죄를 뒤집어쓰게 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거꾸로 읽는 판도라 이야기

더욱 확실하게 판도라를 복권시킨 것은 심리학이다. 심층심리학에서는
판도라의 상자를 인간의 내면 으로 해석한다. 즉 인간의 내면에는 판도라의
상자에 들었던 몹쓸 것들처럼 어두운 부분이 있다. 시기, 질투, 증오, 원망,
분노, 복수심, 공격성 - 우리가 늘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 어두운 심연 말이다.
따라서 상자를 연 판도라의 해위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둠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걸 상징하는 원형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지
않고는 그것을 다스릴 수도 없다. 판도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도 두려움 없이 통찰하게 함으로써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길을 열러 준 은인인 셈이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므로.
미국의 저명한 비교 신화 학자 조셉 캠벨은 판도라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구조를 가진 성서의 실락원 이야기를 독특한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두루 섭렵한 캠벨의 연구에 따르면 뱀을 원래 위대한 여신 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어떤 신화에서는 뱀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꼬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이미지 이다. 한
세대가 이울면 다음 세대가 태어난다.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의식, 뱀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뱀이 사악한
유혹자로 등장하는 것은 히브리 민족이 남신 지향적인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즉
가나안 백성들은 원래 여신을 숭배했는데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면서 여신을 거부하고 격하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여성인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 악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부장적 꺼풀을 벗기고 나면 실락원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난다. 여성은 삶을 상징한다. 남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삶은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한 지상이라는 사실, 이 엄연한 존재
조건을 자각케 한 것이 바로 이브이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신과 인간을 분별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을 인식했다는
죄로 신화적인 꿈의 세계,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자각 과 내쫓김 이야말로 인간의 역사 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내쫓김 당한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조전을
통찰하고 그것을 기꺼이 수락 한 것이다.
조셉 캠벨은 실락원의 인간적 의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아담과 이브에게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로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의 삶을 일군 것입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꿈같은 낙원 에덴 동산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 ? 삶도 없습니다.

캠벨의 이 찬사는 마땅히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통찰의 눈을 갖다댄
판도라에게 돌아가야 한다.

희망이 인류를 구원하리라

수천 년 동안 부당한 모함을 받아온 판도라를 복권시키고 찬양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남아 있다.
다시 신화 속으로 돌아가면, 상자 속에서 온갖 재앙이 빠져나가는 걸 본
판도라는 놀라서 후다닥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하여 상자 속엔 오직 하나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았다. 그것은 에르피스, 즉 희망이었다. 그 덕분에
인간은 어떤 횡액을 당해도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사는 경건한 자세를 갖출 수
있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떤 고난과 불행, 시련도 우리 존재의
뿌리를 흔들 수 없다. 희망은 상자를 빠져나간 그 모든 악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엔 얼마나 많은 사악한 것들이 숨어 있는가. 그러나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리라.
이것이 판도라가 인류에게 준 위대한 메시지이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무언가 간절한 염원을 품는 것이리라. 희망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과 나날>이라는 책을 통해
판도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준 헤시오도스(기원전 7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작가)도 희망 앞에다 헛된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놓았다. 언제나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나 괴로운 고통과 불행,
시련을 겪은 나머지 불완전한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이 모순 투성이
세상엔 희망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신의 말을 전하고 싶다.

희망이란 원래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또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은 것이다. 땅위에 원래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걸어가면 그것이 길이 된다.

많은 사람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세상 을 염원하면 그 세상이
올 것이다.

3. 살아있는 지구의 이름, 가이아

지구는 살아 있다.

소련이 세계 최초로 우주선 스푸트니크 호를 발사하고 나서 4년이 흐른 뒤인
1961년의 어느 봄날, 영국 윌트셔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제임스 러브록은
처음 받아 보는 연애편지처럼 기대와 희망으로 한껏 부풀려진 편지 한 장 을
받았다. 것은 미국 항공 우주국로부터 온 것이었다. 편지는 달 탐색선에
실어보낼 실험기기를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귀하를 초청한다 는 내용을 담고
이었다. 러브록은 너무나 들뜨고 기쁜 나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초청은
그동안 그가 은밀히 품고 있던 개인적 환상 을 합법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소 독특한 사람이었다. 생물학자이면서 의학박사이기도 했던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으로 마을에 살면서 다양한 실험기기들을 연구
개발했다. 그는 어린 시절엔 그림 형제의 동화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즐겨
읽었으며 조금 더 켜서는 줄 베른과 웰즈의 공상 과학 소설에 깊이 빠졌는데,
그때문인지 과학자가 된 뒤에 때때로 공상 과학 소설의 현실로 바꾸는 것이 곧
과학자의 사명 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동료들은 그의 그런 말을 농담이려니
여겼지만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제트추진 연구소에서 NASA는 연구원들과 함께 달 탐색용
실험장치를 개발하던 허브록은 이어서 그보다 훨씬 더 흥미를 끄는 연구에
동참하게 되었다. NASA는 화성에 탐색선을 보내 생물체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아보려고 저명한 생물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실험 방법을 개발하고
있었다. 러브록이 맡은 일은 생물학자들이 제안한 다양한 실험방법들을
현실화하는데 필요한 실험기기의 설계와 관련해 자문을 해 주는 것이었다.
평소에 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에서 생물체를 찾으려면 과연 어떤 실험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개인적 환상 을 키워왔던 러브록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그
일에 덤벼들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 프로젝트의 주역인 생물학자들이
만든 실험장치로는 화성에 생물체들이 떼로 몰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생물학자는 화성
생물체 탐사 장치라면서 한 변의 길이가 약 1센티미터쯤 되는 아름다운
상자모양의 기기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러브록이 그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물어 보자 생물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벼룩을 유인하는 상자입니다. 벼룩들은 이 상장 안에 놓인 미끼에
끌려 안으로 뛰어들어 오지만 결코 밖으로 다시 나가지는 못합니다.
화성에 벼룩이 살고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하시는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막이 발달해 있습니다. 사막으로 가득찬
행성이라고나 할까요. 사막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낙타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낙타처럼 벼룩을 많이 붙이고 다니는 동물은 달리 찾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장치를 쓰면 화성에서 생물체를 찾는 데 결코 실패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혼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문들 - 만약
화성에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어떻게 지구의 생물 스타일에
근거한 실험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대체 생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까? -에 해답을 구해나가다가
행성에서 생물체를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의 수송 매개체로서 대기권을 이용하고,
대사 작용의 결과 생성된 노폐물의 처분장소로 해양을 이용한다. 이러한
생물체들의 작용으로 대기권의 화학적 조성이 달라지게 되며 따라서 생물체가
존재하는 생성의 대기는 생물이 살지 않는 행성의 대기와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다 는 것이 그의 가설이었다.
이 가설은 다시 그를 더 큰 가설로 이끌었다.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거창한
생명체 인 지구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제까지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가설이었다.
그 가설의 핵심은 지구는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체 라는 것이었다. 러브록은
지난 30억년 동안 지구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 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생물이 지구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또한 탄소, 질소, 인, 황, 규소 등의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순환하며, 놀랍게도 순환의 매개자가 전적으로
생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생물들은 기후를 조절하고 때로는 해안선을
변화시키고 대륙을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구는 그 위의
생물체뿐만 아니라 대기, 해양, 심지어 토양과 암석까지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진정 살아 있는 한 행성 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지구 는 이제껏 사람들이 써 온 단순한 생물체들의
서식처로서의 지구 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러브록과 동년배이면서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소설가 윌리엄 골딩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이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며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살아 있는 지구의 이름, 그것은
가이아였다. 러브록은 그리스어로 대지의 여신을 의미하는 이 말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하며 흡족해했다.

만물의 터전, 넓디 넓은 가이아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신으로서 게(Ge)라고도
불렸다. 지리학(geography), 지질학(geology) 같은 학문의 명칭 앞머리 글자
ge는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모든 민족들에게는 고유한 세계 창조설이 있다. 더 범위를 좁혀서 보면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지어내고 전승해 온 이들의 독특한 심성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세계 창조설이나 원시 종교에 거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대지의 신
은 대개 여성형이며 그 특성도 비슷하다. 뭇 생명을 낳고 그것을 생장, 번성케
하며 자비롭고 너그럽다. 가이아 역시 그리스인들에게는 생명과 풍요의
근원으로서 거룩한 모성의 원형이였다.
헤시오도스는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세계의 시작 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으며 다음에 생긴 것은 변함없는 만물의 터전으로서 넓고
넓은 가이아니라.

카오스는 누가, 또는 무엇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거기 존재했으며
무한의 공간 속에 자리한 잡탕으로 뒤섞인, 형태 없는 부동의 덩어리 였다.
그래도 그 안에는 만물의 씨앗이 잠재해 있었으니 카오스는 곧 에레보스(그윽학
어둠)와 뉘스(밤)를 낳았다. 이어서 에레보스와 뉘스가 교합하니 거기서
헤메라(낮)와 아이테르(푸른 하늘)가 태어났다.
한편 가이아는 그 넓디 넓은 몸을 뒤척여 우라노스(하늘)와 폰토스(바다)를
낳았고 연후에 다시 우라노스와 교합하여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았다. 그
12남매가 바로 원시적인 자연력의 상징이면서 올림포스 신족의 앞 세대인 티탄
신족들이었다. 오케아노스(대양), 휘페리온(높은 곳을 달리는 자),
크로노스(시간), 레아(동물의 여주인), 므네모쉬네(기억), 테미스(이치)가 모두
티탄의 일원이었다.
티탄 열두 남매에 이어 가이아는 우라노스와의 사이에 퀴클롭스(외눈박이
거인) 3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를 낳았다. 퀴클롭스는 이마에 커다란 눈을
하나씩 달고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3형제의 이름은 각각
브론테스(천둥), 스테로페스(번개), 아르게스(벼락)이었다. 팔이 백 개나 달린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의 이름은 각각 코토스(돌진하는 자), 브리아레오스(강한
자), 귀에스(수족이 있는 자)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양새로 사납거니와 이름
그대로 언동도 얌전치 못했다. 그런 연유로 아비되는 우라노스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면서도 이들을 몹시 미워하였고 끝내는 가이아의 뱃속, 즉
타르타롯(무한지옥)에 가두어 한낮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우라노스의 모진 행동과 갇힌 아들들의 행패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기
그지없던 가이아는 마침내 우라노스에게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이아는
티탄 12남매를 불러모은 뒤 물었다.
누가 나서서 이 어미의 괴로움을 덜어주겠느냐?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않는 중에 막내인 크로노스가 나섰다. 크로노스는
어머니가 준 작은 낫을 들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우라노스가 오길 기다렸다.
밤이 깊어 이윽고 우라노스가 내려와 온 몸으로 가이아의 몸을 덮으려는 찰나,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의 성기를 잘라버렸다. 가이아의 몸 위로 우라노스의
피가 쏟아졌고 그 피의 정기로 가이아는 다시 복수의 세 여신과 기간테스를
낳았다.
아비 우라노스를 거세한 크로노스는 티탄 형제들과 합께 크로노스의 시대 를
열었다. 티탄 형제들은 모두 자신의 누이들과 짝을 이루어 슬하에 많은 신과
여신들을 낳았는데 크로노스는 레아와 결혼하였다. (이러한 근친상간의 의미는
신들의 이름을 새겨 들여다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예컨대 높은
곳을 달리는 자를 뜻하는 휘페리온은 누이 테이아와 결혼하여 태양신 헬리오스와
달의 여신 셀레네, 그리고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낳았다.) 그런데 크로노스는
레아가 자식을 낳자 마자 집어삼켜 버리곤 했다. 그래서 크로노스와 레아의
소생인 하데스, 포세이돈,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는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의
뱃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는 아비를 내쫓은 자는 다시 그 자식에게서 내쫓김을
당하리라는 가이아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노스는 자식을
삼켜버림으로써 후환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낳는 족족 지아비에게 자식을 잡아먹힌 레아는 여섯 번째 임신을 하자
우라노스와 가이아에게 이 자식만이라도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이에
가이아가 방책을 일러주었다. 레아가 아기를 낳자 가이아가 아기를 데려갔다.
레아는 대신 아이 크기만한 돌덩이 하나를 강보에다 둘둘 싸 웃목에 놓았다.
크로노스는 그게 아기인 줄 알고 버릇대로 강보째 삼켜 버렸다. 레아가
크로노스를 속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이 아이가 바로 제우스(광명)였다.
가이아의 은혜로 외딴 섬의 동굴 속에서 자라난 제우스는 어느 날 테미스
여신을 찾아가 아버지를 물리칠 방도를 물었다. 테미스의 귀띔을 받은 대로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시동으로 들어가 신임을 얻은 뒤 크로노스에게 토제가 섞인
술을 먹였다. 제우스에게 속아 넘어간 크로노스는 삼켰던 자식들을 도로 다
토해냈다. 이리하여 원래는 제우스의 형이요 누나였던 하데스, 포세이돈,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는 제우스의 동생이 되고 말았다. 이후 제우스는
형제들과 더불어 티탄 신족들과 전쟁을 벌여(이 전쟁을 티타노마키이라고 한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폐위시키고 올림포스 신족의 시대를 열었다.

가이아를 위한 변론

러브록이 가이아 가설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은 1968년이였다. 미국 천문학회의
연구 발표회 자리에서였다. 이어서 그는 1971년 <대기 환경>이라는 과학잡지에
논문을 투고했다. 2년 후인 73년에는 <텔루스>와 <이카루스>라는 과학잡지에
보다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9년에 드디어 <가이아:생명체로서의
지구>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가설을 진화에 대한 새로운
이론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책은 다윈의 위대한 업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생물종의
진화가 그들 주위의 물리적 환경의 진화와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보탬으로써 다윈의 사상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생물과 그
주위 환경은 상호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마치 단일 시스템처럼 행동한다. 이
책에서 진실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거대한 생물조직, 즉 가이아의
진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로서는 최초의 단서로부터 시작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천문학에서
동물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관련 분야들을 종횡무진 섭렵하며 연구에 몰두한
결과로 얻은 소중한 성과였다. 그는 그 세월 동안 어떤 대학이나 연구소와도
관련을 맺지 않고 방앗간을 개조한 자신의 연구실 겸 응접실 겸 회의장에
틀어박혀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으로 바꾸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가 여러 가지 과학 실험 기기들을 발명하거나 개량한 재주꾼이라는 사실은
가이아를 위해선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극히 미량의
화학물질도 감별해 내는 전자포획 감지기는 그의 가장 든든한 밑천이었다.
때문에 <가이아>의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발명품들을 꾸준히 사들여 준 휴렛
펙커드 사이 따로 감사의 뜻을 전할 정도였다.
러브록은 평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 견해가 심각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책으로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갖춘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표현해야 한다 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구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견해를 소개하는 그 최초의
저서를 사전만 가지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다. 하지만 그의 책은 바로
그점에서부터 동료 과학자들의 못마땅한 눈길을 받아야 했다. 심각한
과학자들에게는 그것이 과학을 비하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성직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공격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그에게 정작 뉴욕에 있는 세례 요한
대성당은 강연을 요청한 반면 과학자들은-물론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그의
가설을 시대착오적인 괴짜 몽상가의 궤변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터무니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되기도 전에 가이아 이론은
여러 분야 과학자들의 국제회의의 의제로 대두되었고 러브록은 1988년 그간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포함한 두 번째 저서 <가이아의 시대:살아있는 지구의
전기>를 발간했다.
가이아 이론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과학자는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를 필두로 하는 사회생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이아
가설이 성립하여면 생물체의 유전자 속에 앞날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설계를
미리 세울 수 있는 어떤 조건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하였다. 하물며 그것이 토양, 암석, 대기, 해양 같은 물리적
환경을 포함해 전지구적 규모로 진행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가이아가 살아있는 유기체라는데 그렇다면 그 유기체의
세포와 유전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러브록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집합체는 그 구성원 하나
하나에서는 도저히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속성을 지닌다 는 일반론 위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실험으로 재반박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 색의 데이지 꽃과 그것을 먹고 사는 초식 동물로만 구성된
단순한 생태계를 자기고 있는 행성을 가상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따르면 이 가상의 세계는 태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복사열이 크게 많아지거나
적어지거나를 막혼하고 항상 적당한 기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데이지꽃과
초식동물이 미래를 예측하거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생물종들 사이에 무의식적인 성장과 경쟁이 진화의 원리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면 게 러브록의 주장이었다.
가이아 이론에 대한 또다른 거센 비판은 일부 환경보호론자들로부터 나왔다.
러브록은 환결오염이 가이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는데
결론은 가이아에겐 그게 그리 큰 물제가 이나라는 것이었다. 생물체가 지상에
출현한 35억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 어떤 재난에도 불구하고 가이아는
앞으로도 생물들의 생존에 적합학 환경을 만들어 나가리라는 믿음에 근겋나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가이아 이론은 산업계가 환경을 파괴해도
좋다는 면죄부나 다름없다 는 비난을 부러일으켰다. 러브록은 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가이아 이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범지구적 시야를 갖도록 강요한다. 이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지구 전체의 건강성이지 일부 생물종의 안위 여부가
아니다. 환경 보호 운동은 인류의 건강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 점에서
가이아 이론과 환경 보호 운동은 서로 그 궤를 달리하기 시작한다.........나는
오로지 가이아를 위해서만 주장을 펼히고자 하는데 그것은 인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매우 많은데 비해 가이아를 위하여 소리를 내는 사람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가이아를 위한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러브록의 이 발언은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다시피 지금에 와서는 환경보호운동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편의를 양보하지 않는 선상에서, 다시 말해 적당한
개발을 통해 환경도 되도록 깨끗이 보호하자는 편에서부터 모든 인공적인 것을
거부하자는 쪽까지 좌우로 넓게 포진해 있다. 그런데 인간이야말로 가이아에겐
최고의 오염물질 이라는 러브록의 생각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따라서
겸손히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 환경 근본주의자들의 생각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우리들은 자연계를 파괴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영락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가이아는 현재 의도적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아이가 선호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쪽으로 우리들이 계속
범지구적인 환경 파괴 행위를 일삼는다면 가이아는 결국 인간 종족들보다 더 잘
자신에게 순응하는 생물종으로 우리들을 대치하리라. 이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만약 우리들이 이 세상을 하나의 생물체로 간주하고 우리들이 그것의
한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면 - 그 소유자도 아니요 임대인도 아니며 단순한
방문갯도 또한 아닌-우리들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신이
내리신 기간 만큼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활할 것인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지 여부는 우리 각자의 의사에 달려 있다.

그러면서 그는 묻는다. 만약 가이아와 공존하는 것이 우리 개인의 책임이라면
도대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몇 가지 작은
방안으로 러브록은 세가지 C를 삼가는 일을 들었다. 세가지 C란 자동차(Car)와
가축(Cattle)과 전기톱(Chair saw)이다. 예컨대 쇠고기를 지금보다 적게 먹으면
열대 지방의 삼림을 파괴하여 비육우 목장을 만드는 파괴행위도 그만큼 줄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가이아의 또다른 얼굴

러브록은 <가이아의 시대> 말미에서 가이아 이론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 고 말했다.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가설을 내세운
과학자가 했다고 믿기에는 싱거운 말이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이론은 우리들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한 한 인간의 견해 이며 자신의 견해가 인간과 대지와의
유기적 관계를 일깨우는 역할 을 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가이아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 가이아
이론은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행성 지구와 우리 자신,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지구가 살아있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거대한 생명체 가이아의 일부라고
생각해 보자. 늘 보는 하늘도,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왔다가는 사계도,
비,눈,바람도, 무심히 꺾어드는 들꽃도 달리 보이리라. 그것은 모두 가이아가
치르는 장엄한 생명 의식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 또한 그 의식에 동참한다는
느낌을 가질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경건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그리스인들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체감한 것도 필경 그러한 경건함 속에서였을
것이다. 가이아의 숨결에 조용히 귀기울일 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생명 조직의 피와 살, 뼈대를 그토록 쉽사리
파헤치고 부수고 더럽히지는 못하리라.
한 가지 잊어 벼려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가이아를 비롯해 여러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들은 생명을 관장하는 자비로운 속성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을 거두어 들이고 파괴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다. 러브록의 다음과
같은 경고는, 사망과 붕괴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인 바, 그것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개인으로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작은 대가 라는 그의 신뢰할
만한 삶의 태도를 헤아려 볼 때, 경청해 마땅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가이아는 아무 그릇된 행동이나 다 허용하는 인자한 어머니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의 거친 행동에 의해서 쉽게 해를 입을 수 있는
섬세하고 연약한 숫처녀도 아니다.
가이아는 꿋꿋하고 강건하여서 온 세상을 편안하게 감싸 주며 자신의 법칙에
복종하는 존재들에게는 항상 안락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자신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을 훼손하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아주 무자비할 수도 있다. 가이아의
무의식적인 존재 목적은 이 행성을 생물들이 살기에 적당하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들이 이러한 가이아의 법칙을 거역한다면 가이아는 아무런
동정심 없이 인간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대륙간 탄도탄에 장착된
미세한 전자 두뇌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 미사일을 최대 속도록 정확하게
목표물에 명중시키듯이.

