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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길여

작성자명관**
조회수5565
등록일2007-07-07 오전 11:37:32
한국 의료 발달사의 학습장 가천박물관
선사시대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의료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천박물관. 한국 의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박물관을 찾는 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특수 박물관을 그 지향점으로 한다.
가천박물관은 21세기 동북아 중심도시로 성장할 인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가천(嘉泉)
. 아름다운 샘. 아름답다(嘉)
는 것은 상서로움(吉)
을 스무 번이나 더한다(加)
는 뜻이다. 인천 시민들과 가천의과대학 부속 길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가천박물관은 입장료 없이 들어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샘과도 같은 휴식공간이다.

“가천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의료기 발달사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잊혀져가는 생명존중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성호영 학예연구원이 밝히는 가천박물관 설립 목적이다.

인천 유일의 사립 박물관인 가천박물관은 박애·애국·봉사의 신념으로 설립된 길병원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지난 95년 이 병원 이사장인 가천 이길여 여사에 의해 세워졌다. 따라서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길병원 40년 역사의 발자취를 바탕으로 한국 의료사를 깊이있게 연구하고 총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교육하기 위한 특수 박물관을 그 지향점으로 삼는다.

가천박물관에는 선사시대의 의료활동과 관련된 유물에서부터 현대의 의료기구까지 전통 의료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어 의료기기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고대 유물인 뼛조각·석침·골침·연석 등 의료기구와 본초학의 시조로 알려진 신농씨의 상상도는 인류 초기단계의 의료활동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또 약잔 및 약탕기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손잡이 달린 토기류를 통해 삼국시대 의료기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차를 봉양할 때 사용했던 강화 출토 고려차맷돌, 고려청자연화문탁잔, 청자 약잔·약병 등은 고려인들의 높은 의료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물이다. 둥근 달 속에 계수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서 방아를 찧는 동경(銅鏡)
속의 토끼는 떡방아가 아니라 실은 약방아를 찧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재미있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약절구와 약연·약탕기·침구·약저울 등 각종 의료기기와 한방의학서들은 당시 상당한 수준을 구가했던 우리 조상들의 의료술을 짐작하게 한다. 사상의설로 한의학의 한 본류를 형성한 이제마 선생의 약 처방문, 근대 의학의 선구자 지석영 선생의 친필 서간도 전시돼 있다.

가천박물관은 전통 한의학과 관련된 유물 외에도 근·현대 서양의학 기구들도 전시해 서양 의료술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 준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동충하초 등 각종 한약재들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전시물이다.

한편 가천박물관은 7천2백여권에 이르는 국내 발행 잡지(정기간행물)
창간호를 소장해 ‘최다 창간호 소장’ 기록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올라 있기도 하다. 1908년 창간된 “장학보”에서부터 최근 창간된 영어 제목의 여성지까지 방대한 양의 잡지 창간호들이 발행연도별로 서가에 진열돼 있다. 보관 상태도 거의 완벽해 언론사(史)
, 잡지사, 국문학사, 미술사 등을 연구하는 사학도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소장 창간호 가운데 “동방제약회사 약보”(1936)
, “유항월보”(1937)
, “동양의학”(1955)
, “대한한의학회보”(1966)
등 의학 관련 잡지 창간호들은 따로 공간을 마련해 전시해 놓았다.

인천 지역 유일의 국보(276호)
문화재인 “초조본 유가사지론”과 “향약제생집성방”(보물 1178호)
등 13점의 보물은 가천박물관이 자랑하는 소장품이다. “초조본 유가사지론”은 초조본 고려대장경판의 완벽한 인쇄술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당나라 현장법사의 한역(漢譯)
불경을 조판한 고려 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유가사지론 1백권 중 제53권에 해당한다.

“태산요록”(보물 1179호)
, “산거사요”(보물 1207호)
, “신응경”(1180호)
, “식물본초”(1227호)
등의 보물 지정 문화재는 국내 유일본이거나 희귀본 의학서적으로 관련 분야 연구가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연구자료다.
가천박물관은 인천 시민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도 자리매김했다. 조선 후기 인천부에서 제작한 안동 권씨 호구 단자 및 토지 거래 문서, 1911년 제작된 현대식 인천항 계획도 등 1백여 점의 인천 근대사 유물은 인천 지역 학생들의 학습자료로 이용된다.

또 월 20여 차례 이 지역 관내 유치원생들을 초청해 박물관을 관람시키고 있으며 중·고교의 역사연구반 등 특활 지원사업으로 문화강연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사진·영상의 해’를 기념해 그간 수집해온 사진자료를 정리해 ‘근대 풍물과 삶의 흔적’이라는 전시회도 열었다.

다가올 21세기 동북아 시대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인천. 가천박물관은 빠른 시일내에 인천시 연수구에 마련된 새 부지에 박물관을 신축, 이전할 계획이다. 가천박물관은 한국 의료사를 전시·연구하는 세계 도시 인천의 본격적인 특수 박물관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울러 해마다 인천 시민들을 위한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문화사업을 통해 인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현원섭 월간중앙 기자]
2002.02.23 12:13
등록포기 대학생, 친구들이 등록금 대납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생활을 포기해야 했던 한 대학생이 친구들의 등록금 대납(代納)
운동과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학총장의 지원으로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29일 경기도 성남의 경원대학교에 따르면 이 대학 실내건축학부 1학년인 최형진(20)
군은 5년전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신데 이어 최근 가족 생계를 꾸리던 홀어머니(48)
마저 관절염으로 앓아 눕자 지난 8월말 눈물을 머금고 2학기 등록을 포기했다.

최씨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월세와 어머니 치료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왔다.

이 소식을 들은 서승진(24)
씨 등 대학 친구와 선배들은 직접 등록금을 마련하겠다고 수소문하다 결국 연대보증으로 은행에서 학자금을 융자받아 추가등록기간에 가까스로 등록을 대신 마쳤다.

이런 사연이 학내에 퍼지면서 이 대학 이길여(李吉女)
총장은 최근 최군을 불러 2학기 등록금 전액을 특별장학금으로 주고, 최씨의 어머니를 인천 길병원에 무료 입원 치료토록 배려했다.

최씨는 "주위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울 뿐"이라며 "앞으로 이웃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성남=연합뉴스)
김경태기자

2002.01.29 6:25
[사진] 태국 상원의원들 길병원 방문
태국 상원 보건위원회 프라싯 피툴키지 위원장 등 의원 22명과 주한 태국대사관 관계자 등이 14일 인천시 남동구 가천의대 길병원(이사장 李吉女)을 방문했다. 이들은 심장센터와 서해권역응급센터 등 의료시설을 둘러보고 병원측과 양국 의료.문화교류 협력방안 등을 논의했다.
2006.05.19 5:29
210야드너머로 펑펑 "나이 날려 버리죠"
"제 별명이 '드라이 싱'입니다."
첫 홀 드라이버 티샷을 보고 동반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가천 길재단 이길여(74) 회장이 한마디한다. 이 회장과 얼마 전 안양베네스트 골프장에서 오랜만에 함께 운동을 했다. 드라이브샷이 완전히 싱글 수준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드라이 싱'이란다.

드라이버 비거리가 210야드쯤 나간다. 체중 이동, 허리 돌리기, 파워 임팩트 그리고 피니시까지 한 동작으로 깔끔하게 이어진다.

"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셨죠?"

"숙녀 나이를 물어보면 곤란하죠."

"의사는 몇 년도에 되셨나요?"

"서울대 의대 졸업하고 의사 된 게 1957년인데 그때 윤 교수는 뭐하고 있었나요?"

"아, 저야 그때 좀 놀았죠."

나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니까 정말 '놀고 있을 때'였다.

사실 겉모습만 봐서는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도 없다. 빨간 장갑을 양손에 끼고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데다가 멋진 선글라스까지 꼈으니 마치 40대 조종사 같다. 정말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분이다.

"그때는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특히 부인병은 세균성 질환이 많아 항생제만 투여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정말 안타까웠죠."

그녀는 미국 유학 중에 좋은 병원에서 붙잡는 걸 뿌리치고 귀국해 병원을 열었다. 당시 환자 중에는 병원비가 없어 야반도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병원은 미리 보증금을 받고 입원을 시킬 때였다.

"나는 병원에다 '보증금 없어도 입원이 됩니다'라 써 붙여 놓고 환자를 받았어요, 도망가면 그냥 내버려 두고 외상 하겠다면 외상 받아주고 돈 내는 환자에게는 받는 식이었죠."

그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결심한 것이 '박애.봉사.애국'이라고 했다.

"장타의 비결이 뭐죠?"
"연습해야죠,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이 있나요, 새벽에 연습장에 나가 맹렬히 연습합니다."

그동안 홀인원을 한 번 했고 최저타는 78타라고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원래 운동을 다 좋아합니다. 어려서는 달리기를 잘했고 승마도 좋아합니다. 몸이 건강해야 머리도 잘 돌아가죠. 골프장에 오면 꽃구경도 하고 신나게 걷고 젊은 사람들 하고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즐겁잖아요."

사실 이날 제일 행복한 사람은 캐디였을 것이다. 이 회장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캐디의 조그만 수고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베풀고 베푸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원포인트 레슨=드라이버 비거리를 결코 포기하지 마라.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 경영학 박사

[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http://find.joins.com/search_result_news02.asp?query=%C0%CC%B1%E6%BF%A9+&news_sch=&news_photo=&news_sort=date&news_title=no&news_source=&news_service=&news_start_num=1&sdate=&edate=&news_date_op=
2006.05.23 9:47
1. 새로운 꿈

나는 학생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을 만나면 난 격의 없는 할머니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교육이야말로 내가 평생 힘을 쏟아야 할 사업이다.

나는 아이들이 좋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나는 항상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에겐 순수함과 호기심이 깃든 열정이 있다.
지난 금요일 나는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가천의과학대학교 학생들로부터 특강 요청을 받고 강의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학생들에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의대 졸업 후 산부인과 개원에서 시작해 길의료재단을 설립하기까지 굴곡 많았던 40여 년, 그리고 가천의과학대학교를 비롯해 경원대학교 등 남들이 보면 성공담이라 할 수 있는 업적을 소개해야 할까. 하루 네 시간씩 자면서 이룩한 내 모든 것을 어떻게 한 시간에 담을 수 있을까.

먼동이 틀 무렵 나는 이런 생각이 부질없음을 알았다. 내가 이룩한 의료와 교육 사업, 그리고 내가 받은 수많은 상과 훈장들…. 이런 것들이 학생들에게 무슨 감동을 줄까.

나는 깨달았다. 이건 아니다. 수백 명의 맑은 눈망울을 향해 내가 진정 보여줘야 하는 것은 '나의 업적'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으로 키웠고, 의사로서 수많은 새 생명을 받고, 환자를 치료하며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랑 덕분이었다. 사랑이 없다면 병원이나 학교 건물은 단순한 시멘트 덩어리일 뿐이 아닌가.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룬다. 일에 대한 사랑, 가족과 조국 사랑, 신념에 대한 사랑…. 모든 사람이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사랑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창 너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인천 송도 청량산 자락에 내 우거(寓居)가 있다. 나는 매일 눈 앞에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역사를 본다. 송도 경제자유구역이다. 2020년까지 1600만여 평의 매립지에 세계 각국 기업과 학교, 병원이 들어온다고 하니 신천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1958년 처음으로 병원을 열던 시절 바닷가의 찬바람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진료를 끝낼 시간이 되면 대기 환자들이 병원 문을 닫지 못하도록 몸으로 버텼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용한 의사, 보증금 없어도 입원하는 병원, 따뜻한 청진기를 지닌 여의사라는 소문이 돌면서 병원은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송도에서 온 환자는 생선을, 간석동 주민은 쌀을, 구월동에 사는 이는 채소를 가지고 왔다. 무료진료를 다닐 것도 없었다. 병원이 무료진료소였다.

여유가 생기면서 의료 취약지에 눈을 돌렸다. 경기도 양평과 백령도, 철원에 병원을 세웠다. 올 4월에는 길병원 터에 뇌과학연구소를 열었다. 의료영상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조장희 박사를 미국에서 초빙하고 650억원을 들여 야심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그동안 주변에서 말도 많았다. '병원 살림도 힘들다면서 기초의학에 투자할 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또는 '아니 아직도 욕심이 남았대?'하는 빈정거림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인생을 대나무에 비유한다. 대나무 마디가 하나 완성되면 다음 마디가 자라듯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열심히 만들어가면 그뿐이다. 이제 생활이 어려운 환자는 정부가 맡아줄 만큼 나라의 살림 규모가 커졌다. 한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병원을 첨단화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세계 유수 병원들과 코앞에서 격렬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첨단과학 시스템이라는 방패와 고급두뇌라는 창이 있어야 한다. 나의 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2006.05.24 10:36
2. 가족이야기

열여섯 나이에 시집와 30명이 넘는 대가족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 차순녀(右)와 아버지 이동숙(左).

전북 군산 초입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차머리를 돌려 처음 만나는 소담한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행정구역 상으론 전라북도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안터. 드넓은 대야평야를 앞에 하고 뒤로는 문중 산인 건장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요즘도 십여가구가 모두 전주 이씨인 집성촌이다.

아버지 이동숙은 전주 이씨 익안대군(이성계의 셋째 아들)파 18대 손이었다. 익안대군파 3대 손께서 역적으로 몰려 몸을 피한 곳이 바로 안터라고 했다.
조실부모한 할아버지 이상제는 곤궁한 살림이었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동학에 깊숙이 관여하셨고 경문 외우는 일로 아침을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셨다. 지금도 늦은 밤 의관을 정제하고 경문을 외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방엔 늘 열댓 분의 어르신들이 드나들었다. 심각한 얘기가 오갈 때면 깊은 한숨과 역한 담배 연기가 사랑방을 짓눌렀다. 일본 순사들의 눈초리가 매섭던 시절이었다.

집안 살림은 할머니 김흥아의 몫이었다. 근검하고 부지런하셨다. "집에서 십리 안에서는 내 자손들이 남의 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을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당신은 밀기울 죽을 먹으면서 일하는 머슴들에겐 고봉밥을 담아주셨다고 한다. 덕분에 근동 논밭 대부분을 소유할 정도로 살림이 불어났다.

할아버지가 '김 선생'(독립운동가로 추정)이란 분과 10여 일씩 집을 비우거나, 일본 순사들이 하나 뿐인 시백부를 쫓을 때는 안절부절하며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머니 차순녀는 전북 부안 하장리 사람이다. 16세 때 네 살 어린 아버지 이동숙과 결혼해 30명이 넘는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며 청춘을 보냈다. 할머니도 무서웠지만 어머니 역시 녹록지 않은 분으로 기억된다.

위로 오빠가 넷이 있었던 어머니는 친정 부모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당시 관행대로 신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질 않았다.

처녀 시절 집에서 가까운 궁월리 교회에 야학이 들어섰다고 한다. 배움에 목 말랐던 어머니는 부모 몰래 공부를 시작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들통났다. 야학을 마치고 한밤중에 사립문을 들어서다 외할아버지에 발각돼 치도곤 혼줄이 나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은 꺾이질 않았다.

"아버지, 그냥 지 공부하게 해주시요. 야학 선생님이 그러는디, 여자들도 남자들 맹키로 밖에서 일하는 세상이 온다고 글드만요. 나쁜 짓 안 허고 공부만 열심히 헐께요."

이렇게 부모님을 설득한 어머니는 기어이 언문을 깨쳤고, 공부하는 오빠들 먼발치에서 '동몽선습'과 '소학'을 뗐다고 한다.

어머니의 시련은 혼인하고부터 시작됐다. 아들을 간절히 원하는 시어머니 밑에서 언니와 나, 오로지 딸 둘 만을 낳으셨으니 당시 사회 분위기로 그 분의 신산스런 삶이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
2006.05.25 9:57
3. 어머니의 태몽

어릴 적 내 눈에는 크고 듬직하던 고향 집이었는데 이젠 초라하고 낡은 개량 주택으로 변모해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들일이 한창인 여름이었지. 새참이 든 광주리를 일꾼들 앞에 내려놓고 열어보니 밥과 반찬은 온 데 간 데 없고 누런 놋수저만 가득하더라."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신 태몽 이야기다. 할머니는 "이번에는 꼬추가 틀림 없것지야. 사람을 먹여 살리자면 사내가 돼야지 여자 심으로 워떠케 그런 일을 하것냐, 영락없는 아들이다"며 기뻐하셨다. 손자를 확신한 할아버지도 "석 달 열흘 잔치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니셨다. 손이 귀한 집에서 어머니가 스무 살에 언니를 낳고, 3년 만에 나를 가지셨으니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귀한 아들 날 몸인디 함부로 해서야 쓰것냐"는 할머니의 배려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어머니가 진통을 시작하자, 종손의 탄생을 축하하려는 친인척과 마을 어른들이 몰려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잔칫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딸이라는 소식을 들은 마을 어른들은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갔고, 잔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해졌을 터였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누워 있는 방문을 열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잠시 들여다봤을 뿐이었다. 나 또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이나 기대를 받지 못한 채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로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말조차 제대로 못했다. 어머님은 걱정을 하면서도 나에겐 싫은 소리 한 마디 않으셨다.
오히려 더 많은 애정으로 보살펴주셨다. 그때까지 엄마 젖을 빨았던 것 같다. "엄마 찐"하고 품에 달려들면 언제나 나를 위해 따스한 가슴을 내주셨던 어머니.

말문이 트이자 나는 '마을에서 제일 말 잘하는 아이'가 됐다. 그동안 못한 말을 봇물 쏟듯 내뱉었다. 할머니는 이런 나와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하셨다. 부뚜막에 군불을 넣고 소죽을 끓이실 때면 나를 불러 "까라"고 하셨다.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라는 말씀에 나는 소죽이 다 끓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급 급장(반장)은 지방 고위관료의 딸이었다. 나를 비롯한 급우들이 검정고무신을 신을 때, 그 아이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듯 싶다.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 다른 아이들은 두 손으로 '앞으로 나란히' 했지만, 급장만은 맨 앞에서 옆으로 팔을 벌리는 게 아닌가. 나도 그 아이처럼 하고 싶었다. 난 급장이 돼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3개월쯤 지나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급장이 됐다.

나는 일본 아이들까지 제치고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엔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첫 성적표를 받아보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셨다. 내게 1등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관심을 받고 싶었던 내가 되레 "꼴등을 할까"하는 생각도 해 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는 성격은 그때부터 나타난 것 같다. '한 광주리 가득한 놋수저'는 수만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 지금 신기하게 맞아떨어지는 태몽이 아닐 수 없다.

2006.05.28 7:35
4. 강아지 포대기

언니가 학교에 간 사이 언니가 아끼는 인형을 안고 어머니와 포즈를 취했다.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일반적으로 정겨운 고향의 정취련만 나에겐 그렇지 못한 가슴 아린 추억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여러 마리 있었다. 모두 버려진 동물들로, 다리가 부러지거나 심한 상처를 입어 내가 길에서 데려다 키운 것들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을 어귀 개울가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 역시 호기심이 일어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닿자마자 나는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심하게 화를 냈다. 아이들이 다리가 부러져 절룩이는 강아지를 막대기로 쿡쿡 쑤셔대고, 돌을 던지며 키득거리는 게 아닌가. 강아지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밀쳐내고 강아지를 안았다. 주인 없는 강아지여서 냄새가 심하게 나고 더러웠다. 나는 녀석을 꼭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을 따뜻하게 데워 깨끗이 씻겨준 뒤 부러진 다리에 부목까지 대고 붕대를 정성스레 감았다. 그리고는 친동생처럼 등에 업고 놀러 다녔다. 이런 내가 기특해서였을까, 아니면 힘들게 보여서였을까. 어머니는 강아지 포대기를 만들어 주셨다.

"강아지 돌봐주다가 네가 쪄 죽겄다."

할머니는 무더운 날에도 포대기 끈을 풀지 않는 나를 보시며 이렇게 안쓰러워하셨다.

강아지 뿐 아니라 병든 고양이나 날개를 다친 새, 아니면 함께 뛰어놀다가 무릎이 까진 친구들까지 모두 돌봤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의사놀이를 한 셈이었다. 약을 바르거나 헝겊을 찢어 붕대를 감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의 유년 기억 속에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는 없다. 내가 의사 역할을 하고 친구들은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픈 환자가 되는 식이었다.

할머니가 내게 하신 것처럼 아이들의 배를 어루만지며 "할미 손은 약 손, 우리 아가 배 아프지 않게 해주소"라고 하던가, 무당처럼 흰 보자기에 됫박 쌀을 싸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동네 친구의 머리를 좌우로 문지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다. 그 중에 걸인들도 꽤 있었다
고 기억된다. 할머니는 허름한 옷차림의 걸인에게 개다리 소반에 밥과 반찬, 국까지 챙겨 마치 손님처럼 대접하곤 했다. 그런데 밥상을 꼭 언니와 나에게만 나르도록 하셨다. 심지어 등교하려는 나를 불러세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셨다. 나는 학교에 늦을까봐 발을 동동 구르면서 툴툴거렸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부모를 잘못 만나 거지가 됐지 똑같은 사람이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추운 겨울 당신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거리의 헐벗은 부랑아에게 벗어주고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오시기도 했다.

마당에서 듣던 각설이 타령이 지금은 아득한 옛 일이 됐지만, 나의 뇌리에는 그 시절 그 광경이 생생하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과 교육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 같다.
2006.05.29 7:57
5. 죽음에 대한 공포

필자가 태어나서 여학교 시절까지 자란 전북 옥구군(현군산시 옥구읍) 대야들녘.

의사는 늘 죽음 곁에 있다. 병원에서 주검을 보는 것 역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죽는 것에 대해 초연할 만한데도 아직 나는 죽음이 두렵다. 사람들은 "힘들어 죽겠다" "아파 죽겠다"는 등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병원 직원들도 못하도록 한다. 사람을 살리는 곳이 병원인데, 직원들이 '죽겠다'를 연발하면 환자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고향 우리 집 근처에 순이라는 소꿉친구가 살았다. 어느 해 여름, 우리 동네에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돌면서 희생자가 한두 명씩 생기기 시작했다. 위생에 대한 개념도, 예방접종도 없던 시절이어서인지 주로 아이들과 노인들이 희생됐다.

어느 날 "순이가 죽었다"는 말이 삽시간에 돌았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뒷산 고목 뒤에 서서 멀찌감치 보이는 순이네 집을 내려다봤다. 친구의 주검은 너무도 초라했다. 애장이라고 하는데, 거적에 돌돌 말린 무엇이 지게에 실려나가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지켜본 나는 "순이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엄마.아빠도 없는 곳에 혼자 있어야 할 거야"라며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급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리 속에 머물렀다. 죽음을 막연히 두려운 것쯤으로 알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운 사건은 또 있다.

나와 언니는 나무를 잘 탔다. 특히 큰 소나무와 감나무가 많은 뒷산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어르신들은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곧잘 하셨다. 감나무는 높기도 했지만 나뭇가지가 잘 부러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감나무 위에서 놀다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나무에서 미끄러지면서 몸이 한 바퀴 반을 돌아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어린 나이에 '이젠 죽는구나'하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낀 기억이 있다.

그날 밤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진땀을 쏟고, 베개를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언니는 또 다른 고민거릴 내게 던져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는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신기하다는 듯 곧잘 전해줬는데 어느 날 대뜸 "길여야, 너 지구가 둥근 거 알아?"라며 말을 꺼냈다.

언니는 "지구는 항상 빙글빙글 돌고, 그 지구 밖에는 우주가 있데, 그런데 그 우주는 끝이 없데"라며 "그런데도 사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언니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나에겐 또 다른 근심거리가 생겼다.

"지구가 돌다가 내가 아래쪽에 있을 때 만유인력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지? 우주는 끝이 없다는데 어디까지 떨어져야 하나?"하는 걱정이었다.

어릴 때 유난히 '죽음 공포'를 많이 겪은 나는 지금도 매사를 죽음 반대 편에서 생각한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밝은 면을 사랑하고, 환자에게 한마디 말을 건넬 때에도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노력한다.
2006.05.30 6:26
6. 의사가 될래요

이리여중 시절 수학 선생님과 교정에서 포즈를 취했다. 뒷줄 왼쪽이 필자.

소학교 시절 교의(校醫)였던 이영춘 박사는 '의사가 되겠다'는 내 꿈을 키워준 분이다. 하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반사경을 쓰고, 자상한 말투로 "숨을 크게…"라며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진찰하는 의사선생님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천연두 예방접종 때 나는 주삿바늘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의사 가운을 입은 미래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이렇게 '의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고 6년제 공립학교인 이리여중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별나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집에서 5리쯤 떨어진 임피역에서 이리역(현 익산역)까지 기차로 통학했다. 그런데 당시 기차는 연발착이 잦았다. 특히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기차는 유난히 불규칙했다. 밤 12시가 넘도록 기다리게 해 놓고 아예 출발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 늦은 밤 혼자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기차가 늦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며 시간을 때웠다. 그럴 때면 난 학교 건물 뒤에 있는 키 작은 소나무 밑에 누워 책을 보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나만의 공부방을 찾아냈다. 교실 청소를 위해 교단을 들고 걸레로 바닥을 닦다가 뚜껑을 발견했다. 열어 보니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이 나왔다. 교사가 일본식 단층 건물이었는데 건물 아래쪽에 환기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바로 이 환기 구멍에서 빛이 흘러들어왔다. 처음엔 퀴퀴한 냄새와 벌레, 짙은 거미줄 때문에 몇 분을 버티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기차가 연발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교단 밑 공부방'을 찾았다.

우리 집 뒷산에는 일제 말기 공습에 대비해 어른들이 파놓은 방공호가 있었다. 이곳도 내 공부방이었다.
집 뒤뜰에서 선산으로 이어지는 큰 대나무밭에 위치한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낮에는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으로, 밤에는 촛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논쟁이 치열했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긴장감이 팽배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공호 안에서 책을 읽었다.

뒷산의 큰 소나무도 나만의 공간이었다. 친구가 놀러오면 나는 소나무 위로 올라가고, 친구는 나무 아래 앉아 공부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어머니는 개떡을 만들어 주셨다. 소나무 위에 걸터앉아 먹는 그 개떡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전북의 명문이었던 이리여중에서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경기.이화 등 명문 여학교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공부하고 가르쳤다. 내가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공부한다고 하니, 서울에서 온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조차 "이리에서 어떻게 서울대 의대에 가겠냐"며 무시했다. 이런 말을 듣고 나는 '어디 두고 보라지'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학창 시절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공부한 나는 2학년을 마치고 월반을 해서 4학년이 됐고, 1951년 이리여중에선 최초로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2006.05.31 5:11
7. 부산전시연합대
부산전시연합대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포즈를 취한 필자(右).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나는 축하 대신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와 언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자가 배워서 뭘 하겠느냐"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대학 진학은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의사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시기였다.

한국전쟁으로 전국의 대학은 모두 부산전시연합대 체제로 운영됐다. 1951년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령'이 내려졌고, 세계 교육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시연합대학체제'가 출범됐다. 이 조치령은 전화(戰禍)로 정상 수업을 할 수 없는 대학생들이 다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교육이 중단돼서는 안 된다는 선각자들의 의지가 담겼다.
연합대는 부산에서 출범해 광주.전주.대전으로 이어졌다. 나는 부산에서 수업을 받았다. 당시 부산전시연합대 학생 수는 4268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의학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전쟁 와중에 의료실습 기자재도 크게 부족했고,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교육을 받은 터라 더욱 그랬다. 그래도 의학에 대한 열정만은 식지 않아 해부학 실습시간에는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시체를 만졌다. 그 손을 씻지도 않고 밥을 먹곤 했다. 정신력으로 공부하던 때였다.