4. 이성과 광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아폴론적 인간과 디오니소스적 인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다. 저마다
다른 역사, 다른 성격, 다른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이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수많은 작은 우주들 을
살펴보면 똑같지는 않을지언정 비슷하게 닮은 꼴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운행법칙이 서로 흡사한 우주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기질과 개성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먼
옛날부터 있어 왔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몸 안에 있는 네가지 액체에
근거를 두고 사람의 성격을 괄괄하고 변화무쌍한 다혈질, 까다로우면서 변덕이
심한 담즙질, 근심,걱정이 많고 비사교적인 흑담즙질, 생각이 깊고 침착,냉정한
점액질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의 성격을 크게 생산적 성격과
비생산적 성격으로 나누고 비생산적 성격을 다시 수용지향형, 착취지향형,
저장지향형, 시장지향형으로 세분하였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외향형과
내향형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이분법도 있다. 심지어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살이 찌는 형인지 아르는 형인지로 개성을 가늠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을 이렇게 몇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어떤 사람의 개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 주는 묘미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아폴론 형 과 디오니소스 형 으로 사람을 나누는 방식이 있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며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아폴론적 이라는 말은 빛
또는 태양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의 집합체로,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말은 술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의 집합체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균형,조화,절제,질서,이성,지식,평운함이 아폴론적인 이미지라면,
도취,극단성,무질서,본능,광란,환상,열광은 디오니소소적인 이미지이다.
아폴론의 세계는 이성 이 지배하는 세계요,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광기 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이처럼 극단적인 대립항으로 놓고 설명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였다. 니체는 1872년에 그리스 비극의 근원을 논한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따.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 예술이 대립되는 두
자기의 예술적 충동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는 그리스의
조형예술, 즉 조각과 회화에서 대표적으로 잘 드러나는, 밝고 명랑한 아폴론적
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음악으로 대표되는,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충동, 바로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갈등과
결합에 의해서 문화가 발생하며 그리스의 비극은 양자가 행복하게 결합한
상태에서 나온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존재의 일상적인 범위와 한계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추구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극단으로 가는 길은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 고 믿는다. 반면에 아폴론적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용을 지킨다. 심지어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잊지 않는 유형이다.

아폴론 형 문명과 디오니소스 형 문명

<국화와 칼>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여성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도 니체가 세워 놓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대립적 정식을
문화분석의 도구로 원용하였다. 베네딕트는 어떤 문화의 고유한 특질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어떤
뚜렷한 가치 체계 아래 서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어떤 뚜렷한 가치
체계 아래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종합적 방법론을 주창했다.
그것이 문화유형론이다. 그녀는 <문화의 유형>이라는 책에서 북미 대륙의 인디언
문화를 현지에서 조사해 비교,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펼쳤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비슷한 여러 인디언 부족의 문화 안에서도 사실은 완전히
판이한 문화유형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아메리카 평원에
사는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디오니소스 형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격렬한 경험, 즉 인간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궤도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단식이나 고행, 약물, 알콜을
통해서 환상 상태에 이르려 하고, 환상 속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고자
한다. 그들에겐 무엇에든지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며 그런
덕목을 갖춘 전투적인 사람을 존경한다. 반면에 뉴멕시코주의 고원지대에 사는
주니 족은 그와 대단히 상반되는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매사에 중용을
중시하며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과도한 것은 불신하고 경멸한다. 용감하고
정열적인 사람은 비난받고, 붙임성 있고 온화하며 남 앞에 잘 나서려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존경받는다. 어떤 경우에도 감정적인 흥분이라든가 화를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사랑이든 증오이든 질투이든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도 역시 혐오의 대상이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주니 족의 문화를 전형적인
아폴론 형의 문화라고 설명하였다.
굳이 가르라고 한다면, 예로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격정적인 우리 민족의
문화는 아무래도 디오니소스 형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유복했던 신, 아폴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적인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탄생과
성장을 둘러싼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아폴론은 올림포스의 12주신 가운데서
제우스 다음으로 숭앙받는 지위에 있었다. 그는 태양의 신이자 예술의
신이었는데 또한 예언과 궁수의 신이었다. 또한 빛나는, 찬란한 이라는 뜻을
가진 포이브스 아폴론이라 불렸다. 아폴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특별한 숭배는
공상적이고 모호하며 형태없는 것과 반대되는 지적이고 단호화고, 특정할 수
있는 것 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편애를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원래는 12주신 가운데 들지도 못하다가 나중에야 주신들
가운데 그 역할이 가장 미미한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대신 12주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술의 신이자 황홀경과 공포의 신, 야성의 신이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둘 다 제우스의 서자였다. 하지만 아폴론의 어머니 레토는 비록
정실은 아니었으나 여신이었고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아폴론은 태어날 때부터 뭇신들의 사랑을 받은 유복한 신이었고
디오니소스는 너무나 기구한 이력을 지녀서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인 듯한
느낌을 주는 불행한 신이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헤라의 질투 때문에 출생이
순탄치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제우스가 레토를 가까이 해 아이를 갖게 한
사실을 안 헤라는 온 그리스 땅에다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렸다. 태양 아래
드러나 있는 땅 이면 어느 땅이든 레토에게 출산할 장소를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일 명령을 어기면 단숨에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리라는 처벌
조항까지 달았다.
레토는 몸풀 자리를 구해서 그리스와 에게 해의 수많은 섬들을다 헤매
돌아다녔다. 더욱이 레토는 쌍둥이를 배고 있었다. 하지만 헤라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어떤 땅도 레토의 간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출산이 임박한
레토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곳은 바로 델레스 섬(떠올라 보인 섬)이었다. 이
섬에 델로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사연이 있어서였다. 레토를 범한 제우스는 그
뒤에 레토의 동생인 아스테리아까지 넘보았다. 아스테리아는 언니 레토가 그랬던
것처럼 메추라기로 변해 도망쳤으나 제우스 역시 그때처럼 독수리로 변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제우스가 사라진 뒤에야 바다 밑에서 떠올라 섬이 되었다.
아스테리아도 헤라의 명령이 무섭기는 매일반이었으나 피를 나눈 자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레토를 받아들었다.
머리맡에서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 이치의 여신 테미스를 비롯하여 여러
올림포스 종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토는 아프레 밤낮을 진통했다. 하지만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헤라가 해산의 수호여신이 에일레이티아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토를 끔찍한 고통에서 구한 것은 테미스
여신이었다. 테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파도로 델레스 섬을 가려 달라고
부탁했다 파도로 델레스 섬을 가림으로써 태양 아래 드러나 있는 땅이면 어느
땅이든 출산 장소를 제공하지 말라 는 헤라의 명령을 교묘히 피한 것이었다.
이윽고 레토가 쌍둥이를 낳았으니 바로 아폴롱과 아르테미스 남매였다. 이
쌍둥이가 태어나가 여신들은 다투어 손뼉을 쳤고 대지는 벙긋 웃었다 고 한다.
제우스는 자식들을 무사히 낳게 해 준 은공에 답하느라 그때까지 뿌리도 없이
바다 위에 덜렁 떠 있던 델로스 섬을 바다 바닥에 단단히 동여매 주었다. 그리고
아폴론에게는 백조가 끄는 전차를 선물로 주었다.
아폴론은 태어나자마자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제게 악기를 주세요, 제우스의 영광을 노래하렵니다. 제게 활을 주세요,
어머니 레토의 한을 풀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태어난 지 나흘만에 아폴론은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준 활을
둘러메고 파르나소스 산으로 달려가 헤라의 시주를 박고 레토를 괴롭혀 왔던
거대한 뱀 피돈( 판도라에게 찬사를 에서 이야기한 위대한 여신 을 상징하는
바로 그 뱀이다)을 쏘아 죽였다.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델포이 신전을 맡기고
피톤의 아내였던 암뱀 피티아를 인간으로 탄생시켜 아폴론의 제관 노릇을 하게
했다. 이후로 델포이 신전에는 아폴론의 예언과 신탁을 듣거나 죄사함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태양을
다스리고 궁술과 예언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아폴론은 뭇신과 인간들의 아낌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피톤을 죽인 벌로 잠시 인간세상으로 유배당하고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일에 얽혀 두 번이나 똑같은 벌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그저
재미 있는 이야깃거리일 뿐 벌이랄 게 없었다.

용서받지 못한 신, 디오니소스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었을까. 디오니소소의 어머니 세멜레는
헤라한테서 레토보다 훨씬 끔찍한 보복을 당했다. 세멜레는 테베 왕가의
딸이었다. 제우스가 세멜레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걸 눈치 챈 헤라는 어느 날
세멜레를 키웠던 늙은 유모 베로에로 변신해 세멜레를 찾아갔다.
소문에 듣자 하니 아가씨의 집에 제우스 대신이 드나든다면세요? 사실이라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만, 아가씨, 세상엔 지입으로 말하는 바와 같지 못한
이가 많습니다. 제우스 대신이 틀림없다면 징표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대신께서는 천상에 계실 때 빛나는 갑옷을 입고 계신다니 그 옷차림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틀림없는 제우스이니까요.
헤라의 간계에 넘어간 세멜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세멜레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꼭 들어주십사고 간청하자 제우스는 저승 앞을 흐르는 증오의 강
스틱스에 걸고 꼭 들어주마고 약속을 했다. 이윽고 세멜레가 입을 열었고
제우스는 세멜레의 이야기를 들은 즉시 그것이 헤라의 농간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스틱스에 걸고 맹세를 했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제우스는 눈물을
머금고 천상으로 돌아가 갑옷을 입고 내려와야 했다. 인간의 눈이 어찌 그
광휘를 감당할 수 있었으랴. 세멜레는 갑옷이 뿜어내는 빛과 열기에 새카맣게 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세멜레의 몸 속에서는 6개월 전부터 아기가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안 제우스는 세멜레의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고 금실로
꿰맸다. 이윽고 열달이 다 차서 아기를 꺼내니 그가 바로 시오니소스였다.
아폴론이 태어났을 때처럼 박수를 쳐 준 여신도 없었고 대지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서러운 탄생이었다. 제우스는 아기를 니사라는 곳으로 보내 님프들에게
맡기고 헤라 몰래 기르도록 했다. 그래서 아기에게 니사의 제우스 라는 뜻을
가진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디오니소스는 이외에도
어머니가 둘인 자 라는 뜻의 디오메트로, 광기를 불어넣는 자 하는 뜻의
마이노미노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니사의 산과 들을 누비며 자라는 동안 디오니소스는 포도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술을 빚는 방벙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디오니소스의 존재를 알게 된
헤라는 그때까지도 분노를 거두지 않고 디오니소스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게 만들어 버렸다. 다행히 디오니소스가 프리기아 땅을 방랑하고
있을 때 이 청년을 가엾게 여긴 자비로운 여신 레아가 광기를 없애 주었다.
디오니소스는 그 뒤로도 여전히 방랑을 계속하며 가는 곳마다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빚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소아시아를 거쳐 인도로까지 건너간
디오니소스는 거기서 몇 년을 지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인도 원정을 끝으로 오랜 방랑을 마감하고 디오니소스는 고향 테베로
돌아왔다. 머리엔 포도 덩굴로 만든 관을 쓰고 한 손엔 티르소스(주신을
상징하는, 솔방울이 달린 지팡이), 또 한 손엔 술잔을 들고 나타난 디오니소스를
테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드디어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밀교가
생겨나 온 테베 땅에 널리 퍼졌다.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 가운데는 여성들이
특히 많았으며 노예들도 있었다. 아다시피 고대 그리스의 여성들은 노예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억압과 고통에 찌들려 살아가던 여성들에게는 디오니소스
밀교의 신비스러운 제의가 일종의 탈출구였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무리를 지어
산과 들을 헤매다녔다. 술을 마시고 황홀 망아의 상태에서 야간 집회를
가졌는데, 집회 때에는 마음 속의 온갖 한을 토해내듯 괴성을 질렀으며, 바라를
치고 피리를 불며 광란에 가까운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도 의식이 끝나면 숲
속에 그대로 쓰러져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때로는 산 짐승을 갈갈이 찢어 죽여
그 고기를 날것으로 먹기도 했다. 날고기는 신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먹는 행위는 재생을 간구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테베에서 시작된
디오니소스 밀교는 온 그리스로 퍼져 나갔고 알렉산더 대와이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에는 전 헬레니즘 세계를 휩쓸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열광시킨 디오니소스의 가르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술이 주는 황홀한 도취였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톰 무어는
자신이 디오니소스의 추종자임을 확인하는 것은 삶 가운데 고통과 죽음의 장이
있음을 인정하고 알아차리는 것, 죽음에서부터 삶에 이르는, 또 고통에서부터
황홀경에 이르는 전 범위를 담담히 지켜보는 것 이라 말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뿐만 아니라 모든 식물의 생육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디오니소스의 로마 식 이름인 바쿠스는 싹 을 뜻한다. 한알의 씨는 땅 속에
묻혀 긴 겨울을 나고 봄이면 부활한다. 그리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간다.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망아의 상태로 들어 간 뒤,
그 망아의 정점에서 그들은 어쩌면 생성과 소멸이 곧 하나인 자연의 이법을
깨달았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씨앗임을, 한 씨앗으로 태어나한
생을 살고 갈 뿐임을, 그러니 속세의 욕망과 고통에 얽매여 괴로워 할 것도 없고
그저 겸손히 자연의 저 위대한 정적 속으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리라고. 봄이
오면 나의 소멸을 딛고 또 다른 씨앗이 꽃을 피우지 않는가.

빅극을 탄생시틴 디오니시아 축제

비극, 즉 영어 tragedy 의 어원은 그리스어 tragoigia 이다. 양(trago)의
노래(dia)'라는 뜻이다. 양이 어떻게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며, 또 양들이 부르는
노래가 어떻게 비극이 되었을까.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1년에 두 번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축제의 이름은 디오니시아 였고 그 중에서도 봄이
시작되는 3월 그믐에 열림 대 디오니시아 때는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비극
경연이 벌어졌다. 초창기에는 둥글게 다져놓은 흙바닥이 극장 구실ㅇ르 했다.
지금으로 치면 무대에 해당하는 그 둥근 마당을 오케스트라 라고 했고
오케스트라 북쪽에는 나무로 된 좌석이 있었으며 남쪽엔 배우들이 쓰는 천막이
있었다. 지금의 분장실이다. 오케스트라 남쪽엔 배우가, 북쪽엔 합창단은 탈을
썼다. 맨 얼굴로는 지붕도 없는 넓은 마당에서 관객들에게 감정의 움직임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합창단의 지휘자격인 배우가 선창을 하거나 대사를 하면 50명의 합창던아
구애 대답하는 형식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합창단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양신 사티로스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티로스는
머리엔 뿔이 돋아있고,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신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극의 형식이 그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건
디오니소스 교도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곤 했는데 사티로스 모양의 탈을 쓴
사람들이 반드시 행렬의 앞에 서서 노래를 선창하였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가 고향 테베로 돌아올 대 사티로스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디오니소스가 산과 들에서 살았고 또 식물 생육의 신이니만큼 숲과 들에서 사는
목양신 사티로스는 디오니소스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의가 그리스가
도시국가로 발전한 후에 축제 행사로 정착되었고, 그후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연극이 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대다수의 비극의 가지고 있는 이야기
구조, 즉 질서의 혼란, 주인공의 고난과 죽음, 질서의 회복이라는 틀이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재생의 과정, 나아가서는 겨울에 죽은 생명이 봄에
부활하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비극 공연의 초창기엔 합창단을 빼고는 배우가 한 사람만 등장하였기 때문에
탈과 못을 갈아입어 가며 한 명이 몇 사람의 역할을 맡거나 또는 두세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한 사람 역할ㄹ을 맡았다. 또 배우와 합창단이 주고받는
말과 노래 가운데서 합창단 즉 양들의 노래가 극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
비중이 축소되었고 나중엔 합창단이 아예 사라지게 됨으로써 오늘날의 연극과
같은 형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디오니시아 때 열렸던 비극 경연에서 연거푸 1등상을 받음으로써 유명해진
작가들이 우리가 아는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테스
같은 사람들이다. 아이스킬로스는 배우의 수를 둘로 늘리고 합창단의 역할을
줄여 대화가 극의 중심이 되게 했고 소포클레스는 다시 배우 수를 셋으로
늘리고 무대에 배경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극의 형식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아가멤논>, <오이디푸스 대왕>, <메디아>등 3대 비극작가들의
대표작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그리스 시대의 비극은 주로 고대의 신화나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내용을 따온 것들이었다.

이성과 광기가 만나는 곳, 진리의 세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이 아폴론적인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그리스의 비극이라 하였다. 그는 비극의 근원을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찾음으로써 아폴론의 이성보다는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더 놓이 샀으며 근대에
들어와 안이한 합리주의, 낙관주의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사라졌음을
슬퍼했다. 만일 니체가 살아 있다면 온갖 극단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다 동원되는
20세기의 전위예술을 보고 디오니소스 정신이 부활했다고 기뻐할는지도
모를ㅇ리이다. 예술은 어쨌거나 이성보다는 광기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도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가 더 매력적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도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가 더 매력적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빈틈없이 절제된 것보다는 빈틈 많은 불완전한 것들에 친근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디오니소스는 광기 자체가 아니라 광기를
통해 광기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순각적인 쾌감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20세기의 통탄할 쾌략주의는 디오니소스의 창조적
광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성과 광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결국은 한 곳에 도달한다. 우리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밝고 높은 등대,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너희의 빛,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작가이다. 주제와 인물 설정, 사건 전개와 심리 묘사등이 독특한 질서 아래
단단히 통일되어 있는 그의 작품 세계는 세계 문학사를 놓고 보더라도 단연
우뚝한 데가 있다. 평론가들이 흔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 라고 일컫는 그
독특한 작품 세계는 원색의 유화 물감이 마구 뿌려져 마르지도 않은 채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는 커다란 회색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 세계를 요약해
표현할 때면 19세기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건져 올린 생동감 넘치는 인간
군상들,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 치밀하고 집요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관된 주제 의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죄의식, 심판, 처벌,
참회, 구원을 둘러싼 문제에 상당히 집착하였다.
만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 의 이런
모든 특성들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탐욕스런 호색한 표트르
카라마조프가 어느 날 밤 손도끼에 찍혀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러 정황
증거에 의해 한 여자를 사이에 놓고 아버지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큰아들
드미트리가 살해 용의자로 체로된다. 그러나 재판 도중에 놀리 정연한
인텔리겐치아이자 둘깨 아들인 이반이 자신이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카라마조프가에는 간질병을 앓는 비천하고 사악한 하인 스메르자코프가
잇었는데, 그는 사실은 카라마조프의 사생아였다. 이반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증오를 부추겨 교묘하게 살해를 교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뇌와 번민 끝에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는 이반의 말을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스메르자코르까지 자살해 버려 드미트리는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만큼 범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시베리다 유형을 달게 받아들인다.
소설 전편을 통해 셋째 아들 알료사와 그의 스승 조시마 장로가 선의 상징으로서
악의 상징인 표트르, 스메르자코프와 대립 구도를 이루며 신과 인간, 인간
구원을 둘러싼 주제를 시종일관 이끄러 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부친 살해 심리

그런데 1928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작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명
심리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노문이 발표되었다. 논문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 살해범>이었고 발표자는 인간의 정신 활동은 의식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고 주장하며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저 유명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모든 예술 작품은 꿈과 비슷하다 고 생각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 이다. 꿈이 의식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무의식적인 사고나 욕망을 가장 선명하고 다양하게 비추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는 꿈의 분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무의식 속에
있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소망은 대부분 성적인 것이고 의식의 눈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꿈은 그러한 무의식적
충동을 의식이 받아들일 만한 정도로 적당하게 위장 하고 왜곡 시켜 드러낸다.
예를 들면 사촌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무의식적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근친 상간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꿈에는 사촌이 아니라 웬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꿈이
위장 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있고 또한
환상적으로나마 사촌과 사랑을 나는고 싶다는 무의식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꿈에는 사촌이 아니라 웬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꿈이 위장 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있고 또한 충족시키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예술 작품도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무의식적 소망이 위장된 채 드러난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작가 자신에게 부친 살해 심리가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라든지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머니 나이뻘인 전당포 노파를 지구인 것
등이 모두 그런 심리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자기 영지에 속한 한 농노에 의해 도끼로 살해되었다. 그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열여덟 살이었다. 일생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괴롭힌 간질
발작이 시작된 것도 바로 열여덟 살 때부터였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이 진짜 간질이 아니라 히스테리성 발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찍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에서 비롯된 부친 살해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욕구를 자각했기
때문에 진작부터 아버지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가 살해되자 원래의 죄책감에다 자신이 아버지를 주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새로운 죄책감이 덧쌓였고 그 결과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게
되엇다. 즉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은 도둑이 제 발 저려서 생긴 신경성
질병이라는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서 드미트리가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작가 자신의 도덕적인 자기 학대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스로를 벌줌이로써 죄책감을 덜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말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는 끔찍한 소망을 품었던 걸까?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 보자면 그런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는 결코 끔찍한 것도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거치게 되어 있는 일종의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3,6세 사이의 남자 아이가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성의
아버지를 결쟁자로 적대시하는 심리 현상을 가리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는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 발달하는가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본성적 욕구에서 파생하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처럼 생각했다. 그 동력의 이름은 리비도 이다. 본능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라고 인간을 내모는 불가항력적인 힘, 그것이 리비도이다.
리비도는 흔히 성적인 충동 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데, 그것은 프로이트가
인간이 지닌 여러 본능적 욕구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이 성적인 욕구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양은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지만 사람이 성장해 감에 따라
표현 형태를 달리한다고 보았다. 리비도는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재기를
거쳐 성기기로 발달해 가는데 각각의 단계를 어떻게 거치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각각의 시기에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었는지 그렇게
않은지에 따라 성격상의 특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리비도가 입과 입술,
혀 그밖의 입 근처에 지중되는 시기가 태어나서 1년 반까지의 구강기인데, 이
시기엔 아이들이 입을 할 수 있는 활동, 즉 엄마의 젖을 빨거나 손가락을
빨거나, 무언가를 깨무는 일에서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만약 이 시기에 아이의
욕구가 과잉 충족되거나, 지나치게 좌절된다면 그 아이는 장차 지나친
낙관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한 남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이 강하며,
술,담배를 지나치게 즐기거나 껌씹기를 좋아하는 등 입을 많이 놀리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어떤 시기에나 욕구가 알맞게 충족되어야지 지나치게
많거나 적게 충족되면 성격상의 결함이 생겨난다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구강기, 항문기(1.5-3세)에 이어 남근기가 오는데 이 시기를 오이디푸스기
라고도 한다. 보통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과 어머니들 동일시한다.
그래서 남자아이의 경우, 처음엔 나도 어머니철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기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서히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어머니를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질투심,경쟁심을 트끼고
어머니를 혼자 독점하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된다. 그래서 때로 난 아버지가
죽으면 엄마랑 결혼 할꺼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이의 이런 말을
버리지만 프로이트는 그 말의 뒤에 숨은 무의식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은 아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아버지에게
들켜 거세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버지와 더욱 깊은 동일화를 꾀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남자의 길 을 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마침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 청산하게 된다.
오이디푸스기를 무사히 통과하면 이어 잠재기(7-12세), 성기기(13세 이후의
청소년기)를 거치게 된다. 성적 충동이 왕성해지는 성기기에는 다시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이 부활하는데 그 욕망이 어머니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완전히 청산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 극복 과정은 아이의 주체성 확립과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프로이트는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극복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거나
청산하지 못하면 자라서도 올바른 이성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거나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홀어머니와 외아들 의 관계도
오이디푸스기의 정상적 통과 여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비극적 영웅,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다는 모티브에 착안하여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에 그
주인공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에겐 자식이 없었다. 텔포이 신전에서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그들에게 신탁이 내리기를 아들이 생기긴 하겠지만,
그 아들은 장차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는 것이었다. 라이오스는
왕지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신탁이 낼니 운명을 피해 가려 했다.
그러나 술이 몹시 취한 어느 날, 왕비와 몸을 섞고 말았고 마침내 그토록
둘워하던 아들이 태어났다. 신탁의 실현을 두려워 한 왕은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은밀히 부하 한 사람을 불렀다. 그는 양치기였다. 라이오스 왕은
아이의 발목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두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강보에 싸 내밀며 일렀다.
키다이론 산 깊숙히 들어가 아이의 발목을 묶은 이 가죽끈을 튼튼한
나뭇가지에다 걸어놓고 오너라.
하지만 양치기는 차마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코린토스의
어떤 양치기에게 아이를 넘겨주었고, 왕에게는 시킨대로 했노라 보고했다.
그런데 당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왕에게 혈육이
없음을 늘 안타까이 여겨왔던 충직한 양치기는 자기가 얻은 아이를 왕에게 갖다
보였고, 왕과 왕비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했다. 발견된 당시에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해서 아이에겐 오이디푸스(발이 부은 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헌헌장부로 자라난 뒤, 어느 날이었다. 오이디푸스를
데려왔던 양치기가 술자리에서 오이디푸스가 왕의 친아들이 아님을 발설하고
말았다. 왕은 쉬쉬 했짐나 이상하게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으로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물었다.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 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오이디푸스는 저주받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방랑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떠나
있으면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데 보이오티아로 양하던 도중에 오이디푸스는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 좁은 길에서 마차를 탄 웬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노인은
오이디푸스더러 길을 비키라고 채찍을 휘둘렀고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오이디푸스는 노인과 그 부하를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는 테베에 스핑크스하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수없이 죽이기에 델포이 신전에 그 연유를 물으러 가던 중이었다. 자기를 죽인
청년이 자신의 아들임을 라이오스가 몰랐듯이 오이디푸스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오이디푸스는 방랑을 계속하여 몇 달 뒤에 테베에 이르렀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당도한즉 사람들이 반가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상히 여긴
오이티푸스가 까닭을 물으니 혹시 스핑크스를 물리칠 수 있는 영웅이 아닌가
싶어 그런다고 대답했다. 스핑크스는 머리는 여자, 몸은 사자인 데다 양 어깨엔
날개까지 단 괴물이었다. 테베 도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신전의 기둥 위에
올라 앉아 수수께끼를 내고는 그걸 알아맞추지 못하면 목을 졸라 죽여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꼭 남자만 죽이니 자칫하다간 테베 남자들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 끝에
선왕도 스핑크스를 물리칠 방도를 묻기 위해 델포이 신전으로 가다, 불행히도
강도를 만나 죽고 말았다. 고 덧붙었다. 그래서 테베 왕가에서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에게 왕위를 주며, 홀로 된 왕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이 모험을 받아들였다.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개의 다리,
오후에는 두 개의 다리, 저녁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다. 해답은 인간 이었다. 인간은 갓난아기 때는 두 발과 두 팔, 즉 네
다리로 걷다가 어른이 되면 두다리로, 그리고 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 세 다리로
걷는다. 오이디푸스가 해답을 말하자마자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약속대로 왕위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딸과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태평성대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어느 날
난데없이 테베에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오이디푸스는 다시 텔포이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부친 살해와 근친 상간에 대한 징벌 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그때까지도 코린토스 왕을 친아버지로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는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살하였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아 장님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미치광이가 되어 떠돌아 다녔다.

에리히 프롬의 또다른 해석

지금 까지 우리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그에서 유래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웬지 마음이 무겁다. 무언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향한 약간의 반감-과연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힘, 히비도에 의해 조종당하는 존재인가 하는-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때문이건만,
더욱이 그 운명을 피해 보려고 애를 썼건만, 기어이 오이디푸스는 그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걸까? 하는 연민의 감정이다.
첫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마음을 다소 달랠 수 있는 길이 있다. 신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 프로이트와는 다른 견해를 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롬은 아이들이 유달리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이에겐 세계의
전부이다. 아이는 어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일부로 자라나, 출생한 뒤에도 역시
어머니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한다. 어머니야말로 아이에겐 생명을
주고, 생명을 좌우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의존심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물에 대한 집착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낙원, 즉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던 행복한 상황에 대한
동경심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행복한 낙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곧 신경증으로 이어진다. 그 집착을 끊고 홀로 설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단순히 성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했다는 것이다.
부친에 대한 적대감 역시 프롬은 프로이트와 다르게 해석했다.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구와 관련된 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부자 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며 그의
운명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된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굴복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은 자연스레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낳고, 억압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들며 극단적으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이러한 갈등 역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성의
대결로 왜곡시켜 버렸다고 프롬은 비판하였다.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유달리 집착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본질적인 갈등
구조가 있음을 발곁하고 그 현상에 주목한 것은 프로이트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을 성적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처럼 생각한 그의 인간관의 한계
때문에 그 발견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축소되어 버렸다는 게 프롬의 주장이다.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은 어찌해야 할까.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자시느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 길이 없었는데도, 라이오스가 어린 아들을 죽이려 했고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데도, 길을 가는 오이디푸스의 화를 돋군 장본인은 라이오스임에도,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를 구해준 선행 때문이었음에도, 어머니 이오카스테가
부은 발을 보고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왜 모든 책임을 오이디푸스가
뒤집어써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이 연민이야말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고자 목적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의 반응을 보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연민과 공포의 카타프시스 라고 갈파했다.
비극을 봄으로써 우리는 가련한 주인공에게는 연민을,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앞에서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 극장의
무대 위에서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설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카타르시스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운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오이디푸스가
파멸했다면 그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반문으로 그만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다스리기로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 대왕>의 한 장면을 음미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카타프시스 하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로 하자.

오이디푸스 : (절규하며)오오, 빛이여,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해다오! 이
몸은 죄 많게 태어나 죄 많은 혼인을 하고 죄 많은 피를
흘렸구나! (눈을 찌른다)

합창단 : 조국 테베의 사람들이여
이이가 오이디푸스이다.
저 유명한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온 장안의 누구나 그 행운을 부러워 했으나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말았도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세상 저편에 이르기 전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아라

6. 마음은 힘이 세다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미국의 교육학자인 로젠탈과 제이콥슨은 1968년, 교육학 관련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연구
결과의 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사가 어떤 학생에게 저 아이는 장차 성적이
크게 오를 것 이라는 기대를 하면 그런 기대를 받은 학생을 실제로 성적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국민학교를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하였다.
실험 대상이 된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하류 계층에 속했으며 학생 수는
650명이었다. 1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전학년에 걸쳐 능력별 반편성이 되어
있었는데 읽기 성적을 우수반, 보통반, 열등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열등반에
속한 학생들은 대부분 가정 형평이 아주 어려웠고 주로 멕시코계였다.
두 사람은 먼저 전교생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면서 고사와
학생들에게 지능검사의 목적을 성적이나 지능이 크게 향상될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라고 밝혔다. 물론 이것은 교사와 학생들을 속이기
위해 계획된 거짓말이었다. 지능검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가 반에서 약
20퍼센트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냈다. 그리고는 이들의 명단을 교사들에게
돌리면서, 이번에 실시한 지능검사 결과, 성적이나 지능이 크게 향상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학생들 이라고 알려주었다. 이것도 역시 실험을 제대로 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꾸민 거짓말이다. 무작위로 뽑았으니 만큼 지능검사 결과와
명단에 오른 학생들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연구자들의 말을 그대로 다 믿었다. 교사들로 하여금 명단에 오른 학생들에게
성적이 크게 오를 것 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 연구의 전제이자
핵심이었던 것이다.
8개월 뒤에 학생들은 앞서의 것과 똑같은 지능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일반 학생들과 점수는 앞서의 검사 결과에 비해 8.4점이 오른 반면
20퍼센트의 학생들, 즉 실험 집단의 점수는 12.2점이나 높아졌던 것이다. 일반
학생들의 평균점보다 3.8점이나 놓은 수치였다. 특히 학년별로는 1학년과
2학년에서 일반 학생과 실험 집단간의 차이가 크게 나타났으며 저소득 계층에
속하는 멕시코계 학생들의 점수가 두드러지게 향상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로젠탈과 제이콥슨은 이러한 연구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학생에 대한 교사의
기대감은 실제로 성적 향상을 가져오는데, 이러한 기대 효과는 저학년 그리고
하류 계층 학생들에게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 보더라도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러
선생님들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든 선생님들 앞에서 한결같지 않다는
느낌을 한 번쯤은 가지게 된다. 어떤 선생님 앞에서는 공연히 주눅이 들거나
위축되고 어떤 선생님 앞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행동거지가
단정해진다. 꼭 선생님뿐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친구에게는
굉장히 너그럽다가도 어떤 친구에게는 사납게 군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행동이 그리 되는 듯하다. 저
선생님은 나를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는 느낌이 들면 이상하게도
그 선생님 앞에서는 늘 단정치 못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말이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다가 어쩌다 단추가 떨어진 옷을 입고
오면 꼭 그 선생님에게 지적을 당하게 되는, 그런 식이다. 반대로 저 친구는
나를 참 의젓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는 생각이 들면, 정말로 그 친구
앞에서만큼은 더할 수 없이 의젓해진다.
그런 경험 법칙을 되살려 보면 교사의 기대가 학생들의 성적을 실제로
향상시키게 되는 심리적 과정을 어렵잖게 이해할수 있다. 연구자의 의도를 모른
해 착생의 지능과 잠재 능력을 신뢰하게 된 교사는 그 학생에게 평소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교사의 기대감과 신뢰는 눈빛과 말씨,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고 학생은 그것을 느낀다. 설혹 그 학생이 당장 좋은 결과를
나타내지 못하더라도 교사는 그 학생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실망치 않고 계속
격려하고 애정을 기울일 것이다. 그 학생에게 기대감을 가지기 전이라면 넌
어쩔 수 없구나 하고 포기할 일도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큼 위안이
되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기대와 격려를 받는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것 역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 학생은 선생님의 신뢰와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저학년과 멕시코계 학생들에게 그러한 기대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저학년은 아직 자신의 학습 능력에 대한 판단(이를 학문적 자아
개념 이라 한다.)이 영글어 있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어 라는 생각이 아직
굳어지기 전이라 교사의 기대감에 따라 나는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을 하기가
훨씬 수월한 조건 아래 있는 것이다. 또 계층적으로 가장 극빈한 층에 속하는
멕시코계 학생들은 아마도 교사의 기대와 신뢰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스스로에 대해 체념하거나 부정적인 자아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뜻하지 않게 선생님의 신뢰와
애정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 없는 힘도 쑥쑥 생겨나지 않겠는가.
로젠탈과 제이콥슨의 연구는 이른바 자기충족적 예언 이론을 교육 현장에서
검증한 것이었다. 자기충족적 예언 이론이란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주위의
예언이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는 이론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피그말리온 효과 라고도 한다.

피그말리온의 사랑과 아프로디테의 은총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에 사는 솜씨가 빼어난 조각가였다. 키도 작고 별로
잘생기지도 못한 피그말리온은 어쩐 일인지 여자는 멀리할수록 좋다 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여자란 결점이 너무 많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리라 결심했다.
어느 날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여자의 입상을 조각했다.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조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여자가 너무 얌전해서 그런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상아 처녀는 살아있는 인간 그대로였으며, 감히 어떤
여자도 가까이 와 견주어 보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왔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
완벽한 작품을 날마다 흡족한 눈으로 감상했다. 그러다 그만 상아 처녀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제 손으로 만든 조각임에도 그걸 깜빡 잊고 살아있는
여인에게 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상아 처녀를 손끝으로 쓰다듬곤 했다. 해변에서
예쁜 조개껍질이나 조약돌이라도 주울라치면 얼른 상아 처녀에게 갖다 바쳤고
산에 들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도 한아름씩 꺾어다 처녀의 팔에 안겨 주었다.
앙증맞은 귀와 긴 목에다가는 빛나는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어두었다.
얼굴에 어울리는 예쁜 옷도 해 입혔고 급기야는 긴 의자에 폭신폭신한 요를 깔고
그 위에 상아 처녀를 눕혔다. 물론 머리맡에 부드러운 깃털로 만든 베개를 고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집을 들고 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상아
처녀에게 입맞춤을 하곤 했다.
그런데 키프로스 섬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이름 그대로 바다의 흰 거품(아프로스)에서 태어난 여신이었다. 흰
거품이 오랜 세월 바다를 떠돌다 이윽고 여신을 빚어 조개껍질에 싣고 지중해의
한 섬에 내려다 놓으니 그 섬이 바로 키프로스였다. 아프로디테가 대지 위에
첫발을 디딘 곳이 바로 키프로스였던 것이다. 그 뒤로 키프로스 사람들은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세우고 해마다 큰 축제를 벌였다.
피그말리온이 상아 처녀와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섬의 제일 큰 명절인
아프로디테 축제일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신전에 갖가지 제물을 갖다 바쳤고
신전에 피운 양 냄새가 온 섬에 진동했다. 피그말리온도 신전으로 가 제물을
바치고 여신을 경배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빌었다.
여신이시여, 바라건대 저에게 아내를 주소서......
그는 저 상아 처녀를 아내로 주소서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너무도 수줍어서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에 저 상아 처녀 같은 여성을 아내로 주소서 라고
조그맣게 덧붙었다.
기도를 마친 피그말리온은 집으로 돌아와 늘 하듯이 긴 의자 위로 몸을
구부리고 상아 처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처녀의 입술에
온기가 감도는 게 아닌가. 놀란 피그말리온은 처녀의 몸을 쓰다듬어 보았다.
처녀의 몸은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피그말리온은 다시 한
번 처녀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처녀가 두 눈을 뜨고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피그말리온을 바라 보는 게 아닌가. 신전에 흠향하러 와 있던
아프로디테가 피그말리온의 순정을 어여삐 여겨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된 상아 처녀에게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으며 둘 사이엔 아들 파포스가 태어났다. 아프로디테에게 봉헌된
키프로스의 파포스라는 도시는 바로 이 아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랑과 믿음의 힘

영국의 극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죠지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원용하여 5막짜리 희곡<피그말리온>을 남겼다. 주인공인 H. 히긴스는
음성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학문적 실험의 일환으로 가난한 소녀
일라이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 일라이자는 런던의 거리에서 꽃을 팔아
살아가는 하류 계층의 소녀였다. 히긴스는 일라이자의 엉망진창인 발음과
사투리, 빈민층 언어를 교정해서 귀부인으로 변신시키고 애초의 목표대로
사교계의 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상아 처녀를 인간으로 변화시킨
피그말리온처럼. 그러나 그는 학문적 실험의 성공에 만족할 뿐 일라이자를
이성으로 대해 주지 안는다. 이에 실망하고 모욕감을 느낀 일라이자는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이들은 신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행복한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결말을 이렇게 처리한 것이야말로 날카로운 기지와 독설로 유명한 버나드 쇼다운
점이라는 평도 있다.
그런데 이 희곡은 정작 연극보다는 영화로 더 유명해졌다. 1964년 미국에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제작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청순한 얼굴을 가진 배우 오드리 헵번이 일라이자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에서는 끝 부분이 신화의 결말처럼 해피엔딩으로 개작되었다. 히긴스가
일라이자를 가르치는 도중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희곡의
결말이 버나드 소다왔다면 해피에딩으로의 개작은 가장 헐리우드다운 것으라고
할 수 있다. 스타와 섹스, 그리고 해피엔딩이야 말로 헐리우드 영화를 떠받쳐 온
세 개의 기둥이라고 일컬어지니까.
피그말리온 효과 는 우리에게 사랑과 믿음의 힘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지성이면 감첨이라는 우리네 속담이 가리키는 바도 그것이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믿음은 그 사람 속에 잠들어 있는 것들을 깨우고 흔들어 마침내는
활짝 꽃피게 한다. 요컨대 상아를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들 그것을
일컬어 사랑의 기적 이라고 한다. 친구나 부모, 선생님, 때로는 연인-최악의
순간에도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 주는 피그말리온이 있기에 수많은 기적이
일어난다. 빈곤과 범죄의 수렁에서 헤어나 새 사람이 되고, 불처의 병을
이겨내며, 온갖 시련을 헤쳐내고,, 인간 승리를 이룩한다. 셜리반니더라도
힘들고 외로울 때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날이 삶이 얼마나
따뜻해지겠는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고, 더듬어 볼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내가 저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랑과 믿음은
반드시 전달되고, 그것이 간절하고 지극한 것이라면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정신, 의지, 마음, 영혼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힘을 이야기하다 보니 얼른 떠오르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이른바 플라시보 효과 에 대한 이야기다. 플라시보란 가짜약을 말한다. 위장병
환자에게 새로 개발된 특별한 위장약이라고 속이고 영양제를 복용하게 하였더니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현저하게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시보 효과 라는 것인데 여러 가지 실험에서 이런 효과가 검증되었기 때문에
의약계에서는 치료를 목적으로 일부러 가짜약을 주기도 한다. 실질적인
약리작용은 없지만 환자의 정신을 안정시켜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새삼 마음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네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

나 자신을 지극하게 사랑하고 믿어 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무언가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알고 일찍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어라. 네가 대접받고 싶으면 남을 대접해
주어라.
그렇다. 남을 사랑하고 믿어 주는 일, 지극하고 간절하기까지야 않더라도 그저
남들만큼 사랑하고 믿어 주는 일만 해도 얼마나 어려운가. 작고 하찮은 것,
못나고 힘없는 것,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돌보고 감싸오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낮고 외로운 자리에 내려 서고, 나아가서 그것들 속의 하나가 되는 길이
참 시인의 길이하고 믿고 살아온 인가한 눈빛의 노시인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조그만 시련에도 견디지 못하고 내 안의 사랑이 흔들려 괴로울 떼
한 번씩 읽어보자.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힘을 주리라.