생활여건도 열악했다.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방 한 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곳에서 나는 한 평 남짓한 쪽방에 네 명이 함께 기거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것도 함께 누워 잘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아 두 명이 잠자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은 공부를 하는 식으로 생활해야만 했다. 자다가 답답해 일어나 보면 내 배와 다리를 베개 삼아 자면서 코를 고는 친구들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힘겨운 날들이 계속됐지만 모두 잘 견뎌냈다.

그 시절이 나에게는 심한 정신적 갈등의 시기이기도 했다.

난리통에 학도병으로 나가는 남학생들 때문이었다. 내 또래의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젊은이가 전장에 나갔고, 그들 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 내 역할은 없었다. 남자였다면 앞장서서 전선으로 향했을 것이고, 조금 더 일찍 의학을 공부했다면 야전병원 군의관으로 참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의대생일 뿐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국가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젊은 영령에 정신적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훌륭한 의사가 돼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 그 길이라고 다짐했다. 훗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귀국하려는 나에게 동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물었다. "부르지도 않는 한국에 뭐 하러 돌아가느냐"고. 나는 전쟁을 겪으면서 다졌던 나의 다짐을 굳이 얘기하지는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시절 '애국'은 우리의 가치관이었다.

2006.06.01 8:38
8. 참 봉사자 닥터 골든

‘퀘이커 의료봉사단’일원으로 참 봉사자의 모습을 보여준 닥터 골든(左)과 필자.

전쟁이 끝나자 부산전시연합대는 문을 닫았고, 서울대도 서울로 옮겼다. 나는 학교 근처인 서울 혜화동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학업 분위기는 조금씩 안정돼 갔고, 나도 의학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언니를 통해 쌀과 학비.용돈을 지원했다.

당시 가세는 기울고 있었다. 전쟁통에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다. 나는 최대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방학이면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인체의 뼈 구조를 공부하기 위해 나는 항상 가방에 사람의 뼈를 넣고 다녔다. 기름기가 잔뜩 묻어 있는 뼈는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일 두개골을 만지고, 척추뼈를 실로 꿰어 순서와 기능을 외웠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인골(人骨)을 마을로 가져와 부정탔다"고 동네 사람들이 집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동네 망해 먹을라구 작정을 혔구먼. 뭔 일이 생기면 어떻게 책임질 것이오?" 나를 중학교에 보내고 대학까지, 그것도 의과대학에 보낸 것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못마땅했을까.

할머니도 불호령을 내리셨다.

"우리 집에 송장 뼈가 있다고? 야가 참말로 미쳤능갑다. 당장 내다버리지 못할까. 그렁게 가시내들은 공부를 갈치는 것이 아니란 말이여."

하지만 이를 막은 것은 어머니였다. "사람 몸을 알아야 제대로 치료를 하죠"라며.

어머니의 든든한 후원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1957년 군산도립병원에서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내 고향인데다 외국인 의료진이 파견 나와 있어 그곳을 택했다. 당시 군산도립병원에서는 '퀘이커 의료봉사단' 소속 수십 명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영국인 의사 골든을 만났고, 그는 훗날 내 의사 생활의 이정표가 될 만한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줬다.

폐렴 환자로 기억된다. 그는 입과 코에서 피고름이 계속 흘러 캑캑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응급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석션(흡입관)이 눈에 띄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의사 골든이 입으로 환자의 피고름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옆에서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상상도 못할 장면에서 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진정한 봉사자'가 무엇인지 그는 나에게 행동으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듬해 퀘이커 봉사단은 군산도립병원을 떠났다. 나도 이곳에서 수련 생활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골든은 서울적십자병원을 소개해줬다. 나는 그곳에서 수련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서울적십자병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련의 제도(인턴.레지던트)를 시행하면서 월급도 줬다.

수련의를 마칠 즈음 선진 의학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야할 때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논 한 필지 값과 맞먹는 미국행 비행기삯조차 내겐 없었다.
2006.06.04 6:10
9. 미국 유학

미국 유학을 떠나는 날 김포공항에서 포즈를 취했다.

군산도립병원과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수련생활을 하면서 미국 유학에 대한 열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문제는 유학경비였다. 항공료 정도는 내 힘으로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자금을 대느라 고생한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마침 인천에서 개원한 친한 친구가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적산가옥인 10평 남짓한 목조 건물에서 산부인과 개원의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어느 정도 환자를 보면 경비를 마련할 수 있겠지'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수술을 못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절박한 환자들을 대하면서 미국 유학의 꿈은 멀어져 가는 듯했다. 눈앞에 있는 중환자 진료가 유학보다 더 다급했던 것이다. 병원을 찾는 환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당시 개원한 산부인과가 많지 않았거니와 친절한 여의사가 진료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인천 시내에 퍼졌다.

하루가 어떻게 가고, 계절이 바뀌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난 의사 면허시험에 합격한 뒤 2년 남짓 수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임상경험을 터득했던 터라 환자 진료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선진의료에 대한 꿈을 접어둘 수는 없었다. 뭔가 결행을 해야 했다. 이때 뜻하지 않은 장벽이 또 생겼다.

미국의 유학정책이 바뀐 것이다. 미국의 의대 졸업생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련의 생활을 하려면'ECFMG(외국의대 졸업생 등록 교육위원회)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다. 하루종일 진료에 파김치가 됐던 나에게 유학시험은 힘겨운 난관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그렇다고 환자를 등한시할 수 없다 보니 밤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며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시험과목은 전공인 의학과 영어듣기 평가였다.

'졸업한 지 4년이 지나서 응시하려면 6개월 이상은 이불을 펴고 누울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험은 어려웠다.

시험공부를 시작한 지 3년여 만인 1964년, 연세대 계단강의실에서 내 꿈인 미국 유학을 결정하는 시험을 봤다. 수백 명이 모인 시험장에서 내 자리를 확인한 순간,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맨 뒷자리가 배정된 것이다. 영어듣기 평가는 녹음기에서 나오는 문장을 듣고 네 개의 보기 가운데 답을 찾는 식이었다. 그런데 스피커가 좋지 않아 맨 앞자리가 아니면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하늘이 꺼지는 듯했고 가슴은 쿵쾅쿵쾅 두방망이질 쳐댔다. 순간 맥박을 잡아 보니 120. 보통 사람이 60~70 정도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두 눈을 감고 자신에게 '잘할 수 있어, 잘할 거야'라고 격려했다.

얼마 뒤 그렇게 고대하던 '미국 의사 자격시험'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하늘을 날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사로서의 보람, 어머니의 장한 딸이 되려는 욕심, 좀 더 나은 의학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 등이 그 힘든 과정을 지탱하게 했던 것 같다. 그해 10월 난 후배 여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6.06.05 6:15
10. 뉴욕에 가다

수련의 생활을 하던 미국 병원의 스태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필자(서 있는 사람 중 오른쪽).

ECFMG(외국의대 졸업생 등록 교육위원회)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뒤 신청서를 제출했던 10여 곳의 병원으로부터 수련의 제의를 받았다. 나는 뉴욕에 있는 메리 이머큘리트병원(Mary Immaculate Hospital)을 택했다. 뉴욕이면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의 수도'가 아닌가. 기왕이면 미국의 심장 깊숙이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당시엔 꽤나 심각했다. 1960년대 미국의 편의시설은 낙후된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었다. 샤워기나 화장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문고리까지 조작 방법이 달라 실수로 문이 안에서 잠겨 애를 먹었다는 얘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진 문명을 접하면서 이런 실수를 할까봐 나는 친한 서울대 의대 동창 두 명과 함께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방의 구조를 살펴보고 좌변기.샤워기.에어컨 등 편의시설의 사용법을 익히느라 밤을 꼬박 샜다.

64년 가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병원에 들려 환자.직원들과 눈물의 이별을 했다.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어머니와 언니.동료와 부둥켜안고 한동안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공항은 눈물로 환송하는 가족들로 무척 붐볐다. 유학이나 이민은 긴 이별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탄 뉴욕행 비행기는 하와이.시애틀을 경유해 꼬박 하루 만에 케네디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선 밍크코트를 걸친 사람, 반팔 옷을 입은 사람,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 등 다양한 복장의 생경한 모습이 나를 반겼다. 병원으로 가던 그랜드 센트럴파크 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눈에 잡힌 풍광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길에 익숙했던 나는 한없이 넓고 끝없이 펼쳐진 도로, 그 위를 씽씽 달리는 각양각색의 자동차를 보곤 아연실색했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30분 동안 실감한 것은 '아 이런 것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거구나'였다.

병원은 나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규모는 400병상으로 크진 않았지만 의료시설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한국에선 보기도, 구하기도 힘든 각종 의료기기와 장비가 즐비했다. 한 번 쓰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거즈.주사기.주삿바늘 등 의료소모품도 나를 '경악'하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 개인 병.의원 중엔 미군부대에서 보따리 상인을 통해 흘러나오는 주사기를 사용하는 곳이 많았다. 몇 번 소독해 사용하다가 주사기 끝이 무뎌지면 숫돌에 갈아 썼다. 몽당연필처럼 길이가 짧아지면 근육주사용을 정맥주사용으로 활용했다. 수술용 장갑에 구멍이 나면 덧붙여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환자들은 어떤가. 참고 견디다 응급상황이 돼서야 병원에 달려왔다. 하지만 미국은 암 검사, 대사이상 검사 등 예방차원의 진료가 이미 보편화돼 있었다. 이런 의료 수준의 격차와 고국의 환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속에서 뜨겁게 응어리지는 그 무엇인가를 참아내야 했다.
2006.06.06 8:56
11.미국 수련의 시절

퀸즈 종합병원 수련의 시절 동료 의사들과 함께(왼쪽에서 둘째가 필자).

5년에 가까운 미국 생활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는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에서 1년의 인턴 과정을 마쳤고, 인근 퀸즈 종합병원으로 옮겨 레지던트를 밟았다.

미국 종합병원은 첨단 의료시설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체계적인 의료시스템과 의료진의 환자에 대한 열정이었다. 인턴의 일과는 오전 5시에 시작돼 세상이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 한밤이 돼서야 끝났다. 소아과 인턴을 돌던 첫날의 일이다.

병동에 도착한 내게 수간호사가 환자들의 병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30명이 넘는 환자의 병세와 검사.치료 결과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녀는 무려 한 시간여에 걸쳐, 그것도 차트 한번 뒤지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마치 한 권의 책을 달달 외우는 듯했다. 입원 환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런 과정을 나도 반복해야 했다. 한 시간쯤 뒤에 온 수석 전공의(칩 레지던트)에게 수간호사로부터 들은 내용을 그대로 설명했다. 단어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됐다.

수석 전공의의 보고가 끝나면 과장(Attending Doctor)이 치료를 위한 처방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지만 어떻게 매일 그 많은 환자의 기록을 외울 수 있었는지.
그러나 이것은 환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바탕을 둔 일상적인 훈련 결과다. 당시 미국 병원 수련의에겐 출퇴근이 없었다. 환자를 돌보느라 밤새는 것은 예사였다. 수련의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환자가 아플 때만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환자와 같이 생활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환자의 작은 변화까지 살펴 머릿속에 모든 환자의 정보를 차곡차곡 입력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병원은 정교하게 짜여진 매뉴얼로 운영됐다. 완벽한 환자 관리 체크리스트는 수련의에게 엄청난 업무 강도를 요구했다. 하루하루 진땀 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격일로 당직을 섰고, 정상근무일조차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강행군을 계속했다. 나는 잠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환자들과 붙어살다시피 했다.

소아과 인턴 시절 나는 '주사 잘 놓는 의사'로 통했다. 신생아의 이마에 놓는 나비 모양의 주사인 '나비침'도 한 번에 척척 혈관을 찾아내 동료.과장들을 놀라게 했다. "동양인은 손재주가 뛰어나다"라는 말을 들으며 우쭐하기도 했다.

그 덕에 어려운 주사를 놓을 때나 미국 의료진이 몇 번 실패한 뒤에는 어김없이 나를 찾았다. 당직이 아닌 날에도 '주사를 놔 달라'는 요청에 불려다닐 정도였다. 남자아기에게 의무적으로 해주는 포경수술을 5분여 만에 끝내 15~20분 걸리는 미국 의료진에게서 "솜씨 좋다"는 칭찬도 들었다.
태어난 지 2~3일 지난 신생아에게 기본적으로 행해지던 '대사이상 검사'도 내 몫이었다. 신생아의 대퇴동맥(사타구니 부근)에서 채혈을 해야 하는데 손이 큰 미국 의사들에겐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언어와 환경이 낯설고, 일과는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선진 의술을 맘껏 공부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하며 나는 빠르게 미국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2006.06.07 8:12
12. 내 인생의 로맨스

첫 데이트때 입었던 원피스 차림으로 센트럴 파크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면 "혼자 살고 있으니 궁금한 게 많은가"라며 웃어넘기곤 한다. 이번 기회에 '내 한 번의 로맨스'를 꺼내보려고 한다.

서울대 의대 졸업 후 환자 속에 파묻혀 있던 와중에 여기저기서 맞선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 내 나이 20대 후반으로 혼인 적령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맞선 자리에 나갈 수는 없었다. 중매 결혼이 활달한 내 성격에 맞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짧은 시간조차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에게 미국 유학은 인생의 다른 면을 경험하게 한 사건이었다. 퀸즈 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칠 때쯤인 1968년 봄의 일이다. 기숙사 뒤편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큰 식료품점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일본 과자며, 양갱.굴 등을 사러 이곳에 들렀다.

어느 날인가 병원에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한국인 남자가 꽃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식료품점에서 나를 보고 점원에게 근무지를 물었다는 것이다. 나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서울에서 중학생 때 혼자 미국에 건너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사업을 한다고 했다.

첫 데이트 날, 나는 예쁜 원피스에 브로치를 달아 한껏 멋을 내고, 기숙사 창문으로 도로를 내려다보며 그 사람을 기다렸다. 검은색 링컨콘티넨탈 승용차에서 내린 말쑥한 정장 차림의 그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나를 위해 차 문을 열고, 닫아주는 그의 매너에 난 공주가 된 듯 즐거웠고, 그런 그가 참으로 멋져 보였다.
뉴욕에서 차량으로 2시간 거리인 베어 마운틴으로 피크닉을 갔다. 그는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비빔밥과 한국 음식을 펼쳐놓았다. 당시 맨하탄에는 '삼복'과 '아리랑'이라는 한국음식점이 두 곳 있었는데 거기서 주문했단다. 수련기간에 단 한 번도 한국음식을 접하지 못한 나에게 그의 이런 준비는 감동 그 자체였다. 언젠가 나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면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릴 스트립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를 회상하며 감회에 젖은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주말이면 뉴욕 빌딩 숲을 돌아다니고, 센트럴 파크나 뉴욕 외곽의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새벽이슬을 맞을 때까지 춤을 추기도 했다. 때론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관람하며 애틋한 로맨스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나에게 청혼을 해왔다.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울었다.

2주 정도 지나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센트럴 파크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 제의를 거절하고 난 또 울어야 했다. 난 이미 마음을 추스르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시절 이미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 '나의 일', 그리고 '환자'와 결혼한 몸이었다.
2006.06.08 8:15
13. 환자를 위한 병원

1988년 길병원과 토마스 제퍼슨 의대의 자매결연 조인식에서 닥터 고넬라(左)와 함께 한 필자.

최근 선진 의료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해외 탐방에 나서는 의료기관들이 적잖다. 사실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있기에 선진 의료시스템 도입은 절박하다. 그런 면에서 난 행운아다. 우리나라 의료시설이 낙후돼 있던 1960년대에 미국의 선진 의료시스템을 체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수련기간에 본 모든 의료현장은 그대로 귀감이었고, 의학도로서 배워야 할 교과서였다.
인턴시절 내과에 배치됐을 때 폐렴에 걸린 백인 노(老)신사를 회진한 적이 있다. 그 환자는 자기가 걸린 병의 원인균이 무엇이고, 치료제로 맞고 있는 페니실린 주사의 용량과 치료 효과, 부작용의 가능성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심지어 앞으로 사흘 뒤면 퇴원할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마치 의사가 의무기록을 읽듯 자신의 치료 과정을 상세히 알고 있는 환자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알기 쉽게, 거듭 설명해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세기 전인데도 미국에선 의료진이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해 충실하게 설명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에서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환자로서 직접 수술대에 올라 미국 의료시스템을 경험한 일도 있다. 난소에 생긴 주먹만한 혹을 제거하기 위해 여느 환자처럼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때 수술의사는 불안해 하는 내 손을 잡아주며 "치료가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시켰다.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깊이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도 산모 엉덩이를 다독거리며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 배운 '노하우'다.

미국 의학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데는 환자와 가족의 인식도 한 몫했다. 당시에는 자기공명영상기(MRI).양전자단층촬영기(PET)와 같은 첨단 진단장비가 없었다. 가장 대중적인 장비가 X선 장비였으니 치료받다 사망하더라도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면 의사는 병명을 밝혀내기 위해 가족에게 해부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가족이 병원 측 요구에 동의해 시신을 내주는 것이었다.

가천의과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토마스 제퍼슨의대 닥터 고넬라 교수는 'What's a good doctor?'라는 주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년 가깝게 학장을 지낸 그의 첫째 지론은 '의사는 환자를 빨리, 잘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설명을 잘하는 의사가 되어라'고 한다. 마치 환자에게 질병에 대한 것을 교육하듯 말해주라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는 '경영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의사도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가슴으로 치료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존경받고 사랑받는 의사가 될 수 있다.
환자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야 한다'는 내 의사관은 미국 수련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의 결과였다.
2006.06.11 5:56
14. 귀국 준비

병원 파티에 참석한 필자(아랫줄 맨 왼쪽)와 설리반 교수(필자의 어깨에 팔을 두른 사람).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나는 우리 국민의 신명을 확인했다. 나도 4년 전 그때 거리 응원에 나섰을 정도니까 말이다. 포르투갈과 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렸던 인천의 문학경기장이었다. 박지성 선수가 16강 진출을 결정짓는 결승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난 그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문학경기장에서 송도에 있는 집까지 1시간여를 걸었다. 그리고 차량의 경음기 소리에 맞춰 손바닥을 치고, 복받쳐 오르는 뜨거운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온 국민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애국'을 표현했다.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나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한번 떠나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던 그 시절, 왜 나는 고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을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나는 의대를 무사히 마치고,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베푼 축복이었고, 국가의 혜택이었다. 이젠 내가 그 보답으로 선진 의술을 고국의 환자들에게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같은 생각은 공부를 하는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에게 미국에 남으라는 권유와 설득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온 많은 유학생, 수련기간 내내 동고동락했던 친한 친구 마타, 신나는 추억을 만들어 준 남미 출신 피에르를 비롯한 많은 동료가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왜 떠나느냐"며 나의 귀국에 반대했다.
특히 나를 딸처럼 아꼈던 퀸스 종합병원 병리과 주임과장인 셜리반 박사가 나와의 이별을 가장 애석해했다.
그녀는 결핵 흉터에서 암이 발생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밝혀낸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내가 사망한 결핵 환자 폐 절편에서 암이 분화(分化)된 증거를 찾아냈을 때 "닥터 리가 해냈다"며 뛸듯이 기뻐하며 칭찬했다. 유태계인 그녀는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고국의 환자들을 위해 선진 의술을 익히러 왔고, 내 환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운영하던 병원까지 그대로 두고 왔다"고 설득했다. 결국 그녀는 나의 '귀국 결정'을 존중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는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그녀는 성탄축하 메시지와 함께 "네 자리는 아직도 남겨두고 있다"는 글귀로 나와의 재회 여지를 남겨두곤 했다.

귀국 날짜가 다가오면서 유학 초기에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혀 굴리는 영어에 익숙치 않아 과장이나 간호사가 전화로 빠르게 얘기하면 무조건 "I will be there(내가 갈게요)"라고 답하곤 허겁지겁 달려가기도 했다.

1968년 10월, 케네디공항으로 환송 나온 닥터 셜리반 부부, 또 많은 동료들과 작별을 나눴다. 공항 한 구석이 눈물바다가 됐다.

4년여 만의 귀국,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조국의 강토가 어머니 가슴처럼 뜨겁게 나를 맞는 듯했다. '대~한민국'의 함성이 들릴 때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잔영처럼 떠오른다.
2006.06.12 8:48
15. 이길여 산부인과

신축한 ‘이길여 산부인과’ 옥상에서 간호사와 포즈를 취한 필자(左).

4년여의 결코 짧지 않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와 가족.친지들을 부둥켜안으며 상봉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가장 먼저 후배에게 맡겼던 병원을 찾았다. 내가 배운 선진 의술을 펼칠 곳이었다. 난 그 터에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의 병원을 신축했다. 한시라도 빨리 진료하고 싶은 마음에 공사를 독려해 첫 삽을 뜬 지 10
개월 만에 36개 병상을 갖춘 병원이 완공됐다. 개인병원으론 인천에서 가장 컸다. 간판을 자성의원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로 바꿔 달았다. 내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69년 가을이었다.

미국 유학시절 체험했던 선진 시스템을 가능하면 이 병원에 도입하려 했다. 산모들을 위해 호텔이 아니면 구경하기 어렵던 엘리베이터도 설치했다. 지역 주민들이 신기한 듯 엘리베이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기도 했다.

1층은 진료실과 대기실, 2층은 수술실로 썼다. 병원 문을 열자 예전의 환자들이 떡을 해오는가 하면, 일부러 병원에 들러 귀국을 축하해 주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병원 운영의 모토를 '봉사'로 정했다. 그리고 모든 시설과 장비도 환자의 편의와 눈높이에 맞췄다. 지금이야 환자중심 경영을 외치는 병원이 많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개념이 없었다.

나는 산부인과 진찰대가 한국여성의 체형에 잘 맞는지,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진찰받을 수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직접 진찰대에도 누워봤다. 직원들 앞에서 어찌나 민망한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 환자는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끼겠나 싶었다. 그래서 진료시 환자가 그런 느낌을 갖지 않도록 직원들을 철저히 교육했다. 나는 이후 요일별로 직원들에게 친절은 물론이고 영어회화.부인과.산과.여성질환 등의 교육을 정례화했다.

첨단 의료기 도입에도 앞장섰다. 당시 생소했던 초음파 의료기기와 자궁 경부경을 사들였다. 태아의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초음파 기기는 실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태아의 심박동 소리를 들려주면 "저것이 우리 아기가 내는 소리냐"며 남편.시어머니 등 보호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궁 경부경은 환자 교육에 요긴하게 쓰였다. 경부경은 환자에게 자궁의 병변을 모니터로 보여주는 것으로 질병의 심각성을 알려 열심히 치료받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 시절 여성들은 몸이 아파도 참을 때까지 참아보는 식이었다.
더 이상 꼼짝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이 돼서야 병원을 찾으니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다.

산부인과 간판이 걸려 있는데도 다른 질환자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들 역시 내가 진료할 수 있으면 성심껏 보살폈다. 진찰 한번 받으려고 몇 시간씩 기다리는 환자, 몸이 꽁꽁 언 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어린아이 같은 환자, 고통에 못 이겨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환자…. 그들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환자들이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병원 문은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6.06.13 5:49
16. 보증금 없는 병원

이길여산부인과에서 진료하고 있는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병원을 개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원장님, 위급환자예요."
진료 중인 나를 향해 간호사가 뛰어 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임신한 환자인데, 배가 심하게 아프데요."
나는 그 환자를 급히 들어오도록 했다.

"며칠 전부터 아랫배가 몹시 무겁고 심하게 아파요." 친정어머니와 함께 들어온 환자는 울먹이며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진단 결과 자궁외 임신이었다. 복강(腹腔) 출혈이 멈추지 않아 환자의 생명까지 위태로운 응급상황이었다. 즉시 수술을 해야 했다. 지체없이 수술 준비를 지시했다. 그런데 이 다급한 상황에서 환자의 친정어머니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냥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환자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재차 설명했다.
그런데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병원 문을 나서겠다는 것이 아닌가. 병원비가 없다는 것이다.

환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외면했고, 그녀의 어머니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돈이 없는 현실이 서럽고, 가난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우리 병원은 보증금이 필요없는 병원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일단 수술부터 받으세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수술받을 준비나 하세요.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러세요."
하지만 그들 모녀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아니 왜 또 그러세요?"
"결국 돈을 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거든요…."
"사람부터 살고 봐야 할 거 아닙니까?" 한가롭게 병원비 타령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지금 돈이 없으면 벌어서 갚으면 되잖아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환자는 수술대 위에 오를 준비를 했다. 4~5일 뒤 이 환자는 건강한 몸으로 퇴원했다.

1960~70년대에는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도 어려웠지만 의료보험제도가 없어 서민에게는 병원비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무력감과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보증금 없는 병원'임을 병원 안팎에 알리고, 이를 병원 입구와 수납창구에 써붙였다.

당시에는 '책값.술값.병원비는 떼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묘한 인식이 만연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까닭에 병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보증금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입원할 때나 수술할 때 받던 보증금을 과감히 없앴다. 나의 선택을 다른 병원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내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환자에게 보증금을 받지 않는 방식의 병원 운영은 77년 시작된 의료보험이 정착될 때까지 계속됐다.
무료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언젠가는 결국 누군가를 돕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006.06.14 5:52
17. 정이 넘치는 병원

필자(右)가 이길여 산부인과 2층에서 밖을 내다보며 웃고 있다.

나는 휴일도 없이 365일 이른 아침부터 환자를 진료했다. 위급한 환자들이 워낙 많은 시절이다 보니 24시간 대기 상태였다. 한밤중이나 새벽에도 병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달려 나가 진료를 해야 했다.

막 진료를 끝내고 모처럼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30대 중반의 낯익은 여인이 들어섰다. 초라한 행색에 앞치마를 두른 여인에게서 나는 생선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진료를 받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환자였다.

"저, 이거 제 성의로 아시고…."
"이게 뭐예요?"
"너무 약소해서…."

여인은 말꼬리를 흐리며 신문지에 싼 물건을 나에게 내밀었다. 젖은 신문을 펼쳐보니 싱싱한 망둥어였다. 그녀는 송도에 살았는데 아마 생선 장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진료비를 못 내고 간 것이 미안해 팔던 생선 가운데 가장 실한 놈을 골라 다시 병원을 찾은 것이다.

난 가난한 환자가 찾아오면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또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진료비를 깎아줬다. 의료보험 제도가 정착된 요즘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의사가 치료비를 안 받거나 적게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병원을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들이 많아졌다. 환자 서너 명에 한 명꼴은 됐던 것 같다. 남루한 행색의 이들을 진찰한 뒤 진료기록부 위쪽에 ×표시를 하거나 수납직원에게 눈짓을 하면 그 환자는 무료였다. 진료비를 못 내 쩔쩔매는 환자 보호자들의 뒷모습을 보면 괜스레 내가 민망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나중에 갚으세요"라거나 "그냥 가셔도 됩니다"라며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훗날 미안하다며 진료비 일부와 쌀을 가져오기도 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제철에 수확한 감자나 옥수수를 한 자루씩 들고 오기도 했다. 몇 달 혹은 한두 해 뒤에도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며 이런저런 것들을 놓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받은 물건들이 진료실에 가득 쌓여 어떤 때는 시장을 방불케했다.