동해바다
-후포에서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후포는 울진 아래 있는 작은 어항이다.

7. 아름다움은 어디에
아프로디테

<밀로의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1820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에게해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여러섬들, 일컬어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하는 한 섬인 밀로 섬에서 어떤 농부가 아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밭에는 관목이 무성했다. 농부는 손길이 닿는 대로 관목을 뿌리를
뽑아내던 농부는 한순간 멈칫했다. 방금 관목을 걷어낸 자리에 땅 밑으로 통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농부는 엎드려 구멍 속을 들여다 보았다.
구멍은 제법 긴 동굴과 이어져 있었고 그 속에는 조각상이 하나 서 있었다.
높이가 2미터에 이르는 그 조각상은 배꼽 아랫부분만을 주름진 옷으로 가린
반라의 여인상이었다. 왼팔은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고 없었으며 오른 팔은
겨드랑이 아래 젖가슴 높이에서 부러져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농부의 눈에도
범상찮아 보이는 조각상이었다. 게다가 농부의 밭 가까이에는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농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예사롭지 않은 여인상을 내보였고 이
소식은 곧 현지의 프랑스 대리 영사 루이 브레스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일찍이 보국으로부터 고대 미술품이 발견되었을 때는 지체 없이 사 들이라 는
비밀 훈령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술에 관한 한 워낙 문외한이어서
선뜻 단안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각상을 발견한 농부 이오르고스는
조각상의 값으로 무려 2만 5000프랑을 요구하고 있었다. 브레스트는 일단
총영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 마침 밀로 섬에 정박중이던
프랑스 군함에다 승선하고 있는 장교 중에 혹시 미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없는지 를 알아 보았다. 다행히 그 배에는 그리스 통으로 알려진 소위가 한 사람
타고 있었다. 브레스트의 명령을 받아 발견된 조각상을 직접 살펴 보고 온 그
해군 소위는 이것은 틀림없는 비너스 상 이라고 장담하였다. 브레스트는 즉각
이 소위의 견해를 총영사에게 보고했고 총영사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프랑스 공사 리비에르 후작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리비에르는 해군 소위를
직접 만나 상세한 설명을 들은 다음, 당장 자기 돈으로 조각상을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뜻밖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의 식민지였고, 그
중 키클라데스 제도는 전제주의적인 대관 니콜라이 모르네가 통치하고 있었다.
오리코노모스라는 수도사가 조각상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문제는 그가
니콜라이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데 있었다. 그는 니콜라이와 짜고 농부
이오르고스를 불러, 만일 터키 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조각상을 압수할 것 이라고 겁을 준 다음, 헐값으로 조각상을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조각상을 터키로 실어가려고 배를 항구에 대기시켰다. 조각상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 군함과 터키 배가 맞붙은 형국이엇다. 양측 사이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와중에 드디어 오이코노모스가 조각상 운반을 시도했다.
이에 질세라 브레스트는 프랑스 해군을 해안으로 상륙시켰다. 드디어 프랑스
군인들과 오이코노모스가 이끄는 그리스 인들 사이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불문가지, 싸움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고 조각상은 프랑스군함에 실려
남프랑스의 툴롱 항으로 운반되었다. 이어 조각상은 리비에르 후작에게 건네졌고
후작은 다시 그것을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마침내 왕명에 의해 루브르 궁정에
소장된 이 여인상이 바로저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 또는 <멜로스의
아프로디테>였다.
발견된 당시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 미술사가들은 이것이 그리스 고전시기의
거장 브라크시테레스의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흥부하였다. 하지만 머리
부분이라든가 아랫도리를 감싼 주름진 옷의 표현 양식에 헬레니즈 시대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제작 시기와 작가를 둘러싸고 의논이
분분하였다. 갑론을박 끝에 제작년대는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세기 초이며,
얼핏 그리스 고전기인 기원전 4세기의 작품 같은 인상을 풍기는 우아한 자태는
아마도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한 헬레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이
부활되었던 당시의 풍조 속에서 나온 것이리라 추정되었다. 없어진 팔이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인가를 두고도 제작년대에 대해서만큼이나 의논이
분분했는데 아프로디테를 주제로 한 여러 그림이나 조각상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두루 살피건대 오른 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져 있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
했다. 또 왼팔은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으며, 손바닥을 제쳐 그 위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아프로디테에겐 비둘기, 백조, 장미 등 여러
상징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황금빛 사과-트로이전쟁을
불러일으킨-여서 다른 그림이나 조각에도 자주 등장하였던 터였다.
<밀로의 비너스>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예술사에서는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대접을 받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여인상이 있다.
유럽의 산악지방인 빌렌도르프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으로서 돌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 여인상은 비너스를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여겨온
이들에게 적잖은 배반감을 안겨 준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이 비너스의 가슴은
풍만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로 크고, 배는 아이를 몇 낳은 중년 부인의
그것처럼 불룩하며, 두툼한 허벅지 사이의 음부 역시 가슴 못지 않게
큼지막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뿐만 아니라, 흔히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의 비너스 로 명명되며 미술사에서는 통칭해 돌의 비너스 라 일컬어지는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들은 하나같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비너스
-고전미를 자랑하는 <밀로의 비너스>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그려진
눈부신 나신의 비너스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여성으로서의 성징만
불균형스럽게 과장되어 있는 이 구석기의 풍만한 여인들에게 붙은 비너스라는
이름이 도무지 가당찮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비너스는 올림포스 12 주신 가운데 하나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로마 이름이다.(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식 이름은베누스인데 그것의 영어식
발음이 비너스이다.) 그런데 회화나 조각 작품의 제목으로 흔히 등장하는
비너스, 즉 발견된 장소를 앞세우는 어디의 비너스 또는 화가나 조각가의
이름을 앞세우는 누구의 비너스 , 그림 속 여인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앞세운
...하고 있는 비너스 할 때의 비너스는 아프로디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여인상 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그 중에는 물론
실제로 신화 속의 아프로디테를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들도 있지만 대개는 여신의
이름을 비려 여성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예술의 중요한
모티브였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인체가 그 대상이 된 것은 원래 여성미가
남성미보다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예술 창작을 담당한 사람이 주로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여인상은 3만년 전의
저 먼 구석기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화나 조각의 빼놓을 수 없는
주제로서 미술사의 한 공유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시대를 달리하며 탄생한
다양한 여인상을 살펴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각 시대의 여인상은 그 시대의 미적 기준을 모자람없이 표상하고 있다.
따라서 여인상의 역사 는 바로 인류의 미적 이상의 변천사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동물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구석기 시대를 살았던 옛사람들에게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만큼 아름다움 여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밀로의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너무나 다르다. 두 비너스를 나란히 놓고
보노라면 절로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천상의 아프로디테, 지상의 아프로디테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둘러싸고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호머는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인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와는 다르다.
앞서 이야기 한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이야기를 잠깐 되새겨 보자. 우라노스가
괴물 자식들을 가이아의 뱃속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가둠으로써 고통을 받게 된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를 시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게 했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자른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그 우라노스의
사랑의 뿌리 가 바다를 떠돌며 거품을 일으키다 마침내 아름다움의 화신인
아프로디테를 빚어냈다는 것이다.
거품 속에서 완전히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탄생한 아프로디테는 조개껍질에
몸을 실은 채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미는 대로 흐르다 마침내 키프로스 섬에
도착했다. 그윽한 향기와 함께 장미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여신이 도착하자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 세 자매가 여신을 맞이했다. 그들은 아테나 여신이 짠
옷으로 아프로디테의 발가벗은 몸을 가리고 머리에는 관을 씌워 올림포스의 신들
앞으로 안내했다. 제우스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거두어
다스림으로써 인간과 뭇짐승들이 널리 번성하도록 하라는 직분을 주면서
아프로디테를 주신의 대열에 넣어 주었다. 포세이돈과 아폴론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모여있던 남신들은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짝이 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기아하게도 아프로디테는 그 많은 남신들을 놔 두고 하필 신들
가운데서 가장 못생겼을 뿐만 아리나 절름발리이기도 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와 가장 못생긴 남신 헤파이스토스의 결합을
두고 후세의 식자들은 그 상징하는 바를 아름다움과 숙련된 기능이 결합함으로써
예술이 탄생한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풀이하였지만 정작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아름답기는 하였으되 아프로디테는 참으로 정숙치 못한 아내였다.
헤파이스토스를 놔두고 다른 남신들과 수시로 밀애를 즐겼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했던 스캔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와의 불륜이었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 챈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날 짐짓
나들이를 가는 척 집을 나섰다. 아프로디테는 얼른 정부인 아레스를 집으로
불러들었다. 둘이서 한창 사랑을 나누는 중에 헤파이스토스가 들이닥쳤다. 놀란
두 신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파이스토스가 청동을 거미줄 보다 더 가늘게 늘여 짠 그물을 침대 위에
던져 놓고 갔던 것이다. 헤파이스토스의 그물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것이었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그물에 묶이어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에 헤파이스토스의 전갈을 받은 여러 신들이 그 불륜의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제우스, 아폴론, 헤프메스, 포세이돈은 물론이고 몇몇 여신들까지
민망한 얼굴로 낯뜨거운 모습을 지켜보았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두 신은
포세이돈이 헤파이스토스를 달랜 덕분에 겨우 그물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의 사이에서 딸 하르모니아(조화)와 두 아들
데이모스(공포)와 포보스(두려움)를 낳았다. 두 신의 결합은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두 종류의 열정, 즉 사랑과 전쟁의 결합을 상징하는데 그 둘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때 탄생하는 것이 조화라고 한다.
하지만 헤파이스토스의 그런 창피 주기는 아무 소용이 엇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에 이어 헤르메스와도 관계를 가져 그 사이에서도 자식을 둘 낳았다.
하나는 헤르마프로디토스였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였는데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들도 아니고 딸도 아닌 어지자지, 즉 자웅동체로 전해진다.
아프로디테는 지체가 다른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일도 그리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아프로디테의 연인이 되었던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도니스였다. 아도니스는 잘생긴 젊은 사냥꾼이었다. 얼마나 이 청년을 끔찍이
사랑했던지, 여느 때 같으면 나무 그늘에 누워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던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와 같이 숲을 헤메고 산을 넘느라 세월가는
줄을 몰랐다. 아프로디테는 어린 연인과 함께 사슴이나 토끼를 쫓아다니면서 늘
당부를 하곤 했다.
위험한 짐승은 감히 쫓으려고 하지 말아라. 나를 매혹시킨 그대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사자나 멧돼지에게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 무서운 발톱과
엄청난 힘을 항상 경계하라. 그대의 몸을 위험하게 하는 일은 곧 나의 행복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
그런 어느 날, 아프로디테는 키프로스 섬에 볼일이 있어 예의 그 당부를
남기고 연인의 곁을 떠났다. 혼자 사냥감을 찾아 숲속을 헤메던 아도니스의 눈에
마침 멧돼지 한 마리가 스쳐지나갔다. 아프로디테의 당부를 유념하기엔 너무
젊었던 탓에 아도니스는 멧돼지를 향해 창을 던지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창은
빗나갔고 성난 멧돼지는 무서운 기세로 아도니스를 덥쳤다. 멧돼지는 사실은
변신한 아레스였다.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심술을 부린 것이었다. 키프로스 섬으로 가던 도중에 연인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프로디테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프로디테가
피투성이가 된 아도니스의 몸을 안았을땐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아프로디테는 연인의 싸늘한 몸을 부둥켜 안고 슬피 울며 부르짖었다.
그래, 운명의 여신들이여! 그대들이 승리했다. 그러나 나는 완전한 승리는
주지 않으련다. 내가 이렇게 슬퍼한 표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리라.
나의 아도니스여, 그대의 죽음과 내 탄식을 해마다 새로워지게 하리라. 그대가
흘린 피를 꽃으로 피어나게 하리라. 이로써 내 마음이 위안을 얻는대서 누가
나를 시기할 수 있을 것인가!
아프로디테는 말을 끝마치면서 아도니스가 흘린 피 위에다 신주를 뿌렸다.
피와 신주가 섞인 자리에서는 거품이 일더니 마치매 붉은 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또 누가 시기를 한 것인지 그 꽃은 수명이 길지 못했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며
꽃잎을 열어주었는가 하면 다시 또 바람이 불면서 꽃잎을 흩날려 꽃의 이름은
그래서 바람꽃, 아네모네였다.
아도니스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았으나 목동 안키세스 또한 아프로디테와 사랑을
나누었다가 불행한 일을 당한 인간이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키세스는 신과 같은 몸매를 가진 인간 이었다. 이다 산 비탈에서 황소를 몰고
있던 안키세스를 본 순간 아프로디테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프리기아의
공주로 변장해 안키세스를 유록하여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안키세스가 열락을
누린 뒤의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자 아프로디테는 본 모습을 드러내고는 일렀다.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제우스 대신의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안키세스는 한동안은 그 엄청난 비밀을 혼자서 잘 삭였으나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안키세스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로 제우스의 벼락이 떨어졌다. 여신의 행실이 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제우스로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프로디테가 보호를 해 주어서 목숨은 건졌으나 안키세스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아프로디테는 그 뒤 안키세스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 시조인 아이네이아스라고 한다.
아프로디테의 사랑의 이력은 여신의 몸가짐으로서는 지나치게 문란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주재하는 신이었고 그것은 즉 성욕,
관능, 생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리 타매할 일은 아니었다.
아프로디테의 이력은 사랑이 반드시 의롭지만은 않다는 것, 때때로 도덕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인간사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프로디테가 늘 쾌학을 즐기는 데만 빠져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랑을 통한 새로운 창조의 전범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일도 많이 하였다. 지순한
피그말리온을 위해 상아 처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일, 남자들에게 도무지
관심이 없는 처녀 아탈란테를 사랑한 히포메네스를 도와 두 사람을 맺어 준 일
따위가 그러하다.
플라톤은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의 입을 빌려
아프로디테가 지닌 상반되는 두 가지 속성을 지적하였다. 우라노스의 뿌리로부터
어머니 없이 태어난 신화에 근거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 즉 천상의
아프로디테와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에 근거한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죽 지상의 아프로디테가 그것이다.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생식과
종족보존을 관장하며 쾌락과 열락을 추구하는 관능적인 속성을 말하며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정신을 높은 경지로 고양시키고 창조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고매한 사랑의 속성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아프로디테는 12 주신 가운데서도 아폴론이나 아테나와 함께 사람들에게
특별히 섬김을 받은 신들 축에 들었다. 크니도스, 파포스, 아마토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신전이 있었고 신전이 있는 도시에선 여신을 기리는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곤 했다. 제우스의 벼락처럼 요한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을 기꺼이
머리속이게 한 아프로디테의 권능, 그것은 다름아닌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눈으로 덮힌 새벽
들판, 그 위에 찌힌 작은 발자욱 , 하늘을 나는 작은 새 한 마리, 맹수의 포효,
아기의 웃음, 마하트마 간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춤추는 최승희......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우리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얼어붙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마음이 어딘가에서 어디로 움직이는 걸 느끼며.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또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좁은 데서 넓은 데로, 누추한 데서
정결한 데로, 시끄러운 데서 조용한 데로, 약한 데서 강한 데로, 날카로운 데서
부드러운 데로, 나에게서 남에게로, 지상에서 천상으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어디서 오는 걸까? 아프로디테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이래 수많은 현신들을 통해 그 물음에 대답해 주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살아남는 일이 지상의 과제였다. 아다시피 그들은
짐승을 사냥하거나 나무 열매, 풀, 우련히 발견하 곡식 들을 채집해 먹고
살았다. 그러나 큰 짐승을 잡거나 열매가 잔뜩 달린 나무를 발견한 운 좋은 날을
빼고는 늘 먹을 것이 모자랐다. 더 많은 먹을 것! 그것이 그들의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아직 짐승을 길들여 키우거나 곡식을 재배하는 법을 알기
전이었으므로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짐승들이 새끼를 많이 치기를,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염원했다. 그때는 또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태풍이나 폭우, 겨울의 추위로부터 어린 자식을
보호하기도 힘들었을 분더러 맹수의 습격, 질병에도 별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때문에 많이 낳아야만 확률의 법칙에 따라 그나마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의 젖가슴, 배 , 성기가 그토록 커진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자식을 낳고 기르는 데 쓰였으며, 크고 풍만할수록 자식을 많이
낳아 잘 기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석기 시대 여인들의 몸매가
모두 그 머 못나서 그리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조각가들의 솜씨가 서툴러서 그리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릇 많은 것이 좋은 것,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 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그러한 구석기 시대의 미적 이상을
압축하고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비롯한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들을
따로이 풍요 다산상 이라 부른다.
한편 <밀로의 비너스>는 그와는 다른 미적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는 달리 그 어떤 과장이나 왜곡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여성의 인체를 더없이 섬세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몸을 그토록
차분한 눈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일이다. 고대 세계가 이룩한 그 어떤 문명에도 이처럼 사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상은 없다. 더구나 그것이 여신의 모습임에랴. 오직
그리스인들만이 그렇게 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 이외의 것에는 어떤 것에도, 사제나 전제군주,
심지어 그들이 믿는 신 앞에서도 무릎을 끓지 않았다. 그들은 내세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했고, 낙관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영원하고 장엄한 것보다는
유한하고 자연적인 것을 추구했다. 수많은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들에겐 인생이란
그 자체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밀로의 비너스>에는 바로 그런
그리스인들의 사상과 인생관이 녹아들어 있다.
신의 뜻대로 살았던 죄많은 인간의 시대였던 중세와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그들에겐 현재의 삶보다는 내세가 중요했고, 육체는 죄악과
타락의 근원이었으며, 개인의 바램보다는 교회나 사제의 명령이 우선이었고,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덧없었다. 그러니 대체 무엇을 그리거나 조각할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경우를 빼고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에도 가급적 자세한 묘사를
피했다. 무언가를, 더구나 사람의 몸 같은 위험한 걸 자세히 묘사한다는 건
죄악에 물들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중세엔 물론 한 명의
비너스도 탄생하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비너스들을 만날 수 있다. 사실주의, 감각주의를
예술적 특징으로 하는 헬레니즘 시대엔 <웅크린 비너스>, <아름다운 엉덩이의
비너스>처럼 한층 더 관능적으로 자유분방한 모습의 비너스가 태어났으며
르세상스 때는 보티첼리의 <조개 위의 비너스(비너스의 탄생)>, 지오르네의
<잠자는 비너스>, 티지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태어났다.
발가벗었거나 옷을 입었거나,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단정하거나 요염하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잠을 자거나 간에 이 모든 비너스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다른 그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삶의 조건도, 사상도,
가치관도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아름다움은 지상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너스의 역사는아름다움의 역사이며 아름다움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난해한 예술 작품 앞에서 주눅들지 않기 위해

그렇게 보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곧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20세기의 비너스는 종잡을 수가 없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둘째치고 일반인들로선 우선 뭐 저렇게 생긴
여자들이 다 있어 라는 생각이 든다. 또 광고에, 드라마에, 영화에, 연극에
종횡무진 등장하는 육감적인 여성들을 보면 우리 시대엔 아름다움이 섹시함 과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20세기의 삶이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고 종잡을
수없다는 말일 게다. 언뜻 봐서는 이해되지 않는 예술 작품 앞에서 공연히 기가
죽는 분들을 위해서, 그래도 에이, 뭐 이런 게 있어 하며 돌아서지 않고 그
속에 담긴 20세기의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들(물론 나도 여기에
속한다.)을 위해 동굴 벽화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굴 벽화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들소나 사슴, 말 같은 들짐승들이, 그렇게 오래전에 그려졌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이상하게도 동굴 안쪽 어두운 곳에 그려져 있으며 한 번 글니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또 그림 위에는 돌이나 창, 화살 같은 것으로 찌른
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다. 이런 몇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그 그림들은
오늘날의 그림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그림들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 오빠 부대 들의 방에 걸려 있는 대형
브로마이드와 비슷한 것이었다. 사진을 걸어놓음으로써 마치 오빠 와 가까이
있는 듯 느끼는 여학생들처럼 구석기인들은 들짐승을 그려 그것을 칼이나 창으로
무수히 찌러댐으로써 사냥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짐승들을 잘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 남아 있는 그림처럼 잘 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수천 년 동안 같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엔 아무나 그리다가 나중엔 분명히 그림을 특별히 잘 그리는
사람에게 그 일을 전담시켰을 것이다. 그러다 한 재능 있는 구석기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어떤 그림이 마침내 주술적 도구로서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실용 에서 심미 로의 건너뜀, 거기서 드디어 예술이 탄생한 것이리라.
물론 그런 건너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활에서의 건너뜀, 예컨대 들짐승을
길들일 줄 알게 되면서 생긴 여유 같은 게 전제되었을 것이다.
예술의 시초는 그와 같았다. 아무리 난해해 보이는 예술작품도 그 태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그 뒤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예술은 고유한 법칙과
문법을 가지게 되었다. 사상이나 도덕의 이름으로 예술을 재단할 수 없는 이유로
그 때문이다.
그린 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는 그림 앞에 서면
동굴 벽화를 한 번 떠올려 보기 바란다. 어떤 것이 탄생한 경위를 알면 그것의
본질적 속성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굴 벽화는 예술의 뿌리는
지상의 삶에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그런 총론이 구체적인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주는 건 분명하다. 인간을, 그 도무지종잡을
수 없는 존재를, 인간의 역사를,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그 유구한
세월을 이해하는 일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인간과 인간의 역사가 그렇거늘
그것을 담고 있는 예술이 어찌 한눈에 담뿍 잡히겠는다.

8. 개혁은 어려워라
트로이의 목마

야합, 또는 트로이의 목마

1993년 3월부터 그 뒤의 서너 달을 떠올리면 지금도 짜릿한 느낌이 든다.
바야흐로 30여 년의 군부 정권을 끝내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때였다. 문민
정부의 최고 지도자인 김영삼 대통령은 과감한 개혁 을 통해 이제까지의 낡은
한국 을 새로운 한국 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낡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고워 공무원들의 재산이 낱낱이 공개되었고, 직위를 이용해서 재산을
축적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던 부정한 관리들이 상당수 공직에서 쫓겨났다.
몇 억씩의 돈으로 별을 사고 팔았던 위세 좋던 장군들도 군복을 벗어야 했다.
쫓겨난 부패한 관리 대신에 새로 임명된 서울 시장이, 그린벨트 안에 있는 집을
허가 없이 고쳤다는, 낡은 한국 의 기준으로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이유로
6일만에 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뿐만이랴. 군부 정권에 의해
불손.파괴분자들의 난동 으로 매도되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투쟁 으로 자리매김되었으며 더러운 돈이 오가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금융실명제도 실시되었다. 청화대의 점심상에 오른
칼국수는 또 얼마나 신선해 보였던가. 여차하면 한 대 후려갈길 기세로 이놈!
하고 눈을 부릅뜬 군사정권 밑에서 오랫동안 주눅들어 지내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은 마치 의붓어미한테 온갖 구박을 받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옴으로써
오랜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는 듯한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서는 정의의 기사가 나타나 악독한 무리들을 쳐부수는 만화 영화를 볼
때의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법보다는 돈, 양심보다는 권력, 성실히 일하며 흘리는 땀보다는 뇌물과
투기가 힘을 발휘했던 낡은 한국 에서 큰소리 치고 살았던 사람들-유식한 말로
기득권 계층이 그러했다. 낡은 한국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그들은 새로운
한국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영삼 대통령은 주로 그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다시피 김영삼 대통령은 3당합당을
통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김대통령 자신은 그것을 구국의 결단 이라
표현했지만 무혈 쿠데타 야합 이라는 비난도 들끓었다. 어쨌거나 선가는
치러졌고 김영삼씨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씨의 당선이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은 것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대통령 자리에
오른 김영삼씨는 그를 야합의 명수 라 비난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개혁정책을 천명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로선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힌
격이요, 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언론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을 트로이의 목마 라고 빗대어 표현했다.
트로이의 목마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정체를 숨기거나 위장한 채로 적진에
들어가 적을 함락시키는 스파이를 말한다. 당하는 쪽에서 보면 멋모르고
받아들였다가 그로 말미암아 큰 낭패를 당하게 되는 화근 덩어리를 일컫는다.

불화의 사과와 트로이 전쟁

트로이는 지금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에 있던 왕국이었다. 그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쟁이 트로이 전쟁이고 10년에 걸친 그 긴 전쟁의
전말을 서사시로 기록한 것이 바로 호머의 <일리아드>이다.
트로이 전쟁은 아주 엉뚱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신 테티스와 영웅 펠레우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모든 신들이 빠짐없이 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상기한다면
잔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아 그러려니 여길 만도 하건만, 따돌림을 당한 데
양심을 품은 에리스 여신은 혼인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 중에 나타나
하객들사이에다 황금 사과를 한 알 던졌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께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세 여신, 즉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서로 그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참을 입씨름 해도 결말이 나지 않자 세 여신은 제우스에게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다 산에 살고 있는, 파리스라는 잘생긴 양치기 청년에게 판결을
맡겼다. 여신들은 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각기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약속했다. 헤라는 부와 권력을, 아테나는 명예와 명성을, 아프로디테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노라고 했는데 이윽고 파리스가 선택한
것은 아프로디테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파리스는 사실은 트로이 왕가의 왕자였다. 어린 시절에 이 아이는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 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인 프리아모스
왕이 궁궐에서 내보내 양치기로 키운 것이었다. 게다가 아프로디테가 파리스에게
주마고 약속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는 이미 결혼한 여자였으니,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꾀어내 조국 트로이로 가 버렸다.
어이없이 오쟁이를 진 스파르타의 왕 멜넬라오스는 그리스의 모든 왕국에다
파발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예전에 약조된 바가 있어서였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으니 만큼 결혼하기 전 헬레네에게는
메넬라오스말고도 숱한 구혼자가 있었다. 그리스 전역에서 모여든 내노라하는
구혼자들은 헬레네가 자신들 중의 한 사람을 선택하기 전에 누가 선택을 받든
이후로 헬레네와 그 지아비에게 위험이 닥칠 경우 지체 없이 하나가 되어
도와주기 로 맹세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트로이를 공격할 막강한 그리스
연합군이 꾸려졌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는 메넬라오스의 형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
뽑혔다. 그 아래로는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인 아킬레우스, 슬기롭기로
이름난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에 버금가는 장수 아이아스,
아킬레우스의 죽마고우인 파트로클로스 같은 영웅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에
맞서는 트로이 쪽의 진용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은
나이가 좀 들기는 했지만 옛부터 영명한 군주로 이름나 있었다. 또 그의 아들인
헥토르는 고대 작가듣ㄹ에게서 인간 중에서 가장 우수한 인간 이라는 칭송을
받았을 정도로 덕과 용맹을 두루 갖춘 뛰어난 장수였다. 그외에도 아이네이아스,
데이포보스, 글라우코스, 사르페돈 같은 괄목할 만한 장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양 진영의 면면을 보면 알겠거니와 트로이 전쟁은 그야말로 뭇영웅들이
총출동한 대서사극이었다. 전쟁은 영웅들간의 혈전뿐 아니라 친구간의 의리,
지아비의 지순한 사랑, 희생 정신, 지략과 모험 등등에 얽힌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낳으며 10년간 계속되었다. 전쟁이 그렇듯 오래 간 것은 양쪽이 워낙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올림포스 신들의 탓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인연, 저런 사정으로 신들 또한 양편으로 나뉘어 전쟁의 흐름을 이리저리
뒤틀어댔던 것이다. 파리스의 부당한 심판에 승복할 수 엇었던 헤라와 아테나는
그리스 편이었으며 아프로디테는 물론 트로이편이었다.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는
전쟁신 아레스는 트로이 편을 들었고 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이었다. 아폴론과
제우스는 대체로 중립을 지켰으나 때로는 이쪽 저쪽을 번갈아가며 편드는 변덕을
부렸다. 그들은 때로는 예언자로 변신해 자기가 편드는 쪽의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다 죽어가는 용사를 살려놓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구름으로 가려 상대편을 골탕먹이기도 하며 전쟁이 간섭하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를 비롯해
양편의 많은 장숟르이 전사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끝나지 않고 있던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그리스군의 목마 전법이었다.

트로이를 함락시킨 목마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트로이가 계속 버티자 그리스군은 무력으로는 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참에 꾀많은 오디세우스가 한 가지 작전을
제안하고 의논 끝에 오디세우스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정이 났다.
그리스 군은 우선 선단의 일부를 철수시켜 가까운 섬에다 숨겨 놓았다.
그리고는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그 속을 무장한 장수들로 꽉 채웠다. 이어서
목마만 해변에 남겨둔 채, 나머지 그리스군도 각기 함선으로 돌아가 완전히
퇴각하는 척 했다. 트로이 군은 포위가 풀리고 선단이 항구를 떠나는 것을 보고
그리스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 군의 퇴각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스 군이 남기고 간 목마는 당연히 트로이 사람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리품이니 성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람, 무슨 흉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 해야 한다는 사람,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포세이돈
신전의 신관인 라오콘이라는 사람이 음모가 숨어 있음에 틀림없다며 목마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그러자 신음소리 같은 게 났다. 사람들이 무언가
수상쩍다고 웅성대는 순간 저쪽에서 그리스 포로가 한 명 잡혀 왔다. 그는
자신은 시논이라는 사람인데 오디세우스의 미움을 사서 출항하는 함대에 타지
못하고 낙오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목마는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한
제물로 만든 것인데 그렇게 크게 만든 것은 만약 목마가 트로이 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트로이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어, 목마가 성안에 끌려 들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시논의 증언은 트로이인들로 하여금 그 기분 좋은 예언을 현실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때마침 불가사의한 사건까지 일어나 트로이인들의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의혹의 찌쩌기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바다에서 커다란
뱀이 두 마리 나타나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휘감아 죽여 버렸던 것이다.
뱀에게 휘감겨 끔찍하게 죽어가는 삼부자의 모습을 목격한 트로이인들은 신성한
목마를 모독한 라오콘을 벌하려고 신들이 뱀을 보낸 것이라 믿고는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날 밤 트로이 성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셨다. 그러나 시논은 오디세우스가 만약을 위해 남겨 놓고 간 첩자였다.
그는 트로이 병사들이 모두 술에 곯아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목마의 뱃속에
신호를 보냈다. 목마 속에서 쏟아져 나온 장수들이 성문을 활짝 열어제치자
야음을 틈타 이미 성 앞까지 와 있던 그리스 군들이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은
곧 불바다가 되었다. 배불리 먹고 잠에 곯아 떨어져 있던 트로이 군사와
백성들은 그리스 군의 창칼 아래 무참히 도륙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그리스 군의
승리로 끝났다.

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병법에서, 트로이의 목마 와 같은 위장 전술은 그 역사가 대단히 깊고 또
수법도 다양하다. 선물을 가장한 폭탄, 미인계, 거짓 정보 흘리기, 스파이 전술
등등이 모두 그에 속한다. 위장 전술이 널리 이용되는 까닭은 아마도 적의
헛점이나 급소를 파고듦으로써 피를 별로 흘리지 않고서도 큰 전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손권.유비의 연합군과 조조의 군사가 맞붙은 삼국지의 적벽대전은 위장 전술의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조의 패배는 물고 물리는 위장 전술에서의
패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조는 적장 주유를 꾀러 장간을
세객으로 보내는 꾀를 쓴다. 하지만 주유는 오히려 장간을 역이용해 조조 진영의
뛰어난 두 지도자 채모.장윤이 자신의 첩자인 양 거짓 정보를 흘리고 조조는 그
계략에 속아 아까운 장수 둘을 제손으로 죽여 버린다. 그 뒤 조조는 다시
채중.채화 두 사람을 주유에게 거짓으로 항복시켜 적진을 탐지하려 하나
이번에도 주유는 그 둘을 역이용해 충신 황개를 조조에게 거짓 항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더욱이 방통까지 첩자로 보내 조조로 하여금 방통의 제안대로
연환계를 쓰게 만든다. 30∼50척의 배를 쇠사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서로 오갈 수 있게 하면 멀미를 막을 수 있어 수전에 유리하다는 소위 연환계로
말미암아 조조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자초한다. 주유는 제갈공명이 일으킨
동남풍을 이용하여, 거짓 항복한 황개가 이끄는 스무 척의 화선을 앞세워 화공을
펼침으로써 조조의 막강한 수군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나 적벽대전 이야기를 듣고 보면 위장 전술이라는게 퍽 깜찍하고
경제적인 전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신화나 전설, 영웅담 속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 산뜻하게 결말을 맺진 않았다.
법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힘있고 배경 든든한
사람들의 바람막이가 되는 현실에 의분을 느낀 많은 법관 지망생들이 늘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지켜주는 법관이 되겠다 는 포부를 밝혀 왔다. 하지만
실제로 법관이 된 뒤에, 말하자면 트로이 성 안에 들어간 뒤에 젊은 시절의 그
의기를 올곧게 지켜낸 법관은 그리 흔치 않다. 그보다 트로이 쪽에 항복해
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낡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학생운동에 뛰어든
아들딸을 보고 한국의 많은 부모님들은 이렇게 말해 왔다.
너의 분노와 정의감은 이해한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무의미한 희생이 있을 뿐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힘있는 자리에 올라선
뒤 네 뜻을 펼쳐라. 힘이 있어야 쇠를 고쳐도 고칠 거 아니냐.
분노와 정의감을 잠시 눅이고(목마가 되어), 국가의 정책을 좌우하거나
집행하는 힘있는 자리, 자신의 듯대로 사람을 부릴수 있는 높은 자리에
올라(트로이 성에 들어간 뒤), 그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변혁을
시작하라(성을 함락시키라)는 뜻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논리가 가진 함정을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정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한국을 만들자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으나
다리며 백화점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낡은 한국을 다스렸던 낡은 인물들이
그것봐라. 옛날이 좋았다 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낡은 한국이라는 성은 신화
속의 트로이 성처럼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한낱 간계로 무너지기엔 그
뿌리가 너무나 깊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비리 공무원 몇 명을 솎아낸다고 해서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뇌물과 촌지의 관행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진 않는다.
12·12를 군사 반란이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낡은 한국에서 온갖 부당한 이듯을
누려온 사람들이 잘못했습니다 고 고개를 숙이진 않는다. 오히려 빈틈이 생긴
때마다 낡은 생각, 낡은 가치, 낡은 구조를 부활시키려 든다. 그들은 트로이
왕국의 군사나 백성들처럼 술 취한 채 잠들지 않는다.
개혁은 어렵다. 낡은 사회의 역사가 너무 오래기 때문이다. 개혁은 혼자 할 수
없다. 혼자 할 수 없다. 혼자 하려다간 낡은 사회의 구조 속에 자신마저 빠져
버린다. 트로이 성 안에 들어갔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항복해 버린 수많은
옛날의 젊은이 들처럼.
개혁은 진정으로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의지와 힘을 하나로 묶어 밀고
나가는 것이다. 트로이를 함락시킨 것은 나무로 만든 목마가 아니라 그리스
연합군의 병사들이었다. 개혁을 밀고 나가는 힘은 근사한 수사나 멋있는
선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고난의 연대를 살아 오며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
속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나온다. 꼭 그 이 만큼, 꼭 그 넓이 만큼. 그
혈루의 대하는 섣부른 간계 따위로는 씨겨지지 않는다.

9. 신화와 역사 사이
미노타우로스와 에게문명

신화를 발굴한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또는 학문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우리는 뜻밖의 진실과 만나게 된다. 비전문가, 다시 말해 아마추어들이
빼놓을 수 없는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기를 발견한
갈바니와 에너지 보전의 법칙을 발견한 메이어는 의사였고 무선 부호를 창안한
모르스는 화가였다. 직업적인 전문가들은 잘 다니려 들지 않는 잡초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 신천지를 발견하는 이런 열정적인 아마추어들을 마르틴루터는
일찍이 ㄹ이 세상의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다. 그들로
하여금 전인미답의 오솔길을 헤매게 만드는 것은 돈도 밥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알고 싶어하고 밝혀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러한 위대한 아마추어 가운데서도 마땅히 첫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북부 독일 메클렌부르크 주위 자그마한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슐리만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신화와 전설, 동화같은 것들을 곧잘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가운데서 특히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트로이
전쟁과 그것을 승리로 이 ㄴ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같은 뭇
영웅들의 모험담이었다.
일곱 살 나던 해인 1829년 크리스마스 때 그는 아버지한테서 <그림으로 본
세계사>라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책에는 아이네이아스가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등에 업는 채, 불타고 있는 트로이 성을 빠져나오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어린 슐리만은 책속에 그려진 트로이의 거대한 성벽과 성문에 눈길을
빼앗긴 채 물었다.
이게 바로 트로이의 모습이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 있어요?
글쎄, 아무도 모른단다.
내가 어른이 되면 트로이와 왕의 보물들을 꼭 찾아내고 말거예.
일곱 살 난 아들의 맹세에 가난한 아버지는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슐리만은 호머의 서사시들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 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 위대한 아마추어답게 그는
오로지 순수한 열정에 의지해 자신의 믿음을 향해 돌진했다. 슐리만은 열네 살
때 식품점 점원으로 취직해 5년 반 동안이나 청어와 우유, 소금 같은 것을
팔았다. 그런데 미국을 여행하게 된 서른 살 때는 미국 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대상인이 되어 있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 30대 초반에 백만장자가
되기까지의 고난과 시련이 어떠했는지, 또한 그것들을 이긴 그의 신념과 투지와
재능이 얼마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과 찬사를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그가 모국어인 독일어를 합해 12개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쓰고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슐리만은 1863년 드디어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매혹시켜 왔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에서 은퇴 하였고 몇 년간의 답사를 거친 뒤 1871년 마침내
트로이의 폐허 위에 첫 삽을 꽂았다. 그 곳은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는
뉴일리엄이라는 마을이었다. 백 명의 인부를 동원해 3년여를 파들어간 끝에
슐리만은 원시 시대의 두 도시를 포함해 모두 9개의 도시를 발굴해 냈다. 폐허
밑에서 한 도시가 묻혀 있었다. 슐리만은 그중 밑에서부터 세 번째 층에서 불탄
흔적이 있는 견고한 성벽과 거대한 성문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는 그곳이
트로이의 유적이라고 확신했으며 실제로 거기서 왕관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금붙이들을 발견했다. 바로 그 유명한 프리아모스의 보물 이었다. (슐리만이
죽기 얼마전에 이 보물은 트로이 시대보다 천 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임이
밝혀졌으며 트로이 유적은 제 7층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고학사의 맨 첫장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에게 문명의 실마리, 황소 그림

신화를 역사로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 밖에 미케네 왕국의 왕묘를 발굴한 것도 슐리만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슐리만의 진짜 위대한 업적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슐리만은 트로이, 미케네에 이어 1884년 티린스를 발굴했는데 이 발굴에서
그는 미케네와 티린스 나아가서는 크레타와 그리스 동부 해안지역, 키클라데스
제도를 하나로 잇는 어떤 공통된 문명의 그림자를 감지했던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
다스리던 황금의 도시 이고 티린스는 헤라클레스가 탄생한 곳이다.
슐리만은 티린스에서 그때까지 발견한 것들 가운데 가장 웅대한 궁전의
기초벽을 발굴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궁전의 유적에서 발견된
도기와 벽화들이었다. 티린스의 도기들은 미케네에서 발견한 것들과 비슷한
특징들은 에게해의 다른 섬들, 특히 크레타에서 다른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도기들과도 비슷했다. 오리엔트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리고 티린스 궁전의 벽들에는 파란색과 노란색 띠로 둘러쳐진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푸른색 바탕에, 사나워
보이는 둥근 눈을 부릅뜨고 등에는 붉은 점이 있는 황소가 꼬리를 치켜들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황소 위에서는 한 남자가 뿔을 붙잡고 무용수가
도약할 때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티린스 발굴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
황소 벽화에 대해 슐리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일리아드 속에 나오는 유명한 마술사처럼 묘기를 보여주는 벽화를 보고 저는
그 황소의 등에 탄 남자가 안장 없이 타는 사람이거나 황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슐리만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이 황소 그림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유럽 최초의
문명-에게 문명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제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화를
발굴함으로써 스스로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 하인리히 슐리만은 1890년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아서 에번스의 크노소스 발굴

슐리만이 그 흔적만을 얼핏 보았을 뿐인 에게 문명을 완전히 알리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인인 아서 에번스였다.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슐리만과 대조되는
사람이었다. 슐리만이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아마추어였다면 에번스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전문자였다. 그는 옥스퍼드와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고대의
상형문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상형문자 해석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크레타를 방문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자갈더미와 폐허를 돌아다니다가 그는
상형문자 해석에 대한 이론은 전으로 미루어 두고 삽을 잡았다. 크레타 총독의
표현을 빌리면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닌 슐리만과는 달리, 에번스는 그후 25년
동안을 한 장소만을 팠다.
끈질긴 삽질 끝에 그는 마침내 버킹검 궁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크노소스
궁정의 유적을 발굴했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궁저의 1층 평면도가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그것은 미케네와 티린스에 있는 궁전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미케네나
티린스에 있는 궁전들에 비해 훨씬 크고 당당해서 크레타가 본거지이고 다른 두
지역의 성들은 그에 종속된 식민 도시의 수도였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궁전은 각 층마다 방과 복도, 홀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어 있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 왕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미로 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전문가인 에번스도 제우스의 아들인 미노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둔 미로의 궁전 을 발견했다는 다소 슐리만적 인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유물과 벽화가 계속 발굴되었다. 그런데 벽화 가운데 슐리만이
티린스에서 발굴한 그림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바로 두 처녀와 한 청년이
황소와 놀고 있는 듯한 <황소와 춤추는 사람>이었다. 미궁과 황소, 이 두
가지야말로 신화와 역사 사이에 놓인 가파른 사다리였다.