망둥어를 비롯한 다양한 선물은 입원 환자들에게 나눠주고, 미역이나 생선은 반찬으로, 감자나 옥수수는 산모들의 밤참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들에게서 받은 물건들 때문에 나는 송도에선 망둥어가 많이 나오고, 덕적도 옥수수가 맛있고, 채소는 구월동에서 많이 재배되며, 소래포구에서 나오는 멍게가 맛이 좋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집에서 꼬았다는 짚신 몇 켤레를 들고 온 이도 있었다. 또 옷감을 갖고 오기도 했다. 환자가 우산 몇 개를 돌돌 말아 들고 오면 우산장수요, 소금자루를 이고 오면 소금장수였다.

사람냄새 물씬 풍기고 살가운 정이 넘쳤던 시절이었다. 진료받고 돌아간 환자가 내가 잘 있는지 일부러 보러 오기도 했으며, 병원 앞을 지날 때는 어김없이 인사하고 가는 환자들이 있었다. 병원이라기보다 서민의 안식처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환자들과 함께 옥수수를 쪄 먹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따뜻함에 흠뻑 취했던 시절이었다.
2006.06.15 6:22
18. 언니

왼쪽부터 언니·어머니·필자.
내가 밀려드는 환자들 속에서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뒤에서 도와준 '숨은 공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세 살 위 언니다. 부모님 외엔 유일한 혈육인 언니는 내가 미국 유학을 다녀오는 동안 산부인과를 대신 맡아줬고, 이후 나와 함께 '이길여 산부인과'를 운영하는데 온 힘을 보탰다.

언니는 나의 든든한 바람막이이자 친구요, 남편이요, 그림자였다. 어머니가 나에게 정신적인 안정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셨다면, 언니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언니는 손끝이 야물었다. 병원에서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 냈다. 신생아에게 입힐 저고리, 탯줄을 자른 뒤 배꼽을 싸는 배꼽대 등 산모에게 필요한 용품은 대부분 솜씨 있는 언니가 제공했다. 환자가 많다 보니 빨래감도 하루가 멀다하고 산더미처럼 쌓였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라 언니는 피가 잔뜩 묻은 빨래감을 방망이로 두드려 빨고 삶아 환자들에게 내놓았다.

음식 솜씨 또한 빼어났다. 산모가 먹을 미역국이며 반찬도 직접 만들었다. 그 가운데 언니는 우리 병원의 명물을 하나 만들어 냈다. 바로 '미역국'이다. 분만이 끊이지 않는 산부인과의 식당에는 언제나 한 솥 가득 미역국이 끓고 있었다. 36개의 병상을 다 차지한 산모들이 먹을 미역국은 언니가 준비했다. 그런데 맛이 기가 막혔다. 많이 끓이면 맛이 덜할 법도 하련만 언니가 만든 미역국은 한결같아 환자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인천 근방에서 우리 병원의 미역국 맛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퇴원한 산모가 남편에게 냄비를 들려 보내기도 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언니에게만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미역국에 별다른 양념을 넣거나 끓이는 방법이 독특한 것도 아니었다. 겨울철엔 굴을 넣기도 하고, 다른 때는 쇠고기를 섞기도 했는데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게다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더욱 식욕을 자극했다.

언젠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유명한 호텔요리사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무릎을 탁 쳤다. "재료도, 양념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만든 사람의 정성입니다."

한국전쟁 통에 내가 부산에서 의대를 다닐 때도 언니는 외아들을 들쳐업고 학비며 쌀을 대기 위해 석 달에 한 번꼴로 자췻집에 다녀갔다. 지금이야 교통편이 좋아 대야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반나절이면 충분하지만, 당시엔 꼬박 이틀이 걸렸다. 나중에 서울대 의대를 다닐 때도 언니는 내게 쌀 등을 날라다 주며 용돈도 줬다. 언니는 그렇게 나의 손과 발이 됐다. 환자를 보느라 내가 끼니를 거를 때면 계란 노른자에 가루우유를 푼 영양식을 만들어 코앞에 들이밀곤 했다.

언니는 지금 규방다례 기능보유자(무형문화재 11호)로 활동 중이고, 2003년에는 '신사임당'에 뽑혔다. 또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빼어난 솜씨를 지닌 언니가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줬으니 내 성공의 절반은 언니 몫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06.06.18 7:07
19. 영종도 산모

무의촌 진료를 마치고 환자들에게 여성질환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필자.

의사라면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환자가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감 속에 나를 찾아온 환자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1950년대 후반 인천에서 개원의로 일하던 의사 초년기 때의 일이다.

아침 일찍 세수를 하러 수돗가로 나오는데,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30대 초반의 남자가 상기된 표정으로 뛰어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이 누구세요? 선생님 저희 집까지 좀 가 주세요."
초췌한 모습의 그 남자는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그는 두말 없이 두 손으로 내 팔을 끌어당기며 간절한 눈빛으로 왕진을 부탁했다. 나는 허겁지겁 왕진 가방을 집어들고 조산사와 함께 그를 따라 나섰다.

나에게 가방을 뺏어 든 그 남자가 우리를 안내했다.
가는 동안에 그 남자는 "제 집사람이 아기를 낳으려고 하는데… 죽을지도 몰라요.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요"라고 말한 뒤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월미도 여객선 터미널이었다.

영종도행 배에 올랐다. 영종도는 월미도에서 바라다보이는 섬이다. 지금은 영종대교로 육지와 연결돼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다. 영종도 선착장에 내린 나는 그 남자를 따라 한없이 걸었다. 논길과 밭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남자의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온통 젖어 있었다. 내내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집에는 마을사람 몇 명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고 무거웠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상태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안방에 누워있는 그의 부인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배는 볼록 불러 있고, 아기를 낳다가 경련을 일으켜 입에는 거품을 물었다. 임신중독증이었다. 죽은 지 몇 시간이 지난 듯 몸이 뻣뻣이 굳어 있었다.

"여보, 의사 선생님 오셨어. 당신이 찾는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고. 눈 좀 떠봐!" 남자는 아내의 어깨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산모는 의사를 부르러 간 남편을 기다리다 남편의 얼굴도, 마지막 희망이던 의사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맥이 탁 풀리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왠지 모를 분노와 허탈감에 마루로 나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목메어 우는 사내의 절규가 방문 밖으로 처절하게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영종도 산모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논길과 밭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어떻게 배를 타고, 버스를 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던 그날의 하늘만 기억날 뿐이었다.

터벅터벅 그 먼길을 돌아오면서 나는 최소한의 의료 혜택조차 받을 수 없는 무의촌 지역 주민의 실상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들을 위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깊게 생각케 한 사건이었다.
2006.06.19 7:58
20. 무의촌 진료

무료 진료와 이·미용 봉사를 마친 뒤 마을 이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있는 필자.

어느 날 인천 지역 미용사협회 간부가 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다. 미용사협회 회원 중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회원들이 병원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이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러자 이 간부는 병원에서 무의촌 진료에 나설 때 미용사협회 회원들을
데려가 달라고 했다. 무의촌 지역 주민에게 커트와 퍼머를 해주고, 이()도 잡아주는 봉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당시 무의촌 지역 사람들은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머리도 제대로 깎지 못했으니,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로 난 미용사협회 회원들과 무료 진료에 나섰다.

마을 이장집 대청마루에서 진료를 하고, 마당에서 머리를 깎고 다듬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가 많아 머리를 다듬거나 깎기 전에 눈과 입을 가리게 하고 머리에 살충제인 DDT를 뿌렸다. 그러면 시커먼 머릿니가 우수수 떨어지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 DDT라는 살충제를 사람에게 직접 뿌렸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실 나와 간호사들은 이 일이 있기 전부터 무의도로 정기 진료를 다녔다. 그 시절만 해도 대부분의 서해 섬마을에는 의사나 병원이 없었다. 당연히 평생 병원 구경은커녕 의사 얼굴 한 번 못 본 섬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병에 대한 지식도 없고, 병원을 찾아갈 엄두도 못 내는 주민을 위해 진료와 질환에 대한 교육을 해줬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예기치 않은 난관도 많았다. 인천 앞바다에 섬이 오죽 많은가. 그 섬들을 한 바퀴 돌아오려면 적어도 열흘은 잡아야 했다. 그것도 하루 두세 곳을 걸어서 돌아다녀야 하는 강행군이니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효율적인 진료방안이 필요했다.

무의촌 진료 계획을 잡은 뒤 섬에서 온 환자를 통해 일정을 알려주고 영흥도.이작도 등 큰 섬으로 인근 섬주민을 모이도록 해 한꺼번에 진료와 머리 손질을 병행했다.

무료 진료를 시작한 지 몇 해 뒤인가 싶다. 병원 식구들과 영종도에 다녀오던 때였다. 영종도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다 근처 다방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하는데,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방 주인 여자가 다가와 흥분한 목소리로 "이길여 선생님 아니세요? 선생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라며 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자궁외 임신으로 입원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무료로 수술을 해 주셨어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나는 그날 그 주인에게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대접받았다.

지금도 봉사활동하러 다니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안에서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의사가 되도록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 주신 어머니께, 그리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신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2006.06.20 8:05
21. 환자 진료 25시

바쁜 개업의 시절에 바깥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진료에 몰두하고 환자에게 헌신적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나는 후학들에게 '환자에게 미친 나의 세월'을 얘기하곤 한다.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시절, 난 1년 365일 외출은 꿈도 못 꿨다. 계절의 변화는 사람들의 얼굴에 핀 화사한 웃음이나 옷차림에서, 또 창 밖 가로수 잎이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느꼈을 뿐이다.

지금이야 눈 내리는 풍경을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지만 그때는 환자의 옷차림에서 겨울이 왔음을 느끼곤 했다. 문만 열면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는 구름처럼 밀려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어느 날 진료를 하는데 찬바람이 느껴졌다. 연탄난로를 피운 대기실과 진찰실은 제법 따뜻한데도 냉기가 감도는 것이었다.

"왜 이리 추운 거지?"

내 말에 간호사가 진찰실을 나갔다 들어왔다. 그런데도 찬바람은 여전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진찰실에서부터 병원 밖까지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 바깥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이 닫히면 밖에서 기다리는 환자가 진료를 보지 못할까봐 굳세게 문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열악했던 당시엔 정말 그랬다.

더구나 건물 맨 위층에 살림집이 있어 난 그야말로 건물에 갇힌 채 오르내리며 살았다. 언제 겨울이 오고 가는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환자를 보느라 끼니조차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면 병원 일을 도와주던 언니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분유에 계란을 타서 내게 건네줬다. 링거 줄로 빨대를 만들어 마시기 좋게 해줬지만 그래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여유도 없었다. 촌각을 다투며 나를 기다리는 환자를 보러 가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은 답답했다. 1층 진료실과 2층 수술실을 두세 계단씩 뛰어다녔다. 수술 환자는 마취하기 전에 손과 얼굴을 만져주고, 안아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수술을 마치면 몇 시간 동안 기다리는 진료 환자에게 달려갔다.

언니는 나를 따라다니며 "제발 한 모금만 먹어봐"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는 위급환자와 내 손길을 기다리는 대기 환자에게 몰두하다 보면 배고픔을 잊기 십상이었다.

잦은 수술과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 끼니를 거르는 것이 다반사가 됐다.

정말로 밤낮없이 진료했다. 365일 24시간 진료가 맞는 표현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때 나의 절실한 소원은 한 시간만이라도 푹 자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 장롱 속에 곱게 걸어 놓은 잠옷을 쳐다보며 젊은 시절 회상에 젖곤한다. 미국 유학 시절 예쁜 잠옷을 하나 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난 환자에 빠져 있었다. 의사로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2006.06.21 7:46
22. 따뜻한 진료

인천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네 쌍둥이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필자.

병원에 오면 환자들은 대부분 긴장한다.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의사가 환자의 마음을 열게 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은빛의 청진기는 색감만으로도 차가운 느낌이다. 게다가 금속으로 돼 있어 한 여름에도 살에 닿으면 매우 차갑게 느껴진다.

처음 환자를 진료할 때였다. 청진기의 차가운 감촉이 살에 닿자 환자들이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청진기를 따뜻하게 할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내 체온으로 청진기를 데우는 것이었다. 나는 청진기를 내 가슴 속에 넣어두었다가 진료할 때마다 꺼내 사용했다. 진찰을 받는 환자들의 반응이 즉각 달라졌다. 그 뒤부터 따뜻한 청진기는 환자들에게 내 체온뿐 아니라 내 마음을 전해주는 가교가 됐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이다 보니 환자들을 진료할 때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산모가 놀란다는 것은 뱃속에 있는 아이도 놀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자궁 안을 손가락으로 내진할 때는 매우 세심한 배려를 했다. 차가운 고무장갑에 산모가 놀라지 않도록 내진 전엔 장갑 낀 손을 항상 따뜻한 소독 물에 담가놓았다. 그리고 산모가 거부감 없이 내 손길을 받아들이도록 조심스럽게 진찰했다.

환자가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이디어를 만들기도 했다. 진료실에 세 대의 진찰대를 설치해 번갈아 가면서 환자를 봤다. 나란히 놓인 옆 진찰대로 옮기는데 걸리는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환자들은 그 짧은 시간마저도 불안해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의자에 바퀴를 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바퀴 의자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 세운상가에서 작은 바퀴를 사다가 직접 의자에 붙였다. 이렇게 바퀴 달린 의자가 완성됐다.

언젠가 막 수련의 생활을 끝낸 젊은 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왜 환자를 끌어안아 일으키세요. 환자도 힘들고 원장님도 힘드실 텐데…"

내가 환자를 얼싸안듯하며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환자를 끌어안는 데는 내 나름대로 숨은 뜻이 있다.

처음에는 산모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리고 친밀감을 주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끌어안는 일이 또 다른 진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았을 때 무겁게 안겨오는 환자는 아직도 치료 기간이 오래 남아 있는 것이고, 가볍게 안겨오는 환자는 거의 다 나았다는 증거로 믿어도 좋다.

또 청진기나 혈압을 재보지 않아도, 그들을 안아보면 환자의 열이 느껴지기도 하고 숨소리와 심장소리가 내 가슴에 와 닿아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선생님은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고 있나요?"

내가 젊은 수련의들에게 자주 해주던 말이다. 난 지금 가천의과학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예비 의사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2006.06.22 9:25
23. 나의 어머니

꽹과리를 치며 신명나게 춤을 추시는 어머니.
누구나 어머니를 떠올리다 보면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내 어머니는 환자를 보느라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잠도 편하게 못 자는 딸을 항상 안타까워하셨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아주 각별하고 소중한 분이다. 나의 전부였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셨다. 그저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인데, 그것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마음의 울림'으로 남아있다.

내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셨다. 유교 중심의 시절, 얼마나 삶이 신산스러웠을까. 호된 시집살이에 위축될 법도 했으련만 기억 속의 어머닌 늘 당당하셨고 인정 많으시고, 시대를 앞서 가셨다.
어렵던 시절 거지가 찾아오면 어머니는 늘 고봉밥을 손수 차려 주셨다. 그것도 우리 두 자매에게 직접 날라주라고 하셨다. 추운 날씨에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고봉밥 심부름을 시키셨다. 쇠경 또한 깎는 법이 없으실 만큼 인정 많고 넉넉하셨던 분이셨다.

문맹률이 높았던 시절이었건만, 어머니는 예배당 야학에 나가 언문(한글)을 깨치셨다. 오빠들이 다니는 서당까지 쫓아가 어깨너머로 한자도 익히셨다고 한다.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떼신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곧잘 이야기책을 읽어주곤 하셨다. 집에는 그가 방물장수에게서 사들인 고전 소설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춘향전' '흥부전' '유충렬전'과 같은 이야기책을 낭랑한 목소리로, 구성지게 읽으면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저런 저런… 이 일을 어째야 쓸꺼나!"라며 맞장구를 친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학자님'으로 통했다.

일본어도 배우셨다. 당시 일제는 한글을 못 쓰게 했으며, 하루에 한 문장씩 인쇄된 일본어를 나눠주며 의무적으로 익히도록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기차표를 사야했다. 당연 일본어로 말해야 했기에, 바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리리 이치마이 구다사이(이리 한 장 주세요)"

"림빠 이치마이 구다사이(임피 한 장 주세요)"

어머니는 신식 여성으로 시대를 앞서 사신 분이셨다. 당시 시골에선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핸드백이며, 상해양말(지금의 스타킹)을 차려입고 마실을 다니실 만큼 멋쟁이였다. 어느 날 마을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는데, 어머니가 군산으로 나가 쪽찐 머리를 풀고 머리카락을 부풀려 올리는 이른바 히사시카미(낭지머리) 머리를 하고 돌아오신 게 아닌가. 당시 농촌 사회에서는 파격이었다.

여행도 많이 다니셨다. 당시 옥구군 주변의 몇몇 가정들이 모이는 친목계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들과 함께 서울 창경원 등으로 나들이를 즐기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거기서 한발 더 나가셨다. 그 시절 혼자 여행이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도 중국의 봉천(지금의 심양)까지 다녀오셨다.
어머니의 그런 성격 때문인지 당시 낯설었던 성당에도 다니셨고, 훗날 인간문화재가 된 소리꾼들로부터 소리도 배우시고, 장구와 꽹과리를 익히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한마디는 자녀를 평생 즐거움으로 살게 하는 기둥이 된다고 했고, 자식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고 했던가. 어머니의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사고, 베풂과 평등사상이 자연스레 내 몸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2006-06-25 오후 6:27:47
24. '친정엄마'
 
필자(左)는 길병원에서 회진 도중 1958년부터 3대째 진료를 받고 있다는 환자를 만났다.
 
 
병원은 생로병사가 담긴 삶의 축소판이다. 의사는 경각을 다투는 환자들 속에서 한평생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살아간다. 뒤돌아보면 아득하고 힘겨웠지만 그래도 나에겐 환자가 있어 행복한 세월이었다.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에 가천의과학대 길병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곳을 '우리 집', 여기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우리 가족'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에서 우리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새 생명을 얻고,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난 수많은 환자들. 그들과 내가 맺은 행복한 인연은 수십 권의 책에 담아도 모자랄 것이다.
 
요즘도 나는 병원에서 이길여산부인과 시절에 진료를 받았거나 아이를 낳았던 산모들을 종종 만난다. 할머니가 된 그들은 "내 아이를 여기서 낳았는데, 손자도 여기서 낳게 됐어요"라며 반가워한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환자들과의 기억은 언제나 새롭다.
 
위생환경이 열악했던 1970년대까지는 임산부.수술환자를 제외하곤 병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세균성 질환자나 후진국형 전염병 환자였다. 심지어 어른이 주로 걸리는 세균성 질환인 임질로 고생하는 어린아이까지 오기도 했다. 잘 씻지 않는 엄마의 손을 통해 감염된 것이다.
 
어느 날은 냉(冷)이 심한 여성이 병원을 찾아왔다. 진찰 결과 역시 세균성 질환이었다. 곧이곧대로 설명하면 가정불화가 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남편을 오라고 해 귓속말로 "부인이 병에 걸린 것은 당신 때문"이라고 알려줬다. 물론 부인에겐 알려주지 않고 부부를 함께 치료했다.
 
분만실에선 흥미로운 광경도 많았다. 산모가 진통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자, 갑자기 복도에 있던 남편이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부부가 같이 산통(産痛)을 느끼는 것이다.
 
남편이 함께 입덧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인처럼 헛구역질을 하고 식사도 못한다. 또 다른 부부는 아기를 낳은 뒤 같이 미역국을 하루 네끼 먹는다. 이런 부부들에겐 부부애가 깊어 그렇다고 다독거려준다.
 
70년대 초 우리 병원을 다니던 30대 잉꼬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병원을 찾아왔다.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친정어머니를 먼저 찾았을 법한데, 그녀는 단박에 내게로 달려왔다. 내 품에 안겨 서글프게 우는 그녀가 사랑스러운 딸처럼 느껴져 나도 함께 울었다.
 
또 한번은 임신 8개월의 여성이 한겨울 오전 4시에 병원 문을 두드렸다. 놀란 나는 "배가 아픈지, 출혈이 있는지, 아기가 놀지 않는지…." 열심히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불안해서 밤을 꼬박 샜어요. 선생님을 뵈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 그냥 달려왔어요"라는 게 아닌가.
 
초산 환자였는데, 불안한 마음에 통행금지가 풀리자마자 나를 보러 온 것이다. 새벽 단잠을 깨운 그녀가 미울 법도 했지만, 오히려 내가 그녀의 친정엄마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에게 진료실은 이렇게 환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곳이었다. 지금도 나는 우리 병원식구들에게 말한다. 병원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가정에 행복과 평안을 주는 곳이라고.
 
 
 
 
 

 
2006-06-26 오후 9:07:12
25. 인생의 기로
 
일본 니혼대 연구실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 필자(右).
 
 
의사가 된 뒤부터 환자 진료가 사실상 내 인생의 전부였다. 특히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6~7년 동안은 그야말로 '환자 숲에 파묻힌 삶'을 살았다. 보증금 없는 병원, 무의촌 진료, 자궁암 무료검진 등을 실시하며 환자들에게 둘러싸여 앞만 보고 내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 앞에 엄청나게 큰 바윗덩이가 놓인 듯 답답함이 엄습했다. 시곗바늘이 갑자기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내 삶의 좌표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밀려오는 환자들을 핑계로 너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결혼도 못하고 어느덧 마흔을 넘겨버린 시점이었다. 나는 갈등과 고뇌에 휩싸였다. 미래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 한 구석에 잠자고 있던 공부에 대한 욕구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배움만이 지금의 나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고, 갈등과 고뇌에 해답을 주는 길임을 알게 됐다.
 
어디든 이 목마름을 해소해 줄 곳이 필요했다.
 
미국 유학 때 만난 담당과장님의 편지를 펼쳐봤다. 귀국한 뒤에도 그녀와 나는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항상 "네 자리는 있으니, 언제든지 다시 오라"고 했다. 선진의술을 배우기 위해 맨 처음 간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난 의사가 되면서 스스로에게 했던 '조국의 환자들을 치료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1970년 미국에서 영주권 승인 통보가 왔을 때 이를 물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울대 이제구 교수님이 니혼(日本)대에서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일본은 말 그대로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유신헌법이 발효된데다 대일(對日)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일본 유학은 물론이고 기업 진출 등의 절차도 매우 까다로웠다. 일본 내 대학의 입학 허가 절차는 물론이고 일본 입국 허가를 얻어내는 데도 만만치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니혼대에서 전자현미경 분야를 공부하고 와 가톨릭대 의대에 재직하고 있던 최진 교수님(작고)이 다케우치 다다시(竹內正) 교수를 소개해 줬다. 도쿄(東京)대 출신인 다케우치 교수는 일본 병리학계의 거두로, 미국에서 당뇨병과 신장을 연구한 분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미국에서 유학한 나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입학 허가를 받고, 일본 입국 비자를 내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자 혼자 공부하러 간다고 해서인지 일본대사관 측은 비자 발급을 망설였다. 대사관을 직접 찾아갔다. 참사관을 만나 나의 상황을 얘기했다. 한국에서 펼친 의료활동을 설명하고, 일본에서 새로운 의학지식을 얻기 위해 유학을 가야겠다고 설득했다. 참사관은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보증을 서줬고,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일본 유학이라는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동료에게 병원을 맡기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6-06-27 오후 7:35:51
26. 마흔셋 유학생
 
필자는 일본 유학 때 시간이 나면 혼자 우에노공원을 찾곤 했다.
 
 
1975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나이 마흔셋의 만학(晩學), 그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공항에서 나는 해묵은 사진을 꺼내보듯 잠시 미국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일본에서 펼쳐질 미지의 삶에 가슴이 설렜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요즘처럼 양국 간 교류는 원활하지 않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낯설었다. 이렇게 내 인생의 새 지평을 연 일본 유학은 시작됐다.
 
도쿄(東京) 이케부쿠로(池袋)의 값싼 비즈니스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집을 얻거나 하숙할 생각도 했지만, 비용이 월 10만 엔 남짓이어서 호텔과 맞먹었다. 세탁이나 방범 문제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곳이 싸게 먹혔다.
 
패전 후 일본의 발전과 저력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다. 비포장도로가 많았던 한국에 비해 일본 거리는 잘 정비돼 깨끗했다.
 
친절과 예의가 일본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어느 날인가 전철에서 내가 일본여성의 발을 밟았는데, 그녀가 오히려 나에게 "스미마셍(미안합니다)"하는 게 아닌가. 발이 아파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어쩔 줄 몰라 한 적도 있다.
 
우에노(上野)공원에서 새벽 산책을 할 때였다. 이른 시간인데도 10여 명의 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식 영어로 '보란치아'(volunteer)라는 자원봉사자였다. 당시 한국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일본의 의료 수준 역시 우리나라보다 월등했다. 61년부터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었다. 또 73년부터 70세 이상에겐 노인의료가 무상으로 제공됐으니, 얼마나 부러웠던지. 우리나라는 63년 의료보험법을 제정하고도, 전 국민이 의보혜택을 받는 것은 89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그 무렵 일본 정부는 모든 현(縣)에 의과대를 둔다는 목표로 의학부 신설을 장려하고, 의사 수도 늘리고 있었다. 이런 일본을 보면서, 의료 취약지에서 의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고국의 환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도쿄여자의과대와 그 학교를 세운 요시오카 야요이(1871~1959)라는 여의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일본 유학 덕이다. 일본 개화기의 '신여성'이라고 할 요시오카는 1900년 모교인 제생학사에서 여학생을 안 뽑는 데 분노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내걸고 여자의대를 세웠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출산 과정까지 제자들에게 '실습용'으로 보여주는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 결과 도쿄여자의대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의대로 자리 잡았다. "환자를 대할 때는 지극한 정성, 즉 지성(至誠)과 사랑으로!"라던 요시오카의 좌우명은 유학기간 줄곧 내 마음과 맞닿아 있었다.
 
 
 
 
 
 
 
2006-06-28 오후 8:14:56
27. 토끼 위령제
 
일본에서 열린 신장학회에 참석한 필자(앞줄 오른쪽). 앞줄 왼쪽이 다케우치 교수 부부.
 
 
일본 유학 중 나를 이끌어준 은사는 니혼(日本)대 다케우치 다다시 교수였다. 그는 일본 병리학 분야의 권위자로,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는 실력파 학자였다. 선친이 '일본 소아과 의사 1호'라는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다케우치 교수는 당뇨병 환자에게 나타나는 콩팥의 특이한 병리학적 변화를 규명한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의 킴멜 스틸 교수를 사사(師事)한 유학파였다. 나는 그의 지도 아래 매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해부를 하거나, 신장학회를 쫓아다녔다. 다케우치 교수는 해부 대상 동물로 개.고양이.토끼 등을 추천했는데, 나는 토끼를 골랐다. 암수를 구별할 수 있는 3㎏짜리 다 자란 토끼에 엔도톡신을 주사한 뒤 신장의 반응을 살피는 연구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동물의 사체(死體)를 다루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물 해부를 다들 꺼렸다. 내가 도맡다시피하다 보니 실습용으로 해부한 토끼 수가 300마리를 헤아렸다.
 