미노스와 미노타우로스

티로스의 왕 포에닉스에게 에우로페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어느날 에우로페가
바닷가에서 시녀들과 놀고 있는데 잘생긴 황소 한 마리가 다가와서 에우로페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 황소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 에우로페가 등에
올라타자 마자 황소는 그녀를 크레타 섬으로 납치해 버렸다. 황소는 다름아닌
제우스였다. 이 둘 사이에 생긴 아들이 바로 미노스였다.
미노스는 장성한 뒤 의붓형제들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
제가 제우스의 아들로서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니 부디 황소를 한 마디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반드시
신께 제물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청을 받아들여 흰 파도를 가르고 황소를 한 마리 보내
주었다. 든든한 뒷배경을 과시한 덕에 미노스는 무사히 왕위에 올랐고 나라는
융성했다. 그러나 미노스는 그만 과욕을 부리고 말았다. 포세이돈이 보낸 신성한
황소를 다시 제물로 갖다 바치는 게 못내 아까와서 다른 소를 그 황소인 것처럼
속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 포세이돈이 미노스의 잔꾀에 속을 리 없었다. 진오한
포세이돈은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문제의
황소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둘 사이에 괴물이 태어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괴물이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미노타우로스였다. 미노스로서는
차마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포세이돈이 또 무슨 형벌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노스는 할 수 없이 지상의 헤파이스토스 라고 불리는 장인 다이달로스를 불러
한 번 들어가면 신들도 나오기 어려운 미궁, 만든 사람도 나올 수 없는 미궁 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그 미궁에 같혀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미노스왕의 애물단지인 이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사람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였다. 어느날 미노스의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에서 열린 운동
경기에 참가했다가 황소의 뿔에 받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노스는 이를
빌미로 아테네를 공격했다. 그리고 평화를 맺는 조건으로 매년 7명의 처녀와
7명의 총각을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주기
위해서였다. 아들 딸을 둔 아테네의 부모들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때가 오면
자기 자식이 뽑혀갈까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때 왕자인 테세우스가 공물로
바쳐지는 다른 처녀 총각 사이에 섞여 크레타로 가서 그 괴물을 처치하고
오겠다고 나섰다.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반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실 한
꾸러미를 주면서 자신이 실의 한 쪽끝을 잡고 미궁 앞에 서 있을테니 실을 풀어
가며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일러 주었던 것이다.

신화와 역사

슐리만과 에번스가 발견한 <황소와 춤추는 사람>은 사실은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진 제물이었을지 모른다.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미궁의 유적은 미노스 왕의
신화에 일말의 역사적 진실이 묻어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B.C 5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테스는 미노스가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오늘날
그리스에 속한 해역의 대부분을 제압했으며 키클라테스 제도 전역에 신민지를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실제로 에번스는 크레타에서
함대의 흔적ㅇ를 찾아냈다.
슐리만과 에번스의 발굴은 B.C 3000년부터 그리스가 성립한 B.C 1000년까지의
2천여 년간 지속된 에게 문명의 전모를 상당 부분 밝혀주었다. 에게 문명은
지리적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해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 세계로
전승해 주었으며 그 중심은 크레타와 미케네였다.
크레타는 특히 B.C 16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에게해를 주름잡았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해 놓은 함대의 지휘자이며 바다의 통치자 였던 미노스라는
왕이 살았던 시기는 바로 이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크노소스 궁전 역시 이
시기의 것인데 크레타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50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궁전은 하수고와 환기 장치, 난방 장치,
호사스런 목욕탕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크레타는 B.C 1500년경 미케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미케네는 B.C 1900년경 북방에서 내려온 인도 유럽어족인
아카이아인들이 세운 공동체였다. 미케네는 크레타와 교역하면서 그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나중엔 크레타를 제치고 에게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B.C
1200년경 철기 문화를 가지고 남하한 도리아인들(이들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다)에게 크레타와 더불어 멸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수수께끼

에게 문명의 주역이였던 미노아 문명(크레타 문명을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
흔히 이렇게 부른다)를 둘러싸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몇 가지 고고학적 숙제가
남아 있다.
그 첫 번째는 그토록 한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크레타 섬의 원주민들은 대체
어떤 종족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미노스가 그리스인이었다고 적어
놓았고 헤로도토스는 그렇지 않다고 적어 놓았다. 소아시아에서 온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지중해인으로 불리는 종족과 소아시아인의 혼혈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첫 번째의 의문을 풀어 줄 단서가 있긴 있으나 그 자체가
또다른 수수께끼이다. 에번스는 크노소스에서 독특한 선상문자가 가득 쓰여진
조그만 점토판을 2천 개가 넘게 발굴했다. 1953년 영국의 건축가 마이클
벤트리스가 선상문자 중 일부가 그리스어의 초지 형태임을 밝히고 상당 부분
해독을 해냈다. 하지만 그 역시 당시 크레타인에 비해 훨씬 미개했던 그리스인의
언어가 어떻게 크레타에서 사용되었을까 하는 또다른 의문을 던져 주었다. 그
의문을 파헤쳐들어가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벤트리스는 불행히고 4년
뒤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미노아 문명의 최후를 둘러싸고도 아직 견해가 분분하다. 오랫동안 평화롭게
번영를 누렸던 미노아 문명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또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새로운 정복자가 침탈하더라도 대개는 기존의 문명 위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때문에 앞선 문명이 하루 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크노소스의 유적은
난폭한 가장이 내던진 밥상처럼, 짧은 순간에 박살이 난 형국을 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무기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크레타인들보다 미개했던 도리아인들이 그 야만성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지진에 의한 몰락설인데 발굴자인 에번스는 후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크노소스의
유적지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과 비슷한 갑작스런 죽음 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미처 끝내지 못한 예술작품과 작업 중에 갑자기 중단된 듯한 현장, 그리고 밥을
짓다 파괴당한 부엌들이 그런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크레타 섬은 지진대
위에 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원인이 무엇이었거나 간에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이후 4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 고대 문명이 탄생했다. 4세기 동안의
이 암흑기는 왜 생긴 것일까?
미궁과 같은 이 의문점들을 속시원하게 풀어 줄 아리아드네의실 은 어디에
있을까. 열정과 투지의 실타래를 들고 아무도 가지 않은 역사의 미궁으로 접어들
위대한 아마추어를 고대하며 그 첫걸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경구를
한 구절 읽어 본다.

인간으로서의 겸양을 배우고자 할진대 굳이 하늘의 별을 쳐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수천 년 앞서 존재했던 위대한,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수많은
문화 세계로 눈을 돌리면 족하다
-
C.W. 쎄람

10.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태양계의 작은 섬, 소행성

1792년, 보데라는 독일 사람이 당대 천문학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연구
논문을 하나 발표했다. 그는 베를릴 천문대의 대장이었다. 그의 주장인즉
행성들은 그저 무질서하게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게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우주를 향해한다 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야 상식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그의 주장은 상당한 지지를 얻어 보데의 법칙 으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뒷날 이 법칙은 보데가 다른 사람에게서 도둑질한 것임이 과학자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실제로 그 법칙의 핵심적인 내용을 처음 밝혀낸 사람은
뷔텐베르크에 살던 티티우스라는 무명의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베를릴
천문대의 보데에게 전했는데 보데가 그걸 슬쩍 가로채서 마치 자신의 연구
성과인 양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 보데의 법칙 은
티티우스-보데의 법칙 으로 개명되었다. 보데의 얌체짓을 놓고 보건대 늘 별을
쳐다보며 산다고 해서 마음이 별 같아지는 건 아닌가보다.
경위야 어쨌거나 티티우스-보데의 법칙 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천문학자들 사이에 해엉 찾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에선 내노라 하는
천문학자들이 미지의 행성을 발견하기 위한 연맹 을 결성하기까지 했다.
천문학자들은 특히, 다른 행성들에 견주어 굉장히 넓은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화성과 목성 사이의 우주 공간에 집중적으로 망원경을 들이댔다.
티티우스-보데의 법칙 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분명히 아직 알려지지 않은
천체가 있을 법했던 것이다.
화성과 목성 사이의 우주 공간에서 가장 먼저 새로운 천체를 발견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피아치였다. 그는 1801년에 지름이 992m에 불과한 아주 작은 행성을
발견하고 거기다 세레스라는, 자신의 고향인 시칠리아 섬의 수호신 이름을
붙여주었다. 세레스는 행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소행성이라고 불렀다.
피아치의 발견에 이어서 1902년에는 팔라스가, 1804년엔 주노가 발견되었으며
이후 본격적인 소행성 탐사 시대가 개막되었다. 소행성들은 거의 대부분의
화성과 목성의 궤도 사이에 분포해 있다. 그래서 태양에서 5억km 떨어져 있는 그
우주 공간대를 소행성의 고향 이라 일컫는다. 지금까지 발견된 소행성은 무려
4만 5천여 개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 소행성들의 질량을 모두 합해도 지구
질량을 모두 합해도 지구 질량의 1/500에 지나지 않는다. 제일 큰 세레스에서
작은 알갱이에 이르기까지 소행성의 크기는 제각각이다.
소행성은 행성이 부숴지면서 나온 찌꺼기들이다. 태초에 어떤 행성이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폭발하면서 그 파편들이 태양계 곳곳으로 흩어진
것이다. 그래서 소행성은 태양계의 작은 섬이라 불린다. 이들 점점이 흩어진
섬들을 모자이크하면 하나의 행성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소행성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태양계의 기원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소행성의 개체발생 과정이 태양계의 계통발생 과정을 설명해 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작기는 하지만 소행성도 행성으로서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소행성은
대체로 기다란 모양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회전하면서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우주
공간을 향해한다. 따라서 소행성에도 하루가 있고 1년이 있다. 행성의 하루는
대개 7∼10 시간이며, 1년은 지구 시간으로 환산하면 평균 5년이다. 궤도가
인접해 있는 소행성들은 이따금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그파편이 지구쪽으로
날아들기도 하는데 지상에 떨어진 소행성의 파편이 바로 운석이다.

대담무쌍한 소행성, 이카로스

소행성 가운데 특별히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트로이 소행성군과 아폴로
소행성군이다. 목성의 궤도선상에 운집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공전하는 15개의
소행성 무리를 트로이 소행성군이라 한다. 우주의 군도인 셈이다. 이 무리에
속한 소행성에는 모두 트로이 전쟁에 등장한 영웅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아킬레우스는 목성보다 서너 발자국 앞서 태양 주위를 돌며, 아킬레우스의 둘도
없는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는 목성보다 서너 발자국 뒤에서 돈다. 일부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목성이 거느린 20개의 위성들은 원래는 목성 주변을 맴돌던
트로이 소행성군의 식구였다고 한다. 그러다 양아버지인 목성의 강력한 인력에
끌려들어가 위성으로 입양되었다는 것이다. 태양계의 기원과 관련해서 특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폴로 소행성군은 금성보다 더 가까이 태양에 다가가는 일군의 소행성들을
가리킨다. 에로스, 아도니스, 헤르메스 같은 소행성이 이에 속한다. 아폴로
소행성군은 우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이다. 공전 궤도를 놓고 볼 때 다른
행성, 그 가운데서도 지구와 충돌할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만약 지름
10m짜리 소행성이 서울시 한 복판에 떨어질 경우 서울 시민 모두가 하늘나라로
가야 한다니 아폴로 소행성과의 충돌은 곧 지구의 종말을 의미한다.
천문학자들은 지름이 0.8km 이상 되는 아폴로 소행성들이 적어도 750개 정도는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지구의 미래를 점치기 좋아하는 호사기들은
앞으로 100만년 동안 적어도 네 개의 아폴로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그냥 흘려들어도 좋은 허황된 엄포만은 아니다.
1937년에 헤르메스가 80만 km를 사이에 두고 지구를 지나갔다. 지구와
헤르메스의 공전 주기를 따져 계산하면 최소 30만 km 안쪽까지도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30만 km라면 달까지의 거리보다 더 가까운 거리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협적인 반란군에 속하는 또하나의 새로운 소행성이 1949년에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미국 팔로마 천문대의 월터바드였다. 멀리는 화성 궤도의
안쪽까지 거대한 타원형을 그리며 태양을 돌고 있는 이 소행성은 태양에 2천 8백
30만 km까지 바싹 다가간다. 지름 1.3km에 불과한 자그마한 몸으로, 혜성을
제외하고는 태양계의 그 어떤 행성보다 태양에 가까이 접근하는 이 대담무쌍한
소행성의 이름은 아카로스이다. 공전 주기가 409일인 이카로시 한번 충돌과
종말의 공포 속에 몰아넣았다.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

이카로스는 장인 다이달로스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다이달로스는 크레타 섬에
살면서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미궁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인데 원래는 아테네
사람이었다. 지상의 헤파이스토스 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건축과 목공,
철공에 두루 능해 돛과 수레, 도끼 등 사람들에게 요긴한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어냈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이 이를 어여삐 여겨 아크로폴리스
언덕 꼭대기에 높이 솟아 있는 자신의 신전 한 귀퉁이에다 다이달로스의
작업장을 내줄 정도였다.
그런데 다이달로스 밑에는 탈로스라는 도제가 한 명 있었다. 탈로스는 나이가
어려 아직 손재간은 스승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자연의 이치를 깨쳐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드는, 말하자면 격물치지의 능력은 오히려 스승을
앞질렀다. 그는 물고기 등뼈에 착안해 톱을 만들었고 바람개비가 도는 걸 보고
원을 그릴 수 있는 양각기(콤파스)를 고안했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고 가히 그 앞날이 기대되었다. 새로운 것은 늘눈길을 끄는 법, 자연히
아테네 사람들의 눈길이 구관인 다이달로스보다 신인인 탈로스에게 더 자주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유일무이한 명성을 누리던 다이달로스의 가슴엔 불 같은 질투가 일었다.(다른
사람이 자신을 능가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이런 마음보를 다이달로스의 질투
라고 한다. 모차르트를 향한 살리에리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결국
다이달로스는 어느 날 탈로스를 신전 지붕 위로 데려가 밀어 버렸다. 아테나
여신은 이 사실을 알고 다이달로스를 아테네에서 쫓아냈다. 차마 죽이지 못한
것은 재주가 아까와서였다.
아테네에서 쫓겨난 다이달로스가 찾아든 곳이 바로 미노스 왕이 다스리던
크레타 섬이었다. 다이달로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잇던 미노스는 왕가의 여자
노예를 다이달로스와 짝지워 줌으로써 이 재간꾼을 자신의 왕국에 눌러 앉혔다.
다이달로스는 이 크레타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카로스를 얻었다. 그런데
다이달로스는 뜻하지 아니한 사건에 휘말려 미노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의 황소와 사랑을 하여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바로 그 사건에 연류되었던 것이다. 시련에 눈이 먼 왕비에게 암소 가죽을
입히니 누가 보아도 살아 있는 암소 그대로였다. 왕비는 속이 빈 그 가짜 암소
속에 들어가 포세이돈의 황소에게 접근했고 급기야 괴물을 낳았다.
미노스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격분했다. 그러나 그는 홧김에 쓸곳 많은
재간꾼을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미노스는 결자해지의
원칙을 적용해 다이달로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미궁을 만들게 했다. 다만
말 끝에 미노스는 이런 단서를 달았다.
만약 미궁에서 살아나오는 자가 있으면 너를 그 곳에 가둘 터이니 그리
알아라!
그러나 알다시피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미노타우스를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오게 된다. 체면이 말이아니게 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뿐 아니라 그 아들 이카로스까지 함께 미궁에 가두어 버렸다.

이카로스의 비상과 추락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또 무슨 손재주를 부려 미궁을 탈출할까 우려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미궁을 겹겹이 에워싸게 했고 그러고도 못 미더워 바다로
나가는 배까지 철저하게 수색하게 하였다. 다이달로스 부자는 꼼짝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다이달로스는 여느 때처럼 아들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다가, 가슴이 답답하여 미궁의 제일 높은 곳, 바다쪽 절벽에 면한 첨탑에서
절망스레 바깥 세상을 내다보았다. 첨탑 위로 새떼들이 날아 올랐다. 그 중에 몇
마리는 창틀에 앉아 깃을 쪼기도 했다. 순간 섬광처럼 미노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도가 떠올랐다.
하늘! 땅과 바다는 막았지만 하늘은 미노스도 막지 못하리라!
그날부터 다이달로스는 첨탑에 떨어진 새의 깃털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몫의 날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깃털이 모이자 다이달로스는 작업을 시작했다.
큰 깃은 옷에서 뽑아낸 실로 묶고 작은 깃은 미궁의 천정 모서리에서 긁어낸
밀랍으로 붙었다. 날개가 완성되자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를 데리고 첨탑으로
올라갔다. 아들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고 나는 법을 가르친 뒤 다이달로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일렀다.
아들아, 너무 높게 날아서도 아니 되고 너무 낮게 날아서도 아니 된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이 날개를 녹여 버릴 것이며 너무 낮게 날면 날개가 물에 젖게
된다. 반드시 내가 나는 높이만큼만 날아라.
아들을 먼저 허공으로 밀어 준 뒤 다이달로스도 바람에 몸을 실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보다 앞서 날며 아들이 제대로 날고 있는지 가끔씩 뒤돌아
보았다. 시킨 대로 잘 날고 있는 듯하여 다이달로스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델로스 섬을 지날 즈음이었다. 푸른 바다와 뭇 섬을 눈 아래로 굽어보며
하늘을 나는 기분에 도취되어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당부를 무시하고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아득히 비상하여 창공의 한 점이 되는가 싶은 순간,
이카로스는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태양이 날개를 이어붙인 밀랍을 녹여버린
탓이었다. 추락은 비상보다 더 짧은, 찰나의 일이었다. 다이달로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땐 두어 개 가벼운 깃털만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내려다 보니
이카리아(이카로스의 바다) 위엔 그저 하얀 포말만이 무심히 동심원을 그리며
잦아들고 있었다.

추락하는 것들의 아름다운 날개

무엇이 이카로스를 높이 더 높이로 이끌었을까? 높이 더 높이 비상하여
이카로스는 무엇을 보았을까? 신화는 아무런 대답도 남기고 있지 않다. 다만 그
뒤로 인간 세상에서 이카로스의 비상을 당랑거철과 같은 격에 놓는 걸 보면
겁없이 아무 것에나 도전하지 말아라 라는 게 이카로스의 짧은 생을 통해 신들이
인간에게 내리고자 했던 가르침인 듯하다. 우주 공간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한 점
티끌에 불과하면서도 그 어떤 행성보다 더 가까이 태양에 접근하는 소행성에
이카로스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도 거기에 연유한다. 같은 이유로 패기와 열정
하나로 재벌에의 꿈을 키웠던 70년대의 야심만만했던 몇몇 청년 기업가들을
사람들은 이카로스의 후예 이라 일컬었다. 빈민굴에서 태어나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우뚝 선 말콤 엑스를 어떤 사람들은 검은 이카로스 라고 부른다.
이카로스처럼 그들은 모두 추락했다. 패기만만했던 청년 기업가들은 모두
파산했으며 말콤 엑스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사주한 괴한들의 기관총에 난사당해
죽었다. 태양을 향해 비상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비상은 늘 위험하고, 추락은 그저 깃털 몇 개와 허망한
물거품만으로 끝나는 것일까? 날개가 없는 것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하려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니다. 추락이 두려워 비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일러 새라고
할수 있을까?
우리에겐 모두 날개가 있다. 꿈과 이상이라는 그 날개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비상하지 않는 삶, 그것은 배부른 돼지의 삶이지 인간의 삶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많은 이카로스들의
날개짓으로 여기까지 발전해 왔다. 신에겐 이카로스가 무모한 도전 의
희생자일지 모르나 우리 인간에겐 그렇지 않다. 그는 이상을 향한 위대한 이륙
의 표상이다. 사랑, 평등, 평화, 자유, 정의를 위해 고투하는 인간의 날개짓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한 비상 뒤에는 추락조차 아름답다.
땀흘려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가
지금은 창살 안에 갇혀 있는 시인 박노해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싸워가나 무엇으로 일어서나
끝모를 징역 마룻바닥에 허물어져 미친 듯 나는 통곡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잘 알지 나는 나를 잘 알지
마지막 한 가닥 희망과 애착마저 툭, 끊어져
오직 홀로 남은 나 자신과 처절한 묵시의 투쟁 끝에 서면
나는 결국 죽음조차 의연하게 껴안을 수 있었지
시퍼런 슬픔의 심연 끝바닥에 다다르면
그래 나는 다시 서서히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야
허허로운 눈빛으로 다시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야
- <그리운 사람> 중에서

비상 뒤의 추락은 이렇듯 단단한 깨달으과 지혜, 겸손함을 남긴다. 그리하여
뒤이어 솟아오르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며 심연으로부터의 새로운 비상을
기약한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11. 황금을 사랑하면 별을 잊어 버린다.
미다스 왕의 황금손

그리스 신화에 소아시아 프리기아 왕국의 왕으로 등장하는 미다스는 크레타의
미노스 왕과 비슷하게 반은 역사적인 인물로 추정된다. 프리기아 왕국이 있었던
상가리우스 지역의 바위로 된 기념비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 고대
앗시리아에서는 미타 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
기록해 놓은 바에 따르면, 상당히 명민한 통치자였던 미다스는 외적의 침입을
받고 B.C 700년경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미노스와 마찬가지로
미다스도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조의 이름이었으리라 추측한다.
미다스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전해 오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저 유명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다.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임을 알게 된
이발사가 임금의 언론 탄압(?) 때문에 여위어 가다가 결국 빈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국가 기밀 을 털어놓고 말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알다시피 그 뒤로
구덩이에서 갈대가 자라나 바람만 불면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속삭여대는 바람에 그 국가기밀이 그만 국민적 상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미다스가 당나귀 귀를 가지게 된
억울한 연유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연인즉슨 이러하다.
프리기아 땅에 사는 하신 마르시아스는 사슴뿔로 만든 피리를 기가 막히게 잘
불었다. 그래서 마르시아스의 피리 솜씨 앞에서는 아폴론의 수금 솜씨가
무색하겠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 기어이 아폴론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명색이 음악의 신으로서 듣기에 그다지 기분 좋은 소문은 아니었다. 해서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찾아가 솜씨를 겨뤄 보자도 했다(아폴론과 솜씨를 겨룬
상대는 전하는 이에 따라 다르다. 목신 판이라고도 하고 사티로스라고도 한다.
또 마르시아스이기는 하나 그는 하신이 아나리 보통 인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의 껍질을 산 채로 벗기자는 끔찍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르시아스가 겁없이 내기를 받아들인 것은 상대가 아폴론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폴론은 그때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서 잠시 양치기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양치기 차림으로 와서는 자신이 누구라는 내색도
않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니 이를테면 비겁한 함정 수사 였다.
그런데 이 두 신의 솜씨가 겨루기에 심판으로 초대된 이가 바로 산신
토몰로스와 미다스였다. 경연이 끝난 뒤 토몰로스는 아폴론의 승리를 판정했으나
미다스는 눈치 없이 마르시아스의 손을 들고 말았다. 노한 아폴론은 하신
나부랭이의 피리 가락과 음악의 신이 타는 수금 가락도 제대로 가려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다스의 귀 같잖은 귀 를 그만 볼썽 사나운 당나귀 귀로
만들어 버렸다. 미다스로선 고래 싸움에 애꿎게 등이 터진 셈이었다.
신의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자신이 좋다고 느낀 쪽의 손을 들어준
대목을 놓고 볼 때 미다스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 왕이었던 모양이다. 비록
이발사 때문에 망신을 좀 당하긴 했지만 소신껏 살자면 늘 그만한 수난쯤은
따르기 마련이다.

저주받은 황금의 손

그런데 미다스는 소신만 있었던 게 아니라 풍류도 제법 아는 멋쟁이였다.
어느날 프리기아의 농부들이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노인을 데려왔다.
다름 아닌 주신 디오니소스의 양아버지이자 스승인 실레노스였다. 실레노스는
반인 반수의 사티로스 종족이었으나 지혜롭기로 유명했다. 후세의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실레노스에 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미다스는 인사 불성의 노인이 실레노스임을 알아보고 자그만치 열흘 동안이나
주연을 베풀며 잘 대접했다.
이 사실을 안 디오니소스는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미다스에게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 테니 무엇이든 말해 보라고 하였다. 고기 수천마리를 얻는 것보다 고기
잡는 법을 배우는 게 낫다는 이치를 꿰고 있던 터라 미다스는 자신의 손이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대답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청이 마땅찮긴 했지만 약속한 대로 소원을 들어 주었다. 원하는 대로 되리라 는
디오니소스의 말을 듣고 미다스는 처음엔 반신반의하였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참나무 가지를 한번 꺾어 보았다. 가지는 곧 황금 가지로 변했다.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미다스는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손을 대보았다. 조약돌도, 잔디도,
사과도, 무엇이든 손이 닿기만 하면 모조리 금으로 변했다. 그러나 미다스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미다스는 큰 잔치를 열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포도주를 한 잔 들이키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잔도, 잔 속에 든 술도 금으로
변해 버렸다. 빵ㅇ르 한 조각 먹으려 해도, 고기를 한 점 집으려 해도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모두 금으로 변해 버렸다. 사방엔 금이 흘러넘치는데 미다스는 굵어
죽을 판이었다. 미다스의 황금손은 이제 횡재가 아니라 횡액이요 저주였다.
미다스가 자신의 탐욕을 뉘우치며 탄식하고 있을 때 하나뿐인 딸이 아버지를
위로하러 내전으로 들어왔다. 슬픔에 겨운 나머지 미다스는 위로하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아뿔싸, 애지중지 길러온 귀여운 딸마저 황금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엄청난 재앙 앞에서 넋을 잃은 미다스는 염치불구하고 디오니소스를 찾아가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가 스스로 어리석음을 깊이
깨달았음을 알고 자비로이 일러 주었다.
팍톨로스 강으로 가되, 강의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그대의 머리와
몸을 담그고 탐욕과 어리석음을 씻어라.
미다스는 디오니소스가 시키는 대로 팍톨로스 강물에 몸을 씻고 황금의
저주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황금을 만드는 미다스의 능력이 강물로 옮아가
강바닥의 모래가 모두 금모래로 변했다고 한다.

황금의 강, 그리고 골드 러쉬

북미 대륙은 어느 모로 보나 미다스가 몸을 씻었다는 팍톨로스 강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러나 1848년 1월 24일 아침, 신화속의 팍톨로스 강이 북미
대륙의 남서부에 현현하였다.
그날 아침, 스코들랜드 출신의 목수 제임스 윌슨 마샬은 세라네바다 산맥 기슭
아메리카 강변에 자리잡은 제재소의 방수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기 때문에 혹시 방수로에 이상이라도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방수로엔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고 물 밑바닥의 진흙 위엔 자갈과 암석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 보던 어느 순간, 마샬은 자갈과 암석 조각 사이에 희미한
광택을 내는 콩알만한 물체가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그는 둑에 쭈그리고 앉아 그
물체를 들여다 보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것을 몇 알 주워 들고 자신의 상관인 요한 요거스트 사타에게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방문을 꼭 잠근 채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아메리카 백과사전>에 씌어진
대로 약제용 저울을 이용해 몇 번이고 테스트를 반복했다. 그 결과 마샬이 들고
온 물체가 뛰어나게 순도 높은 금이라는 사실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해졌다.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이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비밀은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캘리포니아(이 때의 캘리포니아는 지금의 네바다·아리조나·유타
주까지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의 카우보이들을 거쳐 바다 저쪽의 하와이,
남쪽으로는 멀리 페루와 칠레까지 퍼져 나갔다. 6개월 뒤에는 미 동부 지역의
주요 도시에까지 소문이 닿았다. 처음엔 연안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선원들과
멕시코와의 전쟁 때문에 인근 몬테레이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 금을 찾아
몰려왔다. 주둔군 사령관은 워싱턴의 중앙 정부에 소문은 과장이 아니다 는
보고를 했고, 이어 조폐국 국장이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금광석 중에는 순도가
98.7%나 되는 것도 있다 고 공식 확인했다.
12월 들어서는 급기야 포크 당시 미 대통령이 수많은 소문 중에서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것을 빼면 사실이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다 고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발언함으로써 골드 러쉬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져갔다.
1849년에 접어들면서 유럽·중남미·중국 등지에서까지 금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몰려왔다. 49년 한 해 동안만 해도 금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의 수는
무려 8만에 육박했다. 이들을 일러 포티아 나이너즈라고 한다. 포티 나이너즈의
쇄도로 말미암아 미국 서해안 지역의 몇몇 소도시들은 동부의 대도시 못지 않은
대도시로 발돋움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이다. 오늘날
샌프란시스코에 포티 나이너즈 라는 미식 축구 팀이 있는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이다. 캘리포니아는 1850년에 미국의 정식 주로 편입되었는데 이 또한
편입되었는데 이 또한 삽시간에 몰려든 포티 나이너즈 덕택이었다.

포티 나이너즈는 과연 금을 찾았나

포티 나이너즈가 캘리포니아로 들어온 경로는 대개 세 가지였다. 북동부의
항구 도시에서 출발하여 배로 남미의 남쪽 끝 호온 갑을 돌아 샌프란시스코까지
올라오는 방법, 역시 동부에서 배로 중미의 파나마까지 가서 육로로 지협을 건넌
다음 다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방법, 그리고 육로로 대륙을
횡당하는 방법이 있었다.
제일 널리 이용된 세 번째 루트는 북미 대륙 중앙부를 걸어서 횡단하는
것으로서 출발지는 미주리 주의 세인트 조세프였다. 세인트 조세프는 오하이오
강, 미시시피 강, 미주리 강 들을 오가는 기선들이 죄다 모여드는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미주리 주까진 철도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단 기차로
미주리 주까지 와서, 다시 기선을 타고 세인트 조세프에 당도했다. 골드러쉬가
시작되고 1년이 되었을 즈음, 이 마을을 거쳐 서부로 간 사람들은 무려 5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인트 조세프는 문명이 끝나는 장소 였다. 그들 앞에는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 3,200km의 황야가 가로놓여 있었다.
포티 나이너즈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장비는 대강 이런 것들이었다. 먼저
노새와 소, 소는 초원지애를 건널 때, 노새는 험한 산길을 지날 대 필요했다.
그리고 마차, 마차의 뒷 트렁크에는 반드시 엽총, 편자, 도끼, 그리고 마차가
고장났을 때 쓰는 수리 용구를 갖추어 실어야 했다. 그 외에도 휴대용 취사
도구, 칸델라, 장화, 방수모 등등 자질구레한 준비물이 수없이 많았다. 포티
나이너즈는 세인트 조세프에 닿기 전에 너나할것 없이 <캘리포니아 이주
입문서>라는 가이드 북을 사서 읽었다. 위에 열거한 준비물 목록까지 포험한
이러한 가이드 북은 십수개 국어로 간행되어 있었는데, 웃지 못할 일은 그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이 사실은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세인트루이스의 신문기자가 엉터리로 꾸며 쓴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곡괭이와 선광
냄비였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들은 노다지를 캐냈을까? 생각해 보라. 3,200km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8배에 이르는 거리이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서부는 완전히 미개척지였다.
대초원과 험한 산길, 수많은 강과 골짜기가 곳곳에서 이들을 가로막았다.
인디안들과의 충돌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처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병을 얻기도 했고, 계곡에서 추락하기도 했으며, 강을
건너다 물길에 쓸리기도 했다. 지금도 세라네바다 산맥의 기슭에 가면 수없이
널려 있는 포티 나이너즈의 무덤들을 볼수 있다. 그리고 무사히 도착한 포티
나이너즈 가운데서도 노다지의 꿈을 이룬 사람들, 즉 운도 따르고, 체력도
좋고, 선견지명도 있는 사람 은 별로 많지 않았다. 금이 나올 만한 주요한
광맥은 이미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이 잽싸게 차지해 버린 뒤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을 구경도 못했거나, 운좋게 금광을 발견했다손치더라도 농장주와
결탁한 브로커들에게 사기당하기 일쑤였다. 얼마간의 사금을 손에 넣어 집으로
돌아가는 배삯이나마 마련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없어 낯선 땅에 눌러
앉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술집을 차리기도 하고
뜨내기 장사치도 되었다. 요컨대 샌프란시스코의 하층민이 된 것이다.
포티 나이너즈의 불행한 결말을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서 최초로 금을 발견한
마샬과 사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결말부터 밝히자면 두 사람
모두 빈곤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원래 사타는 캘리포니아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스위스 출신의 대지주였다. 자신도 자신 소유의 토지를 다 둘러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 위에 위스키 증류 공장, 모피 공장, 제재소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니 서부의 스위스 황제 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
토지는 캘리포니아가 아직 멕시코 영토였을 때 확보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타는
금을 발견하자마자 몬테레이 주둔 미군 사령관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멕시코 전쟁이 미군의 승리로 끝날 게 확실했으므로,
캘리포니아가 미국 영토로 넘어올 경우 혹시 기존의 소유권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사령관은 캘리포니아는 아직은 미군 점령 아래
있는 멧기코 영토일 뿐 이라며 그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사타의 요청이
있은지 열하루 뒤에 그 땅은 일정 부분 나누어 받은 마샹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토지를 강탈해 간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상류 계급 , 즉 골드 러쉬를
타고 도시의 지배 계급으로 위치를 굳힌 과거의 농장주들이었다. 마샬은 소송도
제기해 보았으나, 재판관과 배심원석은 모두 그들 상류 계급 이 차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발견자들이 이러 했을진대 머나먼 곳에서 흘러 들어온 포티
나이너즈야 오죽했으랴.

우리의 탐욕을 씻을 강물은 어디에

미다스왕이나 포티 나이너즈를 탐욕스럽다거나 허황되다고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 황금, 곧 재물·부 물질에 대한 욕심은 어쩌면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비바람을 가릴 집도
있어야 하며 추위를 막아낼 옷도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목적 의식적으로 개조하는 지혜로운 머리를 가진 까닭에 더 좋은 옷, 더 편리한
집, 더기름진 음식을 찾게 된다. 물질적인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류의 문명을 여기까지 밀고 온 토대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쌍으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발전적인 동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지나쳐 물질을 숭배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황금을
사랑하면 별이 있는 곳도 모르게 된다 는 격언이 있다. 물질에 대한 숭배는 곧
영혼을 가두는 감옥을 짓는 행위임을 알리는 경구는 그 밖에도 동서양의 고금을
통틀어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다. 인간이 물질을 다스리는 주인으로 똑바로 서
있을 때라야만 물질의 발전이 인류의 발전에 보탬이 된다. 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숭고한 가치들을 잊어 버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저 안락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간다면 황금은 곧 파멸의 길이다. 물질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존재 조건이라면 물질의 노예가 되는 건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존재
조건이다. 돈 때문에 온갖 끔찍한 일이 다 벌어지는 오늘날의
배금주의·물질주의를 보면 일찍이 그 과오를 깨친 미다스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우리의 이 탐욕과 어리석음을 씻어낼 강물은 어디에 있을까
<고요한 돈강>의 작가 숄로호프의 작품 가운데 <한 인간의 생애>라는 중편이
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한 러시아 병사가 어느 날 독일군 장교들의
질탕한 파티장에 불려 나간다. 무언가 맡은 일에 트집을 잡혀 총살을 당할
판이었다. 그런데 마침 총을 겨누었던 장교의 권총 안에 총알이 들어 있지 않은
바람에 죽음을 모면했다. 장교는 운 좋은 놈 이라며 술을 한잔 준다. 물론
주인공을 장난감쯤으로 여겨 희롱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술을 거부하자 장교가
어쭈, 이것 봐라 하는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물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엉겁결에 나온 대답이 저는 안주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안흣ㅂ니다
였다. 취기가 오른 장교는 이 엉뚱한 대답을 귀엽게 여겨 주인공에게 식탁 위에
있던 소시지와 빵을 가득 안겨 주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그는 이번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독일군 장교들이 배가 터져라 웃어대는 가운데 파티장을
나왔다. 그날 밤 수용소의 러시아 포로들은 모두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빵과
소시지를 한 조각씩 먹었다. 주인공은 포로의 수대로 빵과 소세지를 나누었던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인가.
배고픈 사람을 옆에 두고 혼자 먹지 않는 것, 이 소박한 예의야 말로 우리
모두가 그 속에 이 몸을 담구어야할 강물이 아닐는지.

12.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나르시시즘

정신분열증과 나르시시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는 두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바깥 세계로부터의
철저한 이탈과 과대명상이 그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내면 속으로만
기어들어가며 바깥의 세계-다른 사람들이나 사물, 자연등에는 아무런 관심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온 마음을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만 쏟게 되고 이윽고
과대망상에 빠져 드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열증을 정신분석학에서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상태 로 파악한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도취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자기애라고도 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쓴 사람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폴 네케였다. 네케가 말한 나르시시즘이란 일종의 성적
도착 심리, 즉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 이상 심리를
가르킨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단순히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 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되고 연속된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으로 확장시켜
정신분석이론에 도입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비정상적인 이상 심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정상적인 발달 과정의 한 부분이다. 갓난아이는 나 와
남 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가 웃으면 자기가 웃는 걸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차츰 나 와 남 을 구별하게 되고 자기 이외의 사람과
사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자아을 향했던 리비도가
대상을 향해 옮아가는 것이다.
자아를 향한 자아 리비도 와 대상을 향한 대상 리비도 의 관계를 프로이트는
아메바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아메바는 위족이라는 돌기를 뻗쳐 그속에 자신의
신체 물질을 유입한다. 아메바는 필요에 따라 돌기를 내거나 거둬들이는데 일단
뻗친 돌기도 끌어당기면 다시 원래의 둥근 덩어리가 된다. 아메바가 돌기를
뻗치는 행위를 자아가대상을 향해서 리비도를 내보내는 행위와 견줄 수 있다.
아메바가 필요에 따라 돌기를 냈다가 거둬들였다. 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자아 리비도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대상 리비도로 전환될 수 있고
대상 리비도는 다시 자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강력하고 충격적인 동기에 의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무리하게
떼어 놓는 과정이 일어나면 리비도가 자아만을 향하게 되고 그 결과 과대망상이
생겨난다. 충격적인 일을 당한 뒤 머리가 돌아버리는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다.
즉 정상인들도 많건 적건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되면 정신병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이다. 나 와 남 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대상애를 경험한 후에 일어나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나 와 남 을 구별하지
못하는 젖먹이 대의 원시적인 나르시시즘과 구분하여 2차적 나르시시즘이라
한다.