연구 과정에서 숱하게 동물을 희생시키다 보니, 1년에 한 번씩 실험용 동물 위령제를 지냈다. 제단을 만들고, 연구원들이 돌아가면서 극진하게 절을 하는 등 일본의 제사 풍습을 따랐다. 지금은 우리나라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도 실험동물 위령제를 치르지만, 그 시절 내 눈에는 한국.미국과 사뭇 다른 일본의 위령제는 신기하게 보였다.
 
학술세미나와 학회 참석도 연구 못지 않은 중요한 일과였다. 가끔 발표 기회가 주어지면 열심히 준비했다. 내가 첫 발표에 나섰던 때의 일이다. 일본어로 발표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초등학교 졸업반 때 광복을 맞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지만 의사들을 상대로 전문적인 의학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고민하는 나에게 다케우치 교수가 묘법을 알려줬다. "영어로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했으니 영어가 일어보다 훨씬 유창할 것이고, 국제공용어인 영어로 학술 발표를 하는데 뭐라고 탓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다케우치 교수는 "일본 의사들이 영어에는 약한 편이어서 질문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귀띔도 해줬다. 정말로 내가 영어로 발표하니까 질문이 거의 없었다.
 
당시 다케우치 교수 밑에는 나 말고도 동양인이 여럿 있었다. 중국.대만.베트남 의사가 있었고, 입학허가를 받으려는 외국인도 여러명 대기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은 다케우치 교수가 연구실에 들어서며 "중국사람이란, 참…"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중국의 대학교수가 자신의 학생을 제자로 받아 달라고 청해 허락했더니, 한꺼번에 200명을 보내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얘기를 들은 연구원들 모두 황당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유학 시절 일본인들은 참으로 근면하고,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들은 '잇쇼켄메이'(一所懸命)란 말을 좋은 뜻으로, 즐겨 썼다. 최선을 다해 일하고, 한우물을 판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잇쇼켄메이'를 실천하는 의사들이 많았다. 환자를 볼 때나 연구할 때, 그리고 학생을 지도할 때, 한 눈 팔지 않고 온 정성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2006-06-29 오후 7:15:35
28. 인천길병원
 
인천길병원 개원 기념식 때 모습. 왼쪽부터 이영호 전 인천시 의사회 회장, 필자, 손재식 전 경기도지사, 최진학 인천길병원 초대 원장.
 
 
1976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진료를 해야겠다는 구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길여 산부인과에서 치료할 수 없는 각종 질환자를 먼 지역 병원으로 보낼 때 나의 마음은 답답했다. 한번은 각혈로 토한 피를 다시 꿀꺽꿀꺽 삼키며,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젊은 결핵 환자를 경기도 도립병원(수원)으로 후송한 적도 있었다. 핏기 없는 남편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젊은 부인의 당황한 눈망울을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적어도 인천의 응급환자가 서울이나 타지의 큰 병원으로 옮기다 숨을 거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부인과만으로는 내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모두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종합병원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걸림돌이 하나 생겼다. 73년 의료법 개정으로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개설은 의료법인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의료법인이 아니면 종합병원을 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의료법인 설립은 곧 개인 재산을 사회와 국가에 헌납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병원'이란 명칭으로 개인이 운영하던 150여 개의 소규모 병원들이 '의원'으로 격이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여자 혼자 살려면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하니 의료법인은 곤란하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종합병원을 해야 개인 병원보다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던 의사의 길"이라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어머니는 내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당시 의사와 변호사 등 이른바 '사(師.士)'자 붙은 직종의 사람들은 존경과 부러움을 받으면서도 '개인의 잇속만 챙기는 집단'이란 따가운 시선을 함께 받았다. 나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싫었다. 이런 시각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라도 의료법인을 반드시 설립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의사는 환자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78년 전 재산을 출연해 인천시 중구 인현동 큰 우물 옆에 150병상 규모의 '의료법인 인천길병원'을 출범시켰다. 지금은 의료법인이 대다수여서 화젯거리도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의료계의 이슈였다. 병원 개원식에 참석했던 박승함 보사부 차관은 인사말을 통해 "여의사로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료법인화하는 것"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의료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서울에서 큰 소아과를 운영하는 원장님이 나를 찾아와 "의료법인을 하니까 무엇이 손해고, 무엇이 이득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의료법인은 소유의 개념이 없는 것"이라며 "법인화 이후 병원이 더 잘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뒤에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인천길병원은 곧바로 인턴과 레지던트 교육기관으로, 다시 조산 수습생 교육기관으로 잇달아 지정됐다. 3년 뒤엔 300여 병상으로 확장했다.
 
의료법인 설립과 이를 통한 교육은 내가 늘 마음속 깊이 새겨왔던 '의료.교육.연구'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신념의 첫 번째 결실이었다.
 
 
 
 
 
 
 
2006-07-02 오후 8:58:35
29. 의료취약지 양평 (1)
 
양평길병원 개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필자.
 
 
1970.80년대 우리 정부는 의료취약지구 해소를 위해 대학병원 등에 해외경제협력기금(OECF) 자금을 지원, 부산.대전.구미 등 전국 50개 지역에 민간병원을 세웠다. 당시 양평병원도 OECF 자금을 지원받아 건립이 추진됐지만 재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82년 어느 날 대학 후배인 이성우 보사부 의정국장이 만나자고 했다.
 
"양평병원이 도산 후 2년 동안 방치되고 있다"며 "양평군은 재정자립도가 18%로 경기도 최하위권이니, 적자도 불 보듯 뻔한데 누가 맡겠느냐"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배님은 고향에다 무료병원 짓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앞으로 전(全) 국민 의료보험시대가 오는 만큼 무료병원 설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행정적인 지원을 다 할 테니, 무료병원을 운영하는 셈 치고 양평병원을 맡아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현지에 가보기로 했다. 당시 인구 6만명의 양평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에 식당도 즐비하지만, 당시엔 말 그대로 전형적인 산골이었다.
 
공사가 중단된 양평병원 내부는 거미줄이 가득했고, 철근이 삐져나와 있었다. 곳곳에 부실공사 흔적이 남아있는 흉물 그 자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수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안되겠다 싶어 병원을 나서려는데 할머니 대여섯 분이 나를 막아섰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내 치맛자락을 잡으며 "선생님, 우리 할아범이 중병에 걸려 누워 있는데, 큰 병원에서 큰 주사 한 번만 맞고 죽는 게 소원이랍니다"라며 애원하는 것이다. 종합병원에서 영양제라도 한 번 맞아봤으면 한다는 뜻이리라.
 
언뜻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농촌에서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어 치료 한 번 못 받아 보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할머니의 간절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제가 병원을 맡아서 할아버지하고, 아프신 모든 분들을 치료해 드릴게요"라고 약속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 언덕을 내려오는데 당시 양평경찰서 수사과장이었던 이정식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천에서 근무할 때 우리 병원에서 아이 셋을 낳은 분이다.
 
그분이 나를 추어탕 집으로 안내하더니 "우리나라에선 이 병원을 맡을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제가 선생님 병원에서 아이를 얻으면서, 선생님이 환자에게 쏟는 애정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인천에서 무료진료로 환자를 돌봐주셨듯이 양평 주민들을 돌봐주십시오"라며 양평병원 인수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내 결심을 알려주자 그는 뛸듯이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82년 6월 16일 양평군 공흥리에 80병상 규모의 양평길병원이 탄생했다.
 
 
 
 
 
 
 
2006-07-03 오후 9:03:56
30. 의료취약지 양평 (2)
 
1988년 길병원 산부인과 박지홍 과장(左)(작고)과 양평길병원을 둘러보고 있는 필자.
 
 
양평길병원을 개원하자 당시 큰 병원을 운영하던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선생, 판단 잘못했어. 그 병원은 영원히 적자를 면치 못할 거야"라며 걱정했다. 나는 "적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무료병원 운영하는 셈 치고 맡았어요"라며 웃어넘겼다.
 
선배들의 걱정은 일리가 있었다. 한강 상류 지역인 양평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발전할 수 없는 곳이었다. 개발을 못 하는 농촌지역에서 인구 증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적자'는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양평길병원 인수에 대해 한 기자가 "적자를 메울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앞으로 취약지에서 또 병원을 운영하겠느냐"고 묻는다.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능력이 되는 한 계속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돈보다 중요한 보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평길병원은 해마다 1억5000만원 정도의 경영적자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인천길병원의 성장으로 양평의 적자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개원한 바로 다음날의 일이다. 한 농부가 고단한 삶을 이기지 못해 양잿물과 소주를 마시고 남한강에 투신했다. 사경을 헤메던 환자는 응급조치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그들 가까이에 양평길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에도 종종 심각한 농약중독과 교통사고 등으로 생명을 위협받았던 환자들이 목숨을 건졌다. 이런 것이 적자를 감수하고 양평길병원을 맡은 보람이었다.
 
적자보다 더 큰 문제는 의사 파견이었다. 초빙한 의사들은 얼마 있지 않고 도시에서 근무하겠다며 사직하기 일쑤였다. 도리 없이 난 인천길병원 의료진을 양평길병원에 순환근무토록 했다. "우리 병원은 '박애.봉사.애국'을 원훈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입니다"라고 나는 강조했다.
 
진료과장들은 6개월 단위로 의무적으로 다녀오게 했고, 인턴과 레지던트는 한두 달씩 양평에서 근무하게 했다. 벽지수당을 줘 보수도 올려줬다.
 
양평길병원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의료진의 반응은 한마디로 "좋은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었다. 환자를 대하면서 의료취약지인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곤 다른 의사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해 주며, 양평 근무를 권하기도 했다.
 
의사 파견뿐 아니라 적자 병원을 이끌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원장을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던 중 인천길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오세중 과장을 눈여겨봤다. 그는 양평 출신이기도 했다. 1985년 오세중 원장이 취임했다.
 
오 원장은 취임 즉시 인천길병원과 연계된 기혼여성 자궁암.유방암 무료검진을 군내 12개 읍.면에서 실시했다. 고령자, 무의탁 노인과 영세민에게 무료진료도 해줬다.
 
양평군에서 선정한 효부.효자상 수상자와 그의 부모, 군(郡) 대표 운동선수단 등 '고장을 빛낸 사람'에게도 파격적인 진료 혜택을 주면서 '양평 주민의 병원'으로 자리매김해 갔다. 양평길병원은 의료 사각지대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주고, 의사의 소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곳이다.
 
 
 
 
 
 
 
2006-07-04 오후 9:00:17
31. 철원길병원
 
철원길병원 기공식에 참석한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1984년 철원지역 땅굴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자격으로 견학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버스 옆 자리에 동석한 철원지역 자문위원이 나에게 "철원에 병원을 하나 꼭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주민들이 병원에 가려면 민통선(民統線)을 빠져나와 멀리 의정부나 서울까지 다녀야 한다"며 "양평에도 취약지 병원을 세웠으니, 철원에도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양평길병원이 적자인 데다 인천 구월동에 500병상 규모의 길병원을 신축 중이던 때였다. 나는 또 다른 '적자병원'을 운영할 수 없어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분은 "병원 건물은 지역에서 지을 테니, 의사만이라도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양평에도 가지 않으려는 의사들에게 철원은 물으나 마나 아닌가. "의사도 보내 드리기 어렵습니다"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그 대신 나는 "우리 의료진이 철원에 정기적으로 들러서 무료 진료를 해드리고, 철원 분들이 인천길병원에서 진료받을 때 의료보험 수가를 적용해 드릴 수 있다"고 약속했다. 의료취약지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의료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인천길병원과 철원군이 자매결연을 하여 주민들은 인천에 와서 진료를 받고, 길병원은 철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진료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원 병원건립위원회 주민 몇 분이 인천으로 나를 찾아왔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를 매일같이 방문해 병원 설립 예산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사부 고위간부가 "병원건립 예산은 지원하지만, 운영자는 정부에서도 마음대로 지정할 수 없다. 양평병원도 여러 대학병원에 인수를 요청했지만, 적자가 예상된다는 이유로 2년간 문을 열지 못하고 방치됐었다. 병원을 운영할 사람은 주민들이 직접 찾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머뭇거렸다. 벌써 1000여 명으로 늘어난 길병원 가족의 생계와 앞날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그날 이후 석 달 동안 매일같이 인천길병원으로 나를 찾아와 병원을 맡아달라고 졸랐다. 한편으로 84년 8월에는 철원지역 주민 5013명이 연명으로 종합병원 유치 청원서를 보사부 등 관계당국에 제출했다. 보사부는 취약지 병원 지원자금 100병상 분을 강원도에 배정했고, 강원도에서도 나에게 병원 설립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의 요청은 간절하고도 집요했다. 이렇게 절실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데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었다.
 
84년 11월, 보사부는 정부지원 민간병원 건립 및 운영권을 확정, 철원길병원의 건립을 공식화했다. 정부 지원 15억원과 OECF(해외경제협력기금) 차관 100만 달러로 지상 3층, 지하 1층의 전산화단층촬영기 등 최신 의료장비를 갖춘 철원길병원이 88년 7월 개원했다.
 
나는 접적(接敵)지역이자 의료취약지인 철원 병원이, 언젠가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의 선진 의료를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먼저 펼치는 거점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머지않아 이 병원에서 북한의 동포들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6-07-05 오후 9:32:29
32. 구월동 시대 (상)
 
중앙길병원 개원식에서 ‘박애·봉사·애국’의 의료철학이 새겨진 원훈석 제막식을 하는 필자(맨오른쪽). 맨왼쪽은 이광호 전 서울대의대 학장, 그 옆은 이재형 전 국회의장(작고).
 
 
동인천에 의료법인을 설립하고, 양평길병원을 운영하면서 내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취약지 병원 인수에 따라 정부로부터 500 병상 규모의 병원 설립자금 지원을 약속받은 만큼 진료 및 교육, 연구시스템의 통합을 구현할 '최첨단 대형 종합병원'을 건립해야겠다는 것이었다.
 
1982년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인천시청이 들어설 구월동 개발예정지역 주변에 의료용지가 지정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무릎을 탁 치며 '바로 거기야'라고 생각했다.
 
의료용지를 중심으로 보면, 부평공단과 주안공단.반월공단이 위치해 있었고, 인근에 시화공단과 전국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 전용공단인 남동공단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을 가서 둘러보니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구릉지 한쪽에선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가 하면 다른 쪽은 채소밭 아니면 나대지였다. 도심 속 '황무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황량했다. 누가 보아도 병원을 짓기에는 무리였고 무모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결정을 미룬 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양평길병원을 개원하는 날이었다. 직원에게서 황급히 연락이 왔다. "매입 여부를 오늘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의료용지 지정을 철회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매입을 결정했다. 그리곤 500 병상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84년 6월 병원 신축이 시작되면서, 나는 인천길병원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이곳을 매일 오가며 건축과정을 세심히 살폈다. 철저히 환자 위주의 병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보통 병원 실내는 흰색이나 회색을 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다. 그러나 나는 환자들이 병원이 아니라 내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면서도 길병원의 고유색으로 각인될 만한 색을 고르고 싶었다.
 
빨강.파랑.노랑.초록 등 파격적인 색깔을 벽면 전체에 바꾸어 칠해가며 직접 확인했다. 내가 미국의 시애틀을 여행하면서 봤던 원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떠올렸다. 진녹색의 거대한 메타세콰이어 숲을 배경으로 한 단층 고등학교 건물의 주황색과 코발트색의 대조가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런 눈부시고 인상적인 아름다움을 병원에서도 구현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런 작업을 일주일 이상 반복했다. 여러 가지 색을 섞어 써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길병원의 고유색이 된 '인디언 핑크'가 태어났다. 환자는 물론 의료진으로부터도 '모성애적 따스함과 편안함을 안겨준다'고 호평을 받은 나의 히트작이기도 하다.
 
환자들을 위해 화장실을 넓고 쾌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내 지론이다. 서울의 유명 호텔을 돌며, 직접 화장실의 크기를 재와 병원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87년 3월 25일 지금의 가천의과학대학교 길병원인 '중앙길병원'이 탄생했다. 공단 산업근로자와 응급환자들을 위해 '야간병원'을 모토로 내세우고, 24시간 진료에 나섰다.
 
 
 
 
 
 
 
 
2006-07-06 오후 8:28:40
33. 구월동시대 (중)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의 전산화시스템을 견학하러 온 탈북 의사 출신 김만철(오른쪽에서 둘째)씨를 안내하고 있는 필자.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에 길병원을 건립하면서 나는 '병원 첨단화'에 온 힘을 쏟았다.
 
환자가 건물이나 시설에서만 편리함과 편안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 접수한 뒤 진료를 받고 처방약을 탈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이 번거롭지 않고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고심의 해답은 전산시스템 개발이었다.
 
나는 전산화를 위해 1984년 대형 냉장고만한 크기의 주컴퓨터인 ' MV10000'을 병원에 설치했다. 그리곤 의사.약사.간호사.영양사.물리치료사.방사선사와 경리.원무과 직원 가운데 골고루 한두 명씩 뽑아 모두 15명으로 전산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서 최초로 병원 전산화시스템을 갖추려다 보니 벤치마킹할 곳이 없었다. '전산'이란 단어조차 생소한 때였다. 기껏 원무과에서 입원비 계산만 전산처리하던 전자계산기 수준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눈을 해외로 돌려 직원들을 대만.일본.미국 등에 보내 전산교육을 시켰다.
 
3년여 연구 끝에 DOS(doctor's ordering system)를 자체 개발해 87년 구월동 길병원 개원과 동시에 적용했다. 그러자 환자와 보호자는 물론 의료계에서도 화젯거리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진료 접수증만 세 종류였다. 의료보험은 노란색, 산재보험의 경우 파란색, 일반은 하얀색 등 색깔이 다른 접수증을 환자가 직접 골라 작성해야 했다.
 
또 진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접수증을 다시 썼다. 그러나 우리가 개발한 시스템은 이 과정을 생략했다. 처음 온 환자가 접수증을 제출하면 환자기록이 담긴 '마그네틱 진료카드'가 발급된다. 환자가 이 카드를 판독기에 넣으면 진료과와 진료시간이 자동으로 정해졌다. 그리곤 환자가 진료실로 가는 동안 진료기록부는 에어슈터를 통해 바로 진료실에 전달됐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서기 전에 의료진은 진료 준비를 해 놓는 것이다.
 
또 X-선 촬영, 검사.투약 등의 처방이 내려지면 해당 검사실이나 약국에선 즉시 조치가 이뤄졌다. 주사 처방을 받고 진료실을 나온 은 환자가 몇 걸음 거리에 있는 주사실에 도착하자마자 투약이 이뤄지다 보니 전산시스템의 신속성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 하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따져 묻는 환자도 있었다. "그게 내 주사약인 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간호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여주며 "홍길동씨죠? 처방이 이렇게 나왔습니다. 감기 몸살이신가 보죠"라고 확인시켜 주면 환자가 깜짝 놀랐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투약 준비가 돼 있으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 첫 병원 전산화는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일가족을 이끌고 탈북한 의사 출신 김만철씨는 "언론에 보도된 길병원의 선진 전산시스템을 보고 싶다"며 우리 병원을 찾아와 시설을 둘러보곤 혀를 내둘렀다.
 
김씨는 이날 방문 기념으로 '평생 진료카드 1호'의 수혜자가 됐다. 그 뒤 우리 전산시스템을 보려고 대학병원 및 대형 종합병원 임직원은 물론 재미동포까지 병원을 찾아왔다.
 
 
 
 
 
 
 
2006-07-09 오후 6:03:34
34. 구월동시대 (하)
 
1995년 심장센터 개원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필자(왼쪽에서 넷째).
 
 
인천시 구월동에 자리한 길병원은 개원 6개월 만에 500병상이 모두 찼다. 증가하는 의료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1000병상으로 늘렸으나 이마저도 1년 뒤엔 환자로 꽉 채워졌다. 지금은 1000병상 규모의 병원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때 1000병상은 대단한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개원 당시 '병상이 다 차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로 드러났다.
 
우리 병원과 인천시청만 덩그러니 있던 구월동 일대도 몇년 새 활발한 건축 붐이 일어 아파트.빌딩들이 들어선 인천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는 이젠 질환별로 치료.예방시스템을 갖춘 전문센터를 설치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본관 안에 당뇨병교실을 비롯해 위암 조기검진센터, 암치료센터, 간염센터, 성인병연구소 등을 잇달아 개설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별도 건물이 있어야 진료의 전문성과 연구.교육기능을 갖춘 센터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94년 4월 본관 앞에 첫 전문병원인 여성센터가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랫동안 산부인과 환자를 보아온 의사로서 여성 질병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60년대엔 대부분의 여성이 암이라는 병을 알지도 못했다. 암을 검사할 만한 간단한 시설마저 없을 정도로 의료 현실은 열악했다.
 
그러다 보니 초기에 발견만 하면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 병조차 심각한 지경까지 키운 뒤에야 병원을 찾아오는 여성이 많았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그 시절의 딱한 여성들을 생각하면서 여성병원을 가장 먼저 세운 것이다. 예상대로 여성센터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얼마 뒤 흉부외과 과장이 나를 찾아와 대뜸 "선생님! 길병원이 인천시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따지듯 묻는다. 그리곤 "인천에서 분초(分秒)를 다투는 위급한 심장병환자가 서울로 이송되다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인천시민을 위해 심장 전문병원을 세워주십시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지위 고하, 빈부 격차를 불문하고 성심껏 진료해 왔는데, 정작 인천시민이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니…'. 나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길병원의 존재 이유가 박애.봉사.애국의 실천과 인천시민의 건강.안녕에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했던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심장센터를 건립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적자가 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꼼꼼히 경영수지를 따져봤다.
 
여성센터가 잘되고 있으니 심장센터도 환자 수의 추이를 분석하고, 센터화 이후 환자 수요를 예상해 5년 내에 투자비용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경영적 판단을 내렸다. 95년에 지하 3층, 지상 7층 규모의 국내 두 번째 심장전문병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여성센터와 심장센터는 투자비 회수 기간을 당초 목표보다 2년 앞당겼다. 경영수지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2006-07-10 오후 7:53:11
35. 백령도 6년6개월
 
백령도길병원에서 원격 화상시스템을 이용해 진료 중인 의료팀을 격려하고 있는 필자.
 
 
우리의 땅 백령도. 국내 최북단 낙도인 그 섬을 떠올리면 아직도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지금도 내 기억에 백령도에서 배로 후송됐던 절박한 환자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1970년대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시절, 한 임신 여성은 자연유산으로 출혈이 멎질 않자 급박하게 나를 찾았다. 인천에서 220㎞ 떨어진 백령도에서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려 도착한 환자였다.
 
혈압과 맥박도 잡히지 않았고, 온몸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긴급 수혈이 시작됐고, 나와 의료진은 극진하게 그녀를 보살폈다. 의학적으론 이미 죽은 생명이었지만 그녀는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발그스레 혈색을 되찾았을 때 병원은 기쁨과 보람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1994년 나에게 백령적십자병원 인수 제의가 왔다. 이 병원은 1960년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의 마뎃(한국명 부영발) 신부가 세운 성안드레병원이 모태다. 그 뒤 정부의 서해 5도 주민 지원책의 일환으로 대한적십자사가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십자사도 정부지원 감소로 적자가 쌓이자 93년 복지부에 운영 포기 의사를 통보했다. 이에 복지부가 새로운 운영주체를 찾게 됐고, 수소문한 끝에 나에게 인수를 타진해 온 것이다.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자는 불 보듯 뻔하고, 기왕에 인수하려면 섬 주민에게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줘야 하는데 워낙 오지이다 보니 걱정이 앞섰다.
 
도서 지역을 무료 진료할 때 접했던 순박한 섬 주민들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95년 2월 인수를 결정하고, 그해 6월 11억4000여만 원을 들여 현대적인 의료장비를 갖추고 다시 문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원격화상 진료시스템을 도입했다. 민간병원으론 국내 최초였다. 마이크로웨이브 중계망을 구축해 백령도길병원에 있는 환자가 모니터를 보며 구월동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한 것이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원격진료시스템은 그동안 길병원이 쌓아온 노하우에서 비롯됐다. 같은 해 4월 먼저 문을 연 심장센터 개원 기념 국제심혈관심포지엄에서 우리는 수술실과 회의장을 화상시스템으로 연결해 의사교육에 활용했다. 수술 모습을 회의장에 참석한 의사들이 참관하며, 집도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도 하는 시스템이었다.
 
99년 심장병을 앓고 있던 31세 임신부가 화상시스템의 도움을 받았다. 임신 2주째부터 관리를 받았는데, 37주에 조기 진통이 시작돼 본원 심장내과.산부인과 의료진의 합동 화상진료로 건강한 아이를 순산할 수 있었다.
 
백령길병원에 근무하던 어느 의사는 내가 직접 받은 '아이'였다. 탄생을 지켜 본 아기가 자라서 의사가 된 뒤 길병원 식구로 들어와 백령도에서 봉사의 길을 걷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령길병원은 연간 4억~5억 원의 적자에 허덕이다 6년여 만인 2001년 인천시로 운영권을 넘겨야 했다. 백령길병원은 의료취약지 주민과 사랑을 나눈 의미가 컸던 곳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안고 백령도 주민들의 곁을 떠납니다." 병원을 넘기기 직전 나는 1600여 주민들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백령길병원은 지금껏 내 품에서 떠나 보낸 유일한 '가족'이다.
 
 
 
 
 
 
 
2006-07-11 오후 7:52:54
36. 심청의 고장 백령도
 
2004년도 심청효행상 수상자들과 기념촬영한 필자.
 
 
백령도는 '효녀 심청'의 고장이다.
 
백령길병원을 운영하면서 나는 '심청전'에 나오는 지명이 실제로 백령도에 있고 심청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 것에 놀랐다. 장산곶(날씨가 좋으면 백령도에서 바라다보이는 북한 땅).인당수.연화봉 등은 실존하는 지명이다.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바친 효녀가 아닌가. 나도 어릴 적 어머니가 읽어주신 심청전을 들으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백령도는 요즘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젊은 사람이 별로 없어 노인들이 대부분 고기잡이.농사 등 생활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신경통을 앓거나 잔병치레가 잦은 노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백령길병원에서 모든 주민의 건강기록부를 작성해 정기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1998년에는 도서 지역 가운데 최초로 물리치료실을 개설해 주민이 24시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던 중 백령종고 백원배 교감 선생님이 "이곳이 심청의 고장이니 '심청 동상'을 설립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백령도의 자랑거리인지라 흔쾌히 동의했다. 그때까지 백령도를 대표하는 상징이 없었다. 마침 인천시 옹진군도 효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장산곶이 바라다보이는 고봉포 앞산 정상에 심청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나는 99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심청각 앞에 심청 동상을 세웠다. 15세의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 때의 절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버지를 위해 배를 탔지만 어린 나이에 시퍼런 바다가 어찌 두렵지 않았을까. 그래서 거친 파도를 보지 않으려고 치마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던지는 심청의 모습을 형상화했던 것이다.
 
같은 해 나는 '심청 효행상'을 제정하고, 심청각 준공식에 맞춰 백령도에서 제1회 시상식을 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가천문화재단에서 매년 주최하고 있는 이 행사는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는다. 심청 효행상은 지성으로 효를 실천하고 있는 전국 12~18세의 초.중.고 여학생 가운데 교육기관.자치단체 등의 추천을 받아 수상자를 선정한다.
 
지금까지 배출된 '심청'은 45명에 이른다. 저마다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진정으로 효를 실천하고 있는 연꽃같은 존재들이다.
 
1회 수상자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효행을 실천한 공로'로 청와대에 초청받기도 했다. 수상자가 나온 학교와 고장에선 플래카드를 내거는 등 잔치 분위기라고 한다. 이들의 효에 대한 언론사의 취재 열기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대상을 받은 '심청'은 어머니께 간을 이식해 준 마산의 한일전산고 박순미양이다. 박양은 간 이식 전날 밤 어머니와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지난 이야기와 수술 뒤의 희망찬 내일을 고대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날 간 이식이 이뤄졌지만 어머니는 수술 뒤 깨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어머니와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박양의 애절한 수상소감은 400여 명의 축하객들로 가득 찬 행사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심청으로 선정된 수상자들에겐 우리 재단 취업에 특전을 준다. 현재 길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백령도는 나에게 의료취약지 병원을 운영한 곳이라는 점 외에 심청의 고장으로 효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고장이기도 하다.
 
 
 
 
 
 
 
2006-07-12 오후 7:24:50
37. 옛 공예품 발굴
 
전통 수공예 전시회에서 태극문양이 새겨진 귀중품 보관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필자.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았다. 버선.골무.귀주머니 같은 것은 대부분 손수 만들었고,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큼 예쁜 옷도 직접 지어 줬다. 내가 어렸을 땐 우리 집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이 웬만한 생활필수품은 직접 만들어 썼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어머니들의 솜씨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수공예품의 멋스러움을 계승 발전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쏟아져 나온 문명의 이기(利器)에 밀려 수공예 생활용품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1981년 가천문화재단의 전신인 숭례원을 설립했다. 우리의 전통 사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후세에 가르치고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전국 초.중.고교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쉽게 풀어 쓴 책자를 보급하고, 전시회를 여는 등 전통사상을 일깨우는 데 노력했다.
 
82년 5월에는 '제1회 전국 할아버지 할머니 수공예품 전시회'도 열었다. 하지만 전시회를 열기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수공예품을 만들어 전시회에 낼 할머니.할아버지를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참가를 권유하기 위해 상품도 푸짐하게 마련하고, 할아버지.할머니들에게 서울구경도 시켜드렸다.
 
직원들과 함께 승합차로 전국을 돌며 행사 포스터도 붙이고, 전통 수공예품 찾기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선조의 지혜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되었다.
 
강원도에서 출품된 공예품으로 눈 내릴 때 신는 짚신이 있었다. 이 짚신은 바닥을 넓게 해 눈 속에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짚이 불어나면서 방수효과가 생겨 양말이나 버선이 전혀 젖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지역 특성을 감안한 짚신의 종류도 다양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옥수수 등 농작물의 씨앗을 보관하는 씨앗받이도 관심을 끌었다. 짚으로 조롱박 같은 모양과 크기로 촘촘히 엮은 것이었다. 자연적으로 통풍이 되고, 항온.항습 조절 기능도 갖춰 더욱 놀랐다.
 
고려 때부터 만들었다는 안동의 '지(紙)삿갓'은 비닐이나 나일론으로 만든 우산이 등장한 뒤 생활용품에서 밀려났다. 그래서 나는 지삿갓 전수자에게 수고비를 주고, 술과 밥을 사주며 제작해 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지삿갓은 사라진 지 30~40년 만에 이 전시회를 통해 부활한 작품이다.
 
이런 노력 끝에 첫 번째 전시회가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열렸다. 전국의 60세 이상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비녀와 꽃신.화문석.칠보공예 등 1687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행사는 사라져가는 전통 공예를 되살리고 보존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한편으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노인들께 삶의 의욕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더욱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매년 새로운 공예품을 찾아내야 한다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3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내가 좀 더 일찍 박물관을 세웠더라면 수공예품 상설 전시코너를 마련해 조상의 지혜가 담긴 물품들을 더욱 소중히 간직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2006-07-13 오후 6:02:37
38. 가천박물관
 
개인 소장가 이희경씨(左)로부터 4000여 점의 국내 신문.간행물 등의 창간호를 기증받고 있는 필자.
 
 
1970년대 중반 남루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산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상의하고 싶다고 했다.
 
"보관 중인 고서(古書)들이 큰 돈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 팔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습니다. 고서 전시회를 개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시회를 마치고도 팔리지 않는 고서는 전부 구입해 달라고 했다.
 
문화적.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고서들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여기저기 방치되고 있었다. 폭격과 화재로 사라지거나, 소장자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귀한 유품임에도 불구하고 헐값에 내다 파는 상황이었다.
 
조상의 지혜와 얼이 담긴 유산이 사라져가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고서 전시회를 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많은 고서를 운반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귀중한 문화재였지만 도리없이 가마니에 담았다. 그리고 지게꾼을 고용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지한 방법이었다.
 
전시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고서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사갈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결국 약속대로 팔리지 않은 몇 가마니 분량의 고서들을 3000여 만원에 구입했다. 그 뒤 3년 동안 고서 전시회를 계속 열었고, 그때 구입한 고서 및 골동품들은 가천박물관 소장고에 고스란히 간직되어있다.
 
그 안에서 뜻밖에 국보가 나왔다. '초조본 유가사지론(初雕本 瑜伽師地論)'으로, 인천에 있는 유일한 국보였다. 11세기 고려시대 때 국내 최초로 판각한 대장경의 일부였다. 법상종 스님들이 교과서로 사용했다고 한다.
 
95년 가천박물관을 세워 국보를 포함, 14점의 국가 지정 문화재와 각종 유물 등 모두 2만여 점을 정성스레 보관하고 있다. '의료박물관' 코너를 마련해 전통 의료 유물 1000여 점과 근.현대 의공기구 500여 점 등은 별도로 전시하고 있다. 나와 동료, 선배들이 쓰던 고색창연한 의료기구들도 비치돼 있다. 조선시대 법의학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도 있다.
 
헌종 11년(1845년) 충남 아산 지역에 이소사라는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수사 과정에서 검시가 이뤄졌는데, 이를 그림으로 그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우리 조상이 오래 전부터 사인 분석을 위한 검시안(복검시형도)을 제작, 과학수사에 활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검시안을 통해 여인은 밭에서 김을 매다가 성폭행당한 수치심에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고, 범인은 엄벌에 처해졌다는 내용이다.
 
가천박물관은 올해 인천시 연수구에 새로 지어 문을 연다. 여기에는 국내 간행물 창간호실이 마련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창간된 각종 간행물과 신문 등 9058책을 보유하고 있어, 이 분야 국내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가천박물관이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풍요를 제공하는 가교역할을 담당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6-07-16 오후 8:04:24
39 '공단 길병원'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무료 진료하고 있는 남동길병원 의료진.
 
 
'원진레이온' 사건은 1990년대 초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30년 가까이 이황화탄소에 노출돼온 공장 근로자들이 경련과 마비증세를 보이고 심하면 생명까지 잃는, 끔찍한 직업병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들 환자의 일부는 80년대부터 길병원을 찾아왔다.
 
의사들은 내게 공장 근로자들의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었다. 의사들이 치료 과정에서 보고 들은 공장의 작업환경은 기가 막힐 정도로 열악했다.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근로자들이 너무 불쌍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80년대 후반 구월동 길병원이 개원한 뒤 산재 환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길병원은 공업단지인 반월.시화.주안.부평.남동공단이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재해를 입은 많은 근로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병원으로 달려왔다. 손가락이 잘리고, 손목과 팔이 으깨져 병원을 찾아온 '구릿빛' 산업전사들을 보면서 나는 착잡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이 분들을 돌보자면 구월동 길병원의 본원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체 일부가 잘려 분초를 다투는 환자에게는 더 빨리 접합수술을 해주고, 미리 직업병과 산재 예방에 관한 교육도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단 길병원'을 하나 더 세워야 했다.
 
93년 인천시 남동공단 내에 문을 연 남동길병원과 산업의학연구소는 그런 동기로 설립됐다. 본원의 산업보건과를 확대 발전시킨 '산업전사용 병원'이었다.
 
예상대로 공단 환자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당시엔 작업장에서 사고가 나면 응급조치도 못하고 허겁지겁 서울로 이송하느라 치료시기를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는 남동병원과 본원 간에 유기적인 협진체제를 구축해 응급조치부터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산재 근로자의 재활에 만전을 기했다. 그래서 환자들은 이른 시일 내에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손목이 잘린 환자가 남동길병원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 환자의 잘린 손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그냥 몸만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잘린 손은 어디 있어요?"
 
"그냥 버렸는데요…."
 
"빨리 찾아오시면 붙일 수 있습니다."
 
환자 보호자는 부랴부랴 쓰레기통에 버려진 손을 찾아 가져왔다. 우리 의료진은 오랜 시간 가는 혈관과 신경을 이어 접합에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절단사고가 많았지만, 이렇게 미세수술로 접합을 하는 전문병원은 드물었다. 일반인은 그런 의술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다.
 
공단이 커지면서 외국인 근로자도 늘어났다. 불법 취업이든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해 들어오든 공단의 외국인 근로자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되기 일쑤였다. 원훈이 '박애'인 병원에서 그들을 보고 눈 감고 방치할 순 없었다. 남동길병원은 2002년부터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를 정례화했다.
 
 
 
 
 
 
 
 
2006-07-17 오후 5:55:02
40. 차 향기 가득한 병원
 
가천의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독일 의대생들에게 전통 차 문화를 가르치고 있는 필자(中).
 
 
1970년대 중반쯤 있었던 일이다. 어느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온 언니가 어이없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어떤 외국인이 "한국의 전통 차(茶)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동석했던 한 한국인이 "한국에는 식후에 마시는 '숭늉'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전통 차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 아닌가. 반만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지닌 우리가 고작 숭늉을 전통 차로 내세우다니.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해버리기 힘들었다.
 
나와 언니는 어려서부터 전통 차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배웠다. 동학에 깊이 관여한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한복을 차려 입고 솔잎차를 대접하곤 했다.
 
어머니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을 종종 우리에게 시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의학 공부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언니는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배우고 보급하는 데 열성이었다.
 
나는 일상생활 속에 차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방안을 궁리했다. 언니는 언니대로 다도(茶道)와 전통 차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것을 계승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길여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시절, 언니는 사무실 한켠에서 지인과 고객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전통 차와 다도 문화에 관해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뒤에도 언니는 여러 곳을 다니며 차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82년 내가 숭례원 이사장일 때 '차 문화 자료전'을 연 것도 전통 차에 관한 내 나름의 애착 때문이었다.
 
구월동에 병원을 세우면서 나는 우리의 그윽하고 깊은 '차 맛'을 널리 소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먼저 병원 곳곳에 탄산음료나 커피 대신 전통 차를 놓아뒀다. 직원과 환자, 방문객들이 너나없이 우리의 차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는 직접 차잎을 우려내 병원의 구내 매점이나 휴게실 등 어느 곳에서나 마실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 시절에도 이미 커피는 친숙한 기호식품이 돼있었다. '식후 커피 한 잔'이 직장인의 습관처럼 자리잡은 때였다. 그래서 커피를 찾는 사람들에게 전통 차를 권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약리적으로도 전통 차는 질병을 이기는 항산화효과가 뛰어나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물론 중독성도 없지요. 게다가 우리가 잃어버리기 쉬운 선인의 지혜와 멋, 정신세계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에게는 '차 예절' 교육을 시켰다. 다도는 간호사의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차의 기본 정신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있다고 합니다. 이를 차인(茶人)이라고 합니다. " 이렇게 두 손으로 공손하게 차를 올리는 예절을 가르치면 '말괄량이' 직원도 어느새 상냥하고 예절 바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전통 차 보급으로 '친절한 병원' 이미지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2006-07-18 오후 8:55:36
41. 전통 차 보급운동
 
길병원 간호사들이 필수 교육과정인 다도(茶道)를 배우고 있다.
 
 
병원에서 전통 차를 손님에게 제공하고, 직원에게 다도(茶道)교육을 실시하자 원내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젠 직원이 환자나 가족에게 두 손으로 정성스레 차를 권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환자에게 약을 줄 때도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듯'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 것이 몸에 뱄다.
 
다도란 흔히 '찻잎을 따서 달여 마시기까지의 전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행위'로 일컬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병원 직원은 다도를 생활화하고 체득해 나갔다.
 
1991년 가천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병원 별관에 조선시대 전통 다실을 그대로 재현한 네 곳의 다도 교육장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시민과 직장인, 어린 학생들에게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이곳은 '인천의 사랑방'이 되어 '전통 차 홍보관'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언니는 직접 나서 서울 종로에서 '국산차를 애용하자'는 어깨띠를 두르고 행진도 했다.
 
외국 유학 생활도 짧지 않고 커피도 많이 마신 내가 국산차를 애용하자는 '차사랑 운동'을 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난 전통 차 문화를 통해 잊혀져가는 선인의 멋과 얼이 후대에 이어지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정신이 현대인의 삶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기대했다.
 
99년 가천문화재단은 한국차문화협회.규방다례보존회와 함께 '전국 인설(仁 ) 차문화전'을 열었다. 대여섯 살의 유치원생들이 고사리손으로 차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왼손바닥에 찻잔을 놓고 오른손으로 감싸 마시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가천문화재단은 우리 차의 '세계화'도 시도해 보았다.
 
94년 중국 옌볜(延邊)대 강당에서 연 '한.중 차문화 교류'를 시작으로 한.미, 한.독 간 차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95년 독일 박물관과 함부르크대에서 열린 차문화전에선 10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우리 차의 우수성에 감탄하기도 했다.
 
특히 차의 종주국이라고 하는 중국과 스리랑카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한 '한국 차문화 행사'는 우리 차가 '일본 차문화의 아류'로 여겨지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고 자부한다.
 
2002년부터는 2인 1조로 직접 차를 달여 마시는 체험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백령도 해병대 장병에서부터 휴전선 공동경비구역(JSA) 내 대성동 주민까지 어디든 찾아다녔다. 1500여 곳에서 열린 이 프로그램은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초까지 5년 동안 다도교육을 받은 사람은 10만명에 이른다.
 
차문화 보급운동에는 언니인 이귀례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이 큰 역할을 했다. 언니는 차문화 보급 및 계승에 기여한 공로 등으로, 제35대 신사임당으로 선정됐다. 또 초의(草衣)대선사(1786~1866)의 전통 차에 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초의상과 인천시 교육대상 등도 받았다.
 
2002년 언니가 규방의 차 예절을 복원, 정립한 '규방다례'는 인천시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됐으며, 언니는 기능보유자로 뽑혔다. 평생을 전통 차에 기울여온 언니의 애정과 정성이 평가받은 것이다.
 
 
 
 
 
 
 
2006-07-19 오후 8:05:33
42. 동창회장
 
제1회 함춘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권이혁 성균관대 이사장(右)에게 상패를 전달하는 필자.
 
 
1995년 나는 서울대 의대 동창회장에 선출됐다.
 
서울대 의대 반세기 역사에 '첫 여성 동창회장'이 된 덕분에 여러모로 주목을 받았다.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한 학년에 여학생은 두세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극소수의 여자 동창 중에서 회장 후보가 나오고, 또 회장으로 뽑히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회장을 지낸 분들은 기라성 같은 선배였다. 고인이 된 의료계의 큰별 한격부 선생, 그리고 문태준 전 보사부 장관, 강신호 전경련 회장(동아제약 회장) 등이다. 거물 리더가 이끌던 서울대 의대 동창회를 '여의사'가 물려받았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처럼 여기는 분위기였다.
 
동창회 내에서조차 총회에서 선출된 나를 두고 "하필이면 여성에게 동창회를 맡기느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회장이 되면서 이런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자신도 있었다.
 
동문 의사들은 개인적으로 유능하고 성공했다는 평을 들으면서도 단합.단결에는 약해 '모래알'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직이나 사회에 기여하고, 대의를 위해 일하는 동창회로 거듭나게 하고 싶었다.
 
나는 80년대 한국여의사회 회장으로서 '봉사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의사단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경험이 있었다.
 
우선 동문들이 끈끈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서로 격려하며,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10여 명의 임원으로는 수동적인 일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원 8000여 명의 동창회 규모에 맞게 임원과 위원장을 200여 명으로 늘렸다. 실무위원회도 만들었다. 그러자 임원들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동창회 일에 발 벗고 나섰다. 동창회 조직에 활력이 넘쳤다. 바둑.테니스.등산대회 등 친선동호회 모임도 활발해졌다.
 
아이디어도 쏟아졌다. 의료계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동문을 표창하고 격려하는 사업도 벌였다. 97년도부터 의학 분야에서 국제적인 성과를 이룬 세 명을 선정해 '함춘(含春)의학상'을 시상했다.
 
함춘은 '봄을 끌어안는다'는 뜻으로, 모교의 터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적 237호로 조선시대 정원인 '함춘원'이 지금의 연건캠퍼스 내에 있었다. 99년부터는 이 상과는 별도로 의료계 발전과 복리증진에 기여한 분에게 주는'함춘대상'을 제정, 매년 봄 동창회 정기총회 때 시상하고 있다.
 
권이혁 성균관대 이사장, 주근원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백낙환 인제학원 이사장, '간박사' 김정룡 교수, 고인이 된 이문호 전 대한의학회장 등 20여 분이 함춘대상 수상자이다. 100여 권의 심장 관련 저서를 낸 심전도(EKG) 분야의 세계적 석학 정구영 박사도 이 상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의 이웃사랑과 헌신을 기리는 '장기려의도(醫道)상'도 제정했다. 2004년 김인권 여수애양원장이 첫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모교 지원사업도 펼쳐 매년 교수 8~10명을 뽑아 3000달러씩의 해외연수비를 보조하고, 매년 1000만원어치의 신간 의학도서를 구입, 모교 도서관 내 '동창회 코너'에 비치하고 있다.
 
 
 
 
 
 
 
2006-07-20 오후 7:36:28
43. 함춘회관
 
동창회관인 함춘회관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서울대 의대 동창회 회장단. 왼쪽부터 심영보,필자,박양실 부회장,박희백 회관건축추진위원장.
 
 
나는 서울의대 동창회장에 오른 뒤 번듯한 동창회관을 신축하겠다고 공표했다. 회원의 단합을 이끌어내고,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회관 터는 내가 회장을 맡기 전부터 모교가 제공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새 건물을 짓겠다고 나서자 서울대 총장실에서 난색을 표시했다. 회관 운영이 제대로 안 될 경우 대학본부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나는 "동창회가 운영을 못 하면 이길여 개인이라도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문서로 약속했다. 결국 "회관을 20년간 동창회에서 활용하고, 학교에 기부채납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부 교수가 "가뜩이나 캠퍼스가 좁은데…"라며 반대하고 나서 또 한 번 어려움을 겪었다. 그 분들과 싸우고, 설득하기를 거듭해 결국은 건립키로했다.
 
1996년부터 모금에 들어갔다. 최소한 건평 1000평 이상은 돼야 했기에 30억 원은 모아야 했다. 언론에서도 국내 단과대학 동창회로는 최초로 회관을 짓는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다들 고개를 갸웃둥한 게 사실이었다.
 
의사 모임에 참석했더니 한 의사가 나에게 "30억 원을 걷는다면서요? 아마 3억 원도 어려울 겁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의사들은 단합이 잘 안 되는데, 게다가 서울대 출신들이니 오죽하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회장단 회의를 소집해 효과적인 기금모금 방법을 논의했다. 내가 앞장서서 3억 원을 내겠다고 기부약정을 한 뒤, 회장단은 의무적으로 2000만 원 이상을 내자고 했다. 그리고 회원 1인당 100만 원을 목표액으로 정했다.
 
각 지회를 찾아다니며 회원들을 독려했다. "모교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는 만큼, 모교에 보답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부산지회 총회, 미국의 미주동창회에도 의대 학장과 회장단이 함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미주동창회에는 1인당 1000달러씩 내달라고 호소했다.
 
모금에는 나름의 노하우도 필요했다. 회원들에게 매일 독려 전화를 거는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고용했고, 기금은 부담없이 분할해서 자동이체로 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회원들의 참여가 불붙기 시작했고, 미주동창회에서도 2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이 모아졌다. 기금액은 놀랍게도 당초 목표액을 훨씬 웃도는 40억 원이 넘었다.
 
2002년 10월 지상 7층, 지하 1층 규모로 동창회관이 완공됐다. 회관은 사무국에서 쓰고, 남은 공간을 빌려줘 매년 2억원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회관 관리비는 물론 동창회 사업을 펴는데 큰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이다.
 
회관을 짓느라 동분서주하며 회장 임기를 네 번이나 떠맡았다. 2003년 정기총회 때 나는 "숙원이던 회관도 건립됐고, 또 내가 관여하는 재단과 대학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회장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나를,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로 재추대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005년에야 동창회장직을 현 하권익 회장에게 넘길 수 있었다. 재임 10년 동안 열성적으로 도와준 임원진과 선후배 동문들에게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 바로잡습니다
 
7월 21일자 28면에 소개된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의 '함춘회관'편 사진 설명 중 왼쪽에서 둘째가 필자, 셋째가 박양실 전 서울대 의대 동창회 부회장이므로 바로잡습니다.
 
 
 
 
 
2006-07-23 오후 7:20:16
44. 미주동창회 연설
 
미주동창회에서 연설하는 필자.
 
 
서울의대 동창회장을 하면서 나는 미국에서 열리는 미주동창회 모임엔 빠짐없이 참석했다. 4박5일간 열리는 이 행사에 매년 의대학장 등 10여 명의 동문을 모시고 갔다.
 
1950~1960년 대부터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의사 동문'은 12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엔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고생했지만, 지금은 미국 주류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이 행사는 미국의 동문을 격려하고, 고국의 발전상도 알려주면서 정을 나누는 장(場)이기도 했다.
 
2004년 미주동창회 때의 일이다. 동문회보인 '시계탑' 발간 30년 축하회가 함께 열려 초대 편집장을 지낸 노용면 선생, 이규용 선생, 이재승 미주동창회장 등 200여 명이 모였다. 한국에선 나와 박양실 전 복지부 장관, 왕규창 당시 서울의대 학장과 이왕재 부학장 등 20여 명이 갔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허쉬에서 열린 행사에서 몇몇 동문이 재산상속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부가 된 한 동창이 미국에선 세금을 내지 않고 재산상속을 100만 달러까지만 할 수 있다"며 "상속하고 남은 재산은 아들 학교에 기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날 밤 총회에서 연단에 선 나는 "축사를 준비해왔지만, 오늘은 원고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내가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하고 항상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모교를 나오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운을 뗐다. 그리곤 "여기 오신 많은 사모님들은 결혼 전, 모두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더라면 사모님들이 여러분을 택했을까요. 내조의 힘이 여러분을 미국 상류사회로 이끌어 냈습니다"며 나는 부인들께 먼저 감사의 말을 전했다. 환호와 함께 부인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나는 "그런데 여기선 재산상속을 미국에서 키운 아이들 모교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선 재산을 자식에게만 물려주려고 하는데 이에 비하면, 참 좋은 생각입니다"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동문도 보였다.
 
나는 힘을 주어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여러분의 모교와 모국에 대해서는 어째서 관심을 갖지 못했는지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모교라는 언덕과 울타리가 있었기에 성공했다는 점을 잊지 마시고, 모교와 조국을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연단을 내려오는데 참석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연단을 내려와서야 난 그동안 잊고 살았던 모교와 조국에의 고마움을 일깨워 준 연설에 감동했다는 동문들의 반응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이들의 기부가 모교에 이어지고 있다.
 
미주동창 중엔 명성을 날리는 인물들이 많다. 권기홍 박사는 심장수술의 1인자요, 정구영 박사는 심장내과 분야의 대가다. 또 한혜원 박사는 간 분야 전문가로 미국 의료 발전을 이끌었다. 그 밖에도 세계적인 석학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는 서울의대 동창회장을 맡는 동안, 우리 의사들의 활동이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든든한 유대(紐帶)가 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2006-07-24 오후 8:15:46
45. 새생명 찾아주기
 
'새생명 만남의 밤' 행사 때 수술받은 어린이의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필자(右).
 
 
"수술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데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꺼져가는 생명들이 적지 않습니다."
 
1990년 어느 봄날 인천의 각계 기관단체장과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분이 말했다. 의료보험 혜택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면서, 돈 때문에 치료를 못 받는 환자가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천시민들이 나서서 이런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나왔다.
 
다행히 주변에는 숭고한 뜻을 가진 독지가(篤志家)가 적지 않았다. 이들과 환자를 이어주는 사업을 펼치고, 치료는 내가 도와주겠다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새생명찾아주기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이것을 인천지역 사회운동으로 펼쳐야겠다고 생각하고 90년 8월부터 지역 언론사를 포함한 주요 기관.단체와 손을 잡고 범시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켰다.
 
"적어도 인천에서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숨지는 환자는 없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문병하(작고) 인천일보 사장, 박종우 인천시장과 신홍균 인천시 교육감, 이기성(작고) 영진공사 회장, 심명구 선광공사 회장 등 학계.의료계.재계 등에서 10여 명의 대표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나는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대표를 맡기로 하고, 1억원의 기금을 출연했다.
 
'커피 한 잔' '담배 한 갑' 가격인 1000원을 후원회비 1계좌로 정하고, 후원금 모금에 나섰다. 모인 성금은 인천시와 지역 언론사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무료수술 대상자 선정은 인천시 보건과에서 맡기로 했다.
 
본부가 발족한 뒤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인천 지역 봉사단체를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스티커와 전단 5만부, 그리고 달력을 나눠주며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 인천의 9개 병원과 진료지원 협약도 맺었다.
 
인천 지역의 기관.단체 및 기업체 직원들의 동참이 이어졌다. 초등학생의 고사리 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군 장병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참여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우리 병원 직원들도 전원 후원회원이 됐다.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익명의 독지가도 많았다. 92년 첫 해에 2375명이 가입, 2억1200만 원의 실적을 올렸다. 현재는 16억4000여만 원의 기금이 적립돼 있다.
 
자선 바자회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조수미 콘서트 등 각종 연주회를 여는가 하면 새생명 찾아주기 마라톤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모금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후원자들과 수혜자, 그 가족들을 '새생명 만남의 밤'에 초청, 서로 격려하고 감사하는 자리도 매년 마련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현재까지 심장질환, 파킨슨씨병 같은 중증환자 3800여 명에게 무료수술을 해줄 수 있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몽골.베트남.중국 등 외국으로 그 혜택 범위를 넓혀갔다.
 
요즘 나는 수술을 받은 환자의 부모들과 각국 대사 등이 보내 온 감사의 편지가 산더미같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한없는 보람을 느낀다.
 
 
 
 
 
 
 
2006-07-25 오후 7:45:54
46. 베트남 한센환우
 
필자(左)와 빈딘성의 잔왕 부주석이 직업훈련원 건립비를 제막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과거에는 불치의 병으로 분류됐던 한센병(hansen disease). 나균에 의해 피부.신경.눈.뼈 등이 파괴돼 신체 기형을 가져오는 전염성이 강한 무서운 병이다. 지금은 신약 개발로 완치가 가능하다.
 