나르키소스의 닫힌 마음과 네메시스의 응징

나르키소스(나르시스는 나르키소스의 프랑스식 표기이다)는 강신 케피소스와
강의 요정 레이리오페 사이에 난 아들이었다. 망연자실 이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나르키소스는 쳐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르키소스가 두 살 나던 때였다. 강둑에서 요정들에게 둘러싸인채 놀고 있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지나가던 웬 눈먼 여자가 저 아이는 제 얼굴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살겠다 는 이상한 말을 던졌다. 그 여자는 목욕하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멋모르고 훔쳐보았다가 장님이 되어 버린 테이레시아스였다. 아테나는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한 대신 예언의 능력을 주었던 것이니, 그녀가 던진
말을 곧 나르키소스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암시였다.
어머니 레이리오페는 아들의 불행을 염려하여, 절대로 나르키소스의 눈에
거울이 띄지 않도록 할 것과 나르키소스가 강으로 나갈 때마다 수면을 흔들어
버림으로써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요정들에게 명령했다.
성실한 요정들 덕분에 나르키소스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마침 숲의 요정 에코가
이 아름다운 소년을 보게 되었다. 에코는 한눈에 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에코는 남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에코는 원래 듣는 이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말재간이 뛰어난
요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우스가 요정들을 희롱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아비를 찾아나선 헤라를 만나게 되었다. 에코는 헤라를 붙들고 평소의
버릇대로 이 얘기 저 얘기 쉴틈없이 늘어놓았다. 에코가 너무 길게 수다를 떠는
통에 제우스와 놀고 있던 요정들이 헤라를 피애 모두 달아나버렸다. 에코는 본의
아니게 헤라의 발을 묶어 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헤라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다시는 날 속인 그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할 것이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말대답 할 때만은 예외로 해 주마. 이제부터 너는 남의 말의 끝난 뒤에는
지껄일 수 있으나, 네가 먼저 말을 하지는 못하리라!
때문에 에코는 그저 멀찍이서 나르키소스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에코가 모습을 숨긴 채 가마가만 나르키소스를 뒤쫓아 가노라니, 같이 사냥
나온 친구들을 잃어 버렸는지 나르키소스가 큰소리로 친구들을 불렀다. 거기
누구 없나? 없나! 하고 에코가 대답했다. 있으면 이리 나오게! 에코가 또
이리 나오게! 하고 대답했다. 이리 와서 함께 가자! 나르키소스가 다시
외쳤다. 그러나 에코는 함께 가자! 고 따라 외치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나르키소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 치워! 너 같은 것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는 매몰찬 말을 남기고 본 체 만 체 떠나 버렸다. 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이요, 처신이었다. 에코는 부끄러워서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느라고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때부터 에코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계곡에서만 살았으며 사랑을
거절당한 슬픔 때문에 나날이 여위어 가다가 마침내는 형체도 없이 스러져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나르키소스에게 사랑을 호소하다 죽어간 요정은 비단
에코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요정들이 응답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에코처럼 몸을
말리면서 죽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상사병으로 여위어 가던, 람누스에
사는 샘의 요정 하나가 신들께 기도를 드렸다.
바라건대 나르키소스로 하여금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사랑의
보답ㅇ르 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소서.
요정의 응어리진 기도를 들어준 이는 저 가차 없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였다.
람누스의 산 속에는 아주 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숲속의 짐승들도 그곳으로는 가지 않았으며 낙엽이나 나뭇가지도 그 샘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사냥에 지친 나르키소스가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가를 찾았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다가 나르키소스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빛나는 두 눈, 어깨가지 내려온 황금빛 고수머리, 통통한 장미빛
뺨, 상아같이 흰 목,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 나르키소스는 그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한 번도 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나르키소스는
그것이 제 얼굴인 줄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샘속의 요정이려니 생각한
나르키소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수면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사랑스러운 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물속에 담그였다. 그러자 요정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가 싶더니 당황한 나르키소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어느새 다시 나타나 나르키소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르키소스는 샘가를 떠날 수 없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수면에 비친
제 모습만 바라보았다. 자신을 사모했던 수많은 요정들처럼 나르키소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열병으로 홀로 여위어 갔다. 나르키소스는 마침내
샘가에서 죽고 말았다.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죽고 난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가운데는 자줏빛이고 가장자리는 하얀 한 송이
꽃이 피었다. 그 이름, 수선화였다.

나르시시즘적 인간

나르키소스는 스틱스 강(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강. 죽은 이들의 혼이 이 강을
건너서 저승으로 간다)을 건너면서도 강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려고 뱃전에서
몸을 구부렸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르시시즘은 그 나름의 긍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요구와 목적을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우선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람은 다
어느 정도는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욱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필요를 넘어서는 정도의
나르시시즘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위협하게 된다. 문제는 균형이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어지면서 가볍게는 좀 우스꽝스러운 자기도취가, 무겁게는
정신분열증이 일어난다.
자신의 요구와 소망을 과대평가하고 앞세운다는 점 때문에 나르시시즘은
이기주의와 가끔 혼동된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객관 세계를 주관적으로 왜곡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객관적인 이익 이 아니라 주관적인 만족감 을 구하기
때문에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에도 집착할 수 있다. 요컨대 자기 자신과 바깥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는 게 이기주의와는 구별되는 나르시시즘의
특징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자신을 미화하게 되고 자신의 결점이나
한계를 볼 수 없게 된다.
별다른 재능도 없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곧 주위
사람들에게서 좀 웃기는 사람 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나르시시즘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있다 고 논파했다. 뻔뻔스럽고 거만한
인물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단정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사람들 중에도
나르시시스트가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덕목에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프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그런 유형의 예를 들었다.
어떤 남자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곁에
모여 평소의 그의 행동과 처신을 칭찬했다.
얼마나 학식이 풍부하고, 얼마나 지성적이며, 얼마나 친절하고 얼마나 생각이
은 사람이었는가 말이야......
죽어가던 그 사람이 친구들의 말이 끝나자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겸허함이 빠졌잖은가!

이성을 잠재우는 집단적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칭찬을 받는 데
성공하면 더없이 행복해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면,
즉 나르시시즘에 구명이 뚫리면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위축되고 만다. 또
제어할 길 없는 격분에 사로잡힌다.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받으면 우울증이나
증오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특성과 관련하여 프롬은 특히 집단적인 나르시시즘 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했다. 어떤 한 개인이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유능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우수한 사람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당장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 가 내가 속한 단체, 집단,
지역, 종교, 국가, 민족 으로 대치되면 상확이 달라진다. 우리들만이 진리의
소유자 이고 우리들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 이며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문화적이며,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가장 재능이 뛰어난
민족 이라는 주장이 실제로 공공연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집단적
나르시시즘 앞에서 했던 것처럼 쉽사리 웃지 않는다. 섣불리 비판했다간 되려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가장 위력을 떨칠 때는 전쟁 때-열전이건 냉전이건-이다.
우리 국민은 선량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도적인데 적군은 사악하고 이중적이며
잔혹하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인데 적군은 악의 화신들이다. 는 식이다.
정치가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선동되기 일쑤인 이런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극단적인 배타와 광신, 증오를 낳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말살하려는 광증을 낳는다. 그래서 프롬은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을 이성을
잠재우는 치면적인 독약 이라고 갈파했다.

천지에 가득한 또다른 나

생물학이나 정신분석학, 사회 심리학이 아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인간학
으로는 나르시시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과 세상을 외면하는 닫힌
마음 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네메시스의 응징은 요정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 번도 귀기울이지 않은 나르키소스의 닫힌 마음을 겨눈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연민 때문에라도 한 번쯤 뒤돌아 보야야 했건만......
남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을수록, 즉 마음이 열려 있을수록 나르시시즘은
감소된다고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한 예수님이나 나에게
절하지 말고 네 이웃을 섬겨라. 그것이 나를 섬기는 길이다. 고 한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바도 바로 그 열린 마음- 나와 남 사이의 벽을 허무는
마음,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마음일 것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어지는
경지, 그 곳이 바로 천국이요, 극락일 것이다. 하지만 나누고, 가리고, 따지며
앙앙불락 살아가는 우리 범인 들로서는 그 경지가 너무나 아득해 보인다.
아득하다 못해 슬프다.
내게는, 진창에 빠져 있는 내 발목이 서글퍼 눈물이 날 때면 생각나는
마음의 벗이 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 두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숨져간 청년
노동자 전태일과 백인들의 약탈로 얼룩졌던 1800년대의 북미대륙에 살았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다.
청계천 피복 공장의 지옥 같은 노동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다가 마침내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에 불을 질러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 임을 절규했던 전태일은 아득하다고 해서 포기해선 안된다 고
우리를 다독여 준다. 전태일은 어느날 막노동판에서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 같은 한 밑바닥 인생을 만났다. 어디서 얻어쓴 것인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군복 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은 그 남자는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밥을 먹을 대나 시종 무표정했다.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전태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현실이냐!......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또한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남긴 글에서 이렇게 썼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 바라네. 그러면 뇌성번개가 천지를 무너뜨러도, 하늘의
바닥이 빠져도, 나는 두렵지 않을 걸세

진저리나는 가난과 불행.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 이 곧 나 인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랬기에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던 것이리라.
시애틀은 미국 서부 지역에 살던 한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었다. 1854년 미국
대통령 피어스가 이 인디언 부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땅을 백인 정부에 팔라고
제안했다. 물론 말이 팔라는 것이지 안 나가면 내쫓겠다는 통고문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 답한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데 그 주으이 일부는 소개하면 이렇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기가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준다. 카누를 날라 주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 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
내는 철마가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 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거미줄을 짜는 것이 아니라
그 거미줄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거미줄에 행한 일은 곧 자신에게 행한
일과 다른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 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들의 아이를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 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열린 마음으로 보면, 이렇듯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전체의 일부 이며
나아가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 물, 새, 꽃, 바람마저도 내 가 된다.
부끄러워하. 둘러보면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오늘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 헛되이 나누고, 가르고, 따지기만 하고 있으니.

13. 내 운명은 나의 것
시지프스

위대한 의식의 순간

야근을 끝내고 돌아오는 캄캄한 밤,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또는 간간히 책장
넘기는 소리밖엔 들리지 않는 독서실 한구석에 앉아 시험 공부를 하다가 돌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사는가? ,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는가? , 내 삶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에 따라선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느닷없이, 또
강렬하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그것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아니라
습격 이라고 해야 온당할 정도이다. 내 삶의 의미를 묻는 그런 회의에
습격당하면 이제까지 너무나 익숙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나 전철을 향해 뛰는 그 분주함도, 수험서의 중요한 대목에다
밑줄을 긋는 손길도, 질탕한 술자리의 그렇고 그런 소란도, 승진을 향한
피말리는 경쟁도, 밤늦은 귀가 때의 종종걸음도... 요컨대 똑같은 리듬으로
월·화·수·목·금·토 계속되는, 이제까지는 아주 자연스럽고 수월하던 그
모든 일상이 갑자기 무의미해 보이고, 지루하고, 역겨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바깥 세계가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정물처럼 서먹서먹해지고
나아가선 두렵기까지 하다. 내 삶은 무의미한 일상의 궤도를 습관적으로 따라
돌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에 아득바득 쫓기며 살아온
이제까지의 자신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우리를 성큼 떼놓고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세계로
찾아든 이방인처럼 만들어 버리는 이 돌연하고도 비참한 순간을 실존주의 작ㄱ
알베르 카뮈는 위대한 의식의 순간 이라 칭했다. 자신의 실존 을 자각하고
생의 부조리 에 눈뜨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 란 다른 말로
무의미함, 허망함을 뜻하낟. 카뮈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에에
대답하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 문제 에 대한 카뮈의 결론은 이렇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얼핏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이 두 문장 사이에 가로놓인 긴 사유의 과정을
알고 싶은 사람, 실존을 자각해 본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 본 사람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러자면 그에 앞서
시지프스에 대해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가장 현명한 인간 시지프스

시지프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프스는 인간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한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뜻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 찍힌 존재였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형인 아폴론의 소를 훔쳤다고 한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는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웠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를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이 완전 범죄를 망쳐 놓은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시지프스였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지프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임을 일러바쳤던 것이다.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지프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여하튼 신들의
일에 감히 인간이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눈밖에 나 있던 차에 뒤이어 시지프스는 더욱
결정적인 괘씸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느 날 시지프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잠시 궁리한 끝에
시지프스는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신 아소포스를 찾아갔다. 딸 걱정에 천근
같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소포스에게 시지프스는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
준다면 딸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노라 했다. 시지프스는 그때 코린토스를
창건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엇다.
그러니 코린토스에 있는 산에다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게
시지프스의 청이었다. 물줄기를 산 위로 끌어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쨋거나 딸을 찾는 게 급했던터라 아소포스는 시지프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시지프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휘치를 가르쳐
주었고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냈다.
자신의 떳떳찮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어바친 자가 다름아닌 시지프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신 타나토스(죽음)에게 당장 그놈을 잡아 오라고 명려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보복하리라는 걸 미리 헤아리고 있던
시지프스는 타나토스가 당도하자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 명계의 왕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출하게 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섰다간 온 코린토스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지프스는 이번엔 순순히 항복했다. 그런데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가면서 시지프스는 아내 멜로페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릴 것이며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일렀다.

영겁의 형벌

저승에 당도한 시지프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읍소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와에 대한 능멸에 다름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시지프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생불사하는 신이 아니라 한번 죽으면
그걸로 그만인 인간인 그로서는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도 소중했던 것이다.
하데스가 몇 번이나 타나토스를 보내 을러대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시지프스는 갖가지 말재주와 임기웅변으로 체포를 피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후로 오랫동안을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별빛이 되비치는 바다와
금수초목을 안아 기르는 산과 날마다 새롭게 웃는 대지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하고 신중하다 한들 인간이 어찌 신을 이길 수
있었으랴. 마침내는 시지프스도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 명계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명계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다.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 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 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시지프스는 바위보다 강하다

다시 굴러 떨어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 끔찍하지 짝이 없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시지프스의 무익한 노동 앞엔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카뮈는 시지프스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인 까닭이 바로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노동이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알면서도 수백,
수천, 수만 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에 있다고 갈파했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절망스럽고 참혹할 듯한 순간-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 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이기는
승리의 순간 이다.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시지프스가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이 휴식의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영역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그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시지프스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시킬 수 있다.

자신의 노동이 헛되고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위안 삼을 헛된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슬픔과 비탄에 빠지지 않고-말하자면 신들이 정해 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굴러 떨어질 바위를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 카뮈는
그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불안하고 가파른 실존 을 대면하는 인간의 응당한
자세를 읽어낸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조류이다. 실존주의를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명제는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데, 이 말
속에는 실존주의의 특징뿐만 아니라 실존주의를 잉태한 20세기 전반적인 사회
상황이 그대로 녹아있기도 하다.
18·19세기는 신념과 희망의 시대였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며,
이성의 빛에 따라 사회와 역사는 진보·발전해 간다는 낙관적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일찍이 없었던 위기와 혼돈, 불안과
동요에 빠지게 되었다. 근대 시민 사회의 모순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세기말의 혼랑과 뒤이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이제까지의 믿음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증오와 투쟁, 무의미한 전쟁과 대량 살육,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야수적인 면모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 라는 따위의 본질은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맞닥뜨린 불안·허무·두려움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 이 아니라 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삶, 즉 실존 이었다. 실존주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무의미하게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신의 소명을 받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심오하고 아름다운
본질을 실현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본질이라거나 의미 같은 건 애초에
없다. 그러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기에도 원래부터
주어진 정답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기자신일 뿐이다.
일단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자기를
의식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들은 우연적이며 부조리하다. 나무나
돌은 자신의 생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장하고 소멸할
따름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 이 있는 존재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의식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선험적으로 주어진 의미 따위는 없다. 결국 인간은 주어진
상황, 주어진 순간 속에서 스스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마치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듯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본질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자유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인간의 존재 양식 그 자체임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이기를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으며, 자유 안에 던져져 있다.

참을 수 없는 실존의 무거움이여!

실존주의는 이처럼 개개인의 철저한 자각과 창조적인 주체성을 강조하고 그
역할을 한껏 높이 샀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한 개별적인 존재 조건뿐만
아니라 넓게는 사회·역사적 상황도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개인의 적극적인
선택과 행동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운명과 역사의
유일무이한 주체로 세웠다. 실제로 카뮈와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비롯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사회·정치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 는 실존주의자들의 자평에 하등의 이의를
달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철학과 이론, 주장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또한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 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선택은 수많은 사회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전후좌우에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얽혀 있고, 그의 내면에는 이미 자기화된
사회적과 도덕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의 선택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으며, 나의 판단 은 어떤 기준과 근거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은 역사로부터 물려받거나 사회로부터 배운
것이기 십상이다. 사르트르도 이 점을 인식하고 어떤 개인도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완전히 자유로운 실존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구원은
불가능하다 고 고백하였다.
본질만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힘들 듯이 실존만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관계 속에 놓인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삶과 역사의 주체로서 끊임없는 선택과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 라는 실존주의의 명제는 거역할 수 없이 아름답다. 굴러 떨어진 돌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처럼. 더구나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까지 듣고 나면
인류의 일원으로서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게 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에 전세계의 무게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내 어깨 위에 놓인 전세계라니, 참을 수 없는 실존의 무거움이여!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고 말한 것일까.

14. 모든 과오는 교만으로부터
이라크네·니오베·에리시톤


고사성어들

카산드라의 예언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었다. 어느 날 아폴론이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카산드라가 좀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폴론은 내 사랑을
받아준다면 내가 가진 예언력을 나누어 주겠다 고 유혹했다. 하지만 예언력을
얻은 뒤에도 카산드라는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입맞춤을 하면서 이왕에 준 예언력에서 설득력을 빼 버렸다. 이
때문에 카산드라가 아무리 신통한 예언을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뒷날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카산드라는 전쟁에 원인을 제공한
파리스가 스파르타를 방문하면 트로이를 지틸 수 있다고 예언했으나 아무도
귀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었다. 또 그리스군의 간계를 알아차리고 목마를 성 안에
들여 놓으면 안 된다고 알렸지만 역시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 예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겉으론 번듯한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는
빈 말을 일러 카산드라의 예언 이라고 한다.



부 록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주요 신들

<여신들>
가이아 - 카오스에서 나온 최초의 신. 아들이자 남편인 우라노스와 결혼해
티탄 족을 낳았다.

레아(로마/오프스) -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난 딸. 크로노스와 결혼해
올림포스 신족 6남매, 즉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 낳았다.

데메테르(로마/케레스) - 대지의 여신이자 곡식의 신. 제우스와의 사이에 딸
페르세포네를 낳았다.

헤리(로마/유노) - 가정과 결혼의 신. 제우스의 아내

헤스티아(로마/베스타) - 화로와 신전의 신. 가장 알려지지 않은 신. 처음엔
12주신에 들었으나 나중에 디오니소스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아테나(로마/미네르바) - 지혜와 공예·전쟁의 신. 어머니 메티스가
제우스에게 잡아먹히는 바람에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아르테미스(로마/디아나) - 사냥과 달의 신. 제우스와 여신 레토 사이에서
아폴론과 쌍둥이 남매로 태어났다.

아프로디테(로마/베누스) - 사랑과 미의 여신.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헤파이스토스의
아내.

<남신들>
우라노스 - 최초의 사늘 신.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

크로노스(로마/사트르누스) - 티탄 신족의 막내로서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신들의 통치자가 되었다. 레아와 결혼하여 올림포스 신족을 낳았다.

제우스(로마/유피테르) - 올림포스의 최고신. 번개와 천둥의 신. 여러
여신·여성들과 관계를 맺어 많은 자식을 두었다.

포세이돈(로마/넵투누스) - 바다의 신. 여신 암피트리테와 결혼하였다.

하테스(로마/플루토) - 저승의 신.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다.

아폴론(로마/메르쿠리우스) - 태양의 신이자 입법자·궁수·예술의 신.
아르테미스의 동생.

헤르메스(로마/메르쿠리우스) - 신들의 전령이자 여행자·무역·상업·도둑의
신. 제우스와 여신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레스(로마/마르스) - 전쟁의 신.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헤라가
혼자 낳은 아들이라고도 한다.

헤파이스토스(로마/불카누스) - 대장간의 신. 헤라가 아비 없이 낳은 아들로서
절름발이다. 아프로디테의 남편

디오니소스(로마/바쿠스) - 술과 황홀경의 신. 제우스와 인간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스티아 대신 나중에 12주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