예전에는 '문둥병' 또는 '나병''천형병(天刑病)'으로 불렸고, 이 병에 걸리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치료를 받고 재기를 위해 노력하던 장소였다. 1993년 초 지금은 고인이 된 박선규 한센복지협회장이 나에게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의 도움으로 한센병을 극복해 냈는데, 이젠 우리가 후진국을 도와야 할 때"라고 넌즈시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는 이들을 위한 후원회를 만들고, 후원회장을 맡아 일을 해 달라고 내게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의 어릴 적 기억에도 한센병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아버지와 아들이 구걸하러 다니던 측은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해 7월 한센국제협력후원회를 만들고 모금에 들어갔다. 한센복지협회 산하 전국 11개 시.도 지회와 손잡고 거리 캠페인과 자선바자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우루과이라운드협정 체결 때는 '우리 쌀 사주기 운동'을 벌여 수익금을 후원금으로 적립했다. 길병원 직원과 많은 이웃에게도 이 뜻깊은 일에 동참하도록 독려해 1인 1만원의 후원금을 적립케 했다. 98년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후원자의 모금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6억7000만원을 모았다. 이 정도면 외국의 한센병 환우를 도와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베트남을 우선 지원대상국으로 정했다.
 
베트남을 선정한 이유는, 한국군이 참전했던 배트남전 때 전사한 분들과 그 유족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91년 당시 박양실 한국여자의사회 회장과 여의사 10여 명으로 구성된 의료봉사단 일원으로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무료 진료 활동을 벌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봉사단은 열흘 동안 무료 진료를 하던 중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던 베트남 여성 도티늉을 찾아낸 바 있다. 나는 그녀를 우리 병원에 데려와 무료로 수술해 줬다. 그래서 베트남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우선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부대 주둔지이자 격전지로 알려진 '빈딘성'에 직업훈련원을 지어주기로 했다. 2001년 5월 착공, 그 해 12월 7일 준공식을 했다. 빈딘성 퀴논시에서 1.5㎞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직업훈련원은 실습교실.숙박시설.식당.관리실.수위실 등을 갖추고 있다.
 
재봉.재단기술 교육을 위한 재봉틀을 비롯한 관련 기기 등을 구입해 주고, 운송수단인 승합차량도 사줬다. 매달 300만원의 운영비 지원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후원회 직원을 1년에 한 번씩 현지로 보내 훈련원의 운영 및 자금 운용실태를 파악하고 추가 지원사항을 파악한다.
 
지금까지 23기에 걸쳐 554명이 재봉기술을 배워 빈딘성뿐 아니라 베트남 전역 유명 봉재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업훈련원 관계자들로부터 베트남 한센병 환우와 그 가족들이 기술을 익혀 사회에 복귀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흐뭇하다.
 
 
 
 
 
 
 
2006-07-26 오후 7:42:44
47. 의과대학 설립
 
제1회 신입생오리엔테이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필자.
 
 
나는 1970년대부터 우수한 의료인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꿔왔다. 78년 의료법인을 출범시키면서 이런 소망은 더욱 커졌다. 의료기관은 능력 있는 의료인 양성에 책임이 있고, 이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었다. 그러던 차에 94년 심한 경영난에 빠진 경기전문대학과 신명여고를 인수, 빠른 시일 안에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96년 성장관리 권역 내에 의과대학을 설립할 수 있게 되면서, 학교법인의 성공적인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나의 소망을 현실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대학 부지는 먼저 교육부의 의대 설립 기준에 맞아야 하고, 인천에서도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다. 마침 강화 지역이 성장관리 권역인데다 인천과 인접해 있고, 역사적인 명승지여서 대학 입지로선 최적지라고 생각했다.
 
전국체전 성화를 점화하는 마니산과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塹星壇)이 있는 성지다. 그 외에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담은 사적지가 많은 곳이다.
 
강화에서도 짙푸른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이 좋은 지역을 찾아 정말 아름다운 캠퍼스를 건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달여 동안 매일 강화를 돌아다녔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길상면 선두리(船頭里)에서 내 마음에 꼭 드는 부지를 찾아냈다. 해발 336m인 길상산 자락에 위치해 있어 뒤로는 짙푸른 산록이 우거져 있고, 앞에는 출렁이는 서해 바다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선두리는 한자로 풀이하면 '뱃머리'라는 뜻으로 '세계를 향해 항해한다'는 강화의 기운과 딱 맞아떨어진 곳이다.
 
국내 유명 설계사무소에 '대학캠퍼스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게 설계해 달라'고 주문했다. 97년 3월 부지를 매입하고, 곧바로 교사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교육부가 '교사 완공 뒤 대학설립 허가' 방침을 밝히며, 11월에 실사를 나오겠다고 통보해 온 상태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벌였다. 의외로 암석이 많아 발파작업이 계속됐고 야간에도 공사장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주민들의 민원을 설득하면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그 해 8월 교육부가 당초보다 3개월이나 앞당겨 실사를 나왔다. 공정률이 낮다며 대학설립 허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교육부를 찾아갔다. "내가 책임지고 11월까지 건물을 완공하겠으니, 예정대로 11월에 실사를 다시 한번 나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해서 9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41번째 의과대학이 설립인가를 받아냈다. '가천의과대학'이 탄생한 것이다.
 
가천의대와 자매학교인 토마스 제퍼슨의대의 고넬라 학장이 강화캠퍼스를 둘러보곤 "설계한 사람이 프랑스 사람이냐?"며 '원더풀'을 연발했다. 기숙사를 보더니 호텔 수준이라며 감탄했다. 이후에도 강화캠퍼스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본 캠퍼스 중 가장 아름답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2006-07-27 오후 7:08:20
48 제자들
 
가천의대 졸업생의 목에 청진기를 걸어주는 필자.
 
 
강화도 길상산 자락에 있는 가천의대 캠퍼스는 병풍처럼 서 있는 산세를 뒤로하고, 앞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를 키워내겠다는 내 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가천의대는 개교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입학생 전원에게 6년간 입학금 및 등록금 전액 면제의 장학 혜택을 주고, 기숙사 무료 제공과 함께 입학 성적 우수자 10%에게는 길장학금과 봉사장학금을 추가로 지급키로 했기 때문이다.
 
첫 신입생 모집에서 4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신설 의대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응시 학생들의 수능 성적도 전국 41개 의대 중 상위 5위권에 들었다.
 
뛰어난 인재의 지원에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가 설립한 학교를 선택한 아이들, 이 후학들을 훌륭한 의사로 키워내야 할 사명이 더 커진 것을 느꼈다.
 
1998년 3월 첫 입학식에서 나는 말했다. "가천의대야말로 내 반세기 의료인생의 결산이자 결정체입니다. 신입생 여러분은 머지않아 가천의대를 택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 중 하나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를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상기된 얼굴로 경청하던 신입생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난 학생들이 넓은 시야를 갖고 폭넓게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고 싶었다. 우선 의사가 되기 전에 올바른 인성(人性)을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가천의대 학생이라면 의학공부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나 도덕적.윤리적으로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설은 초현대식으로 했다. 기숙사 모든 방은 2인1실로, 펜티엄급 컴퓨터와 전화기를 갖췄다. 강의실에도 1인 1대의 컴퓨터를 비치했다. 각종 실습실과 학습정보센터.학생회관 등은 의학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서적을 접할 수 있도록 꾸몄다. 체육관에는 노래방과 탁구장.당구장을 마련해 여가를 즐기고 마음껏 뛰놀면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각국 학술 연구성과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심포지엄 개최, 해외 명문 의과대학과의 학생 교환 및 학술 교류, 미국 대학과의 원격 화상 강의 등을 정례화했다.
 
미국 하버드의대.시카고의대.토마스 제퍼슨의대, 독일 훔볼트의대, 일본 니혼의대, 중국 베이징의대.톈진의대 등과 협력 협정을 맺었다.
 
내 집무실에는 의대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면면들을 보면서, 내 뜻을 이해하고 나보다 훨씬 나은 봉사와 애국의 길을 걸어주기를 고대한다.
 
첫 졸업생들은 다른 대학병원에서의 요청을 뒤로하고, 전원 길병원에서 수련의로 일하고 있다. 사은회에서 졸업생들은 "이사장님의 뜻대로, 우리 재단의 이념인 박애.봉사.애국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병원에 남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졸업식에서 그들에게 청진기를 선물했다. 내가 진찰할 때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가슴에 품었던 청진기. 이젠 그 청진기가 제자들의 품속에 들어 있다.
 
 
 
 
 
 
 
2006-07-30 오후 6:05:13
49. 훈 할머니
 
길병원에 입원한 훈 할머니와 손녀들이 활짝 웃고 있다. 왼쪽 둘째는 필자.
 
 
훈 할머니. 1942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캄보디아에 끌려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반세기 넘게 잊혀진 그분의 삶은 나에게도 가슴 시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의료봉사 활동을 해외로 확대하고 있을 때였다. 훈 할머니가 97년 8월 4일에 고국 땅을 밟게 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난 그분의 질곡(桎梏) 같은 인생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내 손으로 치료해주고 싶었다. 바로 특별 진료팀을 꾸렸다. 그렇게 해서 길병원에 입원한 훈 할머니는 우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심리치료 등 특별 진료를 받았다. 뇌의 기질적 검사와 기능적 장애 여부를 조사하고 부인과 검사도 정밀 진단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기력은 몹시 쇠약했고, 모든 기능은 떨어져 있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고국의 따스함을 느끼고, 고향과 가족을 찾는 데 필요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해드렸다. 2001년 나는 훈 할머니가 "유해만은 고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가시밭길을 살아온 할머니의 삶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외국 거주 환자 중에 가슴 아픈 사연은 훈 할머니뿐이 아니다. 당시 미수교 국가였던 베트남의 20대 심장병 여성을 길병원에 데려와 수술해 준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91년 나는 당시 박양실 한국여자의사회장이 이끄는 의료봉사단 일원으로 베트남에 무료 검진을 나갔다. 동행했던 장청순 박사가 심장병을 앓고 있던 도티늉(여)을 발견했다. 24세인데도 심장병을 앓아 50대 중년처럼 늙어 보였다. 그녀를 92년 4월 길병원으로 데려와 무료로 수술을 해줬다. 그때만 해도 도티늉은 미수교 공산권국가의 환자였기 때문에 한국 입국 절차가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다행히 보건복지부에서 적극 도와줘 가까스로 문제가 풀렸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그해 12월 국교를 수립했다.
 
도티늉은 당시 심장센터 신익균 소장과 흉부외과 박국양 교수팀의 수술로 새 삶을 찾았다. 수술 후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며 "베트남에 돌아가면 '라이따이한'(베트남에 남겨진 한국인 2세)을 돕는 일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도티늉은 한 달여 입원한 동안 나와 병원 식구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스한 보살핌을 받았다. 귀국 때는 각종 격려금과 기념품 등을 한아름 안고 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1년, 나는 빈딘성 직업훈련원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베트남에 갔을 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딸과 함께 찾아와 나를 덥석 안더니 눈물을 흘렸다. 10년 전과는 달리 너무 젊고 예뻐져서 나는 그녀를 몰라볼 뻔했다. 한국에서 새 생명을 찾았고, 격려금을 많이 받은 덕분에 집도 사고 부자가 됐다며 고마워했다. 그 뒤에도 우리 병원에선 몽골.중국.베트남.우즈베키스탄 등 아시아권에서 온 외국인 및 동포 환자 수백여 명이 새 생명을 찾았다. 훈 할머니와 도티늉이 국경을 넘은 인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된 계기가 됐다.
 
 
 
 
 
 
 
 
2006-07-31 오후 6:16:09
50. 보석과 초음파기
 
뇌과학연구소 전시관에서 조장희 소장(右)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
 
 
나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최신 의료장비에 관심이 남달랐다. 보다 좋은 의료시설로 환자를 완치시키고 싶은 욕심이야 의사라면 똑같지 않겠는가. 난 초창기 산부인과를 운영할 때부터 최신식 의료기기를 도입했다. 국내에 처음으로 초음파 기기를 들여오기 직전에 생긴 일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1970년대 초였으니 내가 마흔을 갓 넘겼을 때다. 어느 날 모임에서 한 친구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와서 자랑했다. 나와 친구들은 반지를 손가락에 껴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액세서리를 즐기지 않는 나였지만, 여느 여성처럼 반지의 광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반지 주인인 친구에게 "야! 참 멋있다. 기가 막힌데…"하며 부러워했다. 그리곤 가격을 알고 놀랐다. 무려 3000만원을 호가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그만한 돈이면 첨단 의료기기를 들여올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지금도 귀금속엔 그다지 관심이나 애착이 없다. 최근까지도 아주 특별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귀걸이나 목걸이 등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 최초로 초음파 의료기기 네 대가 도입됐다. 일본의 알로카사가 만든 태아 심박동 청진기였다. 가격은 4000만원 정도로 당시 화폐 가치를 감안할 때 큰 금액이었다. 결단을 내려 그중 한 대를 내가 운영하는 산부인과에 들여왔다. 나머지 세 대는 국내 최고 권위의 대학병원과 대형 종합병원에 설치됐다.
 
이 같은 고가 장비 도입은 수익성을 따진다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도입을 결정한 이유는 한 가지다. 태아의 건강 상태를 잘 알 수 있고, 이를 가족에게 설명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병원에 설치한 초음파기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기대와 호기심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태아의 심장 소리와 건강 상태를 알려주면 환자와 가족들은 너무도 신기해하면서 고마워했다. 8주쯤 지난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가 초음파기를 통해 "쿵쾅, 쿵쾅"하고 나오면 엄마는 뱃속의 생명체에 대한 신비감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떤 보호자는 아기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집에 가서 다른 식구들까지 데려와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졸랐다. 초음파기에서 나는 소리를 확성기를 통해 대기실에 들려주면 "저게 두 달 된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래"하며 더 크게 틀어달라고 아우성칠 정도였다.
 
첨단 장비에 대한 애착은 남달라 기회만 되면 다른 대학병원에 뒤질세라 도입했다. 79년과 87년 각각 들여온 감마카메라와 뇌정위 수술기계는 3억원을 호가했다. 당시엔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지난해엔 첨단 진단장비인 64MDCT도 국내 처음으로 우리 병원에서 선보였다. 인체 단면을 3차원 영상으로 1초에 64장이나 찍는 고가 장비다.
 
의료장비는 나에게 보석보다 소중하다. 세계 최초로 'PET-MRI' 퓨전영상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뇌과학연구소의 연구 성과가 나타나면 이제 뇌속까지 손바닥처럼 보는 시절이 오리라 기대한다.
 
 
 
 
 
 
 
 
 
2006-08-01 오후 6:11:12
51. 가천미추홀봉사단 (상)
 
가천미추홀봉사단 총재 취임식에서 단원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는 필자.
 
 
1960년대 미국 유학 때의 일이다. 자신의 '봉사 시간'을 기록한 카드를 매단 줄을 목에 걸고 열심히 남을 돕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이들은 자부심도 대단했다. 내가 처음 본 자원봉사자의 모습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70년대 일본 유학 때도 이른 새벽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빗자루로 마당을 열심히 쓰는 자원봉사자의 모습을 봤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선진국처럼 21세기에는 봉사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릴 때부터 '봉사'정신과 습관을 자연스럽게 접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어린이봉사단에 대한 구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90년대 초만 해도 대다수 부모들은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아이들에게 무슨 봉사를 가르치느냐"고 푸념할 정도여서, 봉사는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나도 어릴 적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뒤 오로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어릴 때 생각과 습관은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인 것이다. 봉사단 창립은 미래의 지도자가 될 아이들에게 실천을 통한 봉사의 참뜻을 일깨우려는 내 의지의 실현이었다.
 
초등학교 학생회장들로 봉사단을 구성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리더이자 모범생인 학생회장의 자부심과 긍지를 중.고교와 대학 때는 물론 사회에 나가서까지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이들이 차세대 리더가 되게끔 여러 방면에서 출중한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줘야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인천시교육청을 찾아갔다. "인천의 리더가 국가의 리더가 되고, 이 중에서 세계의 리더가 배출될 것"이라며 "미래를 이끌어갈 예비지도자에게 '참봉사 정신'을 일깨우고 싶다"고 설명했다. 교육청에서 흔쾌히 호응해 시내 각 초등학교에 협조공문을 보냈다.
 
93년 5월 인천 시내 총 113개 초등학교의 학생회장 113명을 단원으로 한 가천미추홀봉사단이 발족했다. 이로부터 2년 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임원들이 달동네 노인들을 목욕시키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는 보도를 접하곤 어린이봉사단을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 총재를 맡은 나는 창립식에서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아직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곤 '내가 정말 책임감을 가지고 잘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나는 "학생회장은 나보다 못한 이웃을 돕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사명을 지녔다"며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공부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이웃사랑과 봉사정신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까지 14년간 봉사단원으로 활동한 어린이는 2264명에 달한다.
 
나는 이들이 '봉사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2006-08-02 오후 6:17:17
52. 가천미추홀봉사단 (하)
 
수련대회에 참가한 가천미추홀봉사단원들을 격려하고 있는 필자.
 
 
가천미추홀봉사단은 나의 호(號) '가천(嘉泉)'과 인천의 옛 이름인 '미추홀'에서 따왔다. 인천의 어린 동량(棟樑)들이 '봉사'를 실천하면서 '리더십'을 갖추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단원들은 매주 양로원.보육원.장애우 시설 등을 돌며 고사리손으로 봉사 활동을 펼친다. 할머니.할아버지를 목욕시켜드리고,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고, 체험한다. 병원에서는 휠체어를 밀어주고, 부축해주면서 환자들의 고통을 느껴보기도 한다.
 
평소에 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싫은 기색 없이 꼬박꼬박 자기 몫을 다한다. 정성을 다해 소중한 체험을 하는 것이다. 처음엔 "아이들이 와서 무얼 한다는 거야?"라며 반신반의하던 양로원 노인들도 이제는 1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어린 학생들의 손길을 기다릴 정도가 됐다. 나날이 의젓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단원들은 송도에 있는 길병원 연수원에서 1박2일간 월례 수련회를 한다. 또 스키.승마.수상스포츠 훈련과 서바이벌게임.극기활동 등을 통해 '리더의 소양'을 쌓는다.
 
동아리 활동도 활발해 초등.중학생 30명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팀은 인천을 대표하는 청소년 동아리가 됐다. 전국청소년대회 때는 식전행사에 단골로 초청될 만큼 수준급이다. 학생들에겐 자주성과 개척정신을 북돋워주는 특강을, 학부모들에게는 '바람직한 자녀로 키우는 방법' 등을 주제로 명사 초청 강의를 실시한다.
 
'어릴 때 형성된 인성(人性)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부모와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가천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차(茶)예절.사물놀이 교육에는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참여토록 해 우리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다.
 
1997년 어린 단원들은 인천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를 방문, 홈스테이 행사를 했다. 해외문화를 체득하고, 한국문화를 알리는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하는 중요한 행사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일본.호주.유럽 등으로 연수를 간다.
 
초등학교 어린이 봉사단원은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로 올라가면서 어린이대에서 청소년대로, 한벗회로, 가천회로 성장해간다. 어릴 적 봉사에 대한 사고와 생활 방식을 사회에 나가서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서울대.카이스트.공군사관학교 등에서 그 뜻을 펼치고 있는 학생도 있다.
 
봉사단원이 된 뒤 자신감이 넘치고, 포용할 줄 아는 아이로 변화된 모습을 지켜본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어머니회와 아버지회도 생겼다.
 
지난해 하버드대에 입학한 봉사단원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나에게 "봉사를 몰랐다면 지금의 저가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남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미래의 리더로 또 미래의 희망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2006-08-03 오후 7:15:38
53. 나이팅게일 선서식
 
나이팅게일 선서식에 참석한 간호사들을 격려하고 있는 필자.
 
 
병원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원무(院務)직원 등 다양한 직업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간호사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옛날 동네 산부인과나 지금의 가천의대 길병원을 운영할 때도 간호사들은 항상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봉사정신을 발휘한 동반자였다.
 
1980년대 초 나는 "사명감 있는 모자(母子)보건요원 양성을 위해 무료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포부를 조선일보 칼럼난'일사일언'에서 밝힌 적 있다. 당시만 해도 현대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와 낙도에서는 짚을 깔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었다. 집에서 낳을 때도 소독도 안한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이런 딱한 처지에 있는 임신부들을 돌봐줄 사명감 있는 간호사를 길러 의료 취약지에 내보내고 싶었다.
 
대학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시골 학생들을 무료로 교육시킨 뒤 고향에서 5~6년간 의무적으로 봉사하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이 나의 구상이었다.
 
이처럼 간호사 양성은 내 오랜 꿈이었다. 94년 부도로 어려움을 겪는 경기전문대학(옛 경기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지금의 가천의대로 키우고, 98년 경원전문대학을 인수한 건 그런 간절한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두 대학에는 간호학과가 있다. 지금도 두 학교에서 매년 200여 명의 간호사가 배출된다. 학생들은 간호사 교육과정을 밟으며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치른다.
 
숙연한 표정으로 촛불을 들고 새로운 봉사의 길에 나설 것을 다짐하는 학생들은, 말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난 그 자리에서 늘 "여러분이 한국의 나이팅게일로서 인류애에 불타는 '병실의 파수꾼'이 되어 달라"고 당부한다.
 
내가 '환자의 숲'에 갇힌 의사로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그만큼 간호사들과의 정도 깊다. 내가 환자를 돌보느라 밤을 새면 그들도 지친 몸으로 같이 있어 주었고, 식사를 제때 못하는 나를 위해 함께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지금도 길병원에선 많은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위해 밤낮 없이 일하고 있다. 여기에는 내가 맡고 있는 대학을 나온 제자도 있고, 다른 간호대학에서 뽑아온 간호사도 있다. 난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인간을 사랑하는 박애.봉사정신을 가져 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환자를 보살피는 것뿐 아니라 항상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내 뜻을 잘 이해하며 묵묵히 일하는 간호사들이 너무 고맙다. 그리고 e-메일과 편지 등을 통해 간호사들을 칭찬하는 글이 나날이 쌓이고, 그것을 읽는 재미는 나에게 또다른 활력소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는 제 할머니의 대.소변을 갈아주면서도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간호사 선생님, 천사 같아요." 간호사들의 정성이 만들어낸 각본 없는 드라마에 난 울고 웃는다.
 
 
 
 
 
 
 
 
 
2006-08-06 오후 6:17:58
54. 모범생의 탈선
 
중학교 2학년 때 단짝이었던 '세 별 자매'가 기념 촬영했다. 왼쪽부터 김진렬(6·25 때 행방불명), 조순주(작고), 필자.
 
 
청소년기에는 착한 모범생이라도 탈선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나라고 학창시절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일탈(逸脫)'의 유혹이 왜 없었을까. 친구들처럼 멋을 내고 싶었고, 이성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이리여중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와 같은 반 친구 세 명은 교내에 소문난 단짝 친구였다. 성적이 우수했고, 행실도 올곧아 선생님들은 우리 셋을 일본말로 '삼바가라스'(三羽鳥)라고 부를 정도로 귀여워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내일은 학교에 가지 말고, 한번 망가져 보자"고 모의했다. 급우나 선생님들 사이에 공인된 모범생인 우리의 그런 모의는 '죽을 각오'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등교거부'를 하고 거리를 배회하리라곤 우리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는 이리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거리인 전주로 갔다. 그리고는 마음껏 시내를 돌아다녔다. 여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대낮에 시내를 활보하니,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집중됐다. 불량학생으로 비쳤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철길을 따라 걷는데 건너편에서 오던 남학생 세 명과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그 학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야! 우리가 지금 이러면 어떻게 해"라며 제동을 걸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우리는 학교로 향했다.
 
오후 늦게 나타난 우리를 보고 강영철 담임선생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믿었던 아이들이었으니 기가 막혔으리라. 선생님은 "니들 나쁜 짓 하고 왔지"라며 호되게 꾸짖으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고교시절 단짝 친구인 박지홍(30대 후반에 서울의대 입학)과 월반(越班)시험 공부를 하다가 호기심에 담배를 피워본 것이다. 어른들 눈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담배에 불을 붙여 뻐끔거렸으니 그 뒤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그 일로 다시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서울의대에 입학하고 6.25 전쟁이 터져 전주의 전시연합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던 여학생 네 명이 일요일에 외출을 했다. 한껏 치장을 하고 시내를 들어섰는데, 같은 수의 군인이 탄 지프가 우리 앞에 섰다. 서울대 독문과와 법대를 다니다 군에 입대했다며 말을 걸어왔다. 키도 훤칠하고 늠름했다. 우리는 그 지프를 타고 종일 데이트를 즐겼다. 이성을 보면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이 쿵쿵 뛰던 때였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밤늦게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점심.저녁도 거르고 밤늦게 돌아온 우리를 본 주인 아주머니가 "세상에, 말만한 처녀들이…"라며 혀를 찼다. 하숙집에 삽시간에 소문이 나고 다들 흉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반성문을 썼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을 봐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누군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밤새 반성문을 썼다.
 
부모님의 절실하고 한없는 사랑, 그것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힘이란 걸 깨달았다.
 
 
 
 
 
 
 
 
2006-08-07 오후 6:09:31
55. 경인일보 인수
 
1999년 경인일보 회장 취임식에서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필자(右).
 
 
1990년대 들어 의료사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평소 염원해 왔던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94년 간호대학으로 유명했던 경기전문대학(가천길대학 전신)을 인수했고, 97년 가천의과대학교를 설립하는가 하면 98년 경원대학교를 인수해 4개의 대학과 신명여고를 운영하게 됐다. 지역문화 활성화와 향토문화 진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가천문화재단과 가천박물관도 설립했다.
 
그러던 차에 99년 내게 뜻하지 않았던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경인일보(京仁日報) 성백응 회장이 자신이 이끌던 신문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경인일보는 경기.인천 지역에서는 가장 전통이 깊은 최대 규모의 언론사였다.
 
성 회장은 나에게 "건강상 이유로 더 이상 신문사 운영에 힘을 쏟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지역에서 어느 분이 신문사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지 오랜 시간 생각해보고 제안을 드립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미디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다만 언론이 바로 서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언론관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인수 제의를 뿌리칠 것을 권유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언론사가 겪고 있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럴 때 일수록 신문사를 경영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다. 병을 고쳐 애국하는 것이나 건강한 언론을 통해 사회의 아픈 곳을 치유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오히려 인수 제의를 받고 나서 나는 지역 언론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됐다. 신문사 인수를 결정했다.
 
경인일보는 1960년 창간된 지방지로, 73년 수원에서 발간하던 '연합신문'과 인천에서 발행되던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등 3개 신문을 통합한 언론사다.
 
99년 11월 난 경인일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나는 취임사에서 "우리 고장을 밝고, 바르게 이끌어 지역문화 창달에 높이 기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데 큰 몫을 해달라"며 지역 언론 본연의 임무를 당부했다. 그리곤 "깨어있는 신문으로서, 독자들에게 읽히고, 독자들에게 봉사하는 신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고 강조했다.
 
모든 기자들에게 최신형 노트북을 새로 지급하고,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해 현장 사진전송 시스템을 갖추는 등 취재 환경개선에 착수했다. 취재차량 지원과 2년 연속 두 자릿수 임금인상 등 복지도 대폭 향상시켰다.
 
경인일보는 3년 연속 '한국기자대상'과 20여 회의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고, 경인지역 최초로 인터넷 TV방송과 뉴미디어 뉴스비전을 개국하는 등 '앞선 언론'으로의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다.
 
어린이에게 바다의 중요성과 내 고장 인천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 시작한 '인천 바다 그리기 대회'에는 5만여 명에 이르는 초.중.고교생이 참가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사생대회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엔 '북경 경인 문화 교류 유한공사'를 설립, 중국과의 언론.경제.문화교류의 가교 역을 담당하고 있다.
 
경인일보는 지역민에게 봉사하는 신문,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으로, 그 임무를 다하고 있다.
 
 
 
 
 
 
 
 
2006-08-08 오후 8:02:08
56. 모교 사랑
 
길병원 연수원을 방문한 대야초등학교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필자.
 
 
내가 나온 전북 군산의 대야초등학교는 전국 초등학교 탁구대회를 주름잡는 학교다. 1990년대 중반 대야초교 탁구부가 여자부 전국 4관왕을 차지했을 당시 이보경 감독이 나를 찾아왔다. 어려운 환경에서 빛나는 성적을 내고 있는 '후배'들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남녀부 모두를 3년 안에 전국 최강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가 요구한 대로 모든 후원을 했다. 사시사철 훈련을 할 수 있게 실내 체육관을 지어 주고, 선수단 전용 버스도 마련해 주었다. 모교 탁구부는 97년 '대통령기 전국 탁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무려 5관왕을 차지했다.
 
선수단은 우승을 하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한다.
 
국내 정상에 오른 탁구선수들은 지금도 수도권 지역에서 시합이 있거나 전지훈련이 필요할 때는 수시로 우리 길병원 연수원에 묵는다.
 
나는 탁구부 후원뿐만 아니라 해마다 모교의 6학년 학생들을 모두 인천으로 초청해 '선배'가 일군 병원과 대학을 보여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꿈을 키워준다. 아이들은 인천과 강화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서울 구경도 한다. 그래서 저학년 아이들은 나의 초청을 받게 되는 6학년이 되기 만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지난해부터는 군산에서 20㎞도 더 떨어진 작은 섬 '개야도'의 초교 어린이들도 초청하고 있다. 전체 주민이 1000여 명에 불과해 전교생.교직원을 합쳐야 40명 정도다. 나의 초청으로, 처음 육지 구경을 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인천을 다녀간 아이들이 "고향 선배님의 이념인 박애.봉사.애국을 실천하는 어린이가 되겠다"는 감사의 편지는 매년 쌓이고 있다.
 
77년엔 문봉식 대야초교 교장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학교의 상징인 교문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다 쓰러져가는 문으로 드나들 게 할 수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79년 2월 멋진 돌기둥에 새 교문을 달아줬다. 94년에는 이 교문이 좁아 큰 차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 다시 넓은 문으로 바꿔주었다. 90년대 초엔 초등학교에선 처음으로 '고생물 화석전시관'도 설치했다.
 
이리여고의 기숙사와 강당도, 전희종 교장선생님이 부탁해와 건립을 지원해 줬다. 이리여고는 기숙사와 강당에 내 호를 붙여 '가천학사' '가천관'이라 부르고 있다.
 
이달 말에는 전북의 여중 3학년생들이 이리여고에 모여 '제1회 가천 이길여 수학(數學)장학생 선발대회'를 한다. 수학영재를 발굴하고 장려하기 위한 이 대회도 내가 후원한다.
 
대야초교와 이리여고 졸업식 때는 우수학생들에게 우리 가천학원 내의 신명여고와 같이 '박애상' '봉사상' '애국상'을 준다. 이리여고에서 서울대 의대를 입학한 학생에겐 장학금도 준다. 전북도내 '참교육'을 실천하는 선생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97년부터 전북교육대상을 시상하고 있고, 군산 벚꽃 아가씨 선발대회도 돕고 있다.
 
이런저런 일을 계기로 나는 전북애향 대상과 자랑스런 전북인 대상을 받았고, 전북일보가 뽑은 '20세기 전북인물 50인'에 선정됐다. 고향 분들이 주시는 상이어서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끼고 있다.
 
 
 
 
 
 
 
 
2006-08-09 오후 7:38:21
57. 아낄 때와 쓸 때
 
직접 만든 옷(상의)을 입고 미주동창회에 참석한 필자(왼쪽 두 번째).
 
 
매니큐어로 스타킹을 때우고, 양말 구멍을 기워 신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웃는다. 며칠 전 구두를 벗다가 양말 기운 자국을 보고 나 자신이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다. 주위에서는 "몇백 억원의 시설투자를 결재하고, 몇억 원의 기부 출연을 선선히 하는 분이 왜 그리 짜십니까"하고 의아해 한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일 터이다. 내 어머니는 풍족한 살림살이에도 버선과 양말, 속옷까지 기워 입으셨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서울 용산의 산호아파트를 끼고 있는 동네미용실을 이용한다. 20여 년째 단골이다. 비용은 커트 8000원, 파마 2만 원이다. 간혹 지인들이 나를 따라와선 "크고 유명한 곳을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 왜 이곳을 이용하느냐"며 놀란다. 그럼 나는 "싸고 편안하니까"라고 대답한다.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끊어다 옷을 만들어 입는 것도 습관이자 취미였다. 내가 손수 만든 옷과 스카프가 공식모임에서 화제에 오른 일도 있다.
 
서울의대 동창회장으로 미주동창회에 참석할 때마다 난 동대문시장에서 몇 천원 주고 구입한 옷감으로 골프 웨어를 만들어 입었다. 원가가 만원도 안 들어간 옷을 보고, 다들 "어디 메이커냐?"고 물을 정도였다.
 
200개를 준비한 분홍색 스카프는 미주동창회 모임 마지막날 참석자 거의 전원이 매고 나와 '분홍색' 물결을 이뤘다. 그 모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도 그럴 듯 하다.
 
하지만 1998년 6월, MBC '성공시대'로 얼굴이 세상에 알려진 뒤부터 동대문시장에 발품 팔기가 어려워졌다. 방송이 나간 뒤 미주동창회에 입고 갈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끊으러 갔는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포목상에 들를 때마다 "성공시대 나오셨죠" "길병원이죠. 방송 봤어요"라고 인사했다. 뒤에선 "이길여다!"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쑥스러워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87년 개원한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의 조경비를 절약한 것도 얘기해야겠다. 건물을 완공한 뒤 조경업체에 나무식재 등 조경 비용을 물었더니 3억 원 정도 든다는 것이었다. 나와 언니는 이규일 당시 관리과장과 함께 서울 양재동과 구파발 화훼단지.수목단지를 찾아다니며 꽃과 나무를 골랐다. 수령과 모양이 같아도 가게에 따라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돈은 1500만 원 정도. 전문업체보다야 못했겠지만, 큰 돈을 아낀 셈 아닌가.
 
98년 강화도에 문을 연 가천의대 캠퍼스도 나와 언니가 조경을 직접 했다. 경험을 살려, 묘목 식재원 등을 다니며 나무를 골라 8억 원가량 견적이 나온 조경사업을 1억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끝냈다.
 
하지만 아끼다가 '사고'친 일도 있다. 난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외국에 나갈 때면, 비서없이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내 손으로 직접 들고 다녔다. 98년 미국에 있는 조카(최승헌 당시 가천의대 부총장)를 보기 위해 갔을 때, 공항에 도착해 큰 짐을 들어올리는 데 팔에서 돌연 전율할 만한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혼자서 무리하다, 팔의 인대가 파열된 것이다.
 
난 지금도 휴지 한 장, 이면지 한 장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돈은 '아낄 때'와 '쓸 때'가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6-08-10 오후 6:30:30
58. 나의 시련기
 
인천 구월동 길병원 착공식에서 필자(中)가 이헌기 당시 보사부 차관 등과 첫 삽을 뜨고 있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지만, 나 역시 큰 병원을 운영하면서 아찔했던 순간을 수도 없이 겪었다. 1980년대 중반 지금의 인천 구월동 길병원을 건립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경기도 양평 취약지 병원을 인수한 뒤 정부로부터 500 병상 규모의 병원건립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착공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 원활하게 지급되지 않을 때여서 건축능력과 함께 재정능력을 갖춘 업체를 찾아야 했다. 수소문 끝에 당시 도급순위 8위인 '공영토건'을 소개받았다. 지상 11층, 지하 2층을 짓기로 하고 총 공사비 58억 원에 계약했다.
 
그런데 이 회사가 터파기를 마치고, 지상 골조공사를 시작하려 할 때 당시 유명했던 '어음 사기사건'에 휘말려 부도가 났다. 결국 공사비 12억 원을 날리고, 다른 업체를 찾아야했다. 그때 다행히도 지인이 D건설업체를 소개했다. 회사 사장은 고맙게도 남은 돈, 46억 원으로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도 현장사무소와 크레인만 설치했을 뿐 도무지 공사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속셈이 있는 듯했다.
 
"왜 공사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건축비를 재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은 돈으로 건물을 짓기로 약속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공사를 안 할거면 나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법적으로 해결하자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소송을 통해 결론이 나려면, 적어도 2~3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으니 앞이 캄캄했다.
 
'내 꿈이 여기서 산산조각나는 것이 아닌가!'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이 업체 사장을 설득해 줄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내가 후원회장으로 있던 한 단체장이 업체 사장과 잘 아는 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무작정 그분을 찾아갔다. 그리곤 염치를 무릅쓰고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고 "도와 달라"고 했다. 며칠 뒤 이분 도움으로 건설업자는 떠났다. 이분은 병원 신축을 맡아 줄 S건설을 소개했고, 공사는 재개됐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한경호 병원 사무국장이 '위생난방'공사를 분리 발주했는데, 국가공인업체에서 실사를 나와 시공업체를 공사능력이 없는 업체라고 판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업체를 내보내고 공사를 남광토건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러자 폭력배 40여 명이 각목을 들고 공사장에 난입해 인부들을 두들겨 패며 쫓아낸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곤 '그동안의 공사비 13억여 원을 달라'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실제 공사비는 2억 원이 조금 넘는다는 게 공인업체의 얘기였다.
 
나도 죽기살기로 못 주겠다고 버텼다. 폭력배들은 동인천에 있는 병원으로 몰려와 몇 날 며칠을 대기실과 계단서 소주병을 깨뜨리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 사람들(폭력배)이 네 다리를 으깨버리라고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어. 집에 들어오지 마"라고 울먹거리는 것이다. 너무 무서워 며칠간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며칠 후 인천의 한 호텔에서 조직폭력배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우리 병원에 몰려왔던 폭력배들이 구속됐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러저런 일로 구월동 길병원의 완공은 2년 가까이 늦어지고 말았다. 가천길재단의 중심인 이 병원은 이런 진통 끝에 태어났다.
 
 
 
 
 
 
 
 
 
2006-08-13 오후 8:31:45
59. 메세나 활동
 
길병원 강당에서 열린 '환자와 주민을 위한 음악회'.
 
 
길병원에는 입구부터 병실.복도까지 사진과 그림 액자가 많이 걸려 있다. 이곳에선 정기적으로 관현악 콘서트가 열린다. 그래서 "길병원에 가면 문화가 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매우 즐겁고 기분 좋다.
 
나는 병원이란 질병을 고칠 뿐 아니라 환자에게 정신적인 안정과 기쁨, 그리고 편안함을 안겨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1960년대 미국 유학 때부터 둘러본 외국의 선진 병원들은 하나같이 '아늑하고 편한 내 집'을 지향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문화와 안락함을 주는 병원을 꾸민다면 질병의 고통이 얼마나 가벼워지고 또 평안해질까.
 
나는 이런 개념을 바로 길병원에서 실현했다. 유명 화가의 작품 전시회와 음악회, 아동.인형극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병원 1층 로비와 정원에서 열고 있다. 경원대 관현악단원들이 자발적으로 정기 연주회도 연다.
 
문화행사 때마다 내가 놀라는 것은 환자들의 반응이다. 몸이 아파 거동조차 불편한 환자들이 미술작품을 유심히 살펴보고, 간소한 음악회지만 자리를 꽉 메운 채 음악을 감상한다. 환자들의 표정은 밝아지고, 병원에서 문화적 갈증을 푼다는 만족감을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젠 환자들이 언제 어떤 공연이나 전시회가 열리는지에 꽤 관심을 쏟는다. 어떤 입원 환자는 "병원에서 예쁜 사진.그림, 그리고 공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즐거워한다.
 
나는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착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 그래서 1991년 5억여 원을 출연해 가천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길병원 별관에 강당을 마련하고, 가천문화학교를 열었다. 98년 3월부터 지금까지 5000명 이상의 주민이 다도(茶道).꽃꽂이.풍물.도예.춤 등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배웠다.
 
가천문화재단 주최로 매년 푸른인천 글쓰기대회(4월), 여의대상 길의료봉사상 시상(〃), 바다 그리기대회(5월), 전국 인설차문화전(6월), 심청효행상 시상(9월), 전북교육대상 시상(12월) 등이 열린다. 지난해부터는 재단이 산발적으로 해오던 후원 협찬을 체계화해 지역문화예술계 인사.단체를 위한 '가천경인문화예술단체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나의 '문화 사랑'을 인정받은 것일까. 나는 95년 당시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에게서 공로표창을, 가천문화재단은 2003년 10월 단체로서는 국내 최초로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각각 받았다. 문화훈장, 젊은 예술가상 등과 함께 3대 정부 포상에 들어가는 이 상은 단체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상이다. 가천문화재단은 대표적인 '메세나' 단체의 반열에 올랐다. 기업이 수익의 사회 환원을 위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활동인 메세나에 가천문화재단이 한 몫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다. 특히 올해 한국메세나협회가 국내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메세나 지원현황에 따르면 우리 재단이 삼성문화재단.LG연암문화재단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5위였다. 난 앞으로도 문화 소외층에 기쁨을 주는 '찾아가는 메세나' 활동을 통해 문화예술의 저변 확대에 나서고 싶다.
 
 
 
 
 
 
 
 
2006-08-14 오후 6:17:34
60. 재난구호팀
 
올 6월 인도네시아 지진 피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펼친 길병원 의료진.
 
 
나는 수해 지역 의료봉사단 파견 업무에 관심이 많다. 어릴 때부터 폭우의 가공할 위력과 물난리에 따른 재앙을 눈으로 직접 봐왔기 때문이다.
 
초등생 시절의 어느 해 여름. 밤낮을 가리지 않는 폭우로 내가 살던 호남평야는 물바다로 변했다. 우리 동네에서 3㎞쯤 떨어진 마을에 사는 급우 성분례가 무사한 지 걱정됐다. 고지대인 우리 마을에서 내려다 보니 아랫마을 집들이 지붕만 삐죽이 드러낸 채 물에 잠겨 있었다.
 
나는 저지대에 살고 있는 분례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 만으로 비에 잠긴 논둑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논두렁이고 길이고 온통 흙탕물 천지였다. 얼마나 미끄러웠던지 발가락으로 논둑의 풀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한발자국씩 헤쳐나가야 했다. 한나절 뒤에야 집근처 고지대에 대피해 있던 분례를 찾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길병원은 오래 전부터 '재난구호팀'을 가동하고 있다. 내가 이런저런 경험으로 유사시 신속하게 재난 지역에서 진료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길병원은 3년 연속 전국 최우수 응급센터로 선정될 만큼 응급의료 경험도 풍부하다. 20여 명의 의사.간호사 등으로 구성된 재난구호팀 역시 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재난 현장마다 출동하곤 한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동현장응급진료소'다. 통상 '이동병원'으로 불리는 이 구조물은 일종의 '에어 셸터(Air Shelter)'로 공기를 불어넣으면 1분30초 만에 수술과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여덟 병상을 갖춘 병원이 된다. 차량으로 옮길 수 있고 언제 어느 곳에나 설치가 가능해 긴급한 부상자들 치료에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재난구호팀은 올해에도 수해가 컸던 강원도 평창 지역은 물론이고 강원도 정선과 경기북부 지역 등 매년 물난리를 겪는 지역에서 주민들을 진료했다.
 
구호의 손길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까지 미치고 있다. 올 6월 지진 피해를 당한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에 10여 명의 의료진을 파견했고, 지난해 10월에는 지진이 난 파키스탄의 무자파라바드에서 한국 의료진 최초로 봉사 활동을 벌였다. 이곳에서 우리 병원 의료진은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다리 접합 수술을 하는 등 중환자 진료에 전념했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펼친 우리 의료진의 노력은 현지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 1월엔 쓰나미(지진 해일)가 덮친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로 달려가 의료지원을 하기도 했다.
 
재난 지역에 파견되는 봉사단은 희망자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선발할 때마다 직원들이 앞다퉈 나선다. 봉사가 생활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봉사단이 재난 지역으로 떠난 날부터 나는 그들의 안전 문제 만을 걱정한다. 길병원 봉사단원들이 검게 탄 얼굴에 미소를 짓고 돌아와야 마음이 놓인다.
 
 
 
 
 
 
 
 
2006-08-15 오후 6:41:46
61. 국제교환학생
 
외국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해 격려하고 있는 필자.
 
 
나는 가천의대를 설립하면서 뛰어난'의술'과 훌륭한 '인성(人性)'을 갖춘 의사를 키우고 싶었다. 우리의 의학도들이 '우물 안 개구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일본 유학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드넓은 지구촌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어느 의대에도 없는 국제화 교육과정을 마련키로 했다. 의학교육연수원에 연구 용역을 맡겨 교육 방향과 지침.프로그램 등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목표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열린 지성(知性)'을 갖춘 국제경쟁력 있는 의사 양성이다. 1998년 개교 때부터 외국인 교수 네 명을 초청, 학생 40명에게 집중적으로 영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국제 학술대회.세미나 개최를 적극 지원, 세계적인 의과대 및 의료인들과 의학지식을 교환케 하고 있다.
 
가천의대 학생들이 외국 자매결연 대학 의대생들과 만나 학술정보를 교환하고 우의를 다지는 기회도 종종 마련한다. 가천의대는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의대, 시카고의대, 중국 베이징(北京)의대, 일본 니혼(日本)의대 등과 자매결연을 했다. 독일 훔볼트의대는 우리나라 대학 중 유일하게 가천의대와 학점 교류를 인정하고 있다. 이 덕분에 많은 가천의대생들이 훔볼트의대에서 3개월 동안 공부하고 돌아온다.
 
가천의대 국제협력센터는 수시로 훔볼트의대생들을 연수시키고, 해마다 여름방학 때 '서머 프로그램'을 개설한다. 국적과 생활방식이 다른 의학도들이 함께 어울리며 '세계'를 배우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국제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에 오는 외국 학생들은 길병원과 가천의대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묵으며 다양한 경험을 한다. 기초 수준의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 강좌를 듣는다. 한국 전통문화 체험 행사에도 참가한다. 외국 학생들은 우리의 전통 차예절교육과 갓 쓰고 한복 입기 등 다채로운 한국문화를 맛본다. 그때마다 "그레이트! 원더풀!"을 연발하며 즐거워한다. 그들은 또 서울과 강화, 경주 유적지, 용인 민속촌 등을 관광하며 한국역사도 배운다.
 
올해에도 독일과 일본.중국에서 온 의대생 15명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으며, 이달 말 일곱 명이 더 올 예정이다. 가천의대생 11명은 훔볼트의대에, 세 명은 니혼의대에서 연수 중이다. 곧 다섯 명이 토마스 제퍼슨 의대로 떠날 예정이다.
 
지난주 외국 학생들이 내 집무실에 들러 꽃다발을 주면서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 발음이 어색하고 박자도 잘 안 맞았지만 감동적이었다. 나도 신이 나서 같이 큰소리로 합창했다.
 
독일 학생 이사벨 도로시는 "한국문화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말했다. 난 그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여러분의 가슴에 한국과 가천의대에 대해 멋진 추억을 품고 귀국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2006-08-16 오후 8:28:34
62. 의술 교류
 
WATTS 보건재단 오덴 총재(右) 일행으로부터 감사의 선물을 받고 있는 필자.
 
 
나는 길병원 개원 때부터 기회만 있으면 의료진을 해외로 보내 선진 의료 현장을 체험케 했다. 때로는 내가 해외에 나가 보고 배웠다.
 
1989년 1월 의료진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협의하기 위해 USC.UCLA 등 미국 대학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94년에는 '국립 올 러시안 리서치센터' 초청으로 러시아 주요 병원들을 시찰했다. 95년에는 일본 니혼대를 방문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에서 열린 미주 한인의학협회 학술대회에 초청받아 '자랑스러운 한국인 의사'를 주제로 특강한 뒤 미국 의료시스템을 둘러봤다. 선진 의료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곳곳을 찾아다닌 것이다.
 
길병원은 88년 한국 민간병원으로선 처음으로 미국 토마스 제퍼슨 의대와 자매결연을 했다. 이 대학 간질환예방센터의 한혜원 소장이 노벨상(76년)을 받은 바루크 새무엘 블럼버그 박사와 함께 길병원에서 특강도 했다.
 
나는 중국에도 관심을 가졌다. 92년 대한의학협회 초청으로 방한한 중국 중화의학회 상임 부의장단 일행을 맞으면서부터 한.중 의학 교류를 구상했다. 당시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의학 교류도 이뤄지지 않았다.
 
95년 9월 중국 톈진(天津)시청을 방문한 나는 톈진 제2의학원 부속 제1중심병원과 동서의학 교류 협력을 맺는 등 중국 병원과의 협력에 힘을 쏟았다. 99년에는 베이징(北京)의대와 화상(畵像)시스템으로 자매결연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뒤 중국 내 병원 관계자들이 잇달아 길병원을 방문했으며, 우리 병원은 중국 의료진 초청 연수를 시작했다. 95년 중국 천율의원의 정형외과 의사 두 명은 디스크를 고칠 수 있는 최신 의술인 카이모파파 치료법을 배워갔다. 또 톈진 제1중심병원의 심장내과 과장인 '닥터 당'이라는 여의사를 비롯한 10여 명의 중국 의사들은 길병원 심장내과에서 '심혈관 중재술'을 익혔다. 닥터 당은 이 시술법을 중국에 최초로 적용해 명의가 됐다.
 
지금도 길병원에는 독일과 중국.일본.캐나다에서 연수를 온 15명의 의사가 있다. 며칠 뒤에는 독일 훔볼트의대.퀼른대 등에서 일곱 명이 연수에 합류한다. 지난해에는 이라크 의사 두 명도 참가했다.
 
93년엔 'LA 한인타운 흑인 폭동' 때 한인과 흑인 간 갈등 해소와 화해 협력을 위해 앞장섰던 'WATTS 보건재단'의 클라이드 윌리엄 오덴 총재와 재단 직원 등 25명을 초청했다. 그의 노력에 감사하고, 조금이라도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이 재단은 건강관리기관을 직영하면서 21개에 이르는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비영리기관이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나라 문화와 보건의료 상황을 보여줬다. 덕분에 나는 LA 명예시민증과 LA시장 감사패를 받았다.
 
이처럼 더 나은 의술을 배우는 데는 주저함이 없어야 하고, 의료 취약 국가에 의술을 전수하는 것이 한국 의학의 경쟁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라는 게 내 소신이다.
 
 
 
 
 
 
 
2006-08-17 오후 8:07:47
63. 여의사회 회장
 
1983년 11월 서울 도화동으로 이전한 한국여자의사회 회관의 현판식에 참석한 필자(오른쪽에서 다섯째)와 역대 여의사회 회장들.
 
 
1982년 나는 제13대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이 됐다.
 
56년 발족한 여의사회는 올해로 반세기 역사를 맞았다.
 
여의사회는 서울 봉천동 등 국내 영세민 거주 지역을 돌며 무료 진료와 봉사 활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대대적인 가족계획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의사회의 활동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는 회장에 취임한 뒤 여의사회 조직.기능의 전문화를 꾀했다. 그리고 우리 사업의 홍보에 힘을 쏟았다. 사업위원회.장학위원회 등 일곱 개의 분과위원회를 조직하고, '여의회보'를 창간했다. 여의회보 교정쇄(校正刷)가 나오면 뿌듯한 마음에 회관으로 달려가 새벽까지 회보 내용 확인 작업에 매달렸다. 회원들의 모금으로 마련한 서울 삼성동 회관이 낡아 83년 서울 도화동에 새 회관을 지었다.
 
여의사들의 활동 무대를 세계로 넓히는 데도 앞장섰다. 83년 여의사회 정기총회 때 일이다. 나는 국제여자의사회를 한국에서 열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회원들 대부분이 "우리가 어떻게 국제회의를 치를 수 있겠느냐"며 무모한 구상이라고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차츰 내 제안이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84년 여의사 64명으로 '국제여자의사회 유치단'을 구성해 캐나다 밴쿠버로 보냈다.
 
여권 받기가 어려웠던 때라 정부는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이 외국에 나가느냐"며 난색을 보였다. 우리는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제회의를 유치하러 간다"고 설득해 겨우 떠날 수 있었다. 우리는 유치에 성공, 87년 김구자 회장 때 제21회 국제여자의사회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었다. 전임 회장이었던 주양자씨가 대회장을 맡아 각국 여의사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치뤘다.
 
박양실 전 보사부 장관이 제16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선생님, 제게 선물 하나 주세요"라며 내게 요청했다. 여의사회에서 '여의(女醫)대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여의사회가 주는'길 봉사상'이 탄생했다.
 
여의사회는 91년 첫 시상식을 열어 복지시설 애민원의 조수정 원장(의료 부문) 등에게 길 봉사상을 수여했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10돈쭝 금메달, 상금 1000만원을 주고 있다.
 
회원 650명으로 출범한 여의사회는 지금 1만3000여 명이 참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뛰어난 업적으로 이름을 날린 회원도 많다. 김정태 박사는 71년 세계보건기구(WHO) 자문관으로 일했다. 제9대 회장인 김동순씨는 '가족계획을 위한 전국여자의사 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했고, 후임 권분이 회장은 국제가족협회에서 30만 달러 받아 대대적인 가족계획사업을 펼쳤다. 이어 주일억 회장은 제22대 국제여자의사회장을 지냈다. 박경아 연세대 의대 교수는 차기 국제여자의사회 회장 후보이다. 박양실.주양자씨는 보사부 장관을 역임했고, 구임회.신영순.박금자.안명옥 회원 등은 국회에 진출했다. 박귀원 현 회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여의사회의 더 큰 발전을 위해 활약하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수련할 때 미국 여의사들조차도 '차별'을 받던 기억을 떠올리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한국사회의 당당한 축으로 우뚝 선 우리 여의사들이 자랑스럽다.
 
 
 
 
 
 
 
 
2006-08-20 오후 7:19:50
64. 인재를 찾아서 (상)
 
올 4월 20일 뇌과학연구소 개소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는 필자.
 
 
현대의학 발전과 의료계 변화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 그래서 나는 가천의대.길병원 연구진의 실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그 인재들이 첨단의학 연구에 정진할 수 있는 시설 확보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새싹을 발굴, 인재로 키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인재 양성은 묘목에 물과 비료를 줘 거목으로 키우는 것과 같다. 새싹이 거목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묘목을 가꾸고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거목이 된 인재가 더욱 빛나는 업적을 남기도록 지원하는 게 더 소중하다고 믿는다.
 
나는 국내외 의료계 인사들과 만나면 늘 인재에 대해 얘기하고, 세계적인 석학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석학을 많이 영입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뇌과학 분야 세계적 석학인 조장희 박사를 영입한 건 인재 발굴.지원을 통한 가천의대와 길병원의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내 꿈과 맞닿아 있다. 나는 미국으로 가 당시 캘리포니아대(어바인)에 재직하던 조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는 "나와 함께 뇌과학 분야의 질병 정복에 한번 나서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열정적으로 설득했건만 조 박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귀국해서도 조 박사에게 "당신의 조국에서 그 뜻을 이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전달했다. 조 박사는 "제 연구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지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600여 억원을 들여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 맞은편에 뇌과학연구소를 지었다. 이 연구소는 세계적 의료장비 회사인 독일의 지멘스 메디컬과 투자협력 협정을, 미국 하버드대 뇌영상센터와 공동연구협력 협정을 각각 맺었다. 최첨단 장비와 우수 연구인력을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뇌과학연구소는 올 4월 20일 문을 열었다. 조 박사는 이곳에서 세계 최초로 '양전자단층촬영장치(PET)와 자기공명영상장치(MRI)의 퓨전영상시스템'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퓨전영상시스템이란 PET와 MRI의 장점만을 합친 영상기기다. 조 박사의 연구 목표는 치매.중풍.뇌종양 등 각종 뇌질환을 발병 전에 진단할 수 있는 '꿈의 영상기기'개발이다.
 
나는 국가가 의료복지 실현과 첨단의학 연구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앞장서고, 대학과 병원은 '연구 인재'를 키워 한국의료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데 온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 명의 인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뇌과학연구소와 함께 암센터.당뇨센터.아토피센터가 들어서는 19층 규모의 아카데미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또 인천 송도경제자유구역 안에 '동북아시아 의료 허브' 역할을 할 생명과학연구소를 짓고 있다. 나의 중장기 목표는 병원과 의대.연구소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세계적 의학단지 조성이다.
 
 
 
 
 
 
 
2006-08-21 오후 6:24:10
65. 인재를 찾아서 (하)
 
이성낙(右) 가천의대 총장과 마틴 폴(左) 독일 훔볼트의대 학장이 이달 초 임상시험센터 공동 설립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이태훈 길병원 원장.
 
 
나는 최근 암.당뇨 분야 세계적 전문가를 모셔오기 위해 몇 차례 외국을 다녀왔다. 가천의대 총장, 길병원 원장과 함께 석학들을 만났다. 이들 중 연구업적이 국제적으로 검증된 미국 내 저명학자 10여 명은 올해 말부터 우리와 같이 일한다. 이름은 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10월 말까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석학들을 영입하기까지 숨 가쁜 과정을 거쳤다. 그 분들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직접 만나 얘기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유럽을 1박2일이나 2박3일 만에 다녀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뇨 분야 세계적 석학인 윤지원 교수와 면역학 분야 거두인 A박사를 모셔오기 위해 정말 많은 공(功)을 들였다. 윤 박사와의 첫 만남은 내가 서울대 의대 동창회장으로 있을 때 이뤄졌다. 미주 동창회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간 나는 그때 시카고대 당뇨연구센터 소장으로 있던 윤 박사를 만났다. 그 뒤 윤 박사가 한국을 몇 차례 오갈 때 다시 봤다. 나는 그의 업적과 열정을 높이 사 함께 일해보자고 요청했다. 그야말로 삼고초려(三顧草廬)였다.
 
마침내 윤 박사는 "조장희 박사를 초빙해 그만한 연구지원을 해주셨으니, 나도 회장님을 믿고 함께 일하고 싶다"며 승낙했다. 그러면서 그는 면역학 분야 A박사와도 손잡고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어느 날 윤 박사가 "여행을 떠날 A박사가 시카고에 들르도록 할 테니, 그 시간에 맞춰 시카고에 오실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곧장 시카고로 가 윤 박사, A박사와 다섯 시간 동안 점심을 먹으며 얘기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에 내 열정과 의지를 믿고 한국으로 오겠다던 윤 박사는 올 4월 암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병상에서 윤 박사는 한 제자가 "전 어디서 일하면 됩니까?"라고 묻자 "가천"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자는 나와 일하기로 돼 있다.
 
A박사는 내 제의에 "50대 초반이고, 미국에서 평생 교수(테뉴어드 프로페서)가 된 내가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고 회답했다.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A박사를 설득했다. 마침내 그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석학이 있는 곳이면 일본이든 독일이든 어디든지 쫓아가 영입 제의를 했다. 이렇게 공을 들여 '획득'한 10여 명의 석학은 가천의대에서의 연구 활동을 앞두고 올 추석 무렵 미국 워싱턴에서 상견례 모임을 한다.
 
석학들의 결단이 헛되지 않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 지원할 생각이다. 곧 착공하는 아카데미센터.생명과학연구소 건물 설계에 연구자들의 의견을 반영, 최적의 연구환경을 갖추도록 했다. 특히 생명과학연구소에 들어설 동물실험실은 그 분들의 주문에 따라 '맞춤형 여구실'로 만든다.
 
최근에는 가천의대와 길병원이 독일 최고 의대인 홈볼트의대와 임상시험센터 공동설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해 내가 구상 중인 임상센터 건립에 속도가 붙었다. 여기에는 세계적 제약회사의 고위경영자와 일본의 연구원이 참여할 예정이다. 이들 다국적 인재가 세계적 업적을 활짝 꽃 피우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로 내 마음은 설렌다.
 
 
 
 
 
 
 
2006-08-22 오후 8:19:15
66. 경원학원 인수<상>
 
1998년 12월 경원학원 이사장에 취임한 필자.
 
 
1998년 가천길대학 임청 학장이 최원영 경원학원 이사장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경영난에 처해 있는 경원대 측이 인수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곤 "최 이사장이 학교를 회장님이 맡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고 덧붙였다.
 
관계자 몇 명을 불러 경원대와 경원전문대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고, 인수 제의 건과 관련한 의견을 내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경원학원이 수도권에 있고, 발전 가능성이 크다"며 "최 이사장을 직접 만나 보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최 이사장과 그의 고문변호사를 만났다. 나와 최 이사장은 서울대 동창회 임원회의에서 몇 번 눈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함께 나온 고문변호사는 인천지검 검사장 출신으로 나와 교분이 있던 터였다.
 
최 이사장은 "내가 운영하고 있는 예음.동아실업 등 8개 기업이 경영난을 겪는 바람에 학교 돈 218억원을 갖다 썼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외환위기로 자금이 돌지 않아 나와 학교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최 이사장은 그러면서 "내가 학교에서 갖다 쓴 돈 전액을 회장님께서 갚아주고 학교를 인수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동안 동창회 등을 통해 나에 대해 알아봤더니 "학교를 잘 운영할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가천학원(가천의대.가천길대학.신명여고)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 내가 학교 운영 적임자라는 것이다. 최 이사장은 내게 "꼭 좀 학교를 맡아 달라"고 수차례 간청했다. 나는 경원학원의 긴박한 사정을 알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경원대와 경원전문대학을 소유한 학교법인 경원학원은 78년에 설립되었다. 이 두 대학은 개교 때부터 '수도권 대학'으로서의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으며 내실을 다져왔다.
 
나는 이 대학이 부정입학.공금유용 문제 등으로 이미지에 다소 상처를 입긴 했지만 원상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무엇보다 400여 명의 유능한 교수진이 20년 동안 쌓아온 전통을 높이 샀다. 마음먹고 과감히 지원한다면 명문 사학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곧바로 학원 쇄신 작업에 들어갔다. 이사진을 전면 개편하고 교육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새 이사진은 "학교법인을 철저히 지도 감독하라"는 교육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교육부에서 추천한 이사 두 명과 감사 한 명으로 구성됐다.
 
98년 12월 나는 경원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취임식에서 "학원운영 투명성 확보와 교직원 복지 향상에 힘쓰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대학을 구현하겠다"고 약속했다. 가천의대 설립에 이어 경원학원을 맡게 된 나는 의료경영과 인재경영을 연계한 육영(育英)의 꿈을 펼칠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2006-08-23 오후 8:13:05
67. 경원학원 인수 <하>
 
산둥대 학생교류프로그램에 참가한 100명의 학생을 인천공항에서 환송하는 필자(앞줄 가운데).
 
 
1998년 경원대 이사장을 맡은 나는 '21세기 국내 10대 사학으로'란 비전을 제시했다. '모두 함께 하는 학교'를 내세우며 교직원의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 냈다. 학생들을 설득하여 학생시위로 얼룩진 학교를 '폭력시위 없는 학교'로 바꾸는 한편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다.
 
인수 1년여 만에 학교는 안정을 찾아갔다. 대학 운영에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2000년 경원대 총장을 맡았다. 그리고는 내가 구상한 대학 발전 계획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첫째로 교육환경 개선에 주력했다. 학생 건강증진을 위해 운동장이 없던 대학에 대운동장을 새로 만들었다. 교실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2001년에 새롬관, 2003년에 국제어학원을 지었다. 내년에 착공하여 2010년에 완공예정인 정문지구(지하캠퍼스)개발 프로젝트도 서두르고 있다. 학교부지 3분의 1을 헐어내고 지하철에서 바로 올라오게 하는 한편 2만5000평의 최신 교육시설을 갖춘 건물을 짓기로 했다.
 
외국 유학생 유치를 위해 최신 시설의 기숙사도 곧 착공한다. 이런 하드웨어적인 교육환경 조성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캠퍼스가 될 것으로 자신한다.
 
교육의 질 향상에도 힘을 기울였다. 국제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을 도입, 맞춤식 교육을 하도록 노력했다. 5년 전만 해도 60%대에 머물렀던 취업률이 2004년에는 80%로 올라섰고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21위를 차지하는 등 성과를 나타냈다. 올해는 15위가 목표다.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양성을 하기 위해 '100명 교수 초빙' 계획도 마련했다.
 
중국의 산둥(山東)대와는 학생교류프로그램에 의해 지난해부터 매년 100명 규모의 학생을 보내고 있다. 이같은 규모의 학생 교류는 국내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1인당 유학경비가 등록금, 기숙사비 등을 합쳐 연간 약 4000달러이지만, 경쟁력 갖춘 '중국전문가 양성'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지원하고 있다. 중국시장을 겨냥한 중국통 전문가 만들기 전략이다. 기업에서 대환영이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와도 산둥대와 같은 유학코스를 마련할 생각이다.
 
교수들의 연구력 향상에도 힘을 쏟았다. 정보기술(IT)-나노기술(NT)-생명공학기술(BT)을 연계한 학문에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전력 IT 등 두 개 부문에서 무려 300억원이 넘는 정부 프로젝트를 유치했다. 경원대에도 IT-NT-BT를 중심으로 가천의과대의 뇌과학연구소, 생명공학연구소를 연계할 수 있는 '세계적 연구소설립'을 구상 중이다.
 
경원학원은 내가 인수한 이후 순항하고 있고, 지금 경원대학교는 미래를 위해 경원전문대와 통합을 추진 중이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경원대. 서울 강남과 경기도 분당을 양팔로 끼고 있는 듯 한 입지를 바탕으로, 한국 '10대 사학'도약은 시간문제 일 뿐이다.
 
 
 
 
 
2006-08-24 오후 7:32:12
68. 직원 사랑
 
직원 화합을 위해 연 '길가족 체육대회'에서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필자.
 
 
내가 운영하고 있는 대학.병원을 포함한 가천길재단의'식구'는 5000명을 넘는다.
 
모두 나와 한 뜻으로 일하고 땀 흘리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가족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이들과 일하면서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고 있다.
 
이런 가족을 위해 고민해야 했던 사건이 1987년에 일어났다.
 
인천시 구월동에 길병원을 건립한 뒤 한때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줘야 할 날짜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산부인과 운영 시절부터 월급과 보너스를 제때 지급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땐 정말 막막하고 암담했다.
 
한 번쯤 양해를 구하고 지급을 미뤄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길병원 '가족'의 자부심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70년대 말 간호대학 부지로 마련해 뒀던 땅을 팔기로 했다. 용인 수지 일대, 지금은 중심상업지역이 된 1만1000평이었다. 10억원이 안 되는 금액으로 매각해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줬다. 그런데 2~3개월 뒤 그 땅은 개발계획 발표로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지금 생각해도 헐값에 땅을 판 것은 아깝지만 직원들과 약속을 지킨 건 뿌듯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직원들은 나의 '직원 사랑'을 확인하곤 '믿음'으로 보답했다.
 
나는 산부인과 시절엔 하루 한 시간씩 영어나 산과(産科).부인과(婦人科) 의학지식을 가르치며 직원들과 어울렸다. 업무상 실수로 꾸중을 들은 직원들을 다독거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내 방을 내주고, 꾸중을 들은 여직원들과 한 이불을 덮고 누운 채 손을 맞잡고 얘기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다 보면 직원들이 잘못을 깨닫곤 "고맙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는 직원도 있었다. 그 직원들은 다음 날 신바람을 내며 일한다.
 
그땐 나와 언니가 병원에서 쓰는 침대보와 이불을 직접 만들었다. 천.거즈 등을 사러 동대문시장에 자주 갔다. 그러다 방석이나 이불.수저통 등 예쁜 물건이 눈에 띄면 직원들에게 혼수용품으로 사다 주곤 했다. 결혼을 위해 병원을 떠나던 한 간호사는 "이사장님께서 그동안 사주신 살림살이를 혼수삼아 잘 살겠습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서민이 금융기관을 이용하기 쉽지 않던 때라 직원들에게 계(契) 모임을 만들어줬다. 월급을 낭비하지 않게 하려고 내 나름대로 목돈 마련을 위한 '재테크' 방법을 알려준 셈이다.
 
하지만 환자에게 불친절한 직원, 벽에 기대 선 직원,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직원은 혼냈다.
 
이젠 병원 가족만 3000명에 이르니 예전처럼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금은 생일을 맞은 직원에게 축하카드와 문화상품권,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하고 있다. 직원 가족이나 친지가 입원하면 가능한 한 병문안을 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길병원에는 '길가족 문화'가 있다. 서로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고, 나만이 아니라 늘 남과 이웃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런 문화가 가천길재단을 일군 원동력이라고 자부한다.
 
 
 
 
 
 
 
 
2006-08-27 오후 6:59:17
69. 건강의 비결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걷기운동을 하고 있는 필자.
 
 
나의 하루는 오전 7시부터 갖가지 보고를 받고 그날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일 올라오는 여러 기관의 보고서만 하루 50여장에 이르고, 그것들을 일일이 챙기느라 아침부터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게 내 일상이 됐다. 이렇다 보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차 안에서 보고를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어떤 경우에는 하루 일정이 너무 빡빡해 식사를 차 안에서 해결할 때도 있다.
 
이같은 일상 때문인지 만나는 사람 가운데 나에게 "회장님은 무슨 비법을 쓰길래 매일 강행군을 하면서도 그렇게 건강하십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건강을 지키는 조건으로 '7시간 이상의 숙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자 본 기억이 없다. 학창시절 이래의 습관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건강하게 지내온 비결을 얘기하자면, 대략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걷기'다. 시골 출신인 나는 걷기가 생활의 일부였다. 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4㎞가 넘는 면소재지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장거리를 걸어 다녔다. 여고 때도 집에서 5리쯤 떨어진 역까지 걸어가 기차로 통학을 했고, 기차가 예고 없이 오지 않을 때엔 20리 떨어진 집까지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몇 해 전 내가 가천의과대 강화캠퍼스를 둘러볼 때 당시 김용일 총장이 앞서가는 나에게 "이사장님, 학교에서는 천천히 걸으셔야 합니다"며 귀띔해 준 적이 있다. 그리곤 "(경원대) 총장도 맡고 계시니, 점잖게 보이셔야 합니다"라며 충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빠른 걸음은 70년 넘게 내 몸에 배어버리고 만 것을. 난 지금도 하루 일과가 아무리 늦게 끝나고 피곤해도 집에서 1시간 이상 걷기운동을 한다.
 
둘째로, 나는 지금도 할 일이 많고, 그 일들이 행복해서 건강한 것 같다. 의사 초년 시절부터 환자들에 갇혀, 항상 잠이 부족했다. 한 시간 만이라도 푹 자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환자의 숲을 뛰어 다니며, 먹을 것을 제 때 못 먹는 수도 많았다. 하지만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고,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이 있어서, 나는 마냥 행복하게 일했다.
 
셋째는 '활짝 웃는 것'이다. 나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회장님의 즐겁고 밝은 표정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 때문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난 그것이 '웃음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웃음으로써 상대방도 유쾌해지고, 그것이 토대가 되어 일상의 활력소가 될 뿐아니라 조직과 기관의 생산성과 문화도 좋아지는 것이리라.
 
우리 직원 가족은 내가 웃음을 중시하는 것을 잘 안다. 채용 면접을 할 때, 내가 "한번 활짝 웃어 보세요"라고 자주 주문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머경영'이란 것도 나오는 세상이 아닌가. 난 크게 웃고 자주 웃으며, 주위에도 그렇게 하기를 권한다. 나라고 마음이 불편할 때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금새 평상심으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웃음은 긍정적인 사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자세와도 이어지는, 건강한 삶을 위한 활력소임에 틀림없다.
 
 
 
 
 
 
 
 
2006-08-28 오후 6:38:23
70. 한국의사 100년
 
올해 초 열린 '소외된 어린생명을 위한 한국의사 100주년 기념 패션쇼'에 모델로 나선 필자(맨 앞)와 동료 여의사들.
 
 
오늘날의 대한의사협회는 100여 년 전 서양의학을 배운 선배 의사 몇 분이 1908년에 만든 친목모임을 모태로 발전해 왔다. 2년 뒤인 2008년, 우리는 '한국의사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게 된다.
 
3년 전 당시 대한의사협회 김재정 회장이 한국의사 100주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일단 사양했다. 그 사업이 마뜩찮아서가 아니라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학교와 병원.재단 일에 얽매여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집요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100년 전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서양의학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선배 의료인들이 연구와 진료.교육에 바친 열정 덕분이다.
 
조국의 독립과 자강(自彊),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선배 의사들이 많았다. 의사 선각자들이 환자 치료만 한 게 아니라,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에도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한 의사들도 많다. 이런 사례들은 '의사의 호국충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촌 곳곳에 재난이 닥칠 때마다 대한의사협회가 앞장서 의료진을 파견하고 많은 구호품을 지원하는 것은 이같은 선배들의 열정을 이어받은 것이리라.
 
해마다 새내기 의사 3000여 명이 배출돼 100주년이 되는 해엔 '의사 10만'시대를 맞게 된다. 나는 한국의사 100주년 위원회에선 100년 뒤 우리 의료계를 설계,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초석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밑그림 아래 2003년 10월 위원장이 된 나는 곧바로 사업 총괄기구인 중앙위원회와 회관건립위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등 사업별로 6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의사들만의 행사가 아닌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 내고 의사와 의사협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민과 함께하는 의사, 국민과 함께하는 100주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00년사 편찬, 100주년 기념학술대회 등을 역점 사업으로 정했다.
 
지난해 11월 첫 행사로 '국민과 함께하는 의협 100주년 맞이 기념콘서트'를 열었다. 올해 초에는 소외된 어린생명을 위한 '한국의사 100주년 기념 패션쇼'를 개최했다. 20~80대 여의사 50명이 패션모델로 나섰다. 패션쇼 수익금 일부를 수양부모협회에 내놓았다. 사진작가 김중만 선생이 기증한 작품을 새긴 도자기 500점을 제작, 판매하기도 했다. 재미한인의사회에서 100주년 기금 약정서를 전달해 와 사업은 한층 활기를 띠고 있다.
 
며칠 전에는 '한국의사 100년사로 본 의사 독립운동'을 주제로 심포지엄도 열었다. 서재필.김필순.이태준.나창현 같은 의사 독립운동가 50여 명을 새롭게 조명한 자리였다. 지금까지 의사들이 나라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살아온 것처럼, 한국의사 100주년위원회도 국민과 함께하는 의사상 정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06-08-29 오후 6:21:00
71. 어머니의 빈자리
 
어느 해 생일을 맞은 어머니에게 화장을 해드리는 필자.
 
 
1978년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내가 의료법인으로 전환한 인천길병원을 개원하던 해였다. 닷새 만에 깨어나셨지만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진 못하셨다. 몸 여기저기가 불편하셨고, 중풍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하셨다. 그래도 삶의 의욕만큼은 잃지 않고 항상 밝게 사셨던 어머니. 어머니가 다니신 노인대학의 친구 분들을 모셔다 잔치를 열 때면 혼자서 서 있기도 힘든 어머니는 춤을 추시는가 하면 '소리'도 곧잘 하셨다.
 
96년 초겨울 무렵이다. 안방 보료에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내게 "더 이상 치료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20여 년 동안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단 한 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왜 그러실까?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그러시는 걸까? 순간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난 그런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황급히 거실로 나왔다.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또다시 "이제 나 죽어야겠다. 더 이상 치료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 날 놔두고 가시면 어쩌란 말이에요. 어머니께서 가시면 나는 엉엉 울면서 이 세상을 돌아다닐 거예요. 안 그럴 것 같아요? 어머니가 아시잖아요. 내가 그러고도 남을 딸이라는 걸. 그러니 앞으론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나를 봐서라도 치료를 받으세요. 내가 돌아가셔도 좋다고 할 때까지 더 사셔야 해요." 내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는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셨다. 아마 '다 큰 딸이 울고 다닐 것'이란 말이 가슴에 걸렸었을까. 얼마 뒤 어머니는 다시 치료를 받겠다고 하셨다. 내 마음을 받아준 어머니가 너무 고마웠지만 어머니가 얼마 사시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너무 슬펐다. 나는 매일 아침 물리치료를 함께 다니며 "야, 우리 어머니 정말 이쁘네"라며 재롱을 떨기도 했다. 집에서는 어머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어루만졌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하나라도 더 쌓고 싶어서였지만 쪼글쪼글해진 살갗으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체취 때문에 매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두 해를 더 사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은 그만 세상과 손을 놓고 싶으셨지만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더 사셨던 것 같다.
 
난 지금 인천 청량산 중턱에 자리한 내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곳은 어머니를 위해 지었지만, 당신은 한 번도 머물지 못했다. 고향집 텃밭을 그리워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자그마한 텃밭까지 마련했건만, 어머니는 떠나셨다. 지금도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머니가 그 텃밭에서 김을 매거나 고추나 호박잎을 따고 계실 것만 같다.
 
98년 늦가을 어머니는 89세로 우리의 손을 놓으셨다. 임종을 지켜보던 그날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요즘도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여전히 혼자인 나를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 목이 멘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셨으며, 나와 언니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신 나의 하늘이요, 땅이었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가 쓰러지신 게 '나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죄스러운 마음에 난 아직도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2006-08-30 오후 6:50:23
72. 인생·경영철학
 
국내 최초로 도입한 첨단 단층촬영 장비인 '64 MDCT' 가동식에 참석한 필자(中).
 
 
사업가도 전문경영인도 아닌 나에게 "경영철학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이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문득 내가 고비고비마다 내린 판단과 실천의 기준을 되돌아보곤 한다.
 
우선 나는 '사람 속으로'라는 말을 좋아한다. 병원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믿었다. 병원이든 기업이든 사람이 붐벼야 성공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이치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그 다음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얻어 그들 가운데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열린 마음으로 베풀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난 어떤 일에서든 사랑을 우선시 했다. 그러면 늘 결과가 좋았다.
 
내가 '보증금 없는 병원''돈이 없어도 치료해 주는 병원''무료 진료'를 과감히 실천하고,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백령도.철원.양평길병원을 인수한 것이 그 예다. 조그만 산부인과가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것도 나와 사랑으로 맺어진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병원을 아껴주고 널리 알려준 덕분이리라. 당장 눈앞 잇속과는 거리가 멀고 어리석어 보이는 듯한 베풂과 사랑은 절대적인 신뢰를 낳는다. 이 신뢰가 실로 엄청난 힘을 발휘함을 나는 실감해 왔다.
 
우리 병원과 대학의 가족들과도 믿음을 바탕으로 '권한 위임'을 실천했다. 믿고 업무를 맡긴 임직원들은 앞장서서 의욕적으로 일하고, 나의 영향력은 분배됐다. 이 덕분에 조직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판단을 신속히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확하고 치밀한 판단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1987년 신경외과 과장이 '뇌정의 수술기계'가 필요하다며 구입해 달라고 했다. 난 이름조차 생소한 의료장비가 그때 돈으로 24만 달러라는 데 놀랐지만 주저하지 않고 도입하라고 했다. 그 뒤에도 첨단 고가장비 도입, 거액을 투자해야 하는 건물 신축 및 리모델링 때마다 난 철저한 분석을 거쳐 신속하게 결단했다. 첨단 의료장비의 경우 다른 병원에선 결재라인을 맴도는 동안 우리는 이미 설치를 마친 때가 많았다. 그렇게 한 걸음 혹은 반걸음씩 앞서 왔다.
 
나는 세계를 상대로 도전적인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한다. 산부인과가 잘 되는데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병원이 궤도에 오른 뒤에도 일본에 가서 선진의술을 배웠다. 안주(安住)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지금도 뇌과학을 비롯한 미개척 분야에 돈과 인재를 투입해 도전하고 있다.
 
나는 일이 닥치면 전력을 기울이는 '완전연소(完全燃燒)'를 지향한다. 좀 가혹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후배들에게 "하루 네 시간 이상 자면서 성공할 생각은 말라"고 충고한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노력의 결정(結晶)으로 무언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2006-08-31 오후 8:27:41
73. 나의 꿈, 나의 미래
 
가천길재단 소속 기관장들이 인천 송도에 있는 가천의대 생명과학연구소 앞에서 발전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태훈 길병원장, 윤성태 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박영복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필자, 이성낙 가천의대 총장, 이우종 경원대 부총장.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지 않는다."
 
어릴 적 나는 바람개비 놀이를 곧잘 했다.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리기 위해 열심히 달렸고, 바람이 센 산 위에도 자주 오르곤 했다. 돌이켜보건대 바람개비는 내 삶의 표상(表象)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을 일으키려고 뛰어다녔던 것처럼 일이 없으면 끊임없이 일을 만들었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환자와 학생, 이웃과 국가를 위해 쉼없이 일했다.
 
나에게 거센 바람은 역경이 아니었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는 거친 바람을 이용해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렸다. 이렇게 시골 소녀가 돌리던 작은 바람개비가 거대한 풍차로 변해 가천길재단을 일구는 에너지이자 원동력이 됐다.
 
작은 병원에서 시작한 의료사업은 이제 교육.언론.문화로 영역을 넓혀가며 우리 사회에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내 아호는 가천(嘉泉)이다.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낸 유승국 박사가 헌정한 가천은 '아름다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샘'이라는 뜻이다. 난 가천길재단을 말 그대로 '성스러운 기운이 움트고 요동치는 곳'으로 만들고, 항상 바람을 일으키며 많은 성취와 결실을 이끌어 내는 재단으로 키울 것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미래상은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종합공익재단'이다.
 
그 첫걸음이 2008년 시작된다. 재단 설립 50주년을 맞아 교육과 의료.문화.봉사.언론 등을 '사랑'과 '봉사'라는 정신으로 묶은 재단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난 그 토대 위에 새로운 100년의 꿈을 설계할 것이며, 1000년 이상 존재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져 나갈 것이다.
 
가천의대 길병원은 진료와 연구.교육이 일체가 된 '메디컬 클러스터'의 중심으로 성장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허브 의료기관을 넘어 세계 속의 의료기관으로 자리매김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또 가천의대와 경원대는 '세계 100대 대학'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를 이끌 리더들이 두 곳에서 끊임없이 배출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맥박이 멈출 때까지 내 모든 것을 가천길재단에 바칠 생각이다. 하지만 이 같은 구상과 비전이 어디 나 혼자만의 열정과 노력으로 되겠는가. 역경을 함께 이겨낸 재단 가족의 땀과 눈물이 오늘의 결실을 거둔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되면 나의 꿈과 가천길재단의 미래는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처럼 세계 무대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무척 행복했다. 내 인생 역정과 재단의 희로애락을 보며 같이 웃고 울면서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끝>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